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아침이 밝았고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사제들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대사제를 두고선 제사를 지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대사제가 없어도 제사는 지내야 한다며 제사를 감행했고 광장의 중앙에 제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제단을 향해 가고 있던 오즈번은 생각했다. 제단의 위치는 공교롭게도 자신이 시간을 돌리기 전, 엘리자벳이 사형을 당했던 단두대가 있던 위치였다.
“맘에 안 들어….”
맘에 들지 않았다. 장소를 옮기고자 했지만 이미 대사제는 행방이 묘연했고 카를시아 역시 많은 이들이 성녀의 제사를 봐야 한다며 광장에 제단을 다시 설치했다. 임시로 만든 제단이지만 그 규모는 꽤 컸다.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이렇게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지만 오즈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제사를 기점으로 시간은 돌려질 테니까.’
“내리시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제사를 알리는 정오의 해가 뜨거울 기세로 제단의 위, 번제물을 바칠 제단을 불태우고 있었다. 식의 제물은 형식상 가축을 잡아 태우기로 했지만, 오즈번은 알고 있었다. 이 제사의 진짜 제물이 누구인지.
‘자, 이제 다시 내가 주인공인 세계가 될 거야.’
그렇게 계단을 올라 제단으로 향하는 오즈번이었다.
* * *
“망할…!”
여전히 갇힌 채 버둥거리고 있던 나는 눈앞의 아스칼을 노려보며 욕을 뱉어냈다. 그러나 나의 욕에도 굴하지 않던 아스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재미난 이야기를 늘어놓듯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뭘!”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어떻게든 족쇄를 풀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여길 탈출하는 게 먼저고.
“흐응~ 그렇게 버둥거릴수록 더 죽이고 싶잖아.”
“…무슨 변태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뭐, 마지막일 테니까. 게다가 기억까지 되찾았으니 선물을 하나 줄게.”
느닷없이 선물 타령을 하는 아스칼의 태도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물론 그 눈빛마저 무시한 채 제 가슴팍에 무언가를 꺼내서 나를 향해 던져 주는 그였다. 바닥으로 떨어진 물체는 단도였다.
‘이 단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단도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뭐야? 기억 다 찾은 기념으로 주는 건데 기억을 못 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뭐! 어차피 내 기억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해!”
맞는 말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판국에 무슨 남의 기억을 일일이 다 기억하겠는가. 물론 그녀의 기억이 스며들었고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도 맞았다. 원작의 소설이 결국 엘리자벳의 발악이란 것도 알았다. 그런데 나에게 그 기억을 하나하나 다 곱씹으면서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아쉽네. 14년 전, 진짜 엘리자벳이 가지고 있던 검이었는데.”
“뭐…?”
아스칼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억해 냈다. 엘리자벳의 잃어버린 기억 속 오펄이라는 사내가 ‘반드시 이 검을 간직하세요.’라고 말했던 검을. 엘리자벳이 끝끝내 찾지 못했던 단도를 기억해 낸 나는 아스칼과 검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기억나?”
“네놈이 들고 갔었구나…!”
“맞아~ 괘씸하더라고. 그 검으로 날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야.”
“하…?”
그 모양이 특이해서 찾기 쉬운 줄 알았던 검은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엘리자벳은 자신, 스스로를 검으로 명하며 그 검을 아스칼과 오즈번을 향해 겨눴었다.
‘잠시만.’
『그 진실을 향해 검을 겨눌 때 한 치의 흔들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 너는 알게 될 거야. 왜 네가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내가 왜 죽었어야만 했는지.』
『아아, 가엾은 나의 아가. 내가 미안하구나. 그러나, 기억의 봉인은 스스로 깨야 한다. 그래야지 진실의 검을 가질 수 있을 테니.』
‘진실.’ 저들이 말했던 진실이 엘리자벳의 과거라 치부하고 어떻게든 그 과거를 알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녀의 과거를 찾았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진실의 검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응? 뭐야. 설마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진실의 검을 찾아야지 신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고 지금 나는 진실의 검을 찾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나갈 방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설마. 그게 아니라 아르텐이 말했던 진실의 검을 찾은 것 같아서.”
“풉. 푸하하하하!”
나의 말에 날 조롱하듯 웃어 대는 아스칼이었다.
“이런, 여기는 아무도 못 와. 특히 아르텐은 말이야.”
왜 콕 집어서 아르텐은 오지 못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만 지금 믿을 구석은 신의 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몸을 뻗어 오펄의 검을 쥐려던 나는 입으로라도 그의 검을 물 생각으로 버둥거렸다.
“자, 이제 제사가 시작되었으니 제물을 태워야겠구나.”
그 말과 함께 아스칼은 제 손에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더니 입으로 어떻게든 검을 물려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미친…! 설마 정말 태울 생각이야?! 이세화! 빨리 생각해! 신의 힘을 어떻게 부리는지…!’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무도 신의 힘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입술을 잘게 깨물며 두려워하는 것을 느낀 것인지 아스칼은 불을 피운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나의 목을 잡고선 날 일으켰다.
“…으윽…!”
흡사 목을 조르는 자세로 내 목을 잡은 아스칼의 손아귀 힘에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아스칼의 다른 손에 있던 불이 점점 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만.』
그리고 그 순간 ‘그만.’이라는 말과 함께 아스칼의 불이 꺼지고 날 붙잡고 있던 아스칼의 힘도 약해졌다.
