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22
22. 다시 돌아가는 길.
1.
이름을 들어서 일까?
혈안으로만 번질대던 혈발귀의 눈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순간, 현산을 보는 눈은 핏물을 뿜어내는 것처럼 붉어졌고 두 손 역시 그랬다.
그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나왔다.
“크아아아!”
흉포한 괴성과 같이 닥쳐오는 지존혈수를 시퍼런 눈으로 응시하며 현산은 흑천을 던졌다.
휘릭 날아간 칼은 선실 벽이 원래 자리인 듯 박혔다.
병기를 손에서 버린 행위, 그걸 본 조선 사내와 일행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손으로 해 낸다.’
결심을 굳힌 현산은 가슴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지존혈수를 향해 마주 손을 내밀었다. 지금 이순간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이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투지와 전의와 기백으로 철사장을 냈다.
‘한다! 할 수 있다! 난 해 낸다!’
영육에 울려 퍼지는 그 의지로서 현산은 지존혈수를 받아쳤다.
펑 하는 소리 이 전에 온몸을 흔들며 침투하는 무서운 기운은 형용하기 힘들다.
벽암자의 죽엽수 내경을 받아냈을 때와는 또 다르다.
하지만 같다.
대취한 취객처럼 휘청거리며 현산은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 발이 딛는 갑판이 쪼개지며 발자국이 난다.
구멍이 나 발이 빠지기 전에 물러나는 빠름, 그 움직임이 멈췄다.
현산은 석상처럼 섰고 혈발귀는 바라봤다.
부르르, 오한을 털어내듯 현산의 몸이 떨림을 보였다.
어깨부터 시작한 그 경련은 발끝까지 퍼졌고, 현산의 발 주변 갑판은 쩍쩍 갈라졌다.
그런 현산의 모습과 변화를 왜 그런지 혈발귀가 멈춰 선채 바라보고 있었다.
“침투한 내경을 흩어내고 있구나!”
장운이 긴장과 경탄을 뱉어냈다. 현산의 모습을 보고 어떠한 상태인지 알아낸 터, 태웅호와 왕정과 황병기는 안도와 감탄으로 눈가를 떨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곁에 선 조선 사내는 아주 작게 중얼거림을 흘렸다.
“혈발귀가 이성을 붙잡았어······”
그렇다는 걸 안 장운은 조선 사내를 힐긋 돌아봤다가 다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구나, 현산 저 친구와의 일장 접전으로, 그 충격 역시 혈발귀에게 미쳤어.’
그래서다.
혈발귀가 현산을 쫓아가 공격하지 않고 멈춰 서 있는 것은, 섬뜩한 혈안의 속에서부터 한줄기 이성의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러나 주화입마가 호전된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현상인 거다.
‘지존혈수를 저렇게 맞받아 내다니······!’
새삼스러운 경탄으로 장운은 현산을 봤다.
저러할 줄은, 혈발귀가 멈춰서고 그사이 자신은 내경을 풀어낸다는 것까지 다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 떠나서 저렇게 서 있다는 것이 놀랍다.
‘벽암자를 상대해 이긴 친구지만······!’
그 결과 자체가 엄청난 일이지만 지존혈수는 또 다르다.
백 년 전 정마대전 당시에 지존혈마가 공포를 뿌린 이유는 필멸필사여서다.
상대가 누구든 지존혈수를 받아 내거나 맞은 자들은 칠공으로 피를 뿜어내며 죽었다.
그런 결과를 방금 전 봤다.
십이인의 흑선호위자들, 그들은 지존혈수의 강맹함에 머리통이 부서지거나 육신이 부서져 죽었지만, 죽어서도 피를 흘려내고 있다.
그런데 현산은 그 무서운 힘을 몸 밖으로 풀어냈다.
‘일부러 맞받았어······!’
이 결과는 그런 거다.
현산이 애병을 던져버리고 맨손으로 지존혈수를 받았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시험한 거다.
저 손, 철빛으로 보이는 저 손은 분명 지존혈수와 같은 강맹한 수공이다.
아마도 철사장인 것 같다.
‘철사장이라면······ 누구나 연마할 수 있지만 아무나 대성할 수 없는 수공.’
철사장은 그런 것이다, 강호에 퍼진 연마방법이 수백가지다.
그렇기에 철사장은 더 이상 고절한 무공이 아니다.
약장수들이 펼치는 기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정한 철사장의 가치를 아는 자라면 그리 말하지 않는다.
“크흐······”
괴소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소릴 혈발귀가 냈고 현산은 시퍼런 눈을 번득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고, 혈발귀가 처음으로 말을 했다.
“내 이름을 어찌 아느냐?”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이성의 끝을 붙잡으려는 혈발귀의 눈은 붉은 차가움으로 칼날처럼 빛을 낸다. 그 눈을 응시하며 현산은 대답했다.
“천수에서 우린 만났었다.”
혈발귀, 홍천성의 혈안이 섬뜩한 예기를 뿜었다.
“그런가? 네놈은 제천무림맹의 주구였구나······!”
혈기에 더해진 살기가 홍천성의 전신으로 풀어져 나왔다.
“운이 좋아 여태 살아있는 모양이다만, 오늘로 그 운이 다했다.”
성큼, 멈췄던 발을 내딛는 혈발귀 홍천성에게 현산이 멈추라는 듯 물음을 던졌다.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홍천성이 멈췄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부르르 떤다.
현산을 보는 혈안 속 한줄기 이성의 빛도 흔들린다.
현산 뒤의 바다 멀리를 본다.
‘나는······’
정말로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나고 자란 고향 청해를 떠나 어디를 유랑하고 있음인가?
왜 이렇게 됐나?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더욱 심하게, 마치 경련처럼 어깨를 떤 홍천성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봇물처럼 솟구치는 기억의 물결 속에서 휘청거렸다.
명교의 위기를 혁파하고자 한 노력과 의지가 수포로 돌아간 절망의 그날들.
“크아아아!”
괴성을 터트리는 홍천성의 혈발이 바람도 없는 데 산발했다. 한줄기 이성의 빛을 보이던 눈동자는 시뻘건 혈안으로 물들었고 두 손도 그러했다.
“모조리 죽인다아!”
처절한 분노와 살기를 발산하며 홍천성은 다시 공격을 펼쳤다.
지존혈수를 휘둘렀다. 그 붉은 장력이 만들어 내는 광풍이 현산을 휩쓸었다.
하지만 현산은 다시 휘청거리지 않았다.
흑풍보를 밟으며 공격을 피했다.
다시 시작된, 아니 이제야 진정으로 이뤄지는 격돌을 지켜보며 모두가 경직해 침을 삼켰다.
그중에서 조선 사내는 칼날 같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저러한 보법은······ 하, 흐르는 물과 같구나······!”
장운과 왕정과 태웅호가 그 중얼거림 속에서 강한 공감으로 자신들도 모르게 고갯짓을 했다.
무공을 제대로 모르는 황병기도 놀라 눈을 치뜨고 바라봤다.
현산의 모습이 지나는 바람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다.
