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49
49화
물론, 지금은 그 소문들이 가짜란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라한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악녀로 악행을 저지를 일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자료 외에, 숨은 진실이. 그 속에 엘리자벳이 있음을 아라한은 직감했다.
“응? 라트? 안 와요??”
“아, 가겠습니다. 그것보다 그 옷을 입으니까….”
아라한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유지한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저 자신이 미소를 지으면 그녀는 부끄러운 듯 여러 가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같이 미소를 짓곤 저를 바라본다. 그 모습이 아라한은 너무 좋았다.
모든 이들이 악녀라 비아냥거려도 그 모든 진실을 아는 저 자신만큼은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맹세하겠지. 그 미소를 위해서라도.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자로서.
‘이제는 당신이 보호받을 차례입니다. 그러니 그대로 웃어 주십시오. 엘리.’
마차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신전은 수도와는 조금 먼 곳에 있었다. 애초에 지역 자체가 다르니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드레스 입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아이고, 엉덩이야.
내가 가뿐하게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자 뒤이어 아라한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참고로 신전은…. 저기 보이시죠?”
아라한은 제 손가락을 산 중턱을 향해 가리키곤 마저 입을 열었다.
“저기를 걸쳐 동굴을 지나….”
“…산을 타고 동굴까지 지나야 해요?”
“설마요. 농담입니다. 엘리 뒤에 있는 길을 쭉 걸어가면 보입니다. 한…. 10분 정도 걸으면 보이지 않을까요.”
“그럼, 저기는 어딘데요.”
“아그리아스 습지대. 엘리가 마셨던 독의 출처죠. 혹 알아본다는 것이 독의 출처일까 봐 미리 말해 드리는 겁니다.”
‘눈치 빠른 녀석.’ 묘하게 눈치가 빠른 아라한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에인을 불렀다.
“에인.”
“예.”
“신전 다녀올 동안 저 습지대 주변을 탐색해 봐.”
“…갑자기요?”
“그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든가 동식물의 흔적이라든가. 뭔가 수상해 보이는 건 다 찾아와.”
나의 명령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인이 마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곳은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아닙니까? 신전의 관할이잖아요.”
“아뇨. 아그리아스 습지대가 있는 저 산은 엄연히 개인 소유의 산입니다. 단지 신전을 끼고 있어서 그리 느껴지지만요. 매년 저 습지대와 산을 신전에서 정화하는 이유는 저 산의 소유가….”
“루시엘라 후작가의 땅이기 때문이겠죠.”
나는 아라한의 말을 가로채며 내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은밀하게 조사하도록 해.”
독은 내가 준비했다고 하지만 너무 상황이 딱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내가 첨가했던 약보다 더 많은 양의 독이 들어갔음이 분명해.
만약에 루시엘라 후작가 중에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이 있다면? 신전에서 매번 정화한다고 하였으니 신전의 사제 중에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면 죽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걸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돌아갈 방법도 알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먼저 산을 향해 사라지는 에인을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라한이 내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이 이상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신전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아라한 공작님께 미리 기별을 받았습니다.”
신전의 입구에 다다르자 유유하게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의 주인이 나와 아라한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아라한에겐 미소를 나에겐 경계의 눈동자를 놓지 않던 사내는 신전 안쪽을 향해 손짓하고는 마저 입을 열었다.
“아직 기도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니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의 옆, 어두컴컴한 복도를 무의식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기시감. 분명 엘리자벳은 이곳에 처음 온 것일 터.
애초에 악녀라고 불리는 그녀가 신전에 올 일은 없었다. 원작과 다르게 공녀가 된다는 설정은 소설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느껴지는 기시감이리라 생각하기로 한 나는 사제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마저 움직였다.
복도 끝, 모르크 제국의 수호신 아르켈미스의 상징인 하얀색 사자가 장식된 문을 열자 정갈하게 정돈된 방이 보였다. 정말 말 그대로 응접실인지 호사스러운 장식품은 보이지 않았고 소파와 테이블만이 중앙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기도 시간이 끝날 것입니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사제가 방문을 닫자마자 아까 느꼈던 기시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의 기억이 드문드문 있던 나에게 신전은 분명 처음 왔을 곳이었다. 그러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데자뷔라고 해야 하나.
