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93
93화
“그것보다 아리아. 그 소설책, 언제 빌려줄 수 있어요?”
“아아! 수도로 올라오면서 들고 왔으니까 숙소에 있을 거예요.”
“흐응, 숙소는 어디예요?”
“아, 요 바로 아랫마을에 있는 숙소인데 의외로 괜찮더라고요.”
수도에 친척이나 지인이 있다면 그들에게 부탁해 잘 곳을 마련해 두었을 텐데 지금, 현재 아타샨 남작가의 상황을 본다면 그러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청렴’이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아니면 사병 요청과 같은 이유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만 처음 사귄 친구를 그런 숙소에 묵게 할 순 없지!
“에인.”
나의 부름에 사냥제를 위해 준비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있던 에인이 정리를 하다 말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제롬에게 말해서 내 손님이 저택에 방문할 예정이니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 놔.”
“…? 아가씨 손님이요?”
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아리아를 바라보는 에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타샨 남작가의 영애인 것을 눈치챈 듯 에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헉…! 엘리,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그냥 빨리 그 책 내용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맘 쓰지 마세요. 도대체 백작 영애의 드레스 자락을 훔친 자가 누구인지 봐야겠어요.”
“역시…!! 엘리도 궁금하죠!! 그러게요…. 도대체 누가 훔쳤을까요.”
‘그러게. 도대체 누가 훔쳤길래 그게 절판까지 되었는지 한 번 봐야겠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에인이 다시 나에게 다가와서는 곧 저택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칠 것 같으니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단장님은 아마, 수확제 문제 때문에 황궁에 입궁해야 할 것 같아서 조금 늦으실 것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응, 알겠어. 에인은 같이 출발하나?”
“네, 저야 아가씨를 지키는 기사니까요.”
“내 검술을 보고도 날 지킨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에인에게 장난을 치자 에인 역시도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키는 역할은 저의 몫입니다?”
“알겠어.”
“친구분께서도 같이 이동하실 건가요.”
“아리아, 괜찮죠?”
“헉…! 물론이죠!!”
아리아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소소한 일상이 좋았다. 문제는 너무 소소한 듯한 일상적인 대화라서 뭔가 찝찝하지만. 원래 소설 속 단조로운 일상은 다음 큰일을 위한 도약인 것처럼 찝찝함을 남기는 불길한 요소라고.
폭풍 전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떡밥은 가득한데 풀린 게 없는 이런 장기 휴재 소설에서는 더더욱.
“엘리? 표정이 안 좋아요.”
“응?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서요.”
“아가씨, 마차 준비가 다 됐다고 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로 이동하자 역시나 화려하고 커다란 하얀색의 마차는 사냥제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자태에 놀란 아리아의 ‘헉……!’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린 것 같지만, 나도 부끄럽다. 창피하다…!! 절대로…. 팔불출 세 남정네가 길을 갈고 결계를 치고 나무를 손질한 건 꺼내지 말아야지.
그렇게 나와 아리아가 마차에 타자 에인이 문을 닫고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엘리자벳이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확인한 오즈번이 제 주변에 있는 영애와 기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후, 그래도 수확제 주인은 루시엘라 영애인데!”
“맞아요! 아무리 공녀라지만….”
“게다가 대사제님께서 두둔하고 섰다지만 빈센트 공녀가 수확제 주인이라니….”
“불안합니다. 아르켈미스 님께서 노하시진 않으실까, 염려스러워요.”
“괜찮습니다. 제가 매일 신전으로 가 기도를 올리고 있는걸요.”
“역시 루시엘라 영애이십니다!”
다들 자신을 땅과 같은 자비로움과 하늘과 같은 포용력을 가진 성녀라 칭송했다. 그런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아직 비어 있는 황후의 자리. 아라한가의 공작 부인보다는 제국의 모후가 더 값어치 있는 이름이거늘. 그것을 알고 있던 오즈번이 속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카를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자신들을 둘러싼 영애와 기사들을 뒤로하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카를시아를 향해 다가가는 오즈번이었다. 원래라면 자신과 첫 춤을 춘 이후,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하였으나 독살 사건이 겹치는 바람에 오찬 자리는 흐지부지되었다.
“올해의 사냥제도 아르켈미스의 축복이 깃들길.”
오즈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카를시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저 자신만이 오즈번의 변화를 눈치챘다고 생각했지만 여기, 한 사람 더.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자가 있었다.
이 모르크 제국의 황제이자 14년 전의 모든 전말을 아는 자.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가 그 주인공이었다.
“제국의 성녀에게 아르켈미스의 축복이 깃들길.”