흐르는 물과 같은 이동.
그렇게 펼쳐내는 신법과 보법,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수많은 무인들이 그러한 경지를 이뤄내고자 피땀의 고련을 하지만 끝내 이르지 못하는 경지다.
그렇다, 이뤄내는 자들이야말로 상승무공을 펼치는 고수가 되는 것이다.
현산이 지금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놀랍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 화산의 고수들인 벽송자와 벽암자를 맞아 싸우고 이긴 인물이다.
“대단해······!”
태웅호의 격한 감탄의 중얼거림, 그것이 격전의 바람에 흩어지는 속에서 현산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상대를 봤다.
천수에서는 무섭기만 하던 마교의 고수 홍천성, 하지만 지금은 무섭지 않다.
피가 끓어오른다.
‘흑풍보는 이제 이뤄냈다.’
지존혈수의 무시무시한 장력 속에서 현산은 뜨거운 희열을 만끽했다.
귀신오의 형님들로부터 배운 보법의 기틀, 사부 정두헌에게 사사하며 쌓아올린 피땀의 결실이다. 바위를 끌고 호약산을 누비던 기세가 이것이다.
‘거스르지 않고, 맞아들이고 보내면서.’
눈앞으로 닥쳐오는 지존혈수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려보내며 현산은 숨을 쉬었다.
코와 입으로 쉬는 숨이 아닌 온몸으로 쉬는 숨이다.
무수한 그 숨구멍들이 느끼고 감각한다.
몸과 영혼이 반응하며 흘러간다.
“크워어어!”
홍천성은 진정 혈발귀처럼 무시무시한 살기를 폭출했다.
질풍처럼 몰아치며 공격하고 있는데도 현산이 귀신처럼 피하고 있어서다.
때려죽일 것 같은데 간발의 차이로 물러나고 비껴나는 결과가 광기를 더 불 질렀다.
“크아아!”
홍천성의 움직임이 대변했다.
팽이처럼 휘돌며 지존혈수를 뿌린다.
회오리처럼 돌며 힘을 배가하는 신법, 그 유명한 마교의 회륜차력(廻輪借力)이다.
그것에 더해진 지존혈수가 현산을 일직선으로 몰며 나온다.
“저, 저거!”
왕정의 다급한 소리, 현산은 물러나던 발에 힘을 주며 멈췄다.
휘돌며 다가오는 홍천성을 보며, 그가 지나오는 바닥갑판의 분쇄를 보며 시퍼런 안광을 뿜었다.
그렇게 숨을 쉬었다.
온몸으로 호흡하며 손을 내밀었다.
‘일심과 일력으로.’
현산이 내민 철빛의 철사장이 창처럼 뻗어 나오는 지존혈수과 충돌했다.
폭음이 터졌다.
그 이전에 현산이 디딘 갑판 바닥이 무너졌고, 회오리로 돌아 나오며 지존혈수를 뻗어낸 홍천성은 반대로 휘돌며 나가 떨어졌다.
“크어어······!”
짓쳐오던 방향으로 돌아가 처박힌 홍천성은 부들거리는 경련으로 피를 토하고 있다.
그 황당한 모습을, 방금 전 끝난 싸움의 결과를 당혹과 충격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 가운데서 현산은 빠진 몸을 빼고 일어섰다.
“후우우.”
길고 깊은 숨을 입으로 내쉰 현산은 손을 응시했다.
지존혈수를 받아친 철사장이다.
생각만이 아니라 정말로 이뤄냈다.
온몸으로 이루는 기공호흡으로, 지존혈수를 받아내는 동시에 그 힘을 배로 해 돌려주었다.
뭐라고 말하려는 얼굴로 다가서는 동료들을 손짓해 제지한 현산은 홍천성에게 다가갔다.
핏덩이를 게워내며 경련하는 그를 보며 기다렸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었다.
눈동자에 혈기가 사라진 홍천성이 올려다본다.
“시원······ 하구나······”
무엇이 시원하다는 것일까?
주화입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세상의 미몽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그도 아니면 이제 육신을 버리고 죽는 것이?
“왜 이렇게 됐소?”
나직하고 담담한 현산의 물음, 홍천성은 입가를 비틀며 웃는다.
“크흐······ 크흐흐흐······”
왜 그런지 처절한 웃음, 그걸 듣는 이들에게 홍천성은 마지막 이야기를 흘려냈다.
* * *
“마교가 결국은 완전히 망하는 모양입니다.”
왕정이 신중한 눈빛으로 좌중을 살피며 낸 말에 반응한 것은 황병기다. 선실의 벽을 허무하게 더듬던 시선에 새로운 의지를 실으며 입을 연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생로병사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지. 생겨나고 자라고 흥하면 필경에는 쇠하고 멸하게 마련인 것, 그들도 그런 것이야.”
장운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고 왕정도 그랬다. 죽어가며 혈발귀가 한 말, 이야기들이 귀에 맴돌이치며 서북변경의 황량한 현실을 곱씹게 만든다.
“하, 중원을 겁박하던 마교가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다니······”
회한 같은 게 묻어나는 숨으로 왕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천무림맹과의 싸움으로 기세가 꺾이고 서쪽으로 물러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고 칼을 갈고 닦아 다시 올 것을 의심치 않았는데······ 그들의 믿음은 그런 게 없을 줄 알았더니 마찬가지군요. 저희끼리 패권싸움을 하고 있다니,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인 게 맞는 모양입니다.”
고갯짓하던 장운이 뒤이어 입을 열었다.
“지존혈수를 얻은 혈발귀 홍천성을 불운하다고 해야 할 것이야. 기연이 아니라 재앙이었던 것이지. 믿었던 형제동료들에게 공격당하고 살기위해 동북으로 도망친 신세······ 마교라는 슬픈 큰 그림의 한 조각이지만······”
말없이 듣고만 있던 현산은 쥐고 있는 현실을 말했다.
“절강에 들면 여인들을 어찌할 것인지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황병기가 육중한 숨으로 반응했다.
“그게 쉽지가 않은 일이지. 백 명이나 되는 여인들을 숨길 곳도 마땅치 않고, 일단은 해안에 정박해서 상황을 보며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최선일세. 온 곳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현실적으로 힘드니······”
“그걸 원하는 여인들도 없지요.”
장운이 끼어들어 황병기에게 말하고 현산을 응시했다.
“자신을 팔아버린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걸세, 해적들에게 일가족이 몰살한 여인들도 마찬가지고. 안전하게 살길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지, 그것이 최선이야. 우리가 더 해줄게 없어.”
냉철하게 현실을 말하는 장운에게 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강에 들면 길이 생길 겁니다.”
정말 그렇다는 건지 희망을 말하는 건지, 현산은 그 말을 하고 눈을 감았다.
선실 밖에선 태웅호가 흑수결놈들을 다그치는 음성이 계속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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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22. 다시 돌아가는 길(2)
2.
항주만을 코앞에 둔 주산군도의 섬들 속으로 배를 숨긴 현산은 왕정과 작은 배를 타고 항주만속으로 들어 뭍에 올랐다.
