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7
017화
아렌과 일행이 공동에 도착하고 눈에 들어온 광경은 한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접전이었다.
허공에 떠 있는 몇 개의 광구가 공동 안을 훤히 비추고 있어서 시야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상황에 비친 치열한 전투의 장면은 보는 이의 심금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쿠어어억!”
“젠장! 죽어!”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기합과 비명.
전장에서 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소리가 그곳에 있었고 한쪽 구석에 몰린 채 피투성이로 무기를 휘두르는 기사들의 모습이 처절했다.
“상황이 급박해 보입니다. 도련님.”
벡스터가 아렌을 바라보며 말하던 그 순간.
“쿠어어억!”
포위망의 외곽에 있던 오크가 아렌의 일행을 발견했고, 눈이 돌아가 있던 오크가 괴성과 함께 벡스터에게 달려들었다.
사람 몸통만 한 도끼를 든 근육질의 오크.
순식간에 가까워진 오크가 게거품을 물며 도끼를 머리위로 들어 올렸고, 잠시 시선을 돌린 벡스터가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지만 이미 도끼는 벡스터의 머리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모든 것이 느려 보인다고 했던가.
시시각각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오는 도끼를 인지하며 최후를 직감하던 그때.
콰직!
끔찍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벡스터는 볼 수 있었다.
흉악하게 치솟은 오크의 대흉근이 기묘하게 비틀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잡아서 돌리는 것처럼 회전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근육의 비틀림이었지만 이어서 그 근육을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 회전은 오크의 온몸으로 퍼졌고.
“쿠아악!”
누군가 오크의 가슴에 꼬챙이를 박아 넣고 오크를 돌리는 것처럼 회전이 가속하더니 이내 피부와 근육을 갈기갈기 찢었다.
쿵!
어느덧 본연의 형체를 완전히 잃어버린 동그란 고깃덩어리가 벡스터의 앞에 떨어져 내렸고, 그 옆에서 뒹구는 뒤틀린 도끼 한 자루가 현실임을 인지시키고 있었다.
“우웁!”
베로아의 신음 소리가 벡스터의 비위를 자극했지만 겨우 참아내고 시선을 아렌에게 돌렸다.
“도련님. 감사··· 괜찮으십니까?”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손을 응시하고 있는 아렌의 모습에 벡스터가 걱정하듯 물었지만 아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아렌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벡스터의 위기에 본능적으로 손을 썼고 그 결과는 아렌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뭔가 위화감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대부분 그런 것이 있었나 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아렌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의지 하에 완벽하게 통제하는 아렌에게 있어서 위화감이라는 것은 곧 파탄을 의미하는 것.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이 느낌은 그래. 마법사라는 놈들이 마법을 쓰는 것을 본 느낌과 비슷하군.’
곰곰이 생각하던 아렌은 결국 비슷한 감각을 느꼈던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쓸 때마다 느껴졌던 마나를 조형하는 감각.
마법이 발현될 때 세상이 반응하는 감각이었다.
아렌의 미간이 꿈틀거리나 싶더니 부룡기공이 호응해서 내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시 아렌의 몸을 순환하는 내공이었지만 이번에는 꼼꼼하게 전신으로 퍼트리며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채기 위해 내면을 살폈다.
그 순간 잊힌 기억이 되살아났다.
현경의 벽을 넘어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에 도전하던 그때.
결국 생사경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그때 받았던 느낌이 갑자기 아렌의 마음을 울렸고, 강한 영감과 함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렌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 * *
“으아아악!”
“젠장! 거기서 멍하니 있지만 말고 도와줘!”
일행을 발견한 기사들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아렌은 그런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가만히 자신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고, 벡스터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저기. 도련님.”
신색을 바로 한 베로아가 창백한 얼굴로 아렌을 부르던 그때.
“흡.”
“헛.”
아렌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고서 베로아와 벡스터가 뭔가 잘 못 본건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지만 어느새 아렌의 미소는 사라지고 예의 무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가라.”
“예. 옛! 알겠습니다. 도련님!”
오크들을 향해 돌격하는 벡스터를 보면서 아렌은 방금 전 깨달은 위화감의 정체를 정리했다.
시험이라고 하면서 허공에서 떨어트린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빠뜨림으로 인간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시각을 빼앗고 그것을 기반으로 실제 감각을 교란시켜 지금의 세계에 집어넣은 것이다.
중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아렌도 이런 게 있다더라 수준으로 이야기만 들었던 이적이 한낱 교육기관에서 펼쳐졌으니 새삼 아직 자신은 모르는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고르고 고른 인재들을 시험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넣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멋지게 속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렌의 시선이 공터의 구석구석을 향했다.
한번 인식하니 곳곳에서 어색한 점이 보였다.
창백한 안색의 베로아를 뒤에 두고 간간이 달려드는 오크들을 분쇄하며 아렌은 공간 구석구석을 눈으로 보며 확인해 나갔다.
벡스터가 외곽에서부터 오크들을 밀어붙이며 구석에 몰려있는 일행들도 조금은 쉴 틈이 만들어지나 싶었지만, 그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렀다.
