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0
010화
아렌의 눈가에 의문의 빛이 떠오르자 베로아가 자세를 바로하고 입을 열었다.
“저희들에게 일어난 일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지만, 감히 도련님에게 검을 빼들고 공격을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른 몸가짐만큼이나 강한 의지를 담은 눈으로 크리앙을 가리고 서있는 렌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다 아랫사람의 실수로 그치지 않고 주인 된 자가 공격을 명했으니 이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급소를 찌르는 창 같다고 생각하며 렌은 인상을 구겼다.
“주인의 잘못된 명령으로 충직한 기사들이 희생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귀족의 명예는 무거운 법.”
누가 봐도 공황상태에 빠진 크리앙이 발작한 것뿐인데 교묘하게 물 타기를 하는 것을 보며 벡스터는 크게 감탄하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검보다 무서운 게 혀라고 하더니 귀족가의 하녀장이 이 정도인데 제대로 된 귀족은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물론 베로아는 백작 부인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2부인과의 오랜 싸움으로 단련이 된 것이기에 일반적인 시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용병으로 시작하여 기사로 서임된 벡스터의 입장에서는 신세계나 마찬가지였다.
“명분에서 앞서고 힘으로 눌렀으니 명예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베로아의 선언에 홀 안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젠장.’
사실 이렇게 흘러갈 일이 아니라고 렌은 생각했다.
명분에서 앞서고 힘으로 눌렀다는 부분에서 이쪽의 절대적인 열세가 분명하지만 크리앙이 한 마디만 거들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를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었을 터.
모욕을 준 것도, 검을 빼든 것도 맞지만 이쪽은 사람이 죽었지 않은가.
그것도 명예로운 전쟁터나 주군을 대신해서 죽은 것도 아닌 온몸이 갈가리 찢겨져 나간 비참한 죽음.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가문으로 복귀해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문제라면 크리앙.
한마디 거들어 주거나 아니면 그 특유의 패악이라도 부려줬으면 좋을 텐데 지금 크리앙은 완전히 탈진해서 겨우겨우 숨만 쉬고 있는 형국이다.
‘······무엇보다도.’
괴물이 앞에 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시녀의 이야기를 듣고서 가만히 서있는 소년의 탈을 쓴 괴물.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눈앞의 괴물이 순수한 인간일 경우.
‘······앞으로 50년은 그 누구도 저 도련님을 막지 못할 것이다.’
예지의 끝자락이나마 닿아 있는 렌의 감각이 그렇게 속삭였고 렌은 그것이 너무도 무서웠다.
베로아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아렌은 대충 귀족들 간의 일처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무림하고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서로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것도 같고 결국은 힘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도 같았지만, 귀족간의 명분 싸움이 꽤나 복잡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고, 못하는 것은 잘 하는 사람에게 시키면 되는 것.
그렇기에 아렌은 베로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시녀장이 처리하는 게 좋겠다.”
“히익! 헙!”
단순한 말 한마디에 구석에 몰려 있는 종업원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지더니 다급하게 자신의 입을 막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죽을죄라도 지은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떨어 대는 것이 아닌가.
실금이라도 했는지 고약한 냄새마저도 풍겼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에 가볍게 혀를 차자 하멜과 종업원들이 서로 뭉쳐서 구석으로 끼어들었다.
아렌에게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어지려는 그 처절한 움직임을 본 벡스터가 조용히 아렌의 옆에 섰다.
“다른 숙소를 찾겠습니다.”
어차피 이 여관에서 계속 지내기에는 틀렸다는 판단을 내린 벡스터가 베로아를 보며 눈빛으로 의중을 물었고, 베로아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벌써 해가 기울어 가기 시작하는 시간인지 급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도련님이 불편하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벡스터의 마음이 급해졌다.
“로렌스를 시켜라.”
하지만 아렌의 입에서 나온 말에 벡스터는 걸음을 멈췄고, 마침 계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로렌스와 유나, 센드가 흠칫거렸다.
과묵하고 자잘한 지시는 안 내리는 아렌의 말에 의아해했지만 베로아는 그 지시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로렌스. 다른 숙소를 알아봐 오세요.”
“예. 시녀장님.”
허겁지겁 곁으로 다가온 로렌스를 보면서 베로아가 단단히 일렀다.
“도련님의 품위에 손상이 가지 않아야 합니다.”
“······ 알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백작가의 자제가 묶을 수 있는 숙소를 찾으라는 말에 로렌스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향했다.
그새 옷을 갈아입고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힌 것인지 유나가 깨끗한 옷을 입고 샌드와 같이 쭈뼛거리며 베로아의 뒤에 서는 모습을 보며 아렌은 가만히 손을 들었다.
“벡스터.”
“예. 도련니 ······ 큭!”
곧게 펴진 아렌의 손가락이 벡스터의 명치 어림을 파고들었고, 그 순간 전신을 달리는 아득한 충격에 벡스터의 몸이 휘청거렸다.
“오러를 돌려라.”
크나큰 충격에 정신마저 희미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직한 아렌의 한 마디가 벡스터를 현실 세계로 되돌려놓았다.
본능적으로 일으킨 오러가 벡스터의 몸을 달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명치 어림에서 뭉친 오러가 식도로 치고 올라왔다.
“우웩!”
시커멓게 죽은 핏덩어리가 벡스터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베로아와 유나, 센드는 창백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렌은 더욱 표정을 굳혔다.