그 행보에 조선사내 이결(李潔)이 동행 했다.
아직도 이름만을 알 뿐인 그는 무거운 얼굴이다.
“일단 주루나 기루에 들어 사정을 살피는 편이 좋겠습니다.”
왕정의 제안 속에는 작은 기대도 들었다. 제대로 된 술구경은 해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고, 변경만을 떠돌던 신세에 기루 냄새는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이리 핑계를 대고, 아니 필요한 일이니 할 수 있게 됐음이다.
“혈도방이란 놈들의 본거지가 항주제일루라고 하니 그리로 가지요.”
조심스러운 왕정의 눈을 보며 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도방이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항주의 뒷거리를 장악했다는 흑도방파, 여인들을 넘겨받기로 한 세력이다.
그러나 백 명이나 되는 여자를 사는 일, 간단치 않다.
‘세가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흑도방파가 이만한 일을······’
배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현산은 밤거리를 걸었다.
항구를 벗어나 전당강을 따라 계속 걸으니 불야성이 맞아준다.
향락으로 강호에 이름을 날린 항주다. 유명세답게 오색등이 밤을 밀어내며 흥청거린다.
“저곳인 모양입니다.”
앞서가던 왕정이 돌아보며 항주제일루를 가리킨다.
“중원 어디를 가나 그 지역의 이름을 쓰는 곳이 제일 크고 유명하게 마련입니다만, 항주제일루는 특히나 유명하고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저곳을 차지하려고 많은 강호방파들이 피를 흘렸고, 무수한 시인가객들과 강호협사들의 자취가 어린 곳이지요. 음 뭐, 다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머쓱한 표정이던 왕정은 현산 뒤의 조선사내 이결을 힐긋 보며 미간을 옅게 좁혔다.
목적지인 절강에 당도했으니 제 갈 길을 가거나 하면 될 텐데 아직 저러고 있음이다.
지금 행보는 왜 따라나선 건지 모르겠다.
“곧 안 봐도 될 거요.”
왕정의 마음을 읽은 이결이 툭 말했다. 그럴 줄 몰랐기에 왕정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고 이결은 내친김에 말하겠다는 듯이 속마음을 말했다.
“절강에 도착했는데 아직 미적거리는 이유는 여인들의 처리결과를 보고 가려함이 우선이고, 항주제일루가 정해뒀던 방문장소였기에 그러하오.”
왕정은 미간을 좁혔고 현산은 이결을 돌아봤다.
그 시선에 답이 나온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소, 항주제일루에 종적이 있소.”
명확하지는 않으나 행보의 이유, 현산은 눈길을 돌렸고 왕정은 다시 걸음을 냈다.
* * *
“백 명이나 되는 여인들을 안전하게······”
생각할수록 힘든 일이라는 것을 곱씹으며 민대머리를 손으로 문지른 태웅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한 일이고 손댄 일이니 제대로 끝마무리를 해야 할 것이지만 지난해서다.
그 마음을 아는지 밤바다가 출렁거린다.
“하아······”
다시 한숨을 내쉬는 태웅호에게 장운과 황병기가 다가왔다. 결박해 놓은 흑수결무사놈들을 살피고 여인들을 안심시키며 이야기하고 나온 길이다.
“바다가 꺼지길 바란다면 그보다 더 크게 한숨을 쉬어야하지 않겠나?”
황병기기 농으로 말을 걸자 태웅호는 찌푸린 표정을 애매하게 펴며 말했다.
“괜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 걱정입니다. 예, 압니다. 비겁하고 못난 소리라는 걸요. 이런 소릴 지껄일 거면 애초에 모른척하고 분노조차 하지 않았어야지요. 다 압니다만, 여인들의 안전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방법이······”
“만들어 낼 것이야.”
장운이 담담히 낸 말에 태웅호는 눈썹을 꿈틀하며 바라봤다.
“그 친구가 한다고 했으면 하는 거지. 여태 그래왔어. 그렇지 않은가?”
그 친구, 현산이다.
맞는 말이다. 현산은 주저하거나 돌아보지 않는다.
당면한 문제에 부딪쳐 해결한다.
그렇게 벽송자를 해치우고 벽암자마저 해결했다.
그가 추호의 망설임 없이 한다고 하는 일, 이번에도 될 것이다.
‘좁쌀같은 간뎅이······’
어금니를 악문 태웅호는 심중에 든 감정들을 밀어냈다.
현산을 믿고 투지를 세웠다.
까짓 거 죽기 아니면 살기다. 여기까지 오는 길도 그런 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대흥안령산맥에서 화산고수들에게 죽었어야 했다.
“아직도 이것저것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부끄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한 태웅호는 당찬 눈매로 뒷말을 냈다.
“정말로 다 버리겠습니다.”
장운은 엷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고 황병기는 담담한 눈으로 바다를 봤다.
‘나는 다 버렸는가······’
검게 출렁이는 밤바다를 보며 황병기는 자문했다.
흔들리던 마음, 삿된 감정에 휘둘리던 가슴은 평온하다.
몸뚱이 하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미망을 버렸다.
이젠 정말로 빈 소매의 펄럭임처럼 자유롭다.
‘현산, 자네에겐 한없이 고마울 뿐이군.’
멀리 항주의 불빛을 보는 황병기의 눈은 깊고 고요하게 반짝였다.
* * *
“허술한 듯 하지만 경계가 보통이 아닙니다.”
항주제일루의 기세를 살핀 왕정은 한층 조심스러운 눈빛을 냈다. 제대로 된 술맛을 기대했던 마음은 긴장으로 사라진지 오래, 술잔을 홀짝인다.
“대개의 흑도패가 그렇듯이 흑의일색인 놈들입니다. 붉은 도가 놈들의 상징입니다.”
왕정의 말대로다.
기루 곳곳에 보이는 흑의에 붉은 도를 지닌 자들, 혈도방이다.
항주를 장악한 방파답게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눈빛이 엄정하고 숨소리가 고르고 차분하다.
항주를 장악한 데는 역시 이유가 있음이다.
“기루의 기녀들을 가장 잘 아는 이가 누구일 것 같소?”
술잔을 만지며 낸 조선 사내 이결의 말이 의외로워 왕정은 미간을 좁혔다. 현산은 심유한 눈으로 응시했고 이결은 남은 말을 무겁게 이어냈다.
“기녀로 이곳에 팔려온 사람을 찾고 있소.”
왕정은 좁힌 미간을 꿈틀했고 현산은 푸른 안광을 순간적으로 보였다.
‘사람을 찾는다······’
그것이다, 조선 사내 이결의 행보, 목적이 그것이다.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항주제일루라는 단서를 갖고 있는 거다.
그래서 흑선을 탈취하고 여인들을 넘기는 곳에 대한 정보를 알았을 때 그런 반응이었다.
격렬한 감정, 형용하기 힘든 눈빛, 그것은 순간적이었다.
그렇지만 현산은 느끼고 읽었다.
왜 그랬는지 이제 알았다.
