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 알고 있었냐?”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로렌이 한동안 침묵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을걸.”
단언하는 아렌의 모습에 로렌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혈계능력으로 꼬마 아렌의 성정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아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현 그라인드의 누구보다도 부작용을 잘 극복해낸 사례가 되었다.
정신분열과 과대망상, 괴팍하게 변해버린 성격 등등으로 그라인드의 혈족들은 대부분 은둔해 있었고, 아렌 정도의 사회성을 갖춘 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찾아본다면 로렌을 치료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로렌을 치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오직 아렌만이 그 뇌리에 품고 있는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로렌의 상태를 확인하고 의식불명에 빠져있던 정신을 깨운 것이니 이 시점에서 최고의 전문가는 아렌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긴. 나를 깨운 것이 너였지.”
쓴웃음을 지으며 로렌이 아렌의 눈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서려있던 허허로운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냉정한 이성의 빛이다.
이제야 이야기를 나눠볼만 하다고 생각하며 아렌은 입을 열었다.
“상태는 어때?”
방금 전과 같은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달랐다.
“약간 우세하다고 할 수 있겠지. 네가 손을 써준 것이 주요했다.”
아렌보다 어린 나이에 혈계능력을 각성한 로렌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했다.
자신을 덮어쓰려는 자아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것이 어느덧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된 것이다.
하나의 신체에서 두 개의 자아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워대니 없는 병도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로렌이 병상에 눕게 된 원인이었다.
“…… 아슬아슬할 때도 있었다. 이제 다 끝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몸에 독과 저주가 스며들더군. 그것들을 이용해서 위기를 모면했었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훌리오가 로렌을 해하기 위해 손을 쓴 독과 저주는 로렌의 힘이 되었다.
몸 상태는 더욱 나빠지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지만, 최소한 자아는 뺐기지 않았으니 로렌의 정신력은 일반인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고 볼 수 있었다.
“괴롭고 막막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으니까. 때로는 이대로 몸을 넘기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도 했었지.”
자아가 제대로 형성이 되기도 전의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과의 사투를 10여년의 세월동안 해왔다는 이야기다.
그 시간과 감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리라.
“그래도 싸워온 보람이 있구나. 이렇게 동생과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까.”
어쩐지 후련한 표정을 지은 로렌을 아렌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렌 자신보다도 어려보이는 얼굴과 체구.
병상에만 있어서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고 피폐해진 몸은 당장이라도 기능을 멈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렌은 그런 로렌을 절대 가볍게 보지 않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로렌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아렌의 시선을 느꼈는지, 로렌이 힘겹게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로 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자세를 바로 한 로렌의 전신에 땀이 솟아났지만, 아렌은 돕지 않았다.
로렌의 얼굴에 서려있는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고, 아렌이 섣불리 돕는다면 그것은 로렌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쉰 로렌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아렌을 직시했다.
냉정함과 이성, 독기가 가득서린 그 눈빛을 마주보고 선 아렌을 향해 로렌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묻자.”
“말해.”
“넌 아렌이 맞는 거냐?”
한줌의 힘도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와 의지를 아렌은 느낄 수 있었다.
“난 아렌 드 그라인드야.”
그렇기에 아렌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형이 알고 있는 아렌과는 다르겠지만.”
“그래.”
그제야 표정을 풀고 눈을 감는 로렌을 보며 아렌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도와줄 테니까 능력을 눌러. 최종적으로는 능력을 흡수하는 것을 목표로 할 거야.”
“…… 얼마나 걸릴까?”
로렌의 눈가에 떠오른 기대를 보면서 아렌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 * *
“왜 왔어?”
“동생을 보러오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 거냐.”
연무장 한편에 쭈그려 앉아 등을 보이고 있는 다렌을 보며 아렌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연무장에는 두 형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이유가 있어서 보러온 것이 맞기는 하다만.”
아렌의 말에 다렌이 슬그머니 얼굴을 돌렸다.
선이 굵어서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는 얼굴은 온갖 감정을 담고 축 처져있었다.
“이제야 아이처럼 보이는구나.”
“…… 형도 아이인건 마찬가지잖아.”
다렌이 발끈했지만, 아렌은 말없이 다렌의 곁에 마주 앉아 눈을 맞췄다.
“마음이 복잡한건 이해하겠지만, 일단은 이야기부터 들어라.”
진중한 목소리에 짜증을 내려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다렌은 귀를 기울였다.
아렌의 입이 열리며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이어지는 이야기에 다렌은 경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그게 사실이야?”
“사실이다. 내가 이렇게 변한 것도 그렇고, 형이 앓아누운 것도 그렇지. 너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 젠장.”
혈계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렌은 망연자실했다.
아무리 혈계능력이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자신의 핏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아직 어린 다렌은 덜컥 겁이 난 것이다.
“집중해라.”
혼란에 빠져있는 정신에 아렌의 한 마디가 박혔고, 흔들리던 동공이 제 자리를 찾았다.
“이제부터 내가 너한테 뭔가를 가르쳐 줄 거다. 집중해.”