“으아악!”
“제라드!”
인간의 상체만한 오크의 도끼가 젊은 기사의 쇄골을 사선으로 가르며 몸통으로 파고들었고, 분노한 부란의 검에 오크의 숨통도 끊어졌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목숨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런데 제라드라는 이름의 기사의 시체가 천천히 분해되는가 싶더니 작은 입자로 변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제. 제라드!”
“뭐죠 이건?”
“큭! 집중하십쇼!”
오크의 시체가 남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사라지는 제라드의 시체에 일행은 의구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연이어 몰아쳐 오는 오크들의 공격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그 모습을 외곽에서 지켜보던 아렌은 자신의 생각이 맞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던전은 환영진과 같은 이면의 세계.
이곳의 적은 실제 하는 것이 아니고, 이곳에서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이 아니다.
가설을 확인했고 확신을 얻었으니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마나가 있는 법.
아렌의 생각에 호응한 마나가 기지개를 피기 시작했다.
* * *
“아아아아!”
이지적인 빛이 인상적이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마법의 언어를 토해내야만 하는 입에서는 비명이 넘쳐흘렀다.
오크들과의 사투는 처절했다.
수십 마리로 추정했던 오크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고 광전사의 주술과 도미닉을 좀먹는 저주는 일행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맨 먼저 제라드라는 기사가 죽었고, 이어서 도르낙가의 기사가 그 뒤를 따랐으며, 부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먼지처럼 사라져 갔다.
“크라악!”
동귀어진의 각오로 펼친 한 수가 레티시아와 도미닉에게 잠깐의 여유를 허락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
몰려오는 오크를 보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 도미닉이 검을 잡으며 달려 나갔다.
“그러면 먼저 갑니다. 아가씨.”
이어서 레티시아의 눈에 비친 것은 오크들에게 둘러싸인 도미닉의 모습.
그리고 오크들의 시선이 레티시아에게로 향했을 때 도미닉이 있던 자리에는 그저 흩어지는 빛무리밖에 없었다.
“덤벼!”
마나는 바닥났고, 전투의 피로에 온몸은 후들거리지만 레티시아는 눈물을 훔치고 악귀처럼 외쳤다.
한 번의 전투에 온갖 감정을 체험한 레티시아는 이제 악밖에 남지 않은 상황.
최후의 최후까지 오크들을 물어뜯으리라 다짐을 굳히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이런!”
오크들을 뚫고 들어오던 기사가 아쉬움에 찬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지만 레티시아의 생각은 눈앞의 오크에게 어떻게 하면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라하!”
오크의 전투 함성도 계속 들으니 익숙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주 달려 나가려던 그 순간.
웅!
공간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공동안의 모든 것이 행동을 멈췄다.
* * *
대종사의 경지에 도달한 이후로 아렌은 전력이라는 것을 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절정고수만 되어도 대결 한 번에 동네 하나가 날아가네 마네 하는 판국에 아렌 정도의 고수가 전력으로 손을 쓰게 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아렌은 반강제로 전력을 봉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이유로 아렌은 이 세계에서도 역시 전력을 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전력은커녕 가진 힘의 일부분도 풀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빠르게 과거의 힘을 되찾아 가는 아렌이 전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재앙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힘을 낼 만한 일도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그렇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공간은 다르다.
무언가 부서지고 누군가 죽어도 어차피 환상이니 얼마나 편리한가.
그렇기에 아렌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힘을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 * *
공간이 눌렸다.
마나의 파동이 공간을 누르기 시작했고 이내 그것은 실재하는 힘이 되더니 공간 안의 모든 것을 아래로 내려 앉혔다.
오크도, 인간도 예외 없이 근원을 건드리는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그런 와중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백금발의 소년.
무표정한 소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 있었고,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웠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여기저기로 시선을 보내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땅바닥으로 박았다.
“꾸이이익!”
처절한 비명과 함께 아렌과 시선을 마주쳤던 오크 주술사가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가 싶더니 이내 바위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콰직!
두개골이 함몰되면서 피와 뇌수가 흘러넘치며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와지직!
아렌이 가볍게 한 발자국 떼는가 싶더니 네다섯 마리의 오크가 마치 거인에게 밟힌 것처럼 다져졌고.
꾸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오크의 몸이 뒤틀리더니 전신의 뼈가 피부 밖으로 뚫고 나왔다.
뻥!
작은 손이 슬쩍 움직이는 순간 오크의 상체와 하체의 일부가 마치 도려낸 듯이 사라져 버렸으며.
촤라라락!
손가락이 슬쩍 가리킨 곳에 있던 오크의 이마에 구멍이 나는가 싶더니 오크의 뒤에 있는 벽에 뇌수와 피가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 그림이 나타났다.
갈기갈기 찢겨지고, 짓이겨지고, 분쇄되는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살육의 모습이 공동 안에 나타났고 어느새 공동의 바닥에는 오크들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공동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소수의 인간들과 오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살덩이들뿐.
그리고 그 모든 살육의 중심에서.
아렌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