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164)
제164화
황제, 그리고 황자들과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끝낸 제롬은 객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황자, 미카일에게 초청을 받았다.
“오! 왔는가?”
궁에 들어가자 미카일이 호의가 가득한 표정으로 제롬을 반겼다.
“황자 전하들을 뵙습니다. 혹, 제가 뭔가 실수한 점이라도 있는지요?”
“이 사람, 실수는 무슨! 나이도 어린 이가 얼마나 말을 잘하던지. 내 그저 그대의 화술에 감탄하여 차나 한 잔 대접하며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부른 것이니, 어려워하지 말게나.”
미카일의 옆에는 이황자 케일도 함께 있었는데, 그의 표정도 미카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롬이야 단순히 이바렐라의 발목을 최대한 잡으려 수를 쓴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로서는 제롬의 배려(?) 덕에 다시 한번 기사회생을 꿈꿀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운 것이 당연했다.
애초에 제롬이 제국에 방문하기 전, 케일의 자금력을 이용해 제롬을 매수하는 계획까지 세워두지 않았던가.
큰 자금이 들어갈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자금을 모조리 아낄 수 있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황자라 하더라도 공짜가 싫은 것은 아닐 테니까.
쪼르륵!
미카일이 주전자를 따르자 맑은 빛을 내는 홍차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렸다.
“자자, 들어보게. 황금사자교의 수녀들이 직접 키운 꽃으로 우려낸 꽃차일세. 왕국의 명문가 출신인 공자에게는 소박해 보이겠지만, 그래도 제법 맛은 괜찮을 게야.”
‘…수작질은 없는 것 같네.’
차를 권하는 미카일과 케일의 표정은 어떤 음험함도 품고 있지 않았다.
만약 저 표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웃음 속에 칼을 숨길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이바렐라에게 그리 밀리지도 않았겠지.
후룹!
‘……!!’
한 모금 마시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향긋한 꽃내음과 달콤한 뒷맛. 어지간히 다도에 정통하여 제대로 우리지 않는다면 낼 수 없는 맛이었다.
“하하하, 제롬 공자가 형님의 다도에 놀란 모양입니다.”
이황자, 케일이 내 반응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놀랐다.
이 대륙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가장 존귀한 신분이라고 할 수 있는 황자가, 설마 다도에 흥미가 있을 줄이야.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소박한 성향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황자들은 어떤 사람이지?’
필라도르 왕국의 사태와 이번 헥사곤의 일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왕국들은 제국 내의 황위 다툼은 일황자와 이황자의 일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이바렐라가 자신을 잘 숨겨왔기도 하지만, 대륙의 왕국들이 의심하지 않았던 데에는 황자들의 능력 역시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바렐라가 아니었다면, 두 황자 모두 능히 제국을 담을 만한 그릇이라고 평해졌다지?’
생각해보면, 드래곤 산맥에서 조우했던 일황자나 이황자의 파벌들 역시 대단한 이들이었다.
십이대주교가 그러했고, 4후작이 그러했다. 비록 3공작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제국의 중추나 다름없는 이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황자들을 따르지는 않았겠지.
과거에는 이바렐라가 제국을 삼키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모조리 숙청당해 버린 탓에 얼굴을 본 적조차 없었지만, 이들은 과연 어떤 이들일까. 문득 황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황자님 말씀대로, 차 맛이 아주 좋습니다.”
달칵!
별 내용 없이 오가는 사담이 잠시 오간 후, 미카일이 향긋한 향을 내뿜는 차를 내려놓은 채 본론으로 넘어갔다.
“피차 바쁜 몸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네. 자네, 이바렐라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나?”
밑도 끝도 없이 들어온 뜬구름 같은 질문.
“이상한 질문이시군요. 삼황녀님뿐만 아니라, 황자님들 또한 대륙의 그 어떤 귀족 가문에서도 모르는 이들은 없습니다.”
“말장난은 생략하지. 내가 그런 표면적인 걸 물어보는 게 아니란 걸 알 것 아닌가.”
미카일이 재차 다그치자 케일이 제지하고 나섰다.
“형님, 아무리 급하셔도 차근차근 물어보셔야지요. 제롬 공자가 놀라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안하네, 제롬 공자. 형님의 성격이 다소 급하다네. 내가 대신 사과하지.”
“별말씀을요.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형님의 질문이 다소 급하긴 했다만, 우리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사실 이걸 묻기 위함이 맞다네. 자네, 이바렐라를 원래 알고 있었나?”
