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74
074화
묵직한 목소리만큼이나 단단해 보이는 사내였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교복을 걸치고 있는 모습에 아렌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수긍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10대인 경우가 많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뒤늦게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사내의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시선이 부딪치고,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이대로는 죽겠군.”
그러던 와중 사내의 입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세 명의 습격자들에게 향했고, 아렌이 나직이 혀를 찼다.
“데려가라.”
“······ 실례하겠습니다.”
아렌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도로 구석구석에서 경비들이 나타나더니 빠르게 응급처치를 시행하고는 이내 세 명의 학생을 후송해갔다.
빠르고 능숙한 일처리에 사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솜씨가 좋군. 하긴 자네를 전담하는 인원들이라면 당연히 그러겠지.”
아렌이 일단 손을 쓰면 최소가 중상이고, 목숨이 위급한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전담 경비들이 구성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해서 이제는 어지간한 의사가 부럽지 않을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비꼬는 것인지 칭찬하는 것인지 애매한 말투에 아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이름은 말론 드 합스다.”
아렌을 자극할 생각은 없는 것인지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렌 드 그라인드.”
“반갑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사내의 모습을 보면서 아렌이 물었다.
“볼 일이 뭐지?”
“자네는 정말 귀족답지 않군.”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이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아렌의 태도에 말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자네를 포섭하려고 왔다.”
“관심 없다.”
묵직한 어투에 진심이 담겨있었지만, 아렌의 대답은 빨랐다.
별사냥이 시작된 이후 아렌을 습격한 무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렌의 악명과 아직 어린 나이에 주목한 이들은 아렌을 끌어들여 세를 불리거나 이용하려고 했었고, 온갖 미사여구와 때로는 협박까지 동원되었지만, 그들 중에 아렌의 마음을 움직인 이들은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들 중에 두발로 걸어 나간 이도 없었다.
“단호하군.”
“관심이 없으니까.”
심드렁한 아렌의 태도에 말론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음?”
색다른 이야기에 아렌이 반응했다.
지금껏 그를 포섭하려 했던 학생들 대부분이 부와 명예, 권위만을 이야기했었고, 제국 자체를 주제로 삼은 것은 말론이 처음이었던 것이니 아렌은 조금 흥미가 돋았다.
그런 아렌의 반응을 눈치 챈 것인지 말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은 곯았다.”
“흠.”
단언하는 말론의 이야기에 아렌의 눈가가 좁혀졌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황제의 폭정은 끝이 없고, 탐욕은 멈출 줄 모르지. 성인으로 인정받는 즉시 군역을 지어야하는 이 나라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나?”
16세가 되는 평민 남성은 선택을 해야 한다.
병사로 징병되거나 세금을 내거나.
만만한 액수는 아니지만, 조금 여유가 있는 평민이라면 낼 수 있는 액수였고, 입이 많은 집에서는 거꾸로 군역을 반기기도 했으니, 제국이 끊임없이 전쟁이 가능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국가와 비교하자면 확실히 비정상적인 병영국가가 카일룸 제국이니 말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제국은 끝없는 전쟁 끝에 자멸할 것이다. 제국은 바뀌어야만 해!”
강인한 의지가 담긴 말이었고, 말에 힘이 실려 있었으니 설득력이 있었지만, 아렌은 이내 시큰둥해졌다.
“나라를 바꾸기 위해서는 권력의 중추에 도달해서, 황제를 견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차근차근 준비하는 수밖에 없어.”
말론의 말에 열기가 서렸다.
“아카데미에 있는 인재들이야말로 미래의 가능성이 활짝 열려있는 우수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
잠시 말은 멈춘 말론이 기이한 시선을 아렌에게로 던졌다.
“아카데미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자네야말로 제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인재라고 확신하고 있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말론이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제국의 백성들을 구하고,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것이니 자네의 명예도 찬란하게 빛날 것이 분명하겠지.”
기이한 힘과 열기가 실려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손을 잡아주게나! 같이 제국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보세!”
묵직한 기세가 절로 믿음을 일으켰고, 신념이 서린 말투가 마음을 움직이니 말론은 아렌이 자신의 손을 잡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머저리군.”
“뭐?”
그렇기 때문에 말론은 아렌의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져 버렸다.
* * *
아렌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머저리라고 했다. 귀가 안 좋은 건가?”
“······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가슴속 불꽃을 잠재운 말론이 물었다.
“그것까지 말해줄 이유가 있을까?”
피식 웃은 아렌이 몸을 돌리려던 그 때, 말론이 손을 뻗었다.
쾅!
그 순간 아렌의 손이 슬쩍 움직였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말론이 뒤로 밀려져 나갔다.
“흐음?”
아렌의 눈에 이채가 떠오르며 말론을 바라보았다.
비록 뒤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가슴께에 교차된 두 팔이 아렌의 일격을 막아낸 것이다.
“입만 살은 건 아니구나.”
주황색의 오러가 넘실거리는 두 팔 너머로 말론의 굳어진 얼굴이 보였다.
“······ 과격하군.”
“함부로 남의 몸에 손을 대려하면 그런 일을 당하는 거다.”
심드렁한 아렌의 태도에 말론이 얼굴을 구겼다.
말론을 보며 아렌이 피식 웃었다.
“제국을 바꿔야 한다고 했지.”