조선을 떠나 중원으로 와야 했던 행보,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여인이다,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그게 누구······”
“기녀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될 겁니다.”
왕정의 말을 자르고 입을 연 현산은 왕정의 눈을 응시했다.
그 눈길에 든 의미를 읽고 물음까지 인지한 왕정은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다 말했다.
“침모나 찬모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이결의 눈이 칼날처럼 번득이는 걸 보며 왕정은 말을 이었다.
“기녀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일 겁니다. 옷을 수선 하고 짓고, 그녀들이 먹을거리를 만들며 뒷수발을 하는 사람이지요. 옷을 만지는 이라면 기녀들 개개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 그런 인물이어야 기녀들에 대해 잘 알 터다.
“그런 이를 어디서 찾을 수 있소?”
다급하게 나오는 이결의 반응을 현산이 침착하게 받아냈다.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내고 현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황한 표정을 만들었던 왕정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고, 이결도 현산의 눈빛을 읽고 몸을 일으켰다.
* * *
항주의방(杭州衣房)이란 낡고 작은 편액을 단 점포는 항주대로가 끝나고 퇴기들이 모여 산다는 낙화로(落花路)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다. 밤이 깊어 가는 그곳에 항주제일루에서 나온 일꾼이 기녀들의 옷을 맡겼다.
“저곳이네요. 항주제일루 기녀들의 의복을 맡아 손보는 곳이 분명합니다.”
길 저편 항주의방의 흐린 불빛을 보던 왕정은 현산과 이결을 돌아봤다. 현산 말대로 지켜보니 찾을 수 있었던 바, 이제 어쩔거냐는 물음이다.
“탈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겠소.”
이결은 걸음을 내 항주의방으로 향했다.
그런 이결의 뒷모습을 보던 왕정은 불안한 숨을 내쉬었다.
이결 제가 말한 대로 탈이 생기지 않을까해서다.
혈도방은 넘겨받을 여인들을 실은 흑선을 기다리고 중인 것이다.
“아무래도······”
“가보지요.”
왕정의 반응을 차단하며 현산은 이결의 뒤를 따라갔다.
쓴 입맛을 다신 왕정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 뒤따랐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항주의방 앞에 다다랐다.
작은 점포 안에는 중년 여인이 옷과 바늘과 씨름중이다.
“실례하겠소이다.”
이결이 정중하게 말하며 인기척을 냈다.
흑선에 처음 오를 때만 해도 서투르던 어투가 자연스럽다.
그동안 혼자 매일 연습이라도 한 건가하며 왕정과 태웅호가 이야기 했을 정도, 이결은 엷은 미소로 이어 말한다.
“잠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그러하오만······”
“칼잡이들이 밤중에 들이쳐 물어볼 말이 뭘까?”
툭 튀어나온 중년여인의 말은 가시가 아니라 칼날이었다. 차갑고 적의가 가득한, 그러나 추호의 두려움도 없는, 당당하고 숨김없는 적개심이다.
“아니 이것 보시오, 우리가 뭐 도적이라도 되는 줄 아오? 물어볼 말이 있어 그런다는데 말 꺼내자마자 그게 뭐요? 항주인심은 원래 그렇소?”
왕정이 반발하며 인상을 쓰는 그 순간 현산은 느꼈다.
항주의방의 뒤로 이어진 퇴기들의 거리, 낙화로 내부로부터 은밀히 피어나는 기세와 움직임, 평범치 않은 일이다.
항주의방이란 이곳은 평범한 곳이 아니다.
“사과드리오.”
무조건 잘못부터 했다는 식으로 이결이 다시 나서자 왕정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고, 차가운 중년여인의 눈을 응시하며 이결은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항주제일루에 기녀로 팔려온 여인인데, 조선사람이오. 본래 이름은 홍난희라고 하오만, 육년전 이곳 항주제일루로 팔려왔다는 것을 힘겹게 알아내고 찾아온 길이오. 혹시 그녀를 아시오?”
항주의방의 주인, 중년여인은 미간을 좁히고 바느질을 멈췄다.
왜 그런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결을 응시하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눈길은 전후를 짚는 것이란 걸 현산은 알았다.
이결이 여기까지 온 행로다.
“그런 일이라면 항주제일루에 물어야지 왜 날 찾아왔소?”
적개심은 옅어졌지만 여전히 차가운 중년여인의 물음, 왕정이 반응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리 하겠소? 혈도방이란 흑도방파가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 기녀로 팔려왔던 여인을 찾는다 하면 좋아라 하겠소이다? 은밀하게 하고자 이러는 게 아니오? 이곳에선 여차하면 벗어나면 그만이고.”
중년여인은 차가운 코웃음을 쳤다.
“흥, 퇴기들이 사는 낙화로, 여긴 찔러보고 아니다 싶으면 내빼도 되는 곳이란 말이지? 하기야, 퇴락하고 더러운 이곳을 누구인들 두려워할까.”
바느질을 다시 시작하는 중녀여인에게 현산이 한마디를 던졌다.
“사람을 찾는 일이오, 간절하게.”
힐긋 고개를 들어 현산을 응시하는 중년여인의 눈이 서늘하게 예리한 빛을 냈다.
그 눈길은 의미를 담고 이결에게 돌아갔고, 물음이 나왔다.
“조선에서 온 거요? 기녀로 팔려온 여인을 찾아서?”
이결은 미간을 옅게 꿈틀거렸고 중년여인은 뒷물음을 냈다.
“그래, 찾는 다는 그 여인이 누구요? 누구이길래 육년이나 지나서 찾으려는 거요?”
왕정도 이결을 돌아봤다.
왜 그런지 뺨에 주름이 지게 이를 악문 이결은 무겁고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심정을 다스리고 대답했다.
“정혼자요.”
중년여인은 바느질을 다시 멈췄다.
왕정은 정말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고, 현산은 싸울 때나 드러내는 시퍼런 눈빛을 순간적으로 뿜어냈다.
“육년 전에 알았더라면······”
고통스러움이 느껴지는 이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소······ 육년······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제라도 그녀를 구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오.”
중년여인은 미동 없는 석상처럼 이결을 바라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왕정이다. 감정을 밀어내고 중년여인을 다그쳤다.
“사정을 알았으니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던가, 아는 게 없으면 그렇다고 하던가, 그도 저도 아면 혈도방에 고해바치던가, 고해바칠 거요?”
험악하게 목자를 부라리는 왕정, 이만큼 드러냈는데도 헛일이거나 위험해 진다면이라는 겁박, 그러나 거들떠도 안보고 중년여인은 입을 열었다.
“홍난희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육년 전에 팔려온 조선 출신 기녀는 알지.”
이결은 눈을 부릅떴고 왕정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중년여인이 돌아섰다.
“내실로 들어가 차라도 한잔 하며 이야기 합시다.”
현산은 확실히 다시 느끼고 감지했다. 낙화로의 어둠 속에서 피어나던 기척들이 물러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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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22. 다시 돌아가는 길(3)
3.
