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7)
현자의 봉서 쟁탈전 (2)
“에드 로스테일러는 이용가치가 있습니다.”
식사의 양이 많다.
입이 짧은 페니아 황녀는 그 절반도 채 먹지 못한 채 남겼지만, 황족의 권위니 뭐니 하면서 식사 테이블은 언제나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다.
이런 낭비가 아니꼽지만, 그렇다고 단출한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신분이니 복잡한 심경이다.
식사를 마친 페니아 황녀는 교수동의 학생회관 쪽으로 나아가 적당한 벤치를 찾았다. 광장 근처에 테이블이 딸린 목재 벤치. 볕을 쬐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잠시 앉았을 뿐이지만, 그녀가 대동하는 시종들은 얼른 양산을 가져와 그늘을 드리우고, 상비하고 다니는 티세트를 이용해 마법으로 물을 데워서 얼른 뜨거운 차를 내왔다.
“그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내부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지금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적당히 회유하면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더 잘 구슬리면 로스테일러 쪽에 파견할 첩자 역할을 해줄 수도 있습니다.”
클레르는 늠름하게 뒷짐을 지고 서서 차를 마시는 페니아 황녀에게 진언했다. 식사 시간 때부터 쭉 논의해온 이야기가 아직 결론이 나질 않았다.
“…”
오후 수업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
페니아 황녀는 늘어뜨린 백금발을 가냘픈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다가, 문득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봤다.
페니아 황녀의 통찰안은 크레핀 로스테일러를 향해 비명을 지른다.
자애롭고 품위 넘치는 귀족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질척질척하고 어두운 광기가 숨어있다고 귀띔한다.
허나 그 물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딱히 손을 댈 수도 없다. 다만, 현자의 봉서만큼은 절대로 그의 손에 넘어가선 안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다음 주 중에 로스테일러 가문의 협상단이 아켄섬에 도착할 거란 소식입니다.”
“이상하군요. 현자의 봉서를 매각하는 선택은 정말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최대한 외부에 알리지 않고 싶었을 텐데, 제 3자인 크레핀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협상단을 파견했을까요?”
“그 소년… 에드가 보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학사 내부에서 생활하니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지요.”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그는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파문당한 신분이니 더 이상 가문에 충성할 필요가 없을텐데요.”
“제가 그 소년의 입장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인정받아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습니다.”
클레르는 그리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숲의 소년에게 있어서 로스테일러 가문의 휘광은 그리울 만도 했다. 듣기로는 하루 하루 생존해나가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니… 배부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겠지.
‘파문 당한 뒤로 세파에 초연한 것처럼 보였지만, 역시 귀족으로 살았던 세월과의 온도차는 버티기 힘들었던 것일까.’
페니아 황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아이러니한 기분을 느꼈다.
“글쎄요. 그건 아닐 걸요.”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클레르와 페니아 황녀가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을 한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요염한 눈매와 사뭇 장난스러운 입 꼬리는 장난기 가득한 소악마 같다.
평소에 한쪽으로 묶어서 어깨 앞으로 내리던 적갈색 머리칼은 오늘따라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로브 모자 또한 평소 같으면 깊게 눌러써서 그 음영 아래에 표정을 숨겼겠지만, 오늘은 시원스럽게 벗어두고 있었다.
푸른색 장미모양 장식이 달린 머리띠는 그 적갈색 머리칼과 적당히 조화가 되어, 차분하게 내려앉은 느낌을 들게 만든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체불명의 악독한 거상이라기보다는, 꾸밈새 가득한 소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외관에 넘어가 물로 보았다간, 빈틈을 보이는 순간 이빨을 드러낼 자다.
“천한 신분에 황녀님과 찻잔을 맞댈 수 있는 영예를 안아도 될런지요.”
빙그레 짓는 미소.
“…”
페니아 황녀가 눈총을 주자, 시종은 차 한 잔을 더 내와서 맞은 편에 두었다.
최고급 허브의 향취가 물씬 올라오지만, 끝끝내 두 사람은 찻잔에 손을 뻗지 않았다.
엘테 상회 최고의 실권자이자, 나이만 차면 회주의 자리를 꿰차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일컫어지는 희대의 여상 로르텔 케헬른.
그녀와의 담화는 예정된 바가 없었기에, 페니아 황녀는 괜히 긴장이 되었다.
“주제넘은 말일까 걱정이 되는데, 에드 선배님이 로스테일러 가문 쪽에 붙었다는 건 억측이라는 사실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네요.”