“그렇다! 황제의 전횡을 막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귀족의 의무다!”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말론이 외쳤지만, 아렌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네가 결정하는 거냐?”
“······ 뭐라고?”
나른한 아렌의 말에 말론이 흠칫거렸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황제나 너나 똑같은 놈들이다. 백성이 너한테 이대로라면 죽겠으니 나라를 뒤집어 엎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나?”
신랄한 아렌의 말에 말론이 일순 말을 잊었다.
“그냥 권력을 가지고 싶다고 말해라.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 그러면 진정성이라도 있을 텐데, 그걸 숨기고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해서 백성을 핑계로 삼았다.”
아렌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자기 자신조차도 속이고 있는데 네가 머저리가 아니면 누가 머저리지?”
수많은 반론이 말론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말론은 입을 열지 못했다.
눈.
자신을 주시하는 아렌의 눈동자가 가슴의 밑바닥까지 훑어보는 느낌에 일순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머저리야.”
자신을 비웃으며 몸을 돌려 사라져가는 아렌을 보면서 말론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 *
느릿하게 걸어가는 아렌의 앞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지만, 아렌은 발걸음을 멈췄다.
한적한 숲의 한복판에서 아렌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한창 바쁠 때 아닌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거 같았지만, 이내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를 보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은 없네.”
허공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인자한 표정의 노인이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총장.”
조금은 굳어진 표정의 부르바스가 아렌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은 인상 깊었네.”
“말론이라는 머저리?”
신랄한 태도에 부르바스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평가 절하될 학생은 아니지. 실제로 능력도 뛰어나고 인망도 있어. 거기에 가문까지 좋으니 교수들도 주목하는 학생이지.”
“그래봤자 머저리는 머저리야.”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는 아렌의 모습에 이제야 제 나이의 소년 같다는 생각이 든 부르바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군.”
엄숙한 표정을 한 부르바스가 자세를 바로 하고 아렌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자네덕분에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수많은 목숨이 살았네.”
허리를 핀 부르바스가 아렌을 응시했다.
“감사하네.”
“받아들이지.”
진중한 표정을 지은 아렌이 답했다.
높은 경지를 이루고 지고한 신분을 가진 부르바스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만큼 아렌도 진심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예의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간 아렌이 입을 열었다.
“감사 인사만 하러 온건 아닌 거 같고 ······. 무슨 일이지?”
사의를 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부르바스의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단순하게 그 이유만으로 움직일 리는 없었다.
“혹시 나보고 덤벼드는 놈들을 봐달라고 하려는 거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하루살이 같은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달려든다면 그 대가를 치워야 하는 법이니 아렌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기대하지도 않아. 그렇게 말할 명분도 없고.”
고소를 지은 부르바스가 말을 이었다.
“별은 얼마나 모았나?”
“이 쓸모없는 거 말인가?”
아렌이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차라라락.
안에 든 별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숲속에 울렸고, 부르바스는 얼굴을 굳혔다.
“······ 꽤 많이 모았군.”
“겁도 없이 덤벼드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지. 나한테는 쓸모가 없지만, 덤벼든 놈들한테는 그렇지 않으니 억지로 모으고 있었다.”
얼핏 짐작해도 스무 개는 넘어 보이는 별들을 하찮게 여기는 아렌의 태도에 부르바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자네. 아카데미에서 마음이 떠났군.”
“당연한 거 아닌가?”
쓸데없는 것을 물어본다는 아렌의 태도에 부르바스가 고소를 지었다.
하긴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부르바스 자신도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인데, 마룡봉인체까지 쫓아낼 정도의 실력을 가진 아렌에게 아카데미의 행사는 너무나도 하찮게 보였을 것이다.
“총학생회라는 것들이 지키고 있는 게 궁금하니 붙어있는 것뿐이다. 덕분에 광대 짓을 하게 생겼어.”
별전쟁을 떠올린 건지 혀를 차는 아렌의 모습에 부르바스는 침을 삼켰다.
이대로라면 아렌은 적당히 지내다가 아카데미를 떠날 것이고, 그것은 부르바스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부탁할게 있네.”
“흐음?”
묵직한 기세가 실린 부르바스의 말에 아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렌이 생각하는 부르바스는 괜찮은 사람이다.
신분과 능력을 떠나서 학생들의 안위를 제일로 생각하는 태도는 충분히 존경할 수 있는 구석이 있었고, 그런 사람을 아렌은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말해 봐라.”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렌은 부르바스의 말을 한번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고맙군.”
부르바스가 감사를 표했다.
나이와 신분을 떠나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아렌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보기는 한다는 점이 기꺼운 것이다.
“이번 별전쟁에서 주변을 잘 살펴주게.”
“음?”
진지한 얼굴로 부르바스가 말을 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직까지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어. 그런 와중에 별전쟁의 개최가 결정됐지. 나라면 이 기회를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일리가 있군.”
아렌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범인을 잡는 것까지 부탁하지는 않아. 부탁해서도 안 되지. 그건 내 의무니까. 하지만 말일세.”
부르바스의 얼굴에 신념이 서렸다.
“학생의 안위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더 이상 희생당하는 학생을 보고 싶지는 않네. 그러니.”
간절한 눈빛으로 부르바스가 아렌을 직시했다.
“별전쟁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지켜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