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유구한 가문의 역사와 천문학적인 부에 걸맞게 그라인드 백작가의 저택은 넓었다.
백작이 기거하고 업무를 보는 중앙저택을 중심으로 꽤나 많은 별채들이 존재했는데, 각 별채들은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었고, 비어 있는 곳도 있었다.
그중 다렌이 머물고 있는 별채로 향한 아렌이 벡스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별채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기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충성심과 용기다.
그런 면에서 다렌의 별채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훌륭한 기사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그들도 아렌을 직접 마주하자 피어오르는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자비 없는 괴물.
최소한 게하르에서 온 기사들은 아렌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아렌은 굳이 그 생각을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잔뜩 굳은 얼굴로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 기사를 향해 아렌이 느긋이 말했다.
“다렌은 있느냐.”
“……도련님은 연무중이십니다.”
“열심히 하는군.”
흡족한 듯 고래를 끄덕이는 아렌이었지만, 그렇기에 기사들은 더욱 더 아렌에 대한 경계를 끌어올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가 쉬지 않고 정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흡족해한다는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볼일이 있다. 길을 내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굳은 얼굴을 한 기사의 말과 함께 저택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아렌의 앞을 가로 막았다.
순식간에 열 명의 기사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모습에 아렌의 눈가가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벡스터.”
“예. 도련님.”
“이것들은 가문의 기사들이 아니냐?”
명예로운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기사를 한낮 물건 취급하는 아렌의 말에 기사들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일어났다.
아렌에 대한 공포와는 별개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하지만 아렌은 물론 벡스터도 기사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게하르에서 온 것들입니다.”
“감히!”
벡스터의 답에 기사들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렌이라면 모르겠지만, 한낮 호위기사가 자신들을 아래로 보는 것이니 분한 마음이 들은 것이지만 이내 흠칫 거리며 얼굴을 굳혔다.
하나로 모아진 벡스터의 기세가 기사를 찌르고 있었고, 어느새 상급을 바라보는 벡스터가 만만치 않음을 알아챈 것이다.
익스퍼트 상급이라면 작은 영지에서는 기사단장을 할 수 있다.
생각보다 대단한 벡스터의 기세에 단순한 호위기사에서 강적으로 인식이 바뀌어 버렸다.
“그럼 타 영지의 기사가 그라인드에서 내 앞길을 막아섰다는 말이로구나.”
귀족가의 분쟁은 말 한마디로도 일어날 수 있다.
한데 지금 아렌의 말은 사소한 말실수를 넘어서 타영지의 기사가 영지의 일에 관여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으니, 일을 진행하기에 따라서는 영지전으로 발전할 수 도 있는 사안이었다.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아렌의 말에 선임으로 보이는 기사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게하르와 그라인드는 사돈관계잖습니까! 저희는 그저 다렌 도련님의 연무시간을 지켜드리려는 것뿐입니다.”
필사적인 변명이었지만, 아렌의 마음은 이미 뒤틀린 후였다.
“그럼 더더욱 내 앞을 막지 말았어야지. 감히 그라인드의 적자를 무시하느냐.”
“그게 무슨!”
억지가 섞인 아렌의 말에 선임기사가 대경실색해 외쳤지만, 아렌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우드드득!
“크아악!”
“아악!”
“커억!”
가슴께로 들어 올린 손바닥이 슬쩍 흔들렸고,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열 명의 기사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누구라도 양팔과 양다리의 관절이 부서져 버린다면 비명을 질러 댈 것이고, 열 명의 기사들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끄으으으!”
제각기 바닥에 몸을 뉘인 채로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는 기사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아렌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고, 벡스터가 저택의 문을 열었다.
“히이익!”
“꺄아악!”
아렌의 모습과 함께 시녀들의 비명이 저택을 울렸고, 고요했던 저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패닉에 빠진 사용인들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은 아렌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고, 집사로 보이는 사내에게 벡스터가 다가섰다.
“밖에 기사들이 쓰러져 있다.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평생 불구가 될 수 있어.”
“아, 알겠습니다.”
사생이 되어 버린 집사가 어디론가 달려가고 벡스터가 잰 걸음으로 아렌의 뒤로 따라붙었다.
“함부로 나서서 죄송합니다.”
“괜찮다.”
아렌의 대답에 벡스터는 고개를 숙이며 불안감에 두근거렸던 속을 가라앉혔다.
점점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성향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벡스터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렇게 저택을 가로질러서 후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흠.”
굳은 표정으로 아렌을 바라보는 다렌과 몇몇 기사들의 모습에 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단단히 다져 있는 바닥과 곳곳에 비치된 수련 도구들을 본 아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함을 표했다.
환경도 그렇고 물건들도 그렇게 꽤나 질이 좋은 것이 다렌이 수련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과는 다르게 다렌과 수련을 도와주던 두 기사는 긴장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오러를 개화하지는 못했지만, 일반인의 신체능력을 넘어서는 다렌과 원숙한 오러 사용자인 두 기사는 이미 저택의 입구에서 일어난 일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환경이 괜찮구나. 좋은 일이군.”
