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32)
살아남은 그대에게 (7)
황실 도서관은 당연히 제국 최대 규모다.
마도서는 동부 마탑 도서관, 교본은 실베니아 아카데미 중앙 도서관, 성서는 성황도의 신앙 도서관.
여러 특수 목적 도서들은 각 서적에 특화된 도서관이 있었으나, 전 분야에 두루 미치는 장서폭은 클로엘 황실 도서관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황실 학자들이 굳이 황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 대현자 실베니아가 굳이 백합궁에서 연구를 이어나간 이유이기도 하며, 지식을 중히 여기는 클로엘 황실의 기조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장미궁 한 켠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 그 으리으리한 크기는 아예 궁전 안에 새로운 궁전이 하나 더 있는 것만 같다.
일반적인 크기의 책장만 수백개다. 둥그런 홀 내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할 정도로 드높은 책장이 둥글게 감싸고 있고, 내부를 아우르는 열람대와 정리용 선반은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근무하고 있는 사서만 수십 명인데, 그나마도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증원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만하면 책으로 산을 쌓아놓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페르시카 황녀가 어렸을 때부터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곳이다.
제국 최대 규모로 구축된 지식의 보물고. 하루에 책 서너권은 너끈히 읽어대며, 역사 문화 종교 경제 지리 마법… 분야를 막론하지 않고 머릿속에 온 분야의 교양을 때려박았다.
이제는 황실의 사서들보다 더 도서관 구조에 빠삭해진 페르시카 황녀다. 이 도서관에 더 이상 모르는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
– 쾅!
밤을 넘어서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다. 도서관 내부는 이미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페르시카 황녀가 촛대의 불빛에 의지해서 도서관 사이를 가로질렀다.
출입이 허가된 시간도 아니며, 화재에 취약하므로 불을 들고 들어오는 것도 엄금이다.
그러나, 당연스럽게 그런 규칙을 전부 무시한 채… 페르시카는 반지의 마력에 의지해서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나아갔다.
최측근인 기사단장 다이룩스는 페르시카 황녀의 지시를 받아 도서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누가 찾아오든 적당히 얼버무려서 돌려보내라는 지시.
영 탐탁지 않은 지시였지만, 다이룩스는 그녀가 지시한대로 가만히 입구를 지키고 서있었다.
믿음직한 문지기를 세워두웠으므로 더 걱정할 것은 없다.
그렇게, 린돈의 반지에 이끌려서 페르시카가 도착한 곳은… 그 거대한 도서관의 구석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나오는 서가였다.
분류가 애매하거나, 내용 자체를 분간하기가 힘든 서적을 따로 모아놓는 별개의 서가였다. 그 특성상 찾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도서관 내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구석에 모여있었다.
숲처럼 이어지는 책들의 행렬을 헤치고 나가, 가장 안쪽 책장에 도달했을 때… 린돈의 반지가 빛이 나기 시작했다.
“…”
페르시카는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촛대를 잡은 손에 미묘하게 떨리는 것 같다. 가슴도 쿵쿵대고 있었다.
그대로 반지를 손에 올려둔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구석에 비치된 책장에서 광휘가 흘러나온다.
-쿠구궁, 쿠궁, 쿵…!
빛이 한 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일순간 풍경이 회오리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그마한 진동과 함께 구석 책장 쪽으로 마력이 쏠리더니,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잠깐 동안 어느새 그 책장은 사라지고 없다.
책장 자체가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 책장 뒤 쪽의 벽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있었다. 페르시카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현자 실베니아의 비밀 연구실.
황태자의 반지가 아니면 들어갈 수조차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극비 중의 극비 공간.
그리고, 두루 존경받던 린돈 황태자를 미치게 만든 원인.
페르시카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일단 연구실의 존재를 알았으니, 여기까지만 확인하고 돌아가서… 클로엘 황제가 돌아왔을 때 보고를 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휙휙 가로저어서 쓸 데 없는 생각을 날려보냈다.
저 연구실 아래에 뭐가 있을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제국에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질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 가장 먼저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오로지 페르시카에게만 찾아온 기회였다.
린돈의 상태를 생각하면 겁부터 밀려올라오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은 채 꽁무니 빠지게 도망부터 치는 것도 안될 일이다.
그래봤자 몇백년 된 연구실이다. 위험한 무언가를 확인하러 가는 것도 아니다.
페르시카 황녀는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어둠 속으로 쭉쭉 뻗어져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다보면 신기할 지경이다. 어떻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런 지하 공간을 만들어 놓았는지…
사실 대현자 실베니아 정도되면 그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공간 끝에 다다르자 커다란 목재 문이 드러났다.