‘툭.’
날 잡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약해진 아스칼의 손은 내 몸을 놓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아스칼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떨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스칼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이 어떻게…!”
이윽고 방의 천장에서 오묘한 빛이 새어 들어오더니 ‘쾅!!’ 거리는 둔탁한 음이 천장을 날려 보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날 비추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빛인지 모르겠다. 그 빛 아래에 무언가 하얀빛이 내 앞으로 떨어지더니 익숙한 뒤태의 사내가 아스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르텐…?!”
푸르른 연 하늘의 머리가 바람에 나부끼듯 찰랑이고 있었다. 내 최애캐라 자부했던 사내가 지금 내 눈앞에서 아스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아스칼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나를 향해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 저, 기억을 찾았어요!! 진실의 검을…! 근데 어떻게 사용하는 줄을 몰라서…!!”
아르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텐은 손을 뻗어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하얀색의 쇠사슬이 아스칼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아르텐은 내 모습을 보고선 짧게 얼굴을 구겼다. 그러곤 내 팔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 냈다.
“…….”
아무 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던 아르텐은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세화 양.”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아르텐의 모습에 나는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실의 검을 찾아 줘서 고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하얀빛이 아르텐을 휘감기 시작했다. 일전에 그가 대사제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보여 주었던 형태의 오라가 아르텐을 감쌌고 이내 그 오라가 걷히자 연하늘의 머리를 가진 사내는 없었다. 엘리자벳과 닮은 적은발의 사내가 고고한 은안을 내비치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아르텐에 의해 몸이 묶인 아스칼이 외쳤다.
“아르켈미스…!!!”
‘……?’
잠시만요. 아르켈미스라니요. 그 제가 알고 있는 아르켈미스 맞나요? 그, 이 세계의 창조주 아르켈미스? 느닷없이 아르켈미스가 왜 나오죠? 잠시만요. 사제님? 아르텐 님? 대사제님? 최애캐님? 아니라고 뭐라 말 좀 해 봐!!
“제가 당신을 이 몸에 빙의시켰습니다.”
“네…?”
아르텐은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그 손을 펼치자 하얀빛이 둥둥 떠다니며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 아이의 부탁이었거든요.”
“부탁……?”
“본디 당신은 이 세계에 태어났어야 할 영혼이었습니다. 저 아스칼에 의해 다른 세계로 튕겨 나간 탓에 당신이 알고 있는 소설 밖의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죠.”
“…예?”
아르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눈을 끔뻑이며 아르텐과 빛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는 아르텐이었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르텐의 표정은.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이곳은 소설 속이었다. 만약 정말 이곳이 다른 세계이고 내가 이 세계에 태어날 영혼이라면 그 책은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이 읽었던 책은 제가 남겨 둔 진실이었습니다.”
“저…. 그… 이해가 잘 가지 않는데….”
“아스칼이 시간이 돌린 것은 알고 계시죠.”
“…아, 뭐…. 네.”
추측만 했을 뿐 정말 시간을 돌렸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시간을 돌린 당사자도 아니었고 시간을 돌렸을 당시의 엘리자벳도 아니었기에 그저 추측만 하고 있었고 실제로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검은 땅으로 걸음을 하던 도중에 납치를 당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 시간을 돌리기 전의 엘리자벳의 기억을 제가 소설로 남겨 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요…?”
“당신이 다시 이 세계에 왔을 때. 알아야 할 진실이니까요.”
“……?”
“엘리자벳은 당신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당신을 이 세계에 빙의시켰고 당신이 읽고 있던 소설은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보여 줄 아스칼과 마몬의 만행에 대한 기록이자 증거였습니다.”
“…….”
“물론, 당신이 읽은 세계의 소설은 달의 뒤편처럼 일부만 보였지만 말입니다.”
“그게 무슨…말이죠?”
“당신도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사연 없는 악녀는 없다.’,‘왜 엘리자벳은 오즈번을 죽이려고 했을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
무언가 아르텐이 말을 하고는 있지만 믿을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이 흘러나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읽었던 소설은 아직 엔딩이 나지 않은 장기 휴재 중인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두고 아르텐이 아스칼과 만행에 대한 기록이자 증거라고 한 것은 그녀가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오즈번을 죽이려고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자 증거이리라. 달의 뒤편처럼 내가 보지 못했던 사실들. 그 사실들은 빙의하면서 느꼈던 기시감이자 의문점들이었다. 사연 없는 악녀는 없다, 말하며 카를시아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즈번을 왜 죽이려고 했을까에 대한 의문은 늘 있었다. 그 해답을 이렇게 아르텐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한마디로 내가 봤던 소설 속 엘리자벳의 행동들이 오즈번의 만행으로 인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단 거잖아.’
여전히 하얀색의 빛을 내뿜는 빛은 내 몸을 빙빙 돌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오펄의 검을 발견하고선 그 검을 향해 다가갔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아르텐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오펄의 검을 손에 쥐고선 나에게 주었다.
“이 검은 엘리자벳의 유품이자 그 아이가 끝까지 찾고 있던 검이죠. 이 검으로 찌르십시오. 아스칼을.”
“…하…?”
“그것이 당신이 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아르텐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이며 아르텐이 쥐여 준 오펄의 검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