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아렌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잉그리드와 다렌이 불편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시간은 변함없이 흘렀고,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
“유나아아. 정령 보여 줘어.”
유나의 운디네에 흠뻑 빠졌는지, 해가 뜨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엘렌이 유나를 붙잡고 떼를 썼다.
“와아아아.”
허공에 수분이 뭉쳐 운디네가 나타났고, 새침한 표정을 한 운디네가 엘렌의 눈앞에서 서성거리자 엘렌이 두 팔을 위로 들고는 운디네의 움직임을 쫓았다.
아이의 미소는 주변을 밝게 만들어주기 마련이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아렌의 일행이었지만, 지금은 모두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금은 아쉽구나.”
“네?”
방실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엘렌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짓던 아렌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나보다 유나를 더 찾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요.”
아렌의 대답에 살포시 미소 지은 베로아가 위로하듯 말했지만, 아렌의 얼굴에 떠오른 허탈한 미소는 내려가지 않았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제법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아렌의 모습이 벡스터와 베로아는 기꺼웠다.
힘과 지혜를 갖춘 이상적인 군주인 아렌이었지만,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모습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영지로 돌아온 이후부터는 조금씩 감정을 밖으로 표출해내고 있으니 묵직한 것이 내려간 느낌이 든 것이다.
그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엘렌의 모습을 보면서 둘은 지금보다 더 엘렌의 안위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공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엘렌의 유모와 시녀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지만, 아렌의 태도를 보았을 때, 최소한 엘렌이 잘못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그나마 마음 한쪽이 편안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놀다 지친 엘렌이 아렌의 침대에 누워서 고롱거리고 있던 때.
“도련님.”
슬며시 아렌의 방안으로 들어선 에드워드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착했습니다. 지금 막 성문을 지났다고 합니다.”
“그런가.”
대답과 함께 아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방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흡!”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가로막으며 유모와 시녀들은 두려운 눈으로 아렌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일어섰을 뿐인데, 방금 전까지 방안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차가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유나가 잠들어 있는 엘렌의 몸에 슬며시 이불을 덮었고, 베로아가 굳은 표정으로 아렌의 옷을 정돈했다.
그것만으로 다소 차가운 인상의 귀공자가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귀족으로 변해 버렸다.
“가지.”
“네.”
엘렌을 슬쩍 쳐다본 아렌이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에드워드와 벡스터가 따랐다.
엘렌의 유모와 시녀들이 두려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베로아와 유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배웅했다.
* * *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황금빛의 곡창지대를 지나 요충지에 견고하게 쌓여 있는 감시탑과 아성을 뒤로하고, 이빨기사단은 헤르메스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견고하게 쌓여 있는 성벽과 거대한 성문, 끝도 없이 유동하는 인구에 감탄한 것도 잠시, 당당한 발걸음으로 전진한 이빨기사단이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성문에서부터였다.
“잠깐 기다리쇼. 아직 앞의 검문이 끝나지 않았소.”
퉁명스런 말투를 내뱉는 관문 기사의 말에 이빨기사단의 선임기사는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우리가 누군지 안 보이는 것인가!”
“왜 모르겠소? 문장만 봐도 알겠구먼.”
코웃음을 치는 관문기사의 말에 선임기사의 얼굴이 붉어지며 자연스레 손이 검으로 향했다.
기사는 그 위치와 의무만큼이나 명예가 높다.
어지간한 귀족만큼 명예의식과 자존심이 높은 기사는 대부분 모욕을 참지 않는다.
북부의 기사답게 불같은 성정을 가진 선임기사는 당연히 모욕을 참을 생각이 없었고, 절로 살기가 일으키며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턱.
“이 친구가 원행에 신경이 날카로운 모양이야. 빨리 쉴 수 있도록 부탁하겠네.”
어느덧 다가온 수석기사가 선임기사의 손을 억누르며 관문기사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알겠소. 하긴 그럴 만도 하겠군.”
뭔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던 관문기사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돌려서 병사들에게로 가 버렸다.
“저놈이!”
“어허!”
그 모습에 선임기사의 얼굴이 더더욱 붉게 달아올랐지만, 수석기사는 노련한 움직임으로 선임기사의 모습을 감쌌다.
“왜 말리신 겁니까?”
그런 수석기사의 곁으로 한 기사가 다가와 슬며시 물었다.
그의 얼굴도 굳어 있는 것이 적잖이 화가 난 모습이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래도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검을 뽑았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네?!”
수석기사의 나직한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말투와 태도는 천박했지만, 몸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손은 검 자루를 단단히 잡고 있었고, 상체는 힘을 내뿜기 위해 움츠리고 있었지. 단번에 베였을 거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수석기사의 모습에 그제야 기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수석기사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이상하군.”
“단장님.”
어느덧 선두로 나선 구스타프의 표정도 굳어졌다.
“주변의 시선이 안 좋아. 아무리 타 영지의 기사단이 들어선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적의를 보일 정도인가?”
구스타프의 말에 기사들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들을 쳐다보던 영지민들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오러를 깨닫고 범인을 초월한 기사들에게는 감정의 잔향이 느껴졌고, 미세한 적의가 그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안 좋군요.”
“……모두 긴장을 풀지 말라고 전해라. 아무래도 일이 생각보다 어려워질 거 같다.”
구스타프의 말에 수석기사와 주변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전파했다.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구스타프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락쇼.”
“……확실히 적의가 강해.”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힌 노인답지 않게 허리를 곧게 펴고 있는 락쇼가 침중한 음성으로 답했다.