문고리를 슬쩍 당겨보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페르시카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선, 천천히 문을 밀어보았다.
– 화아아악!
순간적으로, 너무 놀란 페르시카 황녀는 눈을 질끈 감을 뻔 했다.
문이 열리는 것에 반응해, 실험실 내부에 불빛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현자가 직접 만든 마공학용품은 과연,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도 제 역할대로 작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인가.
사람이 들어오는 것에 반응해서 연구실 내부가 환하게 밝아지는 과정이 신기하다.
그렇게, 외벽을 따라 달려있는 마력의 성화가 연구실 내부를 밝힌다.
“이… 이건…”
그렇게 대단한 광경은 아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푸근한 느낌이다. 목재 벽을 따라 주루룩 이어져있는 공간은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다.
적당히 황실 내 학자들의 개인 연구실 정도 크기다. 그리고 여러 연구용 탁자들에는 서류들과 서적들, 그리고 대현자 실베니아가 직접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연구일지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한쪽에 세워진 칠판에는 여러 이론과 그 검증 과정을 정리해놓은 듯한 글씨가 빼곡하다.
그리고… 연구실 중앙에는 수정구슬 하나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페르시카는 긴장을 풀지 않고 천천히 나아갔다.
대현자 실베니아의 모든 연구기록은 하나 하나가 소중한 인류의 보물처럼 여겨져, 활자 하나 하나까지 전부 연구 분석의 대상이다.
그런 연구기록이 이렇게 잔뜩 쌓여있다는 것… 학술가들에게는 그야말로 금은보화가 쌓여있는 것보다도 더 황홀한 광경일 것이다.
페르시카 또한 학술에 뜻이 있는 자인만큼, 이 연구실이 얼마나 놀라운 공간인지 잘 알고 있다.
무엇 하나라도 훼손했다간 큰 인류의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천천히 천천히 연구실을 가로질러서 중앙에 소중히 보관된 수정구슬로 향했다.
그 수정 구슬의 정체는… 페르시카 또한 잘 알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주 쓰이는 ‘기록구’다.
자기가 정리한 지식 체계를 나중에 기억하기 쉽도록 저장해놓는 매체에 가깝지만… 기록 효율이 워낙 나쁘고 가격은 비싼데다가 사용 난이도도 높아 그렇게 범용적이진 않다.
실베니아 정도 되면 기록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그 방대한 지식을 다 담기는 힘들기에 차라리 종이와 깃펜을 쓰는 게 나을 터.
실제로 실베니아는 대부분의 연구 기록과 과정을 서류나 책의 형태로 남겼다.
그러나, 굳이 기록구로 남겨놓은 연구 결과가 있다는 것은…
‘이건… 필시 실베니아가 평생을 다해 연구한 내용의 핵심이다.’
핵심 중의 핵심만을 그러모아, 그렇게 담아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지식을 탐하는 자라면 그 누구도 못 본 척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린돈을 미치게 만든 것이 이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밀려 올라왔지만, 차마 페르시카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천천히, 수정구슬에 손을 올린다.
그것은, 실베니아가 성위 마법을 통해 관측해왔던… 미래의 기록들이다.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은 여러 분기점에서 한없이 갈라져 나간다.
갈라지고, 수렴하며, 끝없이 뻗어나가는 미래는 감히 어느 한 개인이 관측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결국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방향으로 뻗어져나가는 경우의 수는… 감히 전부 관측하려고 할 수 조차도 없다.
그것이, 실베니아가 수립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항상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성위 마법의 극에 달해, 세상의 섭리를 꺾는 힘을 손에 넣은 대현자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
아켄섬으로 유배를 당하기 전, 이 황실에서 마지막으로 발견한 것.
– ‘절벽 지점’
모든 방향의 가능성을 전부 검토하고, 모든 미래 흐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감안하더라도… 절대로 이 뒤로 이어지는 미래의 흐름이 없는 지점.
길 끝에 놓인 거대한 절벽처럼. 끝 없는 어둠으로 이어지는 낭떠러지만이 남아있는…
세계가, 끝나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기록을 끝마치고 수정구슬에서 손을 뗀 실베니아는── 웃고 있었다.
그 옆에서 실베니아의 연구 성과를 함께 보고 있던 당시의 리엔펠 황태자는… 공포로 동공을 떨고 있었다.
사람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공포 앞에선 이성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 저항조차도 불가능한 시련은 포기하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세계의 선포와도 같았다. 어쩌면 신의 뜻일지도 모른다.
