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아스칼의 대답이 아닌 아르켈미스의 대답이 들리자 오즈번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가를 치를 시간이라니. 도대체 아스칼은 어디에 있기에 자신의 말에 응답하지 않는 것인가. 이미 기도는 끝났다.
그런데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척을 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제물과 함께 아스칼이 시간을 돌리는 주술만 하면 끝날 일인데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스칼이 시간을 돌리는 주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일 터.
‘아스칼님…!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시간을 돌리는 주술만 한다면…!!’
그리고 그런 오즈번의 간절함이 닿았는지 이번에는 아스칼에게서 제대로 된 응답이 들려왔다.
『나의 성녀…! 아직 제단이라면 주술을 시작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스칼의 전언에 오즈번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돌리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찬찬히 자신을 무시하고 겁박한 사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소를 지었다.
“숭고한 식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기도는 이미 끝났으니까요.”
“…하? 아직도 그 소…….”
잔뜩 짜증이 나는 목소리로 아나이스는 오즈번을 향해 소리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늘에서 검은색의 번개가 아나이스와 카를시아, 아라한의 앞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피어오른 검은색의 연기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아스칼이었다.
“아스칼….”
그런 아스칼의 모습을 먼저 알아챈 아나이스가 이를 빠득 갈았다.
“우리 엘리를 어떻게 한 것이냐!!”
아스칼은 아나이스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자신 손녀의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다면 어떤 반응이려나. 과연 지금처럼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건 아나이스뿐만 아니라 카를시아와 아라한도 똑같았다. 아스칼은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시간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스칼 님…! 기도는 끝났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스칼은 제 손을 뻗어 검은색의 연기로 둥근 원을 만들어 그 누구도 오즈번과 자신을 향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결계를 쳤다. 검은 연기가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아나이스는 자신의 검을 꺼내 그 연기를 향해 내리쳤다. 그 순간, 광장에 있던 수호 기사단들이 모두 자신들의 검을 꺼내 들며 아스칼과 오즈번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엘리자벳의 적은발과 닮은 은발의 사내, 에인도 함께 있었다.
“두 번씩이나 우리의 주군을 잃을 수 없다.”
에인의 말에 기사단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칼과 오즈번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 모습을 보고선 실소를 터트린 아스칼이 아나이스와 에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가 없군. 자신의 손녀가. 자신들의 주군이 사실 다른 영혼이란 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참에 이야기해 주지. 네놈들이 사랑하고 지키려고 하는 엘리자벳 아르엘시아는 죽었다. 빈 껍데기에 불과하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엘리자벳 아르엘시아가 아니야. 그러니 이런 무모한 짓은 네놈들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해.”
아스칼은 적어도 자신의 말에 저들이 흔들릴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상관없었다. 단지 찰나의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기에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검을 더 바짝 잡아 드는 수호 기사단과 에인이었다. 그 와중에 아나이스는 아스칼의 말에 웃음이 터졌는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미친 건가.”
아스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의 표정도 살펴보았다. 아나이스뿐만 아니었다. 카를시아도 아라한도 모두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내려다보며 조소를 내비칠 뿐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안에 다른 이의 영혼이 있다는 것쯤은.”
“뭐…?”
아나이스의 말에 아스칼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과 오즈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듣거라! 죄인, 오즈번 루시엘라의 만행을 이곳에 밝히노라!!”
조소를 내비치며 오즈번을 바라보고 있던 카를시아가 오른손을 들며 외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가 내려 피신하고 있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제사를 지낼 때 모였던 인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오즈번은 카를시아와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다. 이미 비는 그쳤다. 비가 그쳤기에 사람들은 다시 거행될 제사를 보러 나와 있었다.
“…어떻게…!”
아스칼의 뒤에서 상황 파악을 하고 있던 오즈번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황후가 되어야 해!! 내가!! 그래야지 백성들이 내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조아릴 테니까! 신의 사랑을 받은 성녀는 나!! 오즈번 루시엘라라고!』
시간을 돌리기 전, 자신이 내뱉었던 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을 돌리기 전에 엘리자벳을 죽이려고 했던 저 자신은 역으로 엘리자벳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그 죄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웠던 이야기까지 모두 보여 주고 있었다. 오즈번은 고개를 돌려 하얗게 타고 있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하얀색의 불꽃이 제단을 삼킬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자신의 만행을 하나하나 보여 주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엘리자벳이 사형을 당하자 기뻐함과 동시에 시간을 돌려 모든 것을 또 자신의 것으로 두려고 했던 탐욕과 욕심의 악마, 마몬의 모습이 이글거렸다.