북부의 비전인 주술을 깊게 익혀서 마스터와도 전투가 가능하다는 주술사인 락쇼는 인간의 감정에 특히 민감했고,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항상 노망난 것처럼 흘흘 대던 락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지 않았으니 사태가 보기보다 심각함을 구스타프는 직감했다.
“여차하면 손을 쓸 준비를 해.”
“알았네.”
게하르의 또 다른 마스터인 야코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속에 차오르는 가운데 그들을 인솔할 기사가 성문 저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 * *
이빨기사단을 처리하기로 결정한 이후, 바인드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에드워드는 여론 조작에 착수했다.
제 아무리 로렌에게 해를 끼치고 아렌을 배제하려 했다고는 하지만, 잉그리드와 게하르는 엄연한 사돈 관계다.
거기에 게하르의 핏줄을 이은 다렌과 엘렌마저 있으니 제아무리 확고부동한 명분이라도 말이 나오기 마련.
일이 끝난 다음에 일어날 반동을 최소화하고 혹시라도 일어날 저항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렌이 나선 이상 실패는 아예 생각지도 않은 에드워드와 바인드는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트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지의 내정을 책임지는 에드워드와 음지를 지배하는 바인드의 합작 결과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잉그리드와 게하르를 좋은 사돈정도로 생각했던 영지민들은 순식간에 태세를 바꿨고, 이제는 사돈에서 침략자로 인식을 전환해 버린 것이다.
로렌의 병에 대한 진실이 일부 흘러나갔고, 아렌의 고생이야기가 영지민들의 울분을 불러일으켰으며, 며칠 전 아렌이 부른 폭풍우를 신이 게하르의 악행에 분노한 것이라는 헛소문까지 퍼트렸으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비방과 선동에 영지의 여론은 뒤집혀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이빨기사단이 영지에 도착했고, 최소한 헤르메스의 주민들은 이빨기사단에게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 * *
“여기는?”
“연병장이군. 허! 이 정도 크기의 연병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인가. 역시 황금의 그라인드라고 불릴 만하군.”
영지민 전체가 적의를 숨기지 않고 이빨기사단을 주시하는 가운데 헤르메스를 가로지른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영주성의 외곽에 있는 거대한 연병장이었다.
수천 명의 대군이라도 문제없이 수용하고 훈련까지 가능해 보이는 거대한 연병장은 척박하고 토지가 부족한 북부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기였다.
화려한 도시의 부와 끝없는 식량, 거기에 이러한 거대한 대지를 확인한 이빨기사단의 모두가 새롭게 결의를 다졌다.
반신반의했던 기사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구스타프의 이상에 감화되었고, 이 순간 기사단의 의지가 하나로 모였으니 그 어떠한 적이라도 분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했다.
연병장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그라인드의 기사들이 한순간에 변한 기사단의 기세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고르고 골라 이 자리에 모인 정예 기사들은 왜 모였는지를 숙지하고 있었고, 이빨기사단이 기세를 높인 만큼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두 세력이 서로의 전의를 가다듬으며 대치하기 시작한 그때, 드웨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라인드에 잘 왔소.”
비록 초입이기는 하지만 소드마스터의 날카로운 기세가 기사단의 예봉을 건드렸고, 초인에 발을 들여놓은 힘은 날카롭게 정련된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다.
“구스타프 드 게하르요.”
하지만 그 순간 구스타프가 앞으로 나섰다.
드웨인의 그것을 상회하는 거친 기세가 일어섰고, 기사단의 예봉을 꺾으려는 드웨인을 막아섰다.
“마스터셨군.”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인 구스타프의 기세에 놀라야 마땅하지만 드웨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인드가 이끄는 정보길드는 제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정보조직이다.
동남부에 기반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그 영향력은 제국 전체에 뻗어있으니 게하르의 내밀한 속살까지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고, 구스타프는 물론이고 야코와 락쇼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적의 실체를 알고 있으니 당황할 이유가 없었고, 비대한 적이지만 상대할 방도마저 존재했으니 드웨인은 당당할 수 있었다.
구스타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알고 있었군.”
“뭐 큰 비밀이라고. 어지간한 귀족가는 다 알고 있을 거요.”
콧방귀를 뀌는 드웨인의 말에 구스타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근거도 없는 헛소리를 내뱉은 드웨인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드웨인의 말에 신뢰를 더해 주었고, 구스타프의 마음속에 작은 동요가 일어났으니 마스터들 간의 전투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런데.”
그런 구스타프의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 드웨인이 이빨기사단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단순히 둘째부인을 보러온 거 치고는 과한 인원이군요.”
“북부에서는 항상 신중하게 움직이오.”
트집을 잡는 드웨인에게 구스타프가 반박했고, 야코와 락쇼가 슬그머니 뒤로 섰다.
은밀한 기세가 슬그머니 드웨인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대로라면 기세에서 밀린 드웨인이 아무것도 못하고 참살 당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
신중하게 백작가를 장악하고 다렌을 후계자로 올리려는 계획은 헤르메스의 적의로 인해 폐기되었고, 다소 우악스럽게라도 일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이니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연병장에 모인 기사들의 안색이 변하고 모두가 검 자루에 손을 가져대 대려는 그때.
쿵!
커다란 무엇인가가 두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에 떨어졌고,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잘 됐구나.”
한 순간에 장내를 장악해버린 목소리에 구스타프와 야코, 락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물건을 옮기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커다란 관을 내던진 아렌이 담담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