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48
48화
“으어어어어…!!!”
매일 10시에 일어나던 내가 오늘은 8시에 기상을 했으니 이 정도면 피곤할 만했다. 게다가 아라한이 남겨 준 많은 양의 숙제만 생각하면…. 마야에게 들으니 공작이 되면 이것보다 더 많은 일거리가 떨어질 거라는데. 이러다가 악녀로 죽는 게 아니라 과로사로 죽지 싶다. 현세에서도 과로에 찌들었는데 빙의해서까지 과로사로 죽고 싶진 않다고!!
“음. 치장…. 치장…! 그놈의 치장 때문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 하냐고!!!”
‘공녀가 되면 일단 옷치레가 더 늘겠지? 안 되겠다. 어차피 예쁜 미모. 편한 기사복만 입고 다니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야가 오기 전에 후다닥 기사 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는 지난번과 같이 포니테일로 꽉 동여매고 기지개를 켰다. 매일 허리를 아작 내는 코르셋을 안 껴도 된다니!! 비틀거릴 것만 같은 구두를 안 신어도 된다니!! 크으, 이 얼마나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인가!
‘똑똑.’
“들어와.”
‘끼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마야는 이미 환복을 마친 나의 모습에 가히 내가 이곳에 빙의되고 난 후 처음 보는 엄청난 표정으로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아… 아가씨…?!?!”
“뭘 그리 놀라. 마야 손 아플까 내가 미리 입었어.”
“…그냥 코르셋이 싫다고 말씀하시죠.”
“…어떻게 알았지?!”
“그야 매일 코르셋 끈을 당길 때마다 비명 지르시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라서 딱히 반박하지 않은 나는 그저 빙그레 웃음 지으며 마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냥 이대로 가자. 어차피 중간에 아라한 공작님이랑 디저트 가게 가기로 했어.”
“그새 관계가 진전됐나요.”
“…뭐래. 공작님의 누이께서 임신 중이신데 디저트를 먹고 싶으시다나 봐.”
“……??? 공작님의 누이라면 일전에 프레시아 후작님과 혼인하신 그분이요?”
그분이 프레시아 후작과 혼인한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분에 대해 아는 것처럼 대충 맞장구쳐 주자. 소설엔 이러한 세세한 설정까지는 안 나온다고.
“응.”
“그것참, 이상하네요.”
“뭐가?”
“제 친구가 프레시아 후작저 시녀인데 임신 얘기는 하나도 없고 두 분이 워낙 금실이 좋아 요번에는 실리엔 해변으로 휴가 떠나셨다던데요? 아마 한 달 정도는 비울 거라고…. 떠난 지 이제 일주일이라 돌아오려면 한참 멀었어요.”
“…….”
이 양반, 설마 날 낚은 건가. 아니 얼마큼 속여야 속이 편한데!!
“…아무래도 공작님께서 어지간히 아가씨랑 데이트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뭐래.”
“요즘 소문 쫙 퍼졌는데, 모르셨어요?”
“또 무슨 소문. 내가 공작님을 유혹하고 뭐…. 흑마술로 사람을 조종했다, 이런 거?”
“에이~ 설마요. 요번에 쓰러지신 일이 워낙 컸잖아요. 백성들이야 그 사실을 잘 모른다지만…. 그리고 그 전에 꾀병이긴 하지만 앓아누운 적도 있다는 소식이 수도에 퍼져서…. 글쎄, 아가씨가 사실은 마녀가 아니라 병약하고 가녀린 백작 영애래요.”
“…뭐?”
뭐지 이 알 수 없는 헛소리는. 아무 말 대잔치인가. 음, 그런 거라면 나도 잘할 수 있는데.
“거기에 ‘병약한 영애를 두고 싸우는 세 남자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가씨라고요.”
“아니, 병약한 건 둘째 치고 날 두고 싸우는 세 남자는 누구야. 아라한 공작님은…. 짚이는 곳이 있으니까 넘기고. 나머지는 2명은 누구인지 참 궁금하네.”
“그러게요. 아마 폐하와 사제님이 아닐까요? 지난번에 쓰러지시고 나서 혹시 폐하께서 아가씨 안아 드신 적 없었어요? 사제님도 곁에 있겠다며 말하거나…….”
“…어.”
그런 적이 있었나…? 있었다. 그것도 정확하게 기억날 정도로 생생하게!! 내가 깨어났을 때 날 치유해 주며 아르텐은 분명 ‘제가 곁에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즈번의 사형 날짜가 잡힌다고 해서 부리나케 카를시아의 집무실로 가 배 아픈 척 비명을 내다가 그에게 공주님 안기까지 당한 것도. 다 기억한다고!! 아니!! 그걸 보고 어떻게 그런 소문을 만들어 내냐고!! 이 막장 소설 속을 어떻게 할 거야!!
“…자자, 벌써 9시네.”
이 사실을 마야에게 이야기했다가 이야기가 또 어떻게 와전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적당히 넘어가도록 하자. 매우 자연스럽게.
“어머, 벌써 그렇게 됐네요. 어서 나가 보셔요~. 아 참, 후작님은 사냥제 때문에 오늘도 출타 중이셔서 비슈느 님과 동행하라고 명하셨다 하니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응~.”
좋아. 자연스러웠어. 이대로 묻어가자.
“그리고 돌아와서 데이트 결과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젠장. 이럴 때만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라고.’
