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37
037화
묵직한 기세만큼이나 단단해 보이는 사내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매서운 눈빛으로 일행을 쏘아보던 사내의 시선이 아렌에게로 향하며 살벌한 기세를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아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눈가를 꿈틀거린 사내가 큰 걸음으로 아렌의 앞을 가로막아서니 그제야 아렌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정 없는 표정과 무저갱 같은 눈빛에 움찔거리기도 잠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는 사내의 모습에 레티시아가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드 서든이에요. 누구시죠?”
냉랭한 말투와 여차하면 손을 쓰겠다는 듯이 은밀히 모여들고 있는 마나, 전투 준비를 마친 레티시아의 말과 기세에 사내가 한 발 물러섰다.
“······ 로번 드 루앙이다.”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걸쳐져 있는 서코트를 확인한 레티시아가 눈을 빛냈다.
“2학년이시군요.”
로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아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서코트와 로브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학년에 따라서 무늬가 조금씩 달랐고, 레티시아는 그 부분을 알아본 것이다.
“네가 그라인드로군.”
“아렌 드 그라인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리자, 로번의 입가가 꿈틀거리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이 신세를 졌다고 들었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아렌을 대신해서 네이던이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 루앙 남작가의 자제가 있었지.”
비틀린 미소와 함께 로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불민한 동생이 그 자리에 있었고, 크게 당했지.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형도 못 알아보더라고.”
킥킥거리는 루앙의 태도에 트리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후계자 자리 때문에 경쟁 중이었나 보군.’
형제가 몇인지 모르겠지만, 나란히 아카데미에 들어올 정도의 인재들인 만큼 루앙 남작가에서도 결정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트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렌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러 왔나?”
빈정거리며 말하는 트리안의 모습에 화라도 낼까 싶었지만, 로번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래도 내 혈육인데 형 된 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미소를 지은 로번이 엄숙한 얼굴로 아렌을 바라보았다.
“로번 드 루앙. 아렌 드 그라인드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갑작스런 선언에 일행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빛을 띄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렌의 악명은 이미 아카데미 내부에 자자한 상황이다.
거기에 명분마저도 아렌이 가지고 있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로번의 결투신청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태도를 보니까 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는 형은 절대 아닌 거 같은데 ······. 노리는 게 있나?’
음습한 계략과는 거리가 먼 트리안이 이렇게 생각할 정도이니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로번의 행동이었지만, 아렌은 다르게 생각했다.
“대견하군.”
“응?”
갑작스런 아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혈육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것인가.”
“······ 아니. 그게.”
뭔가 착각한 것처럼 보이는 아렌에게 레티시아가 말을 걸었지만, 아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정도의 각오라면 나도 호응해 줘야겠지.”
음모와 귀계가 판치는 무림에서도 한 줌 명예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있었고, 유성처럼 사라져 갔지만 그렇기에 더욱 빛이 났었다.
아렌의 몸에서 장엄한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엄숙한 얼굴을 한 아렌이 로번을 쳐다보았다.
“최선을 다해주지. 죽어도 여한은 없을 거라 믿겠다.”
이러한 기개를 가진 자를 상대로 힘을 아낀다는 것은 외려 모욕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 아렌이 최고의 일격을 펼치려는 그 순간.
“자. 잠깐! 무슨 그런 흉악한 소리를 하는 거냐!”
아렌의 기세에 화들짝 놀란 로번이 튕기듯이 뒤로 물러나며 양 손을 내저었다.
“······ 응?”
아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고, 로번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결투장에서 하자는 말이다! 삼일 후에!”
“······ 결투장이 뭐지?”
어쩐지 맥이 빠진 것 같은 아렌의 답변에 레티시아가 설명했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 간에 분쟁이 생길 경우 사용하는 장소에요. 심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공평한 상태에서 대결을 진행하죠.”
그렇게 말하는 레티시아가 로번을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트리안과 네이던도 다르지 않았다.
결투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콜레트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뭔가 계략이 있는 것을 인지한 것인지 로번을 가늘게 흘겨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번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모두가 지켜보는 장소에서 반박의 여지없이 결판을 내자는 거다!”
이미 기세를 갈무리하고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아렌이 입을 열었다.
“구경거리가 되라는 말이군.”
싸늘한 기세가 느껴지는 한 마디에 모두의 몸이 움찔거렸다.
“가치가 없구나. 싫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크게 실망한 아렌이 발걸음을 돌렸고, 로번을 한 차례 쏘아본 일행이 아렌의 뒤를 따라서 이동하려는 그 때, 로번이 다급한 기색으로 외쳤다.
“별을 걸겠다!”
“별을 말인가요?”
“진짜로?”
“······ 미쳤군.”
경악을 터트리는 레티시아, 트리안, 네이던의 반응에 아렌의 발걸음이 멈췄다.
* * *
“도련님!”
“강녕하셨습니까.”
