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건강은 걱정 안 해도 되겠군.”
문 밖에서 잉그리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알코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걷는 그 모습은 아렌과 판박이였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알코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괜찮지 않지.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렌과 엘렌의 어미가 아니냐.”
가문에서 포섭한 가신들은 등을 돌렸고, 친정은 곧 망할 예정이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이 상황에서 재기할 수 있겠냐 싶지만, 귀족들 사이의 정치라는 것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잉그리드가 가진 상징성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 사소한 계기와 함께 고약하게 일이 흘러간다면 잉그리드가 다시 가문의 전면으로 나오는 일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감시를 철저히 해라. 매일 동향을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알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손을 써야겠지.”
문득 느껴지는 스산한 살기에 집사가 흠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정돈했다.
권력은 형제자매와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거기에 가족에 대한 정이 없기로 소문난 알코르이니 잉그리드를 처리하는 것쯤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해낼 것이라는 데 집사는 내기도 걸 수 있었다.
그렇게 이동한 둘이 걸음을 멈춘 곳은 로렌의 방 앞.
“백작님.”
굳건히 방 앞을 지키는 기사 둘이 묵직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끼이.
고풍스런 문양만큼이나 큼직한 문이 열리고 커다란 침대에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로렌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희미하게 미소 짓던 로렌의 표정이 경직되는가 싶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코르도 마찬가지여서 평소보다 굳어진 표정은 심각한 일이 있나 싶을 정도.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이라고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들이었지만, 이 두 부자의 관계를 알고 있는 집사는 두 사람이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은 서글픈 눈동자가 된 집사를 뒤로하고, 로렌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알코르가 손을 들었다.
“괜찮다. 그대로 있어라.”
“……하지만.”
“그대로 있어라.”
고압적인 음성이었지만, 방안의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때로 노력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가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알코르가 최대한의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낀 것이고, 로렌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많이 좋아졌구나.”
편안하게 누운 로렌을 세심한 눈빛으로 관찰하는 것도 잠시, 알코르의 경직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렌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래.”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보던 부자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자기라도 말을 꺼내야 할까 집사가 고민하던 그때, 알코르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몸이 조금 더 좋아지면 집무실로 나오거라.”
“……집무실이요?”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로렌의 표정이 굳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렇겠지만 작위를 가진 자의 집무실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오로지 가주를 위한 공간이고, 그곳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후계자 수업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가문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로렌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로렌의 표정을 본 알코르가 내심을 짐작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대로다. 후계자 수업을 할 거다.”
“…아렌은요?”
로렌뿐만이 아니라 백작가의 그 누구라도 작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렌인 것을 알고 있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로렌에게 후계자 수업을 시킨다고 공표했으니 알코르가 새로운 분란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아렌과는 이야기가 끝났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알코르가 말을 이어나갔다.
“큰 결격사유가 없다면 다음 그라인드 백작은 너다 로렌.”
“……감당하기 힘듭니다.”
알코르의 말에 경악한 것도 잠시, 로렌이 얼굴을 굳히며 사양했다.
그것은 로렌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역대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후계자감이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장남이라고 작위를 이어받는 다는 것은 가문을 위해서도 썩 좋지 않은 일이고, 훗날 분란의 소지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 로렌의 결정은 당연한 것이다.
알코르도 이런 점을 들어서 아렌과 이야기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 외로 아렌은 단호했다.
“아렌이 원하지 않았다.”
“……아렌이 말입니까.”
로렌의 얼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순리를 어겨서 좋을 것이 없다고 하더구나.”
온갖 감정이 깃들어 있는 로렌의 얼굴을 보며 알코르는 내심 탄식했다.
“네 완치는 아렌이 장담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 거기에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너 역시 무시 못 할 능력을 가지게 되겠지.”
내심과는 다르게 냉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가는 알코르의 모습을 보면서 로렌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느리지만 착실하게 몸이 좋아지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자아 역시 제압당하고 있었다.
로렌이 직접 이야기한 적이 없기에 어떠한 능력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라인드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최소 마스터급은 분명할 터이니 세상 그 누구도 로렌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국의 현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로렌이 어리둥절했지만 알코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조만간 큰 혼란이 제국과 대륙을 덮칠 거라는 것에 아렌과 의견을 같이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렌 정도의 전력을 영지에 묶어두는 것도 썩 좋은 대처는 아니지.”
이번 게하르의 일덕분에 경각심을 느낀 알코르는 주변 영지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신경을 쓰니 하나같이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영지의 후계가 바뀌는 일도 벌어졌으니 아직까지 이러한 기류를 몰랐을 자신이 신기할 정도로 여러 가지 일들이 제국의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와 귀족들이 타협해 그럭저럭 괜찮게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한 제국이었지만, 그 내부는 이미 진흙탕이나 마찬가지.