어깨를 부들거리고 있는 조선사내 이결의 심정이 어떠한 것일까 헤아리는 것을 현산은 그만뒀다.
더듬을 수 없는 고통이란 것, 그것만은 명확히 안다.
이결이 정혼자를 잃은 것 같은 슬픔과 분노를 자신 역시 겪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다는 것,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니 이결의 부들거리는 숨소리를 듣는 것이 버겁다.
묻어둔 기억과 아픔들이 다시 곤두서서 가슴을 할퀴고 있어서다.
‘홍난희.’
이결이 찾는, 찾아왔다는 정혼자의 이름이다.
육년전 스물 둘에 중원으로 팔려왔다는 그녀는 항주제일루에서 기녀로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
그렇다는 것을 항주의방의 주인 육대모(六大母)가 확실하게 말해줬다.
조선에서 팔려온 가여운 여인, 스물둘이라는 늦은 나이까지 성혼하지 않았던 이유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정혼자를 기다리던 사연, 날마다 슬픔에 젖어 눈물을 소매에 적시던 그녀를 지부대인이 첩으로 삼았다.
“북경으로 갔어.”
이어 나오는 육대모의 목소리에 이결의 어깨가 경직했다.
“항주에서 긁어모은 돈을 북경의 고관대작들에서 궤짝으로 안겨주고 지금은 예부시랑 자리까지 꿰찬 모양인데, 유복경 그놈이 정말로 지독하고 더러운 놈이지. 매월이를 가지려고 칼부림까지 했지. 자기 때문에 동료 기녀들이 목이 날아가는 판국이라 매월이는 결국 그놈의 첩이 된 거야.”
매월이, 이결의 정혼자 홍난희다.
그녀가 유복경이란 놈의 첩이 되어 북경으로 간 사연이다.
듣고 있자니 피가 치솟고 원통과 애통함이 넘친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그게 전부야. 차들 마시고 갈 길 가라고.”
더 볼일 없다는 듯 항주의방의 주인 육대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실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등을 예리하게 보던 왕정이 입을 열었다, 말하려다 이결을 보고 멈칫했지만 현산에게 엄중이 말한다.
“평범한 여인이 아닙니다. 이곳도 마찬가집니다.”
이미 짐작하고 인지하던 바, 현산은 왕정의 경계를 무심히 들었다.
“칼잡이들이라고 우릴 말하는 데 거침이 없고, 하등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렇겠거니 하기엔 너무나 담대합니다. 자칫 칼질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긴장 따위는 추호도 없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반대, 그것이 맞다.
육대모라는 여인의 뒤에 웅크리고 있던 위험한 기운을 현산은 분명히 인지하고 읽었다.
의도가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모르나, 무뢰배들이라면 항주의 뒷거리에 갈라 묻겠다는 생각이 맞으리라.
“내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어······!”
이 악문 이결의 숨소리에 왕정은 더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고, 현산은 고요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그렇게 차가 다 식어갈 무렵 이결이 고갤 들었다.
형용치 못할 심정을 다스리고 현실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힌다.
“코흘리개일 때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서로 노는 것이 좋았을 때에, 어른들의 약속으로 정혼을 한 사이였소. 자라고 세상을 깨달으며 얼굴을 보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러울 즈음에야 연모함을 알았소. 그리운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입신양명의 성취를 위해 그녀를 떠났던 시절동안······”
겨우 다스렸던 감정의 격랑을 삼키며 이결은 이를 악문다.
“나라에 환란이 일어났소, 왕이 신하들을 도륙하는, 무오년에 이어 갑자년에, 두 번의 환란이 있었소. 능상의 척결이라는 말 뒤에 숨은, 어미로 인한 복수심이 그런 혈란을 일으킨 것이오. 그 사화에 연루되어······”
품고만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음인가, 이결은 묻지 않은 사연을 이야기했다. 홍난희의 집안이 갑자년의 사화에 휩쓸려 어떻게 몰락했는지, 그녀가 중원으로 팔려온 것을 알고 뒤늦게 나선 이결 자신의 행보다.
“나보다 네 살이 어린 그녀의 올해 나이는 스물여덟이오.”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든 시선을 들어 허공을 보며 이결은 목소릴 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던 그녀의 얼굴이······”
이결의 눈에선 한줄기 눈물이 끝내 흘러내렸다.
떨어지는 그 눈물방울처럼 고개를 떨군 이결은 한동안 어깨만 꿈틀거렸고, 그걸 현산은 지켜봤다.
“혈도방과 한패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개운치 않습니다.”
항주의방 주인 육대모와 그 뒤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세에 대해 왕정은 염려를 말했다.
눈치가 빠르니 꼬리를 잡고 몸통을 더듬는 것이다.
그런데 그 꼬리를 감추지 않고 흔들어 보인 육대모의 의도가 궁금하다.
“북경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겠지만 힘찬 걸음이 되겠습니다.”
현산의 말에 반응하며 이결이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 된 눈동자는 미세한 흔들림을 머금었다.
현산이 한 말, 가야할 곳과 해야 할 일을 이름이다.
“찾는 분이 살아 있음을 확인했으니 이제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곳에서의 일을 잊고 고향에서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이어 나온 현산의 말에 이결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새로운 깨달음과 각오로 이를 악문다.
그렇다, 정혼녀 홍난희는 죽지 않았다, 어디에 살아 있는지 안다.
그녀가 어떠하든 찾아 돌아가겠다고 온 길이 이 길이다.
“고맙소.”
차분한, 그러나 결의에 찬 대답을 낸 이결과 눈을 맞춘 현산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왕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담고 있던 짐작을 이야기했다.
“항주의방, 육대모는 혈도방이라는 기왕의 세력에 대항하는 음지의 세로 짐작됩니다. 우연이지만 이들과의 접촉을 활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왕정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현산은 누군가에게 말했다.
“진실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왕정이 두리번거리는데 밖으로 나갔던 육대모가 다시 들어왔다.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의 그녀는 처음 앉았던 중앙 상석에 앉아 현산을 봤다.
“허튼 짓을 하면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야.”
육대모의 무심한 눈동자 한 가운데서 솟아나오는 살기를 현산은 담담히 받아냈다.
“힘자랑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런 협박 따위 하등 겁나지 않는다는, 현산의 얼굴에 다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육대모는 기묘하게 긴장한 눈으로 응시하며 기세를 다스린다.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자 했지? 그래, 진실한 정체가 무엇이냐?”
육대모의 칼날 같은 시선을 받아내며 현산은 되물음을 던졌다.
“누굴 기다리고 있습니까?”
육대모의 눈동자에선 한순간 강렬한 힘이 뿜어 나왔다. 그걸 인지한 왕정이 자신도 모르게 장도의 자루를 움켜잡았고, 이결도 조선검을 잡았다.
“기다리던 손님인지 확인하기 위해 항주의방의 숨은 형세를 들춰 보인 것으로 짐작합니다. 무슨 일이고 어떤 손님인지 모르겠으나 우린 확실히 그 손님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항주의방과 육대모의 적도 아닙니다.”