그네들은 당당히 이야기한 것이다. 너희들의 세계는 여기까지다. 딱, 이 지점까지다.
이유조차도 모른다. 방식조차도 가늠할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이어져 나가야할 모든 미래의 흐름이 뚝 끊겨 사라져 버린다. 암전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그냥 끝나버릴 뿐이다. 그 방식조차도, 관측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실베니아는 그 공포감에 이끌려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인지 세상인지… 어쨌든 뭔지 모를 저 아득한 무언가에게 선언하듯이… 읊조린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식량 하나 구할 수 없는 극지의 땅에서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의 한가운데에서도, 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에서도, 도움 하나 바랄 수 없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언제나 살아남아서 버텨왔다.
언제나 누군가는 답을 찾아, 끝까지 발버둥친 끝에 삶을 이어나갔다.
– ‘재밌네!’
비범(非凡)한 위인과 미치광이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그 사실을 방증하듯, 그 거대한 공포 앞에서도 실베니아는 보란듯이 웃어보였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 다시는 태어나기 힘들다는 비범한 대현자의 눈이, 하늘을 바라보며 영롱하게 빛난다.
*4년에 한 번 치러지는 크레스톨 대축제.
실베니아가 자리해있는 아켄섬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인파들이 몰려드는 시기다.
거기다가 축제의 마지막 날이다. 가장 성대한 행사인 폐막식까지 치러지고 있다.
그야말로 실베니아의 황금기를 상징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아켄섬에 모여 웃고, 마시고, 떠든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으면, 깊은 밤의 어둠속에서 아켄섬만이 밝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축제의 마지막 날인만큼 성대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대륙에서부터 이어지는 맥세스 대교는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곳을 따라서 수십년간 실베니아의 대문 역할을 해준 맥세스 대교에 상인들이 모여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대교를 따라 늘어서 있는 상인들의 노점 행렬을 따라, 아켄섬으로 들어오면 역시 축제를 위한 장식이 잔뜩 달려있는 실베니아의 대문을 볼 수 있다.
간단한 수속을 치르고 대문을 건너가면 입구 광장이다. 생활동과 바로 이어지는 곳이다.
이 광장도 작지 않은 크기다. 외부인들과 더불어서 생활동 상인들이 불을 잔뜩 밝힌 채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다.
축제 기간이라 방문한 외부인들 중에서, 실베니아에 별 접점이 없거나 신분이 대단치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서 그 분위기를 즐겼다.
인파들 사이에서 여러 내기를 걸고 게임을 하거나, 미약한 마법실력을 자랑하며 떠들어대기도 했다.
그렇게 입구 광장을 중심으로 생활동의 골목 구석구석까지… 먹고 마시고 떠드는 사람이 가득하다.
입구 광장을 따라 나있는 대로 방향으로 쭉 들어가보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이용하는 교수동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길이 나있다.
그대로 쭉 나아가다보면 오필리스관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오필리스관까지의 거리는 생활동 기준으로는 그리 멀지 않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은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메이드 장 벨 마이아의 지시 아래에 축제를 즐기고 있는 학생들을 보좌하고 있는 중이다.
오필리스관 앞 장미 정원에서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학생 광장에 가지 않은 학생들끼리 단출하게 모여 환담을 나눈다.
그렇게 멀리서 내려다본 오필리스관의 풍경은, 생활동 입구 광장에 비하면 훨씬 더 귀족적이고 품위 있는 느낌이다.
황족 숙소에서는 클로엘 황제와 페니아 황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굳이 학생 광장에서 열리는 폐막 행사에 나가진 않았다. 중요한 자리이니 만큼 빠지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괜히 국가급 귀빈이 참석해서 자리를 엄숙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니 만큼, 백성들도 학생들도 모두 축제를 즐겨줬으면 했다. 그렇기에 클로엘 황제는 숙소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다음 날 해가 뜨면, 클로엘 황제는 마차를 타고 아켄섬을 뜰 것이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페니아와 환담을 나누고 싶었다.
반면, 셀라하 황녀는 마차를 타고 학생 광장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회유할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도 축제의 흥이 가득했다. 거리에 나와 있는 외부 방문객과 생활동 주민들은 모두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상공에 거대한 폭죽이 여러 차례 터진다.
낮에 떠오른 태양처럼 아카데미를 밝게 비추는 폭죽의 빛은, 은은하고 포근하게 세상을 감싸주었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부모님을 끌고 학생 광장의 한 켠에 앉아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있는 오르테와, 팔짱을 끼고 있는 세일라가 서로 껄껄대며 웃고 있었다.
