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집무실에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분위기에 괴로워하던 시종들과 기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지금 알코르는 십대에 불과한 아들에게 백작위를 넘길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니 일반적인 상리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어떻게든 작위를 유지하고 마지막의 순간까지 최대한 계승을 늦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10대는커녕 30대의 작위 소유자도 흔하지 않은 것이 제국이다.
“나도 22살에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라인드에서는 그렇게 드물지도 않은 일이지.”
말을 하는 알코르의 얼굴에 자조의 빛이 떠올랐다.
언제 혈계 능력이 폭주할지 모르는 그라인드에서는 젊은 가주들이 꽤나 많이 나왔고, 알코르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라인드의 혈계능력은 저주다.”
나직하게 내뱉은 알코르가 말을 이었다.
“언제 발현할지도 알 수 없고, 발현한다면 강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지만 자신을 잃지.”
알코르의 시선이 아렌을 향했고, 아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따지고 보면 꼬마 아렌의 정체성은 거의 없어졌으니 저주라는 알코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평생을 불안 속에 살아왔다.”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은 알코르가 말을 이었다.
“언제 혈계능력이 나를 찾아올지 알 수 없으니,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나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득했지.”
백작인 만큼 그라인드에서 전해지는 최고의 오러연공법을 알고 있었지만, 깊이 익히지 않았다.
익히기만 하면 익스퍼트에 진입하는 것은 우스울 정도의 뛰어난 기술이었지만, 혹시라도 오러가 혈계능력을 자극하지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제국의 모두가 최고의 가치로 치는 힘마저 거부할 정도의 공포와 불안.
그나마 알코르의 마음을 지탱해 주던 것이 첫째부인이었는데, 그녀는 아렌을 출산하고 숨을 다했다.
마음의 지주를 잃은 좌절과 분노는 아이들에게 향했지만 자식을 미워할 수는 없어서 정을 끊으려 했다.
가주된 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잉그리드를 둘째부인으로 들였지만, 정을 주지 않았다.
알코르에게 남은 것은 그라인드 백작이라는 자리뿐.
오로지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가문을 위해서 최대한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니 당대의 그라인드는 성세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백작의 태도에 분노한 잉그리드는 오직 다렌을 차기 백작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오늘의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내가 약해서 그런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알코르였지만, 아렌은 알코르를 욕할 수 없었다.
인간의 정신은 섬세하고 제각각 다르다.
내가 느끼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타인의 입장에서는 큰 일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니 그만큼 객체는 다르고 그것은 개성이 되어서 각자의 삶과 철학을 만드는 것이다.
마스터에 도달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지만 그러한 마스터들의 심상도 천차만별이니, 이러한 점은 감안한다면 마냥 알코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아렌은 생각했다.
애초에 알코르는 백작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코르는 최선을 다해 그라인드라는 가문을 부흥시켰으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칭송을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항상 냉정하고 지친 표정을 한 백작의 고백에 시종들과 기사들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가장 지근거리에서 알코르를 보조하던 그들마저도 알코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것을 원망했었으니, 복잡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묻겠다. 백작이 되고 싶으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속으로 곪아 가던 자신의 마음을 모두 이야기한 알코르가 후련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 외에는 백작위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서 필사적으로 지켜오던 자리를 넘길 수 있는 강대한 후계자가 나타났으니, 알코르는 당장이라도 작위를 계승하고 쉬고 싶었다.
유심히 지켜본 아렌은 냉정하고 사리가 분명했으며, 결정적으로 초월적인 강함을 지니고 있으니 이보다 더 적법한 후계자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런 알코르의 기대한 찬 눈빛을 마주보며 아렌이 입을 열었다.
“로렌 형의 경과를 보고 결정하고자 합니다. 형이 건강을 찾는다면 백작위는 형이 계승하는 게 사리에 맞으니까요.”
“음!”
아렌의 대답을 들은 알코르가 고민했다.
아렌의 답은 정론.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으면 장자가 가문을 계승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간 로렌에게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었지만, 아렌이 이렇게 말한 이상 로렌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것이고, 알코르는 그 부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로렌에게 나 같은 괴로움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다.”
잠시 고민한 알코르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혈계능력의 공포와 싸우면서 백작위를 유지한 알코르의 정신력은 어떻게 보면 일반인의 그것을 한참 뛰어넘은 것이다.
비록 가정을 돌보지는 못했지만, 거대한 가문을 잡음 없이 이끌어온 것은 역으로 알코르의 대단함을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로렌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는 알코르의 고백에 시종과 기사들은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괜찮을 겁니다.”
“뭐가 말이냐.”
하지만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형이 가진 병의 원인은 아마도 혈계능력의 부작용일 테니까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이야기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확실한 거냐?”
“맞을 겁니다. 제가 본 바로는 그래요.”
혈계능력이 발현된 그라인드의 모두가 미치거나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자신을 찾아온 자아와 싸워서 굴복시키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에 성공한 사람은 그라인드는 물론 대륙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치료를 하면서 보조하면 좋아질 겁니다.”