육대모는 시린 시선을 현산에게서 이결에게로 돌렸다.
이제까지 듣고 인지한 사연, 이결의 이야기는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는 걸 의심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당혹스럽다. 눈앞의 이 손님들이 정말 누구인지.
“시원하게 정체를 말해봐라.”
살기를 누그러뜨린 육대모의 거듭된 물음, 현산도 거듭 물음으로 답했다.
“육대모와 항주의방이 하는 일은 뭡니까?”
하는 일이 뭐냐, 항주의방은 옷을 짓고 수선하는 곳이고 육대모는 그 일을 하는 중년여인이다. 항주제일루 기녀들의 옷을 받는 것이 주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다. 이 마당에 숨길 건 없음이다.
“알고 싶다면 알려주지.”
육대모의 눈동자에 다시 강한 살기가 고였다.
싸늘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마치 이제 너희가 이곳을 살아나갈 일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살려고 한다.”
이어 나온 육대모의 대답, 살려고 한다는 말에 현산은 고요한 눈동자는 번득였고 왕정은 미간을 좁혔으며 이결은 심유한 눈빛을 흘려냈다.
“다 같이 살자는 거다. 밟히고 빼앗기고 죽임당하지 말고, 살자는 거다.”
육대모의 전신에서 피어나오는 것과 같은 살기가 내실 밖으로부터 압박해 왔다.
이젠 왕정도 여실하게 느끼는 기세, 현산은 담담히 말했다.
“우리도 같이 살려고 합니다.”
육대모의 살기 차오르던 눈동자가 꿈틀했다. 그 눈에 대고 현산은 또 말했다.
“혈도방이 기다리는 여인들, 우리가 데리고 있습니다.”
* * *
파도가 심해지는 지 갑판의 흔들림이 심해 황병기는 새삼 다리에 힘을 줬다.
바람 때문이라서 라고 답을 말해주는 빈소매는 세차게 펄럭인다.
그렇지만 지금 긴장으로 펄럭이는 건 마음이다. 육대모란 여인 때문이다.
“진실한 정체도 모르면서, 확인조차 없이 이래도 되는 걸까요?”
태웅호가 걱정이 든 목소리를 작게 내자 장운이 된 숨소리를 냈고 왕정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모두가 같은 심정, 현산이 육대모를 데리고 흑선으로 돌아온 행보에 대한 걱정이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렇다.
“항주의방이란 곳이 어떠한 곳인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인가?”
황병기의 물음에 왕정은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혈도방이란 드러난 세력의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곳이란 것으로 짐작할 뿐이지, 세가 어떠한지 명칭은 무엇인지, 세력관계는 또 어떠한지, 알아볼 시간도 없이 이렇게 됐습니다.”
현산의 결정으로 흑선에 돌아온 결과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육대모란 여인이 한 말 때문이라고 했다.
살려고 한다는, 같이 살고자 한다는 말.
그에 대해 현산도 같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전격적으로 동행했다.
‘이제까지도 그랬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현산과 육대모가 들어간 갑판아래 선실을 응시하며 무거운 숨을 내쉰 황병기는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육대모를 보위하고 온 삼인의 사내, 직배도를 가슴에 품고 선 세 무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삼엄하다.
‘항주, 파란을 품은 곳이구나.’
바람에 소매를 펄럭이며 황병기는 현산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흐느끼는 여인들에게서 돌아선 육대모는 현산의 앞으로 다가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많은 말이 든 눈동자의 흔들림을 겨우 다스리고 입을 연다.
“혈도방의 배후엔 서창(西廠)이 있다.”
현산은 미간을 확 좁혔다.
서창이라고 들어서다.
그들은 동창과 더불어 조정의 칼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권을 잡은 환관 유근의 사냥개다.
육대모의 말이 이어졌다.
“사례대태감 유근은 측근이었던 팔호의 일인 마영성에게 동창을, 곡대용이 서창을 맡게 했지. 그런데 권력이라는 게 살아 있는 짐승 같은 것, 세 사람 사이가 벌어지고 대립하게 까지 이른 것이야. 권력을 잡아서지.”
긴장 때문인지 마름 입술에 침을 바른 육대모는 계속 말했다.
“때문에 유근은 내행창(內行廠)을 만들었지. 동창과 서창을 견제감독하기 위해서지. 그렇지만 그들의 갈등은 없어질 일이 아닌바, 보이지 않는 암투가 상존하는 것이야. 우리 같은 민초들에겐 그냥 다 개도적 놈들이지. 그 개도적 놈들 중 서창이 요인들을 회유 포섭할 때 쓰려고······”
그래서라는 거다. 여인들을 공급받아 그런 일을 한다는 거다.
비교적 나이가 적은 여인들은 특별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암자(暗者)로 만들고 그렇지 못한 여인들은 첩으로 주거나 수청을 들게 하는 등의 용도다.
“흑선을 탈취하다니······ 정말로 놀랍군.”
긴가민가했는데 눈으로 확인한 마당, 육대모는 진심을 드러냈다.
“누굴 기다렸습니까?”
툭 튀어나온 현산의 물음에 육대모는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모든 것이 담긴 물음이어서다.
서창을 등에 업은 혈도방을 상대하려는 것이냐는, 그러한 형세이니 여기까지 왔겠지만 어떤 세와 손을 잡으려는 것이냐는.
“우리가 바라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은 육대모는 현산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뒷말을 냈다.
“하북팽가.”
명료하게 그 대답을 낸 육대모는 무거운 표정을 풀었고, 오히려 현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팽가.’
참으로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다.
가슴에, 기억에 사무치게 새겨진 이름이다.
그 이름 때문에 죽어야 했을 어린 목숨을 구했고, 그 이름을 찾아갔다가 사지로 가게 됐다.
처절하고 무섭던 전장,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황가의 척실(戚室)이고 내각대학사등과 연계한 조정의 세라고 판단해서지. 유근 등의 힘에 대항 할 수 있는, 서창의 하수인인 혈도방을 혁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판단하고, 그 가문에 접촉을 시도했건만······”
육대모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뒷말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다.
팽가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고 이들은 기다린 거다.
현산 자신 일행이 혹시 팽가의 답이 아닐지, 긴장하며 반응하고 살핀 것이 오늘 밤의 일이다.
“우린 살아야 해,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해.”
이가는 숨으로 낸 육대모의 분노와 살기에 현산은 시퍼런 눈으로 반응했다.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흠칫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는 육대모에게 현산은 뒷말을 던졌다.
“혈도방을 갈라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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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22. 다시 돌아가는 길(4)
4.
“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웅크린 흑범 같은 기세로 우려를 말하는 전홍(全鴻)의 시린 눈을 응시하며 육대모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혈도방의 전대 방주였던 전위덕의 아우였던 인물, 부방주 마인걸의 모반으로 형과 함께 죽음을 맞은 자.
‘피걸레와 같은 형상으로 항주만 바다 밖으로 떠밀려 가던······’
생생하게 그 날이 떠오른다.