“의외네요, 로르텔.”
페니아 황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동공에 비춰진 모습은, 로브 자락을 밀어내고 천천히 찻잔에 손을 뻗어 그 향기를 즐기고 있는 로르텔의 모습이었다.
페니아 황녀는 굳이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당신은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어머나, 그건 억울한 말이에요. 페니아 황녀님. 그렇지 않고서야 왜 황녀님께 이런 진언을 하려고 찾아왔겠어요.”
능청스러움도 저 정도면 예술이다.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이번 봉서 협상에 개입한 것은 에드 선배님이 아니라 제 아버지 엘테의 탓이겠지요.”
“뭐라고요?”
엘테에 대한 소문은 페니아 황녀도 전해 들었다. 실각이 거의 확실시되어, 거의 모든 권력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궁지에 몰렸는데, 양녀인 로르텔은 이렇게 천하 태평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큰 위화감이 느껴졌다.
“엘테 상회가 현자의 봉서를 매입하려 했던 것은 크레핀에게 더 비싼 값에 매각하기 위해서였거든요. 저희 아버지 엘테 케헬른과 크레핀 로스테일러 간에 일종의 협약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뭐, 저는 전혀 몰랐지만.”
“…그렇다면..”
“뭐, 아버지가 실각 당했어도 현자의 봉서를 매입하려는 계획엔 변함이 없지요. 거기에 저희 엘테 상회 쪽에서 들인 시간과 노력이 대단하거든요.”
페니아 황녀는 가만히 앉아서 로르텔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어느 샌가 말수도 줄어들어 있었다.
“슬슬 현자의 봉서를 책임질 ‘감응자’를 갈아치워야할 때가 되었으니, 지금이 그 매입 협상을 하기에는 적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희 엘테 상회 쪽도 바빠지겠어요. 정신 못 차리면 로스테일러 가문에 봉서를 빼앗길테니.”
“이상하네요. 엘테 상회는 결국 현자의 봉서를 매입한 뒤 로스테일러 가문에 매각할 생각 아닌가요? 어찌 보면 두 집단 간에 이해관계는 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데, 어째서 엘테 상회와 로스테일러 가문은 서로 봉서를 매입하려고 경쟁하는 듯 한 구도를 보이는 거죠?”
“그건…. 제가 봉서를 로스테일러 가문에 매각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죠. 제가 지금 상황이 좀 특수해서, 아버지와 연결되어있는 거래처와는 그리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거든요.”
그 말에 페니아 황녀는 말문이 막혔다.
“어쨌든 봉서를 로스테일러 가문에 매각하기로 약정한 것은 저희 아버지지 제가 아니에요. 그나마도 극비리에 체결된 계약이니, 이제 와서 엘테 상회 쪽에 호소해봐야 별 효력도 없겠죠. 그게 크레핀 로스테일러 본인이 직접 봉서 협상에 나선 이유이고요.”
“이런 내부사정을 왜 제게…”
“적의 적은, 아군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로르텔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웃었다.
학사의 재정이 궁지에 몰려있고, 현자의 봉서 매각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사람만 아는 내부 정보다. 거기에 더해 엘테 상회의 심산과, 로스테일러 가문의 입장까지도 전부 털어내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페니아 황녀님은 아무래도 로스테일러 가문을 견제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저희 입장에서는 윈윈구도가 나오잖아요? 로스테일러 가문을 배제하면 저는 봉서를 취할 수 있어서 좋거든요.”
“…”
“저희, 친하잖아요. 아핫. 같은 수업도 많이 들어가는 학우 관계이고.”
송곳과도 같은 미소다. 유용해 보인다고 쉬이 손을 내밀었다간 찔리기 십상이다.
페니아 황녀는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실감하고 있다.
로르텔 케헬른과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은… 거울의 양면에 서있는 관계와도 같아, 아마 죽을 때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뭐어, 애꿎은 에드 선배님이 피해를 볼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후배로서의 걱정이랄까.”
“그 자를… 걱정했다고요?”
“이미 가문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서 새 삶 살고 있는 사람인데, 로스테일러 가문에 붙었느니 뭐니 하는 오해를 사면 억울하잖아요?”
페니아 황녀는 다시금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 소녀가 순수한 선의로 누군가를 도울 생각을 할 리가 없으니, 에드를 옹호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 확실해보였다.
“그래도, 그 소년은… 이용가치가 확실해요.”
현 시점에서 로스테일러 가문의 내부사정을 대략적으로라도 알 수 있을만한 사람은 에드밖에 없다.