삐진 부분도 있고, 진이 좀 빠진 부분도 있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예니카는 축제의 열기에 못 이겨 피식 웃어보이고 말았다. 지금은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올려다본 하늘엔 여전히 알록달록한 폭죽이 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르텔 케헬른은 상단 직원들을 이끌고 생활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지막 날인 만큼 상회 매출이 가장 극대화되는 날이다. 그만큼 눈코뜰 새 없이 바빴기에, 비서들이 보고서류를 읊는 걸 귀로 들으면서 상회를 향해 걷고 있었다.
문득 밝게 빛나는 학생 광장 쪽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가, 잔뜩 쌓인 업무량을 생각해보고선 한숨을 푹 쉬고 만다. 예전과는 다르게, 자기도 청춘을 좀 구가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가지게 된다. 그리고는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품었던 자신에게 화들짝 놀라고 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 또한 이 실베니아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루시 메이릴은 트릭스관 옥상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학사 풍경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시끌벅적하고, 열기가 밀려올라오고 있었다. 조용하고 정적인 밤의 풍경도 좋았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밝게 빛나는 폭죽 때문에 밤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좀 불만스럽다. 대충 육포를 씹어넘기며, 괜히 허공에 발길질을 몇 번 해보다가… 이윽고 나른한 얼굴로 난간에 드러눕는다. 초가을 밤의 공기가 코 끝에 아른거려, 제법 기분이 좋았다.
직스 에펠슈타인은 엘카를 이끌고 학생광장으로 왔다. 어지간한 무대는 거의 마무리 되어 있는 상태라 아쉬웠지만, 어쨌든 축제의 마지막을 엘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낭만이 피어오르는 축제의 밤, 그 열기와 함께 엘카를 부축한 채로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은 학생광장 구석에서 오벨관의 외벽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혼자 중앙 무대를 올려다 보았다. 세상 고독하단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으나, 어느새 나타난 엘비라가 그의 귀를 잡아 당기더니 중앙 무대쪽 좌석으로 그를 끌고 간다.
아악 아악,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며, 클레비어스는 그렇게 엘비라에게 쭉 끌려가고 만다.
타냐는 학생 광장의 중앙 무대에 올라와 있었다.
마지막 학생 회장 연설을 마친 뒤, 가장 폭죽이 잘 보이는 무대 위에서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본다.
실베니아의 밝은 하늘이 마치 아득히 먼 풍경처럼 보여서, 타냐는 밤 공기를 한 번 삼키고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순간 만큼은, 모두가 하늘에 밝게 피어오르는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붕대를 칭칭 두른 채, 전투부 훈련장에서 홀로 앉아 있던 다이크 엘펠란.
학생 광장에 이제 막 도착해서, 로브를 벗은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
서류를 잔뜩 들고 트릭스관 건물을 나오고 있던 아니스 헤일란.
술에 잔뜩 취해서 길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칼레이드 교수, 그리고 그를 어떻게든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는 클레어 조교수.
홀로 트릭스관의 집무실에 앉아, 가만히 창밖의 불꽃을 바라보는 부교장 레이첼.
그 외 수많은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폭죽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평화롭고도, 마음이 푸근해져… 잠시 세파의 모든 슬픔은 잊어버려도 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축제의 마력이라고도 불렀다.
평화라는 것은 가장 의식하지 못할 때 가장 화려하게 꽃피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새삼 의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모두가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이 축제의 시기였던 것이다.
학생광장에 앉아있던 에드 로스테일러 또한, 하늘을 올려다 본다.
평화의 가치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아는 사내다.
그렇기에, 눈을 지그시 감고…. 축제의 열기에 가만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작정하고 눈을 감은 채 느끼려 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는다.
평화란, 그런 것이었다.
– 화아아아아악!
물이 거대한 기둥처럼 솟아 올랐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자기가 지금 뭘 본 건지 이해조차도 하지 못했다.
– 투두두두두둑!
솟아오른 바닷물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려오고, 그제서야 거대한 파충류의 발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소는, 맥세스 대교의 바로 옆이었다.
수십년 동안 아켄섬과 대륙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육로 역할을 하던 다리다. 아켄섬은 교역로 자체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자훌 변경백과 이어져 있는 만큼, 해로보다는 주로 육로가 핵심적인 물류 이동 수단이었다.
덕분에 이 맥세스 대교야말로 아켄섬 교통의 요충지이자, 사실상 대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선착장이 있기는 하지만, 거대한 범선이 오갈 정도의 규모는 아니고, 애초에 그 정도 규모의 범선들을 이용할 정도로 아켄섬의 인구가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맥세스 대교의 바로 옆, 바닷물을 헤치고 튀어 올라온 거대한 발은… 파충류의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표면은 거대한 비늘로 덮여있었다.