죽은 시체와 같다며 다시 버리자던 항주의방(杭州義幇) 형제들의 말을 뿌리치고 건져냈다. 그리고 살려냈다.
살려낸 것인지 스스로 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형제가 됐지.’
그것이 중요하다, 억압을 일삼던 혈도방의 부방주를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린 인연으로, 방주였던 형님 전위덕의 죽음에 복수하겠다는 전홍의 일념으로 그리됐다. 혈도방이라는 파훼해야할 공동의 목표가 있음이다.
그 목적이 항주의방의 존재 이유다.
의방(依房)이 아닌 의방(義幇)으로서 존재하고자 함이다.
칼을 휘두르는 자들로부터 살아나고자 함이다.
이젠 복수심에 그 의지까지 품은 전홍이기에 심중엔 늘 칼날이 서 있다.
“팽가가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마당입니다. 근본도 모르는 무인들 몇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혈도방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마인걸 그놈은 무공의 고강함은 물론이고 음모와 귀계가 능하기로는······”
“안다.”
툭 튀어나온 육대모의 한마디에 전홍은 꿈틀거리던 눈동자를 고정했다.
허름한 내실 안에 둘만이 앉아 있는 이 현실을 새삼 저 눈으로 받아들였다.
차갑고 무심하고 한없이 깊고 무거운 눈, 전홍 자신을 살린 눈이다.
“혈도방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가 총령(總領) 너겠지.”
입 안에 고인 뜨거운 침을 삼킨 전홍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신중하고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만에 하나 마인걸, 혈도방이 뿌린 덫이라면 큰일이 아닙니까? 놈들은 우리 항주의방을······”
“훑어 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지.”
다시 전홍의 말을 자른 육대모는 잠시 사이를 둔 뒤 말을 이어냈다.
“그렇다고 흑선을 호송하는 놈들을 도륙했을까? 여인들을 공급하는 흑수결이란 놈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놈들은 요녕을 장악한 놈들인데 그럴 필요가 뭐가 있을까? 항주의 골칫거리를 처리하는 일에, 혈도방의 그런 요구에 전폭적으로 응하기 위해서라고? 큰돈을 받아서 그랬다고?”
싸늘한 육대모의 시선을 받아내는 전홍의 응축한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그래, 큰 틀에서 그러했을 수 있다고 치자. 정말로 그놈들이 골육지정과 같은 사이여서 그랬을 수 있다고 치자 이거야. 그런데 저들 중에 조선인이 있다. 매월이를 찾아온 자야. 그자의 사연은 꾸며낸 것이 아니야.”
전홍은 미간을 확 좁혔다.
“매월이라면······ 그 매월이 말입니까? 북경으로 간?”
“맞아.”
“하······”
자신도 모르게 감탄 같은 한숨을 내쉬는 전홍, 그 눈을 향해 육대모는 다시 말했다.
“흑선에 잡혀 있는 여인들은 그들에 대해서 몰라. 자신들의 운명을 바꿔준 사람들이라는 걸, 그들이 흑선내의 흑수결 놈들과 싸워 이겨서 그러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음이지. 그들은 굳이 그런 걸 말하지 않았다.”
입술을 움찔거리는 전홍보다 먼저 육대모가 목소리를 이어냈다.
“여인들을 안전하게 뭍에 내려놓을 방도를 찾다가, 혈도방의 형세를 탐지하기 위해 항주제일루에 갔다가, 나를 만난 것이야. 매월이의 소식을 알기위해서지. 기녀들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을 법한 이를 찾아서 온 거다.”
전홍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고 육대모는 계속 말했다.
“총령, 네 말대로 그들에 대해 모른다, 아는 게 없지. 아는 거라곤 흑선을 탈취했다는 것, 그럴 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짐작, 팔려온 여인들을 안전하게 해 주려 행동한다는 것, 매월이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뿐이다.”
직전처럼 반응하지 않고 전홍은 육대모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내가 보고 판단한 것은 하나다. 날 흑선으로 이끈 자, 산 같은 기세의 젊은 무인, 그자의 눈이다. 그 눈이 말하지 않은 것, 말하는 것을 믿는다.”
단호하게 그 말을 낸 육대모는 허공으로 시선을 올린 뒤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믿는다라고 말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고 무서운 세상이니······”
느릿하게 시선을 내린 육대모는 강한 눈빛을 흘려냈다.
“그자가 말했다. 같이 살고자 한다고.”
* * *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황병기는 거침없는 걸음을 냈다.
뒤따르는 장운과 현산을 호위무사로 둔 위세를 확연히 드러내며 항주제일루에 들었다.
흑도패 답게, 흑수결처럼 흑의를 입고 총관을 호기롭게 불렀다.
“요녕에서 왔다, 총관을 불러라.”
당당하게 하대하는 황병기와 장운과 현산의 위세를 접한 항주제일루의 혈도방 무사는 즉각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사이 황병기는 중얼거렸다.
“흑도패는 왜 다들 흑의를 고집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흑도인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물정 모른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의문이다.
하기야 황병기가 알고 겪은 흑도패들이 전부 그랬으니 그런 건지도 모른다.
흑일방이 그랬고 흑수결이 그러하며 혈도방이란 이놈들도 흑의일색이다.
“흑색이 풍기는 위압감과 위세에 편승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자 첫 번째라고 생각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 진실한 강자는······”
그렇게 황병기의 의문에 대답을 내던 장운은 흠칫했다.
바로 옆에 있는 현산도 흑의이기 때문이다.
낡은 청의는 진즉에 버린 터, 심양으로 들면서 두 번째로 구해 입은 것이다.
그 앞에서 혀를 놀리고 있음이다.
‘말이 헛 나왔군, 이 친구 같은 인물도 있으니.’
현산은 무심하게 반응이 없고 장운이 머쓱해하던 그때, 총관이 나타났다. 가벼운 수인사 후에 총관을 따라 세 사람은 항주제일루의 안으로 들었다.
별원으로 안내되어 가는 동안 항주제일루 내부에 꾸며진 정원과 연못 등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숨기고 마주 앉았다.
“원로에 노고가 크시오이다.”
반가운 미소로 입을 여는 총관, 그의 얼굴을 보며 황병기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흑수결 총사의 명으로 바다를 건너온 특사다. 다시 말하면 내가 곧 흑수결의 총사인 것이다. 너 같은 자와 마주앉자고 온 것이 아니다.”
총관이란 자의 표정이 경직하다 일그러지는 걸 보며 황병기는 차갑게 말했다.
“당장 가서 혈도방주에게 고하고 제대로 손님을 맞아라.”
* * *
붉은 핏방울 같은 홍로주(紅露酒)를 들어 입술에 대던 마인걸은 미간을 확 좁혔다.
“배(倍)를 내라? 따로 계산한다?”
항주제일루의 총관이자 혈도방의 부방주를 밭고 있는 범칠은 소상히 말했다.
“별원으로 들이게 한 수하를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해서 직접 나서 그들을 만나봤습니다만, 보통내기들이 아니었습니다. 흑수결에 대해 오판한 부분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차제에 그들에 대해 더 알아봐야하겠습니다.”