아렌의 말에 다렌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렌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과는 별개로 아렌의 무력을 직접 목도한 다렌에게 아렌은 마스터를 뛰어넘는 위대한 초인과도 같았다.
그런 아렌이 가르쳐준다는 것이 범상한 것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들을 준비가 된 다렌을 바라본 아렌이 눈을 반개하더니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큭!”
동시에 다렌의 귀로 마치 쇠를 긁는 것 같은 소음이 박혀들었고, 다렌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낄 정도였지만, 다행히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게 뭐 …….”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든 다렌이 아렌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려는 그 때, 생소한 지식이 다렌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뭐야?”
“호심경의 일종이다. 정신방어에 특화된 마나운용법이라고 생각해라.”
아렌의 이야기를 들은 다렌이 혼란스런 눈으로 아렌을 바라보았지만, 아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걸로 마나를 모을 생각은 버려라. 외려 모아놓은 마나를 기반으로 운용하는 것이니 부지런히 마나를 수련해야 할 거다.”
“…… 그럼 쓸모가 없잖아.”
마나운용법은 결국 마나를 모으고 축적하기 위한 것인데, 움직이는 것만으로 마나를 소모하게 된다면 본말전도다.
“지금의 너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거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렌의 말에 다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꽤나 높은 확률로 혈계능력의 발현을 억제할거다. 아직 연구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예방책 정도는 될 거야.”
“진짜?”
기쁨과 놀람에 다렌은 비명을 질렀다.
지금 아렌은 그라인드 역사상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혈계능력의 제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니, 다렌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렌 형을 치료하다보면 좀 더 자세해지겠지. 솔직히 말해서 능력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는 감도 안 잡힌다만, 발동 자체를 조절하는 것은 가능할 거 같다.”
또 다른 자아를 불러와서 덮어쓰는 그라인드의 능력은 솔직히 아렌으로서도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결국 인체와 정신에 어떠한 계기가 있어야 발동되는 것은 확실했고, 그러한 부분만 파악할 수 있다면 조정 자체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도에 가는 길에 부지런히 연습해라. 최소한 하루 종일 운용할 정도는 되어야 해.”
아렌의 말에 다렌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제대로 정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아렌이 건네준 지식은 난해한 부분이 있었고, 그것을 단시간에 가능하게 하라는 주문은 버거운 감이 있었다.
“해야 한다. 특히 제도에 도착해서는 한시도 운용을 멈추지 마라.”
“……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아렌의 말에 다렌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닦달하는 것을 아님을 눈치 챈 것이다.
“…… 가문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가게 된 것이니 너도 알기는 알아야겠지.”
그런 다렌을 보고 잠시 생각한 아렌이 입을 열었다.
“황제가 수상하다. 아무리 봐도 우리 가문을 노리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어.”
“황제 폐하가?”
입을 크게 벌리는 다렌을 보면서 아렌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알겠지만, 황제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고위 귀족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야.”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교육 받아온 다렌이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아렌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가문을 대표해서 입성하는 거니 너한테 직접적인 상해는 입히려고 하지 않을 거다. 거기에 드웨인까지 같이 가니 그 부분은 크게 걱정 안 해.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 그게 뭔데?”
살짝 숨을 들이쉰 아렌이 다렌의 눈을 응시했다.
“너를 세뇌하거나 정신 제압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뭐?!”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말에 다렌이 눈을 크게 떴다.
“나라면 그렇게 할 테니까.”
단호한 아렌의 얼굴을 다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 생각보다 더 단호한데?”
낭랑한 목소리가 거대한 방 안을 울렸지만, 그 누구도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빨기사단은 전멸이고, 구스타프와 야코, 락쇼가 목이 잘렸다라 ……. 게하르는 끝났군.”
낮아진 목소리에 드라고는 바짝 긴장했다.
“거기에 게하르로 향하는 상단을 막아버린다고 했다지? 이거 심각한 거 아니야?”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하는 법이다.
수십 년간 제국을 경영한 황제의 안목은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어서 단번에 문제점을 파악해 낸 것이다.
“…… 심각합니다. 이대로라면 북부에 구멍이 뚫립니다.”
드라고가 확인을 해주자 황제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시간 조절이 안 된 거냐?”
“…… 이빨기사단이 갑자기 속력을 높였습니다. 때문에 며칠의 오차가 발생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로디컬의 부고가 도착한 이후 시간을 두고 이빨기사단이 그라인드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아렌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고, 이빨기사단은 높은 확률로 그라인드를 분탕질 했을 것인데, 그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것이니 황제의 짜증은 이해할 만 한 것이다.
물론 로렌을 치료하기 위해 아렌이 영지를 아예 떠나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을 이들이 알리는 없었지만.
사건이 벌어진지 불과 하루도 안 되어서 소식을 전달한 공안도 이런 내밀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말로 줄려다 되로 받았구나.”
황제가 나직이 한탄했고, 드라고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고위 귀족들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꾸준히 공작을 지속하는 공안들이었지만, 이번의 일은 단순히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