‘타인의 오러에 간섭했다.’
오러는 육체를 보호하고 한계를 끌어내는 힘.
그렇기에 외부의 간섭에 강한 반발력을 보이기 마련이고 제 아무리 마스터에 이른 달인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오러에 간섭하는 것은 극히 힘들다.
그런데 아렌은 손가락 하나로 장난처럼 그 일을 해내었으니 렌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뒤집힐 만큼 경악할 일.
‘오러의 운용만큼은 마스터를 뛰어넘는다는 소리가 아닌가.’
베로아가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거절하기가 어려워졌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벡스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명백하게 한 수 위인 렌과 오러를 동원한 검투를 벌이고 인정사정없는 도일의 공격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었다.
거기에 의도치는 않았지만 아렌으로 인한 심리적인 충격이 겹치니 제 아무리 포션으로 치료를 했다고 하더라도 기혈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 부분을 눈치 챈 아렌이 벡스터를 대신해 로렌드를 움직이고 상한 기혈에 손을 쓴 것이다.
무리하게 움직였다면 고질병으로 발전했을 것이 잠깐의 정양만 한다면 회복이 될 정도로 가벼워졌다.
아직 오러에 대한 깊이가 얇은 벡스터이지만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고 다시금 아렌에 대한 충성심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올라가 있겠다.”
벡스터를 한번 본 아렌이 베로아에게 말했고 베로아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중을 알렸다.
렌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천처히 발걸음을 옮기는 아렌의 뒤로 유나와 센드가 따라 붙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에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지만 꿋꿋이 따라오는 유나를 일별한 아렌이 중얼거렸다.
“저녁은 나가서 먹겠다.”
홀 안에 펼쳐진 피바다를 보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센드의 모습이 보였다.
“······ 맛있는 것으로 기분 전환하는 것도 좋겠지.”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어린 아이는 주변의 감정에 민감하고 그것이 귀족가의 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너무나도 무서운 도련님이 이례적으로 자신들을 신경 써 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유나와 센드가 희희낙락하자 베로아의 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유나. 센드. 품위를 지키세요.”
“예. 옛. 시녀장님.”
“네!”
그렇게 위층으로 올라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베로아의 눈에 따스한 빛이 서렸지만 그것도 잠시 뿐.
냉정하게 빛나는 눈으로 렌을 노려보며 베로아가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 보시죠.”
어느 정도 기운을 갈무리한 벡스터가 베로아의 뒤에서 기세를 일으켰고, 렌의 표정은 참담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흡!”
짧지만 강한 호흡과 함께 롱소드가 허공을 갈랐다.
머리 위에서 시작 된 내려베기가 정확히 허리에서 멈췄고 희미하게 검을 감싸고 있는 은은한 오러가 세상 모든 것이라도 베어 버릴 것만 같은 예기를 풍기고 있었다.
“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집어넣은 벡스터가 부쩍 더워진 날씨에 땀을 훔쳤다.
벌써 8월.
유피테르에 도착한지 3개월이 지난 시간은 계절을 여름으로 이끌었고, 길어진 해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물수건으로 몸을 꼼꼼히 닦은 벡스터가 소중히 챙겨온 정복正服을 꺼내 입고 정성스레 손질한 롱소드를 허리춤에 걸었다.
“가 볼까.”
차림새를 꼼꼼히 살피고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벡스터가 방을 나서자 마침 복도에 나온 베로아와 마주쳤다.
“일어나셨습니까.”
“예. 벡스터 경.”
단정하지만 기품 있는 차림의 베로아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화려하게 장신 된 문 앞에 섰다.
가볍게 숨을 들이쉰 베로아가 신중한 몸짓으로 노크했고, 방주인의 목소리가 화답했다.
“들어와라.”
“실례하겠습니다.”
신중한 몸짓으로 벡스터가 문을 열었고 베로아가 앞에서며 둘은 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컸다.
화려하지 않지만 묘한 기품이 서려있는 가구들이 과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었고, 한쪽 벽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짙은 녹음이 일렁이는 숲이 보였으니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다.
사람이라면 저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둘의 시선은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베로아와 벡스터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롯이 한 곳.
풍경을 바라보며 서있는 소년의 뒷모습뿐이다.
조금은 키가 크기는 했지만 여전히 작고 왜소한 체구와 바람에 일렁이는 백금발이 창문 너머의 풍경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베로아와 벡스터는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평소라면 주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대기하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기 때문.
“나가실 시간입니다.”
벡스터의 한 마디에 소년이 몸을 돌렸고 그 초월적인 이목구비와 어우러진 신비로운 분위기에 벡스터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벡스터는 익스퍼트 중급에 이른 기사.
마음을 바로잡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무엇보다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 없는 소년의 얼굴에 찬 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인가?”
나른하면서도 건조한 목소리.
맑은 목소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말투에 어색했던 적도 있었지만 베로아와 벡스터에게는 경애하는 주인의 목소리일 뿐이다.
“예. 유피테르 아카데미 입교일입니다.”
베로아의 표정에 묘한 감회가 떠올랐다.
3개월 전 백작가에서 도망치듯 떠나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들이 그녀의 머리로 스쳐지나갔고 그것이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을 피어나게 만든 것이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 뿐.
“가지.”
아렌의 한 마디에 둘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