“……어쩐 일이야?”
잔뜩 긴장한 다렌의 모습에 아렌이 혀를 찼다.
“너는 형이 왔는데 대접이 박하구나. 우리 사이가 어떻든 간에 너와 나는 형제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되지.”
그걸 아는 사람이 자신의 기사들을 불구로 만들어 놨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다렌은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다과를 준비해 와.”
“도련님.”
“어서.”
“……알겠습니다.”
다렌의 말에 아렌을 노려보던 기사 하나가 저택으로 발을 옮겼다.
“괜찮은 기사구나. 충성심도 있어 보이고.”
“……바투는 좋은 기사야.”
뜬금없는 칭찬에 다렌이 어리둥절했지만 이어지는 아렌의 말에는 경악어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시선을 주의하라고 해라. 네가 아끼는 기사의 눈알을 파 버리고 싶지는 않구나.”
“뭐?!”
다렌이 비명을 질렀고, 남아 있는 기사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아렌은 당연한 것에 왜 그러냐는 듯한 기색이었다.
“도련님이 한번 배려해 주신 겁니다.”
“제법 내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됐구나.”
“과찬이십니다.”
한술 더 뜨는 벡스터의 말에 다렌의 표정이 아연해졌지만, 이어지는 아렌의 말에는 자기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도련님.”
“……큭!”
하지만 남아 있는 기사가 손을 대어 진정시키니 다렌은 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정리해야만 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 약자인 자신이 숙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다렌은 너무도 분했다.
“제법 쓸 만한 표정이 됐구나.”
“……뭐?”
어느덧 연무장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은 아렌이 다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의 감정을 잊지 말아라. 우리 같은 사람에게 약한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
진지한 기색이 가득한 아렌의 말에 다렌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고, 같이 있던 기사의 표정도 굳었다.
다렌을 조롱하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다렌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바투가 다과를 대령했고, 어느새 다렌은 아렌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다.
“괜찮은 차를 쓰는군.”
마치 자신의 거처인양 너무도 편안하게 차를 음미하는 아렌의 모습에 다렌과 기사들의 표정이 묘해질 무렵, 아렌이 다렌과 시선을 맞췄다.
끝도 없이 깊고 어두워서 마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에 다렌은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두 눈을 마주보려는 다렌의 모습에 두 기사는 물론이고 벡스터마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말과 함께 떠오르는 희미한 미소에 다렌을 비롯한 모두가 놀랐다.
아렌은 다렌을 대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아렌이 입을 열었다.
“제도에 계신 숙조부가 돌아가셨다.”
“……로디컬 님이?”
아렌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고, 그것은 다렌도 마찬가지였다.
생전의 로디컬은 그들 삼형제를 차별 없이 대했고, 다렌도 로디컬에게는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너는 잉그리드와 함께 숙조부의 시신을 인수하러 가라. 드웨인이 수행할 거다.”
“크흠!”
잉그리드를 타인으로 취급하는 아렌의 말에 두 기사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지만, 아렌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제도에 가서 네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숙조부님의 시신을 인도받는 자리에 나서면 돼. 나머지는 수행인들이 알아서 할 거다.”
“……알았어.”
“한 가지만 명심하고 실천하면 된다.”
아렌의 몸에서 엄숙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다렌을 비롯한 모두가 절로 몸을 세우며 긴장했다.
“제도에서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당당히 서고 행동해라. 제도에 있는 동안은 네가 그라인드의 얼굴이다.”
“명심할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다렌을 보면서 아렌은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틀 뒤에는 시간을 비워라. 잉그리드도 같이 와야 한다.”
권유가 아닌 통보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수련 열심히 해라.”
“잠깐만!”
말과 함께 몸을 돌리려던 아렌을 다렌이 잡았다.
“뭐지?”
“……왜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거지?”
병석에 누워있는 로렌과 방치되어 있던 아렌과 다르게 다렌은 잉그리드에게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는 귀족들 간의 일과 예법 등도 있었고, 제법 총명한 편에 속하는 다렌은 지금 이 상황이 꽤나 큰 기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다렌이 생각하는 아렌은 경쟁자.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형의 치료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아버님이 움직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지. 그렇다고 엘렌을 보낼 수도 없으니 너 밖에 없지 않느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답변하는 아렌을 다렌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답답한 표정을 지은 다렌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렌이 입을 열었다.
“너는 그라인드의 적자다.”
단호한 아렌의 말에 다렌의 입이 다물어졌다.
“물론 잉그리드와 게하르의 잡것들을 가만 둘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너는 그라인드의 적자고, 일련의 일에는 관련이 없지 않느냐.”
나이에 비해 큰 덩치를 가진 다렌의 몸이 부르르 떨렸고, 두 기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럼 이틀 뒤에 시간을 내라는 게?”
조심스런 다렌의 말에 아렌이 스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일에 집중을 못하는 법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후원을 나서는 아렌과 벡스터의 뒷모습을 다렌과 두 기사가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