『이 세계는 내가 주인공인 세상이야!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네년은 그저 나를 위해 죽는 악녀로 충분해.』
『다시 시간을 돌리게 된다면 14년 전 신전의 간택이 있기 전에 그녀를 죽일 겁니다. 그녀도 악녀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죽은 불쌍한 아이가 더 어울리잖아요.』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하얀색 불꽃이 보여 주는 만행들을 다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 거짓이라 하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오즈번과 아스칼을 노려보며 욕을 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시간을 돌리기 위한 제물이 될 뻔한 이야기에 더 분노했다. 그리고 그런 만행을 바라보며 눈을 지그시 감은 카를시아는 그제야 엘리자벳이 마지막에 했던 말을 이해했다.
‘이제 그 방패막이도 없어지겠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지키려 했던 엘리자벳이 끝까지 자신에게 침묵했던 이유를 깨닫자 밀려오는 후회와 죄책감에 카를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엘리자벳이 혼자 짊어지고 갔을 그 진실에 카를시아는 눈물 흘렸다. 진정으로 엘리자벳이 사랑했던 사내, 카를시아다웠다. 그녀는 스스로 황제파의 히든카드가 되고 방패막이 되면서까지 죽는 그 순간에도 침묵을 지키며 카를시아를 지켰다.
‘아아, 엘리자벳. 나는…! 도대체….’
카를시아의 눈물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이스 역시도 자신의 침묵으로 인해 모든 걸 짊어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엘리자벳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사라진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 아이가 모든 걸 짊어지기 전에 침묵하지 않고 그녀의 방패가 되었더라면 덜 후회했을까.
‘아아, 엘리.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이 할아버지가 늦게 알아서.’
시간을 돌리기 전, 오즈번의 연인이었던 아라한도 똑같았다. 자신이 무시하고 비난하던 이가 사실은 모든 걸 지키기 위해 스스로 검이 되어 죽어 갔다는 걸 목격한 순간, 절망했다. 그런 자신이 이제는 엘리자벳을 사랑한다고 속삭였으니 얼마나 웃겼을까. 오즈번을 믿으면서 엘리자벳의 외침이나 말은 한 번도 믿지 않았던 과거의 저 자신을 후회하는 아라한이었다.
‘당신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디…. 당신께 이 사과가 닿기를….’
수호 기사단도 에인도 광장에 모인 백성들도 모두가. 이제껏 엘리자벳을 악녀라 비난하고 조롱하던 모든 이들이 그녀의 진심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모든 원흉이 성녀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오즈번 루시엘라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마저 깨닫자 모두가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군중의 분노 소리가 거세지자 오즈번의 녹안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아스칼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아스칼… 님…!!”
“나의 성녀, 침착하세요. 어차피 시간은 돌려질 것입니다. 주술은 시작됐으니까요.”
그런 오즈번의 부름에 그녀를 안심시키고 고개를 돌려 제단의 불꽃을 끄기 위해 검은 연기를 쏘았지만,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스칼의 검은 연기를 집어삼킨 하얀색의 불꽃은 아스칼의 만행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간들은 내가 아르켈미스인지 아스칼인지 몰라. 그래서 바보 같은 거지.』
『시간을 돌리기 위해선 많은 제물이 필요합니다. 전염병과 같은 의문사를 한다면 모두가 악녀인 엘리자벳 아르엘시아가 수확제를 지내서 그렇다고 하겠죠. 그걸 노리는 겁니다. 나의 성녀.』
『그 무엇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자신과 같이 창조 받은 인간을 무시하며 뱉은 그 말. 오만과 자만의 신, 아스칼의 말에 백성들은 그런 악신과 하나 된 오즈번에게 더 치를 떨었다. 그 누구도 오즈번의 편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얗게 타고 있던 제단에서 들리기 시작한 전언은 수도뿐만 아니라 제국에 있는 모두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모르크 제국을 멸하려는 악녀, 오즈번 루시엘라를 단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