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연병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서 아렌만이 예의 그 느릿한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 대치하던 마스터들도, 양 가의 기사들도 오로지 아렌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 시간 속에서 드웨인은 정신을 차렸다.
“아렌 도련님.”
적들을 앞에 두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 행동에 구스타프와 야코, 락쇼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지만, 그라인드의 기사들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연병장에 울렸고, 투지가 솟아올랐다.
“음.”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한 아렌의 태도는 충성스런 기사들에게 답하는 것 치고는 성의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라인드의 기사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쉽지 않겠어.”
야코의 말에 구스타프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등장만으로 장내를 휘어잡고, 가문의 기사들에게 – 심지어 마스터에게도! –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은 눈앞의 귀공자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락쇼.”
“……모르겠다. 전혀 보이지 않아.”
락쇼의 말에 구스타프와 야코가 침음을 내뱉었다.
몬스터는 본능으로 적의 강약을 알아채는 힘이 있었고, 몬스터의 이능을 본 딴 주술에도 그러한 힘이 있었지만, 락쇼는 아렌의 경지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락쇼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밤하늘 같은 어둠뿐.
적의 강약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 락쇼와 일행들을 더욱 긴장케 했다.
어느덧 드웨인의 옆에 선 아렌을 보면서 구스타프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웅.
마스터는 심상을 내보이는 자다.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기세가 일어나고 주변에 영향을 끼치니 이빨기사단 역시 이에 동조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이건 뭔가?”
구스타프가 관을 가리키며 물었다.
목소리에 압도하고자 하는 의지를 잔뜩 실어 보낸 한 마디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함이었고, 어지간한 기사라면 이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말이 짧구나. 잉그리드의 개차반 같은 성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겠군.”
“……뭐?!”
하지만 이어서 나온 아렌의 독설은 구스타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구스타프는 역으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북부는 살기에 바빠서 예절을 배울 시간이 없다고 들었다. 이해할 수 있다. 영지를 지키는 고귀한 의무를 위함이니 어쩔 수 없겠지. 그렇다고 해도 영주의 일족이 예의를 몰라서야 되겠느냐. 평소에 시간을 내는 것이 좋겠다.”
가볍게 혀를 차며 말하는 아렌의 모습은 노귀족이 어린 아이를 훈계하는 그것이었고, 마스터인 구스타프를 아이 취급하는 모습에 모두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큭!”
기선을 제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드웨인과 그라인드 기사들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빛이 떠올랐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야코가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이번에도 아렌이 조금 빨랐다.
“그래도 그라인드의 적자로서 질문에는 답을 해주겠다. 너희 못 배워먹은 것들에게는 큰 선심을 쓰는 것이니 이 은혜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뭐 이렇게 말해 봤자 기억이나 하겠냐마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말에 이제는 분노가 솟아오르려 했지만, 아렌이 손짓에 열린 관의 내용물을 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텅.
한쪽으로 날아간 관 뚜껑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이빨기사단의 모두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시신.
양눈이 있던 자리가 비어 있고, 관절이란 관절은 다 꺾여 있었으며, 전신의 뼈란 뼈는 성한 것이 없었다.
제법 고급 수의를 입혔지만, 사이사이 보이는 피부는 거미줄 같은 상처로 가득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시신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빨기사단 사이로 흘렀다.
북부의 귀족들도 당연히 고문을 할 줄 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잔인해 질 수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런 그들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의 처참한 시신의 모습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훌리오.”
락쇼가 허망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으며 시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슬픔이 떠오르더니만, 이내 맹렬한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이능을 연구하고 그것을 인간에 맞게 고친 주술은 입문하는 것조차 어렵다.
자질을 알아보기도 힘들뿐더러 입문한다고 치더라도 극대화된 본능과 싸워야 하는 주술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그 와중에 무수한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니, 피로 쌓아 올린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주술사들의 관계는 끈끈하기 그지없었고, 그 관계는 어지간한 혈연에 비견되었다.
주술사들끼리는 가문을 떠나서 지식의 공유를 아끼지 않았고, 이제는 북부 전체에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더욱 끈끈한 관계가 있기 마련이니 훌리오와 락쇼가 그랬다.
훌리오는 락쇼의 제자였다.
딱히 가저을 이루지 않은 락쇼가 아끼고 아끼던 제자였으니, 자식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훌리오가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 락쇼의 앞에 있게 된 것이다.
자식을 잃은 짐승의 분노는 제어할 수 없는 법.
락쇼 역시 그랬고, 경지가 깊어질수록 내면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본능을 통제하고 있던 이성을 일순간 놓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 * *
끼리리링!
방울이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몬스터가 이빨을 가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소리가 락쇼의 몸에서 울려 퍼졌다.
“락쇼!”
“피해!”
대경실색한 구스타프가 놀라 외쳤지만, 재빠르게 대응한 야코가 구스타프를 안아들더니만 뒤로 물러섰다.
끼리리리!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락쇼의 모습에 이빨기사단과 그라인드의 모두가 창백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괴이한 기세와 살기가 락쇼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고, 그것은 인간의 공포를 근원적으로 자극하는 힘이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피어.
기세에 마나를 실어 상대를 제압하는 몬스터 피어가 락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주술로 증폭 된 피어는 일반적인 사람은 물론이고 마스터의 안색이 변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우드득!
락쇼의 온몸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더니만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것만 하더라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광경인데 뒤틀리던 팔 다리가 팽창하더니 오우거의 그것을 연상케 할 정도로 커다래졌다.
촤라락.
펑퍼짐한 락쇼의 옷 사이로 수없이 많은 넝쿨이 흘러넘치며 땅에 뿌리를 박았다.