밤의 어둠처럼 검붉은 기조의 빛으로 이루어진 발. 보기만 해도 불길함이 피어오르는 외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의 불꽃을 은은하게 받아 빛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맥세스 대교 근처의 상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기괴하게 생긴 저 다리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한 답을 내리기도 전에──
– 콰앙!!!!!
단 일격에…
아켄섬과 긴 역사를 함께해온 맥세스 대교는, 마치 장난감처럼 무너져 내렸다.
*- 콰강! 탁!
“우욱…! 후우..”
“페, 페르시카 황녀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왜 그러십니까! 페르시카 황녀님!”
“다이룩스 기사단장…!”
도서관 문을 열고 튀어나온 페르시카 황녀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당장 몸을 가누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무너지듯 몸에 힘을 풀어버린 페르시카 황녀를, 다이룩스 기사단장은 얼른 받쳐들었다.
“지금 당장… 가용 가능한 병력들 다 소집시키거라..! 소속 불문, 그냥 전투력이 있는 황실 휘하 병사들은 전부 다! 한 명도 남김 없이…!”
클레드릭 수도원에서 만났던 사내.
에드 로스테일러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필요하다면, 반드시 아켄섬에 병사를 동원시켜 달라.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어떤 필연에 의한 결과인가. 그것을 지금 시점에서 판단하려 할 필요는 없었으나…
확실한 건, 우연 치고는 너무 절묘하단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필시 무엇인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실베니아가 관측한 미래의 흐름과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르시카 황녀님! 병사에 대한 통솔 권한은…!”
“지금 아바마마는 자리에 안계시고, 셀라하 언니도 페니아도 자리에 없으니까… 지금은 내게 권한이 있다…!”
“단순히 당사자께서 자리를 비우신 것만으로 군대에 대한 통솔권을 주장하실 순 없습니다… 멋대로 이런 일을 한 게 발각된다면…”
“다이룩스. 내가 다 책임질테니까, 그냥 시키는대로 해…! 책임지라면 다 책임질거고, 지나친 월권 행위로 퇴위하게 된다면, 군말 않고 하마…!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지시대로 움직여! 지금 당장! 지체하지 말고!”
“페르시카 황녀님… 이건 잘못하면, 황권에 대한 도전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병사가 다 따르지도 않을겁니다…”
“그럼 따르는 병사들이라도 다 모아! 한 명도 남김없이! 다 긁어모으거라…! 유배를 당하든, 퇴위를 당하든 다 당할테니까… 방금 말했지 않았느냐!”
페르시카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다이룩스의 보조를 받으며 몸을 가누었다.
“최대한 많은 병사를 집결시켜! 지금 당장…! 지금 당장 아켄섬으로 간다…!”
*- 쿠웅
폭죽이 아켄섬 하늘을 수놓는 소리 사이로, 무언가 거대한 폭발음 비스무리한 것이 들렸다.
그 또한 폭죽 소리일 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이윽고 클로엘 황제와 페니아 황녀가 앉아 있는 황족 숙소에는 자그마한 지진이 들이닥쳤다.
– 쿠궁, 쿠구궁…
갑작스러운 대지의 떨림에, 접견실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던 클로엘 황제와 페니아는 소파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버티고 앉아있어야만 했다.
“이건… 윽..”
“다치신 데는 없나요, 아바마마?”
“그래, 괜찮단다. 다만… 별 일이구나. 하필 이런 경사로운 날에, 지진이라니…”
잠시 몸을 가누던 클로엘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리곤 황족 숙소 안에 다른 피해는 없는지 확인하려고, 아무 사용인이나 불러내려던 참이었다.
– 쾅!
그 때,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페니아 황녀의 호위기사 클레르였다.
“클레르 경..?”
감히 예의 없이 황족들이 들어와 있는 방을 확 열어젖히다니. 사안에 따라선 징계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건만, 클레르의 표정이 워낙 다급해서 차마 지적할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클레르의 보고 사항에, 페니아도 클로엘 황제도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방금 보고가 들어온 사안입니다만… 지금 아켄섬 외부로 향하는 유일한 육로인 맥세스 대교가 무너졌습니다. 그 아래에 설치된 물류 통로용 다리도 그 여파로 함께 무너졌다고 합니다.”
“뭐..라고…?”
수많은 세력들이 각자의 위치에 자리해있는 아켄섬에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꽉 꽉 들어차 있다. 자그마한 배 몇 척으로 감당 가능한 인파가 아니다.
육로 없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아켄섬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