마야의 말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겨 저택을 나서려는 찰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에인이 나의 모습을 보고는 ‘오!’라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예를 취했다.
“수호 기사단 1부대 대장, 에인 비슈느가 차기 가주이신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아가씨를 뵙니다.”
“아직 즉위식도 안 했는데 벌써 차기 가주니 뭐니 하면 부담스럽거든?”
“에이, 그래도 이젠 공녀님이 되실 텐데 익숙해지셔야죠.”
“그건 그렇지만… 뭐…….”
나는 짧게 머리를 긁적이곤 에인을 바라보았다.
“나 어때?”
“매우 잘 어울리십니다. 역시 아가씨께서는 화려한 드레스보다 검 한 자루를 쥐고 있는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다워요.”
“아부해도 뭐 안 나온다?”
“아부가 아니라 정말이에요.”
진심이 잔뜩 묻어나는 에인의 발언에 나는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잔뜩 있었는데 그것조차 잊은 채 나는 어서 가자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문을 열자 에인처럼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아라한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려던 찰나 나의 모습이 평소랑 다른 것을 인지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애, 그 옷은…….”
“아. 할아버지가 주셨어요. 기사단복인데 이상한가요?”
“…….”
대답 대신 침묵을 일관하던 아라한의 모습에 그렇게 이상한가 싶었지만 빨개진 아라한의 귀를 보고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정도면 중증 아닌가.’
“잘… 어울리십니다.”
힘겹게 뱉어 낸 말에 아라한은 제 얼굴을 숨기기 급급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에인이 귓속말로 나에게 말했다.
“아가씨, 저분. 지난번이랑은 상태가 매우 다른데요? 혹시 이상한 거 드셨나?”
“…하하,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아직은 제국 유일의 공작이니까.”
“칫.”
짧게 혀를 차곤 자세를 고쳐 잡던 에인은 걸음을 옮겨 미리 마차의 상태나 말들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고 겨우 진정이 된 듯한 아라한이 제 손을 내밀곤 에스코트를 하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손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배시시’ 미소를 짓고는 아라한에게 말했다.
“오늘은 에스코트 안 해 주셔도 됩니다.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입은 것도 아니고 힐을 신은 것도 아니니까요. 뭣 하면 제가 라트를 지켜 줄게요.”
“아…?”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다. 본디 남자가 여인을 에스코트해 주는 이유는 혹여나 높은 힐을 신다가 다칠까 봐 혹여나 길게 늘어트린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질까, 염려스러워서 하는 행동이지 않던가.
그러나 오늘의 나는 예비 기사의 느낌이기에 에스코트가 딱히 필요 없었다. 애초에 에스코트받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나는 아라한보다 먼저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엘리자벳의 말에 아라한은 순간 멍해졌다. 자신이 만나 오거나 다가왔던 여인들은 모두 ‘배려’라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을 마치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기에 아라한은 여자들에게 친절하되 적절한 선을 지키며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해 주었다. 그에게 에스코트란 그런 의미였다. ‘익숙해진 배려’의 한 부분.
그런데 그것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도 모자라 저 자신을 지켜 주겠노라 말하는 엘리자벳의 모습에 아라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14년 전, 카를시아를 지키겠다고 말하며 치명상을 입고 죽다 살아난 여인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똑같은 말을 다른 이에게 또 뱉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잠시만.’
아라한은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고작 5살짜리였다. 그런 5살짜리 아이가 검을 휘둘러봐야 얼마나 휘두른다고 적은 그리도 필사적으로 엘리자벳에게 상처를 입혔을까. 자신이 납치범이고 5살짜리가 검을 휘두른답시고 알짱거리면 귀여운 장난이라 여기며 검을 뺏고 기절시키는 정도로 끝냈을 것이다.
애초에 암살이 아니라 납치라는 점에서 적이 원하는 건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몸값이나 다른 무언가를 위한 협상 도구였을 확률이 높건만 엘리자벳도 그렇고 카를시아도 그렇고 상처를 입었었다. 물론 카를시아의 상처는 엘리자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타박상 정도였겠다만.
그래, 카를시아야 8살인 데다가 제국의 황태자니, 기본적인 검술이나 인술을 배웠기에 경고 차원에서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고 아라한은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달랐다.
‘5살짜리 아이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엄청난 치명상을 입었다.’
“…그 말뜻은. 그 아이의 검이 적에게도 위협적이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저들이 노린 건 황태자가 아니라 엘리자벳을….”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린 자신의 말에 아라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어린아이가 위협적이다, 해 봤자 얼마나 위협적이라고 그렇게나 상처를 입혔단 말인가.
아비가 남긴 자료에 따르면 근 보름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고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지만, 아나이스를 통해 엘리자벳이 깨어났다고 연통을 받은 것이 그 사건이 있고 난 뒤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뿐이었다.
그 후, 엘리자벳을 공식 석상에서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악녀가 되어 있었다.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은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남의 남자를 뺏어 적당히 놀아 준 뒤 다시 돌려주는. 그런 파렴치한 악녀가.
그것뿐이랴. 그녀가 사적인 무도회에서 대놓고 후작가의 영애를 헐뜯다 빈센트 후작가에서 상대 후작가의 저택에 엄청난 금액을 위자료로 주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래, 모든 시작은 14년 전이었다. 엘리자벳이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그 이후 변해 간 것도. 악녀라 불린 것도. 모두, 14년 전 그 사건이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