그렁그렁한 눈물을 달고서 잰 걸음으로 다가오는 베로아와 절도 있게 인사하는 벡스터의 모습에 아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 세탁 상태가 좋지 않군요. 아카데미 사용인들의 수준이 의심됩니다.”
이리저리 아렌의 모습을 세심하게 살피던 베로아가 옷의 세탁 상태를 트집 잡는 사이, 벡스터가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했다.
아렌이 자리에 앉자 공손한 자세로 베로아와 벡스터가 맞은편에 서니, 충직한 하인들의 모습에 아렌은 안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냐.”
한 동안 수선을 떨던 베로아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벡스터가 따라준 차를 마시며 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 수학하는 학생들에게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관습을 모르지 않는 베로아이지만 이런 경우라면 찾아오는 것이 맞았다.
“재미있는 소식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렌의 대답에 베로아와 벡스터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 어리둥절한 모양입니다. 각 가문에서 날아온 청구서의 금액에 한번 뒤집어졌다고 하고, 원로들은 뜻하지 않게 가문의 이름이 올라갔다고 좋아한다고도 합니다.”
명예에 죽고 사는 것이 귀족.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아찔할 정도였지만, 그라인드 백작가의 위상이 올라간 모양이 되었으니, 꼬장꼬장한 원로들은 뿌듯한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렌에게 있어서 그라인드 백작가는 언젠가는 찾아가야 할 곳이지만 지금 당장 신경 쓸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 2부인 측 인사들이 도련님을 맹비난하고 있다고 합니다. 적법한 후계자가 가문의 재산을 사용하는 것인데 감히 ······!”
생각만화도 울화가 치솟아 오르는지 베로아가 이를 갈았고, 벡스터도 조금은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청구 금액이 꽤 큰 모양입니다. 도련님의 것이 될 재산이 사라지는 것이니 시녀장이 걱정이 큽니다.”
벡스터의 말에 베로아가 눈을 흘겼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충직한 두 하인의 모습에 아렌의 입가가 꿈틀거리더니 한 쪽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보기 드문 주인의 미소에 베로아와 벡스터가 놀란 사이 아렌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
미소가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목소리의 아렌의 얼굴을 주시하며 베로아와 벡스터는 경청했다.
“재물은 중요하지 않다.”
둘의 눈을 주시하며 아렌이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지한 기운이 깃들은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힘은 인력과 같아서 일정 이상을 넘어서면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아렌 정도의 힘이라면 그 실체가 드러난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끌어당길 터이고, 그 중에 가장 큰 비중은 재물일 것이다.
“집을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몸조심하라는 충고를 하려던 베로아가 생각을 바꾸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의 주인이 다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 * *
아카데미의 부지는 넓다.
최고의 인재들을 교육하기 위한 장소이니만큼 시설 하나하나가 최고급이고, 마탑과 신전, 아카데미 경비들과 상주 기사들을 위한 숙소까지 있으니 당연히 넓을 수밖에 없었다.
투자를 아끼지 않는 아카데미의 방침 상,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시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그중에는 결투장도 있었다.
하나하나가 예비 초인이나 다름없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제대로 맞붙는다면 주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마련이고, 그러한 대비와 함께 불의의 사고를 막기 위해 조성된 건물이 결투장이다.
콜로세움의 형태로 세워진 이 거대한 결투장은 강력한 마법방어진과 함께 상황에 따른 환경을 연출할 수 있는 장치까지 되어있는 제국 마도공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 마법 방어진은 물론이고, 대상을 특정해서 디버프를 가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더군.”
네이던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발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아렌과 로번의 결투 소식은 아카데미를 강타했고, 그 결과 오늘 결투장에는 아카데미에 있는 대부분의 인원들이 모여들었다.
지금껏 수많은 특별한 학생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렌만큼의 충격을 준 학생은 없었다.
특별한 것은 시기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고, 원치 않았지만 아렌은 그 시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어느새 대다수의 학생들은 아렌이 꺾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
네이던의 시선이 슬쩍 대기실 저편에 있는 로번의 일행에게로 향했다.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로번과 웃으며 격려하는 그의 일행들의 모습도 마음에 안 들지만 더욱 마음에 안 드는 건 로번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타린 교수의 모습이다.
“······ 대놓고 편들겠다는 거군요.”
“마음에 안 들어.”
레티시아의 중얼거림에 트리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결투장에서의 결투에는 심판이 배정된다.
누구도 불평할 수 없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라지만 하필 오늘의 심판을 맡은 것은 타린 교수.
그런 심판이 한쪽과 보란 듯이 친분을 과시하고 있으니 오늘의 대결이 편파적일 거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이런 일이 용납될 수 있나요?”
분한 듯이 중얼거리는 콜레트의 목소리에 모두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그때, 아렌이 평소와도 같은 기색으로 말했다.
“괜찮다.”
너무도 담담한 기색으로 말하는 아렌에게 일행의 시선이 몰렸다.
“힘만큼 정직한 것도 없지.”
서늘한 눈빛으로 아렌을 쳐다보고 몸을 돌리는 타린을 바라보며 아렌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