“…과분한 자식들을 두었군.”
아렌이 말한 내용이 맞는다면 로렌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라인드는 걸출한 인재를 얻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니, 알코르는 쓰게 웃으며 자조했다.
“……그래. 그러면 로렌의 경과를 보고서 이야기하는 걸로 하겠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백작위가 걸렸음에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아렌의 그릇에 새삼 감탄하는 마음이 든 알코르가 화제를 돌렸다.
“에드워드에게 지시한 내용을 들었다.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문제가 생길 거다.”
알코르의 말에 아렌이 자세를 바로 했다.
“북부의 방어선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누구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순간 방어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몬스터와 싸우는 북부는 인간의 땅을 지키는 최전선이다.
지금의 방어선이 짜이기 전까지 끊임없는 인력과 물자를 갈아 넣었고, 겨우겨우 안정적인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게하르가 말라죽어 버린다면 그 방어선에 구멍이 날 것이고, 그것은 대륙이 몬스터의 침략에 직면한다는 이야기였으니, 알코르의 염려는 당연한 것이다.
“저희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렌은 냉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알코르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아렌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조금 심한 것은 인정하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일입니다. 보복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외려 병력을 몰아서 북부로 진격하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은 겁니다.”
아렌의 말에 시종들과 기사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과 가문의 격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원한의 불씨를 남겨두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고 일을 벌였으면 끝장을 보는 것이 귀족들의 방식이다.
아렌의 말대로 이 정도 조치라면 관대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렌의 시선이 시종들과 기사들에게 향했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 시종들과 기사들이 흠칫 떨며 몸에 힘을 줬지만, 심유한 아렌의 눈빛은 떨어질 줄 몰랐고, 모두가 긴장으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믿을 만한 이들이다.”
“알겠습니다.”
알코르의 한 마디에 그제야 아렌이 시선을 돌렸지만, 공포는 그대로 남았다.
시선을 돌려 알코르의 눈을 직시하며 아렌이 입을 열었다.
“황제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음?”
뜬금없는 이야기에 알코르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제가 들은 황제와 공안의 능력을 생각했을 때, 게하르와 저희 간의 일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도 없었지요. 심지어 숙조부의 부고까지 날아왔습니다.”
“흠.”
아렌의 말에 알코르가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20년 이상을 백작가를 이끌어오던 알코르의 경륜이 지혜와 어우러져 경우의 수를 계산했고, 이내 결과를 도출해 냈다.
“……확실히 그렇군. 하나하나는 그렇다 쳐도 이어놓고 보니 이상하구나.”
“아마도 황제는 제가 제도로 향하기를 원했겠지요. 제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게하르와 분쟁이 일어났었다면 오늘처럼 곱게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알코르의 얼굴에 분노가 솟아올랐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면 그 누구라도 황제가 제국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데, 그 장난의 대상이 자신의 가문이었다는 정황이 드러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분풀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어찌되었든 황제는 제국의 안위를 수호하는 존재이니 북부에 문제가 생긴다면 좌시할 수 없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황제가 추진하는 일에 타격이 가겠지요.”
그 와중에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길 것이 뻔했지만 아렌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아렌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라인드라는 이름의 백성들뿐이다.
“황제는 당분간 저희 쪽에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을 터이니, 그 사이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렌의 말에 알코르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황제는 결코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할 거다.”
어쩌면 그라인드 백작으로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에 알코르의 온몸에 의욕이 솟아올랐다.
* * *
“왔냐.”
“응.”
여전히 병약하기 그지없는 인상이었지만, 그래도 살이 조금 붙은 로렌이 웃으며 아렌을 반겼다.
이제는 자력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는 되는 모양이어서 로렌은 침대에 기대 기분 좋게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힘없는 표정과 초연한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렌은 상관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죽음에서도 사람을 끌어올 자신이 있는 아렌에게 저런 모습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조금 소란스럽던데.”
“별일 아니었어.”
연병장과 저택간의 거리가 있다지만 전투의 소음은 그렇게 쉽게 묻힐 만한 일이 아니었고, 미리 당부를 해 두었음에도 저택의 시종들은 불안감과 공포에 사로잡혔었다.
로렌의 곁을 지키던 시녀들 역시 아렌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거기에 빛보다 빠르다는 하인들 간의 소문은 이미 그녀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아렌을 앞에 두고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웃으며 대답한 로렌의 모습을 본 아렌이 손짓했고, 시녀들이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는 두 형제 밖에 남지 않은 방안에서 아렌이 입을 열었다.
“상태는 어때?”
“좋아. 라고하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최근 중에는 가장 좋아.”
빈말로라도 전혀 건강해 보이지 않는 로렌이지만, 최소한 정신은 차리고 앉아 있을 수 있었으니 상태가 좋아진 것이 맞았다.
하지만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것 알잖아.”
아렌의 말에 허허롭게 웃고 있던 로렌의 움직임이 멈췄다.
“계속 싸워 왔던 그것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로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