“엘리?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아, 아니요.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옆에 있던 아라한을 까먹고 있었던 나는 아라한을 바라보며 어영부영 넘어가려 미소 지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던 아라한이 사제가 준비한 듯한 차를 나에게 권했다.
“차라도 마시면서 기다리도록 하죠.”
“아,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찻잔을 들어 그 물을 바라보자 며칠 전 독을 먹었던 사건을 기억해 냈다. 왜, 그 시녀는 찻잔을 바꿔서 들고 온 것일까. 게다가 적국의 첩자라니. 덕분에 애먼 오즈번만 사형당할 뻔하였다. 그리고 오즈번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그러고 보니 루시엘라 영애는 어떻게 됐나요?”
“아, 그 일이 있고 난 뒤 저택에 근신당했다고 합니다. 뭐, 황실 측에서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루시엘라 후작 쪽에서 꽤 많이 화가 난 모양이더군요.”
“워낙 큰일이긴 하죠. 물론 사람들은 모두 루시엘라 영애도 피해자라 말하겠지만요.”
“저는 영애가 피해자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적국의 첩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가문 소속의 시녀니까요. 게다가 엘리. 그대를 노렸다는 것부터가 이건 우리….”
“황제파에 대한 도전이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요?”
“…하아, 그런 이유도 있지만 정말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사랑 고백 이후 자신의 감정을 더는 숨기지 않던 아라한이었기에 이런 직진남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나는 그저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몇 분 후, 차를 몇 모금 더 마시자 문이 열리고 검은색의 머릿결을 가진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아라한 공작님과 아르엘시아 영애를 뵙니다. 저는 신전의 부사제인 베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부사제님.”
서로 안면이 있는 아라한은 먼저 입을 열며 가볍게 악수를 하였지만, 처음이었던 나는 자신을 베쉬라 소개한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반갑습니다. 엘리자벳 아르엘시아입니다.”
신전이기에 악녀라 불리는 엘리자벳을 꺼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아무렇지 않은 그의 모습에 의아한 것도 잠시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묻는 베쉬의 질문에 답을 시작한 나였다.
“한데 무슨 일이신가요.”
“아, 다름이 아니라 요번에 빈센트 가문이 공작 위를 수여받는다는 것을 들으셨는지요.”
“예, 아라한 공작님께서 영애와 함께 방문하겠다, 말씀해 주신 서신에 적혀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즉위식에 대사제님의 축복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지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니,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봤어. 답 다 나왔네. 설마 저 사제도…. 자문자답하는 스타일인 걸까. 아니면 공작 즉위식인데 왜 아나이스가 아니라 내가 왔냐고 묻는 걸까.
“할아버지께서는 사냥제 때문에 일정이 바빠 제가 대신하여 왔습니다. 또한, 요번 즉위식 때, 빈센트가의 후계자를 선정하게 될 터. 그때에도 사제님의 축복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귀족의 작위 수여식과 후계자 지목 시 신전의 축복이 있어야 함이 분명하지요. 그러나 영애께서는….”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참는다는 뉘앙스로 끊긴 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한마디로 ‘여자가 그런 걸 왜 물어봐?’와 함께 ‘그거랑 네가 온 것이 무슨 상관이야?’라는 느낌이었다. 저들에게 악녀라고 불리는 엘리자벳이 이곳에 왔다는 것 자체가 무슨 죄악인 것처럼 생각하는 걸까.
아니, 진짜 악마도 아니고 사람인데 그냥 악녀라고 불리는 사람이 신전에 오면 ‘아아, 개과천선을 드디어 하는구나!!’라든가 ‘드디어 사람이 되고자 회개하러 왔나?’ 정도는 생각해도 되는 거 아냐?!
찌푸리고 있던 내 표정을 살피던 아라한이 속으로 성질을 내는 나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그 ‘빈센트’ 가문의 차기 가주이자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라서요.”
“……!!”
그런 아라한의 발언에 놀란 듯한 사제가 놀란 표정을 재빨리 감추곤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제가 하마터면 실언할 뻔하였군요. 그러나 지금 대사제님께서는 부재중이신지 오랜지라 대사제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부재중이라고요?”
부사제가 ‘대사제님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자 표정이 심각해진 아라한이었다. 그리고 부사제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였다.
“…젠장. 일이 꼬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