케일의 실눈이 나를 빠른 속도로 탐색했다.
‘과연, 마냥 바보들은 아니란 건가.’
황제의 앞에서 고한 내용을 듣고, 자신들에게 다시금 기회가 주어졌음만을 기뻐하는 멍청이들이었다면 애초에 지금까지 이바렐라와 대립하지도 못했겠지.
이들도 느낀 것이다.
내가, 이바렐라를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후룹!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몇 년 전 대륙 평화 회의에 제 참모가 함께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말하더군요. 이바렐라의 위험성에 대해서. 그때부터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실제로 그녀의 위험성을 알게 된 것은 필라도르 왕국의 반란 획책에서입니다.”
“…대단한 참모군. 대륙 평화 회의에서 이바렐라의 위험성을 깨닫다니.”
감탄과 의심이 공존하는 반응이었다만,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전생에 그녀한테 당신들 모가지가 단두대에서 썰려 나가는 걸 봤다.’는 대답보다는 훨씬 더 현실성 있는 답변이었으니까.
케일의 실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미카일을 향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습니다, 형님. 이 친구, 저희를 이용한 게 맞아요.”
상계를 휘어잡은 이황자답게 내 반응을 보며 진위 여부를 따져본 건가.
뭐, 제법이긴 하다. 다만, 상계에서 굴러먹어 본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하하, 발칙한 친구였군. 이바렐라를 견제하기 위해 우리를 써먹다니.”
말로는 책망하는 듯했지만, 표정은 조금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미카일과 케일 황자.
이 대범한 자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둘 모두, 왕재(王才)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이바렐라에게 힘없이 쓸려간 불우한 황자들인 줄 알았건만.
“맞습니다. 저는 이바렐라 삼황녀님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두 분 황자님과 황제 폐하를 이용했습니다.”
이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진실을 털어놓았다.
“두 분 역시, 이바렐라 황녀님의 위험성을 알기에 제가 내민 조건에 동참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니, 두 황자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맞다. 우리는 이바렐라의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지. 몇 번 힘도 합치며 녀석을 눌러보려 했지만 번번이 당하기만 했다네.”
탁!
찻잔을 내려놓은 미카일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달라. 우리와 달리 벌써 몇 번이나 이바렐라의 계획에 물을 먹였지.”
미카일의 옆에 있던 케일이 손을 뻗어왔다.
“이바렐라의 즉위를 막기 위해, 손을 잡지 않겠나?”
“…그 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제안하며 건네 온 케일의 손을 맞잡지 않은 채, 그들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두 분이 꿈꾸는 황제는, 어떤 황제입니까?”
* * *
달과 별조차 그 모습을 감춘 야심한 밤.
제아무리 온 도시가 하얀색으로 수놓인 바티칸이라 하더라도, 이런 날까지 어둠을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찾아왔다 하여, 모든 생명체들이 제 할 일을 멈추지는 않는 법이다.
숲속의 부엉이가 그러했고, 길 위와 뒷골목의 작은 쥐들이 그러했다.
구름이 지나가며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달이 비추는 은은한 달빛에, 땅 위의 작은 생명체들이 살포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평소와 달리, 낯선 장소에 낯선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물들이 찾지 않는 건물의 외벽에.
휘이이이익!
부엉이나 쥐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큰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사사사사!
자신들을 비추는 달빛을 피해 빠르게 몸을 숨기는 그림자들은, 그 빠른 움직임으로 건물들을 누볐음에도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림자들 중 가장 앞에 있던 그림자가 몸을 숙인 채 냄새를 맡으며 움직이더니, 이내 고개를 치켜들었다.
뒤에 있는 다른 그림자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그림자의 눈빛이 빛났다.
찾았다, 드디어.
크로우의 명에 따라 카르마와 람팡을 추격하던 귀영단의 조장, 원망(遠望)의 눈에 희열이 맴돌았다.
한때는 백익, 람팡이 다루는 이종의 힘인 수왕의 향기를 놓쳐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원망은 포기하지 않고 관점을 바꾸었다. 람팡이 안 된다면, 카르마를 추적하면 될 일이었다.
카르마의 몸에는 그분의 힘이 담겨 있다.
멀어진 거리에 그분의 잔향도 희미해졌지만, 끝없이 추적한 결과.
조원인 추향이 마침내 그 흔적을 찾아냈다고 말한 것이다.
‘됐다, 이제 철수해야 해.’
자신들의 임무는 카르마와 람팡의 말살이 아니다.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들의 주인 또한 그런 무모한 명을 내리는 이가 아니었다.