눈빛을 서늘하게 흘려내며 혈도방주 마인걸은 짧고 거친 수염을 매만졌다.
“하기야, 요하구부터 심양에 이르는 요지를 장악한 놈들이 그놈들이지.”
그만한 배포와 흉심이 없는 놈들이라면 이루지 못했겠지 라는 작은 중얼거림을 내던 마인걸은 다시 미간을 곤두세우고 부방주 범칠을 봤다.
“절세가인 열이라고 했더냐?”
“그러합니다. 정변으로 몰락한 조선 사대부가의 여식들이라고 합니다. 교양과 학식을 갖춘 계집들로서 자태가 빼어남이 특출하다고 합니다. 직접 보지 않았으니 더 믿기야 어렵겠지만, 선례가 있지 않았습니까?”
“선례? 음, 그렇구나, 매월이.”
“맞습니다. 매월이가 딱 그러했습니다. 그 기품에 지부대인이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었지요.”
“그래, 그 중늙은이 놈이 욕심을 버리지 못해 칼부림까지 벌였지.”
“끝내는 차지했지요.”
“쯧, 매월이 고 계집이 제 몸을 희생한 것이지.”
다시 잔을 들어 홍로주를 넘긴 마인걸은 미간을 깊게 좁히고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을까······ 그것이 배운 계집들인가? 조선 계집들은 그러한 것인가? 그러해서 고래로부터 조선계집들을 최고로 치는 것인가?”
혼잣말처럼 말하던 마인걸은 다시 눈길을 범칠에게 고정했다.
“흑선에 올라 직접 보고 결정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정에 없던 거래이니만치 자신들도 신중하게 제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래대로 백 명의 계집만을 넘기고 열 명의 조선계집들은 따로 거래할 곳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구에 들지 않고 주산군도에 흑선을 숨겨놓고 있다?”
차갑게 번득이는 혈도방주 마인걸의 시선을 받아내며 범칠은 마주 시린 눈빛을 냈다.
“흑선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자면 당장이라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만, 필요 없는 분란을 만들기 보다는 상황을 주시하며 대처하는 게 낫다 여깁니다. 자칫 계집들에게 손상이 생긴다면 피해는 본방이 보게 되니까요.”
네 말이 맞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마인걸은 허공을 응시했다.
“조선 사대부가의 계집 열이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그런 상품이라면 서창이 아니라고 해도 구매처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계집에게 환장한 고관대작이나 부호들은 부지기수다.
제대로 잘만하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음이다.
“거래는 나와 대면하고 하겠다고?”
“그래야만 믿고 하겠다는 겁니다. 방주께서 직접 계집들을 보고 평가해야 올바른 가격이 나올 것이고 그것이 거래의 기본이 될 것이라면서, 양측이 공정한 거래로 쌍방 이득을 보기 위해선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리한 가격이 아닌 합리적인 선에서 가격제시를 하겠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응해 달라 이거지? 모든 건 물건을 보고 이야기 하자?”
대답대신 신중하고 예리한 눈빛으로 고개를 깊게 끄덕이는 부방주 범칠.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마인걸은 생각했다. 자신이 부방주이던 때를.
‘거스른 물결은 언제고 다시 거스르는 법.’
모반으로 차지한 혈도방의 방주자리다.
이 자리를 가지기 위해 형제와도 같던 전임방주 전위덕을 죽였다.
그 아우 전홍도 죽여 항주만 바다에 던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에 형용하지 못할 소름이 돋는다.
‘범칠, 이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품을까? 실행할까?’
왜 그런지 싸늘한 마인걸의 눈빛에 범칠의 표정이 어색해질 무렵 마인걸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닥칠 일이라면 받아내야겠지.”
의미가 모호한 그 말을 제안의 받아들임으로 해석한 범칠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하면 약속을 잡겠습니다. 주산군도라고 해도 본방의 영역 안입니다. 행여나 그들이 흉계를 품고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얼마든지 제압이 가능합니다. 방주께선 혈뢰오걸을 대동하고 배에 오르시도록 하십시오.”
마인걸은 홍로주를 채운 잔을 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미소 지었다.
* * *
한낮의 태양이 더위를 뿌리는데 바람은 시원하게 그 더위를 몰고 가 준다. 그래도 흐르는 땀에 옷을 적시는 계절, 겨울을 모르는 절강 앞바다를 헤치며 그들이 오고 있다. 혈도방주를 실은 배, 혈기를 펄럭이며 온다.
“확실히 황어사님의 계획이 치밀하기는 합니다, 그렇지요 형님?”
흑선 주변의 휑한 바다를 돌아보며 태웅호가 말하자 왕정은 긴장을 드러낸다.
“혈도방놈들이 허술하게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걸 방지하고자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자고 했지만, 놈들의 영역이니 배를 띄워 달려오는 것은 여반장인 일이다. 분명히 보이지 않는 곳에 다른 배들이 있음이다.”
태웅호는 민대머리를 손으로 한번 슥 문지르고 살기를 드러냈다.
“일이 그리되면 제대로 싸워야겠지요, 퉤, 솔직히 바라는 바올시다.”
태웅호의 살기어린 음성과 왕정의 긴장한 숨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갈 때, 혈도방의 쾌속선은 흑선의 곁에 접근했다.
선교를 내리자 혈도방 무사들이 차분하게 올라왔다.
총관이자 부방주 범칠을 황병기가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미소로 답한 혈도방 부방주 범칠은 제 뒤로 올라선 자의 옆으로 비켜서며 소개했다.
“본방의 방주님이시오이다.”
황병기는 눈을 빛냈다.
범칠이 비켜서며 앞으로 걸음을 낸 사내, 건장한 체격에 짧고 거친 수염이 인상적인 자, 그보다는 눈동자에 깊이 든 흉기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인물, 혈도방주 마인걸이 웃으며 포권한다.
“혈도방주 마인걸이오.”
황병기는 반사적으로 포권했다.
“흑수결 총사의 특명을 받고 온 황병기라 합니다.”
이어내려는 황병기의 말을 가벼운 손짓으로 제지한 마인걸은 본론을 바로 말했다.
“조선 계집들을 우선 봅시다.”
그래야 한다는, 마음에 차지 않으면 바로 돌아서겠다는, 예까지 몸소 행차한 보람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라는, 희언이었다면 각오하라는 위세다.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우선 선실로 드시지요.”
황병기가 정중하게 권하자 마인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집들을 데려오시오.”
황병기의 표정이 경직하던 그때, 한쪽에 석상처럼 서 있던 현산이 움직였다. 황병기에게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다가가 귀에 대고 은밀히 속삭였다.
“지금 죽이겠습니다.”
은밀한 전언을 하는 것 같지만 갑판 위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다.
불과 이장도 안 되게 떨어져 있는 마인걸의 눈썹이 곤두선 건 당연하다.
“뭐!”
마인걸이 반응하는 그 찰나에 현산은 돌아서며 해동도 흑천을 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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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23. 죽여야 할 자는 죽인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