무미건조하게 뱉은 인사말에도 오즈번은 굴하지 않았다. 눈치가 있는 자라면 그의 말투 속에 숨은 미묘한 ‘살의’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오즈번은 무도회 때와 달리 흥분하거나 놀라움의 연속으로 정신적 타격을 입은 상태가 아니기에 그의 살의를 읽었다. 정확하겐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판’이었으니 굴할 이유가 없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폐하.”
오즈번의 그 말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런 딱딱한 말투로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그렇게 차갑게 한다고 해서 엘리자벳이 악녀라는 사실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는.
그 함축적인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던 카를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찡그리는 정도가 아니라 험악하게 구겨질 정도로 그는 짜증이 났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듯한데. 일전에 초대해 주시기로 하셨던 오찬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화사하게 웃는 오즈번의 얼굴에 카를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함축적인 의미로서 경고와 무언의 압박을 가하던 성녀가 이번엔 웃으면서 오찬 자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오즈번이 어떤 패를 가졌는지 몰라도 자신이 굳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짐이 성녀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이유는 없는 듯한데.”
“아뇨. 있습니다.”
당당하게 뱉은 오즈번의 말에도 카를시아는 이만 물러나라며 그녀를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14년 전.”
“…뭐라?”
고개를 돌려 이만 그녀와의 만남을 끝내려던 카를시아의 손끝이 미묘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14년 전의 사건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이 사건을 아는 자들은 모조리 유배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기억을 잃거나 침묵을 하였기 때문에.
“궁금하신 것 아니십니까?”
“…14년 전의 사건을 밝혀서 좋을 것은 없을 텐데.”
“왜. 그때 제가 성녀로 간택되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아나이스와 아라한에게 들었을 때. 성녀로 간택된 것은 엘리자벳이었지만 엘리자벳과 자신의 납치를 막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 낸 소문으로 그녀가 성녀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즈번이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자신이 그리도 당당히 14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자신이 14년 전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은밀하게 조사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성녀가 아님이 밝혀지는 14년 전 사건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서 좋을 것 없는 오즈번이었다.
“그걸 짐이 왜 알아야 하지.”
“그래야 범인을 찾을 수 있을 텐데요.”
“…….”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여는 오즈번의 말에 카를시아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하, 자비로운 성녀님께서 거래를 제안할 줄은 몰랐군. 원하는 게 뭐지.”
“정확하겐 ‘그걸로 네가 얻는 게 무엇이냐.’ 아닌가요?”
“짐의 말에 대한 의미를 바로 파악하는 걸 보아하니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겠군.”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께서 그리도 칭찬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모레. 정오에, 입궁하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오즈번의 모습이 카를시아는 맘에 들지 않았다. 사실 조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14년 전 사건을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형체의 목소리가 샹들리에가 떨어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말고는.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범인이 귀족이라는 뜻이겠지. 귀족파의 귀족임이 분명했다. 해서 제일 의심하고 있던 자가 ‘아렌 벨루아’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를 파낼수록 나오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깔끔해서 수상할 정도였다. 귀족파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직접적으로 귀족파와 황제파가 정치적 대립을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작았다.
아마, 그 시작이 황태자비 선발 때 갈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황태자비 선발이 있었던 해가 14년 전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오즈번 루시엘라를 황태자비로 두자고 말했던 무리들이 지금의 귀족파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중도파를 주장하던 오즈번 루시엘라를 밀었던 귀족들이 귀족파가 되었다. 그리고 14년 동안 루시엘라가는 중도파로서 그 어떠한 정치적 대립에 나서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야 갑자기 귀족파의 손을 들어 주는 중이었으니까.
14년 동안 조용했던 그들이 왜 갑자기 나서게 된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오즈번 루시엘라를 황태자비로 밀려고 했을까.
엘리자벳이야 황태자비로 밀었던 이유가 명확했다. 개국 공신인 빈센트 가문의 외손녀였으니까. 그러나 루시엘라 가문은 달랐다. 후작이라고는 하나 오히려 수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후작가가 더 많았다.
너무 조용했던 루시엘라 가문의 영애가 14년 전에 갑자기 성녀가 되었다는 소식에 제국민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신기했다. 신성력. 그 미미한 신성력으로 성녀가 되었다고는 무리가 있지만, 신탁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미해도 신께서 인정한 신의 아이라는 뜻이니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루시엘라 가문이었을 텐데.
‘모든 시작은 14년 전이다.’
신전. 신탁. 오즈번 루시엘라.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은 단 하나 ‘아르켈미스’. 그것 말고는 없었다. 아르켈미스를 모시는 신전과 아르켈미스가 직접 대사제에게 내리는 말, 신탁. 그리고 그 신탁으로 아르켈미스가 사랑하는 신의 딸이 된 성녀, 오즈번 루시엘라.
모든 것들 속에 ‘아르켈미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