관점을 돌리니 사방이 심상치 않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알코르의 설명을 들은 로렌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가문을 지키고 아렌이 가문의 적을 요격한다. 이것이 아렌과 내가 낸 결론이다.”
알코르와 아렌이 예측한 혼란이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대비하는 것과 안하는 것은 천지차이가 아닌가.
두 부자는 그라인드의 미래를 위해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다렌의 움직임도 관련이 있군요.”
“그래. 그라인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지.”
로렌의 말에 알코르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몇 마디의 말로 가문의 행사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것이니 총명함이 증명된 것이고, 든든함을 느낀 것이다.
첫째는 사려가 깊고 총명하고,
둘째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아직 어리지만 싹수가 좋았고,
막내는 귀엽기 그지없으니 알코르의 자식 농사는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알코르는 뿌듯하면서도 슬펐다.
자신이 방치한 사이에 훌륭하게 자라 준 자식들이 고마웠고, 그런 자식들을 돌보지 못한 지난날의 자신에 대한 혐오가 솟아 오른 것이다.
알코르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명확했고, 알코르는 그 일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잘할 거라고 믿겠다.”
굳은 결심이 서린 로렌의 얼굴을 보면서 알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로렌의 방을 나선 알코르의 물음에 집사가 대답했다.
“답신이 왔습니다. 붉은 가지 용병단 전체가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푸른 늑대들은?”
“조율중입니다. 긍정적인 답변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알코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을 표시했다.
정복전쟁으로 일어난 제국인 만큼, 이름난 용병단이 수두룩했고, 몇몇의 용병단은 어지간한 영지와도 자웅을 겨루어 볼 만큼 강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붉은 가지 용병단과 푸른 늑대 용병단은 특별했다.
마스터가 단장으로 있는 용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용병단보다 규모가 큰 용병단은 얼마든지 존재했지만, 실질적인 전투능력만을 따진다면 제국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곳이 붉은 가지와 푸른 늑대 용병단이다.
주로 국경지역의 국지전에 투입되는 이 둘의 몸값은 당연히 비쌌다.
마스터라 하면 어지간한 고위 귀족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몸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중앙에서 보조하는 형태로 고용하는 것이 이 두 용병단인데, 비싼 만큼 확실한 값어치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런 두 용병단을 동시에 고용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니 외부의 사람들이 들었다는 미쳤다고 할 것이 뻔했다.
“값어치는 하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황금의 그라인드.
막말로 가진 건 돈밖에 없는 곳이고 알코르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최대한 빠르게 다렌에게로 보내라. 그라인드의 혈족이 더 이상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예!”
굳은 의지가 섞인 집사의 대답을 들으며 알코르는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웅.
다른 사람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겠지만, 이 순간 알코르의 귀와 감각에는 심장에서 힘차게 돌고 있는 하나의 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청명한 기운을 풍기는 원에서 뻗어나간 마나는 알코르의 머리에 닿았고, 촘촘하게 분화된 마나의 줄기가 빈틈없이 알코르의 머리를 감싸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아렌이 다렌에게 전수한 호심공을 알코르도 익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
그런 알코르의 모습을 본 집사가 품에서 푸른빛이 도는 음료를 꺼냈고, 알코르는 주저 없이 목으로 넘겼다.
식도를 거쳐 넘어간 음료는 위장으로 향하기도 전에 분해되어 스며들었고, 그 순간 알코르의 심장에서 돌아가던 원에 힘이 실렸다.
온갖 희귀한 영약들을 갈아 넣은 마나증진제가 미약하게나마 알코르의 전체 그릇을 키웠다.
마법사가 본다면 눈이 뒤집혀서 금을 마신다고까지 이야기할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라인드 백작에게 이 정도의 비효율쯤은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으니까.
그 외에도 마나의 원활한 흐름을 돕는 각종 아티펙트를 온몸에 두르고 있었으니 지금의 알코르는 걸어 다니는 성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효과는 어떠십니까?”
“……좋아. 내 평생 이렇게 좋은 적이 없을 정도로.”
“다행이십니다.”
모처럼 환하게 웃는 알코르의 모습에 집사도 같이 웃었다.
평생을 능력의 공포에 살아온 알코르다.
언제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스트레스는 일반적으로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고, 알코르 역시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공포를 원천적으로 방지해 주는 기술을 몸 안에 두르고 있으니, 알코르는 평생에 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불면으로 괴로워하던 시간도 없어져, 항상 피로해 보였던 알코르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좋은 만큼 확실히 해야겠지.”
알코르의 중얼거림에 집사는 답하지 않았지만 미소 지었다.
애초에 백작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끝없는 노력과 근성으로 수십 년간 무리 없이 가문을 이끌어 성세를 이루어낸 남자.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그만큼 알코르의 능력은 탁월한 면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 알코르가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능력을 전력으로 투사하려 하고 있었다.
그라인드의 적에게는 악몽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