“호로로로로.”
락쇼의 입에서 새어나온 휘파람 소리가 모두의 고막으로 파고들었고, 그 순간 몇몇 기사가 휘청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오러로 정신을 보호해라!”
드웨인의 외침에 따라 황급히 오러를 끌어올린 기사들이 황급히 태세를 정비했지만, 이미 락쇼의 몸은 인간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있었다.
오우거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커다래진 덩치와 주변을 장악하려는 듯 넘실거리는 기괴한 넝쿨들, 주름이 자글자글했던 피부는 나무의 그것과 같은 각질로 변해 버렸고, 두 눈에서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녹색 빛이 아른거리며 사람의 정신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저주가 아렌에게 집중되고 있었고, 아렌의 몸과 정신은 실시간으로 저주에 저항하고 파훼하고 있는 중이었다.
“흥미롭구나.”
하지만 아렌은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두 눈 가득 붉은 기운을 띄우며 락쇼의 몸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괴물.”
누군가가 지껄인 한 마디에 이빨기사단의 안색이 변했다.
마법과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주술은 강력하기 짝이 없는 기술이었지만, 북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존재를 잘 모를 정도로 비밀스런 기술이었고, 그 이유가 락쇼의 모습으로 설명된 것이다.
몬스터의 기술을 모방했기에 몬스터와 한없이 가까워지는 기술의 존재는 생존을 우선시하는 북부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배척할 것이 분명했고, 괴물이라는 한 마디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러니저러니 하더라도 주술은 북부의 한 축을 이루는 기술이다.
그런 그들의 기술을 괴물 취급했으니 가라앉은 전의를 다시 일으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락쇼의 눈에 떠오른 녹색 빛이 짙어지며 거대한 손과 넝쿨이 하늘로 치솟아 아렌을 향해 떨어져 내리려 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느껴지는 일격에 모두의 안색이 변하려는 순간이었지만, 정작 아렌은 태연하기 그지없었고, 동시에 허공에 마법의 문자가 떠오르더니만 락쇼의 몸을 감쌌다.
“크아아아아!”
족쇄의 형태로 된 고리가 허공 곳곳에서 나타나 락쇼의 몸을 구속하려 들었고, 락쇼의 몸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확실히 흥미롭습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드웨인의 옆에 선 부드러운 인상의 노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도련님의 말씀대로 이 자리에 나와 보기를 잘 한 것 같군요. 훌리오의 지식도 괜찮았지만 저 자를 연구한다면 꽤 얻는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인상과는 다르게 두 눈에 번들거리는 광기는 락쇼를 인간으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흥미로운 연구 과제, 혹은 물건으로 취급하는 눈빛은 노인을 익히 알고 있는 드웨인 마저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럼 알아서 해라.”
“크워어어억!”
눈앞에 자신을 두고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에 락쇼의 분노가 폭발했지만, 연병장 곳곳에서 마법의 빛을 터트리고 있는 마법사들은 그런 락쇼를 철저하게 묶어 놓고 있었다.
“관대한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부드러운 인상의 노인, 그라인드 백작가의 마법사를 대표하는 노아는 우아한 몸짓으로 아렌에게 경의를 표했다.
* * *
마법사는 폐쇄적인 집단이다.
같은 학파가 아니라면 지식의 공유를 꺼리며, 한 줌의 비전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마법사다.
유피테르에서 학생들을 가리키던 마법사들은 막대한 대가를 약속받고서 자신들의 지식을 풀었던 것이지, 그런 예외가 아니라면 철저할 정도로 폐쇄적인 자들인 것이다.
지식을 얻고, 진리에 다가서 세상의 법칙을 비틀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자들이지만, 그런 그들도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상과 관여한다.
때문에 스폰서 문제는 마법사에게 있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고, 그런 면에서 노아와 그의 학파는 꽤나 축복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황금의 이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가진 스폰서는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고, 이에 만족한 노아의 학파는 대를 이어 그라인드와 함께했으니 이제는 가신에 가까워져 버렸다.
당연히 영지의 한 축을 이루는 전력인 마법사들을 드웨인은 가만 놔두지 않았고, 마법사들의 대표로 아렌을 만난 노아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마법사는 세상의 법칙을 깨트리려고 노력하는 자이고, 그런 노아의 눈에는 이미 세상의 법칙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아렌의 실체가 보였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관대한 아렌은 훌리오를 기분 좋게 넘겨주었으며, 새로운 지식을 접한 그라인드의 마법사들의 충성이 고취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마법사들에게 락쇼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던져주었으니, 노아가 아렌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은 전혀 과한 예가 아니었다.
“유인해라!”
“살살 다뤄! 오랜만에 흥미로운 실험체다!”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솟아난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마법을 시전하며 락쇼의 거체를 감쌌고, 분노에 불타는 락쇼는 눈앞의 아렌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마법사는 모이면 모일수록 강해진다.
하물며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인 그라인드 백작가였고, 준비된 마법사는 마스터도 우습게보기 마련.
마스터와도 상대가 가능하다던 락쇼가 허망하게 제압당하며 연병장 한쪽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이빨기사단의 모두는 당황스런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살기를 내뿜으며 자신들을 견제하고 있는 그라인드의 기사들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던 탓이다.
“……끄아아아아.”
락쇼의 비명을 뒤로하고 드웨인이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쇠가 쇠를 스치는 단순한 소리이지만 그것이 마스터의 것이라면 단순한 소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법.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드웨인이 스산하게 웃었다.
“시작해 볼까”
어쩐지 모르게 아렌의 미소를 닮은 섬뜩한 기세에 구스타프와 야코의 안색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