귀영단에게 내려진 임무는 카르마와 람팡이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뿐이었다. 이 뒤는 다른 조가 뒤이어 추적할 것이다.
그리고 람팡과 카르마가 연을 맺는 이들의 뒤를 쫓아 혹시 얻을지 모를 패오니아를 추적하는 것이 다음 임무였다.
원망이 추향을 비롯한 다른 조원들에게 수신호로 철수할 것을 전하자, 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향을 돌렸다.
덜컥!
임무가 끝났음에 너무 긴장을 풀어버린 걸까.
한 조원이 무언가에 부딪혀 작은 소음을 일으켰다.
늦은 밤이었음에도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었기에 소음은 제법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쯧, 바보 같은 놈이.’
원망이 눈으로 책망하자, 조원은 당황한 듯했다.
원망의 시선이 조원의 발치로 향하자, 그곳에는 거대한 인형이 놓여 있었다.
돌부리도 아니고, 저런 커다란 장애물조차 피하지 못하고 소리를 내다니.
‘아무래도 돌아가면 크로우 님께 조원을 변경해 달라고 말씀드려야겠군.’
멍청한 조원이 함께 움직인다면, 그 자체로 조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싸늘한 눈으로 조원을 노려보며 원망이 자리를 뜨려 하자,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의문점.
‘…그런데 골목에 저런 인형이 놓여 있었던가?’
무심코 뒤를 돌아본 원망의 눈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람팡을 추적하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추향. 가장 앞서 있었던 만큼, 방향을 바꾼 지금은 가장 뒤에 위치하고 있던 추향이 인형을 스쳐 지나가자.
버둥버둥!
인형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추향의 입을 막은 채 등에 매달려 있었다.
급작스러운 인형의 움직임에 놀란 추향이 인형을 떼어내려 소리 없는 몸부림을 치자.
촤아아아아악!
“……!!”
인형의 몸 곳곳에서 날카롭기 그지없는 칼날들이 튀어나오며 추향의 몸을 헤집어 놓았다.
털썩!
예상치 못했던 아득한 고통에 추향이 눈을 까뒤집으며 무릎을 꿇었다.
야심한 골목길, 온몸의 내장을 꿰뚫린 채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는 추향의 모습은 귀영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걸렸다!’
원망이 다급하게 조원들에게 산개하여 퇴각하라는 수신호를 보내려 하자.
“뭘 그렇게 열심히 손가락을 꼬물거리시나?”
원망의 고개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언제?!
“너희들한테 직접적인 원한은 없어. 하지만….”
제국민들이 고요히 잠든 밤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속삭인 목소리의 주인공이 손을 들어 올리자, 추향을 죽였던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마찰음 하나 들리지 않는 모습은 가히 공포스러웠다.
“긍지 높은 흑사자로서, 탁류(濁流)를 따른다는 사실만으로도 너희는 죽을죄를 지었어. 더군다나.”
목소리의 주인이 다른 손을 까딱이자, 원망의 눈앞에 또 다른 인형이 내려앉았다.
“너희가 살아 돌아가면, 우리 잘나신 고용주께서 엄청나게 빽빽댈 것 같거든.”
‘크윽!’
귀영단원들이 움직이려 했으나, 무슨 수를 쓴 건지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
“사감(私感)은 없으니까… 고통 없이 보내줄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귀영단원들의 눈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쓰러진 추향에게 향했다.
아직도 몸 곳곳에 생긴 구멍에서 피를 쏟는 추향의 시신을 보자, 저 목소리의 주인이 하는 말의 신뢰성이 뚝 떨어졌다.
남자도 그걸 느낀 건지, 민망한 감정이 목소리에 실렸다.
“…쩝. 고의는 아니었어. 오해는 하지 마라.”
스스스스스!
남자의 뒤에 있던 인형에서 시야를 가리는 진한 녹색의 가스가 흘러나왔다.
“……!!”
이윽고 가스가 귀영단을 훑고 지나가자.
풀썩!
마치 잠에 빠지듯이 귀영단원들이 자리에 쓰러졌다.
귀영단 전원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남자, 살라딘이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씨. 미미 파쇄(破碎)는 조금 더 개량해야겠네. 살벌해서 어디 쓰겠나, 쯧.”
살라딘이 손을 휘젓자, 네네의 몸에서 나온 가스가 귀영단원들의 시체 위에 한참을 머물렀다.
이윽고 가스가 걷힌 골목에는 살라딘도, 귀영단의 시신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