실제로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원으로 긴 세월을 살았으니, 아무리 무능하고 거만하기만 한 말단 구성원이었을지라도 최소한의 정보는 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사람을 이용가치로만 판단해 마치 소모품처럼 쥐고 흔드는 것은… 페니아 황녀의 스타일이 아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도움을 요청해보고, 권위에 호소해서 명령을 내려 보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그 때는…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자애의 황녀 페니아이지만, 언제나 이상주의에만 빠져 실리를 그르치지는 않는다.
필요하다면 심장을 차갑게 식힐 때도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페니아 황녀의 대답을 들은 로르텔은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느닷없이 손을 들어서 로브 모자를 휙 둘러썼다.
음영 아래에 얼굴을 숨기고, 고개를 떨군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로르텔 케헬른?”
그게 대체 무슨 반응인가. 뭔가 생각에 빠진 것인가.
어리둥절해 하는 페니아 황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로르텔은 그렇게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화려하게 생긴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로르텔의 어깨에 휙 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르텔은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비둘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 머나…. 본점, 쪽에서 전서, 구가…”
목소리를 떨면서 겨우 말을 이어가던 로르텔이 고개를 들자, 페니아 황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했고, 옆을 지키던 클레르는 피가 거꾸로 솟으려고 했다.
로르텔은 튀어나오려는 폭소를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속이고 이용해먹는다니.”
참지 못한 로르텔이 이어서 말한다.
“누가? 누구를요?”
“네놈! 이런 모독적인….! 지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황녀님께 감히…!”
“페니아 황녀님.”
클레르가 분노했지만, 로르텔은 보란 듯이 말을 끊어버렸다.
로르텔 케헬른은 이미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끝마친 상태다.
그는 다소 궁지에 몰려 있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실 속의 화초로 살아온 페니아 황녀가 그를 이용해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든다.
평소 같았으면 허공에 삽질이나 하는 페니아 황녀를 보며 뒤에서 몰래 폭소나 하고 있었을 터다.
“페니아 황녀님. 이번 건에 한해서 저희는 아군이잖아요. 로스테일러 가문이라는 공공의 적을 일단 이 아켄섬에서 밀어내야지요. 그러니, 정말 진심어린 진언을 해드리고 싶어요.”
“…”
“어중간하게 그를 이용해먹으려 들지 마세요. 역으로 이용당하는 수가 있으니까.”
로르텔은 그리 말하고, 전서구를 챙겨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소 간의 무례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황녀님을 위한 충심에서 나온 조언이니.”
“어딜 가는 거죠, 로르텔.”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요. 잔뜩 꾸미고 왔는데 괜히 로브를 써서 머릿결이 망가졌네요. 에휴. 더 이상 황녀님의 휴식시간을 방해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이만 일어서 볼게요.”
로르텔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부디, 평안하시길.”
“지금 당장 그 무례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황녀님.”
“됐어요, 클레르.”
권위를 세우는 행위를 좋아하진 않지만, 방금은 확실히 무례했다. 페니아 황녀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다른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에드를 대하는 로르텔의 태도가 격변한 듯한 기분이 든다.
기본적으로 로르텔은 상급자를 대할 때 겉으로나마 깍듯한 예우를 해주지만, 그 내면을 보자면 언제나 상대의 그릇을 저울질하는 경향이 있다.
안 그래도 에드 로스테일러의 속내나 평가에 대해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파문 당한 뒤로도 의외로 아카데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고, 이런저런 과목에서 꽤나 우수한 성적을 내기도 하며, 생각보다 건실한 인간이라는 평 또한 종종 들려온다.
거기다가 바로 그 엘테 상회의 여우 로르텔마저도 저런 주의를 줄 정도라면, 정말로 본인의 통찰안이 빗나가고 만 것인가 하는 의심이 또아리를 튼다.
“….”
그렇다면, 조금씩 마음 한편을 타고 진득한 감각이 올라오고 만다.
에드 로스테일러.
그를 파문시켜버린 것은 바로 페니아 황녀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의도했을지라도 그 주지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속을 타고 흐르는 그 감정의 정체는 죄의식이다. 허나 그 크기는 미약하다.
신분의 차이가 막대하고, 피차 간 각별한 관계도 아니다.
그런 자들에게 순간의 판단 실수로 폐를 끼쳤다고 일일이 죄의식에 휘둘렸다가는, 군주로서의 행보에 장애물 밖에 안 된다.
군주라면, 미약한 죄의식 정도는 의도적으로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클레르. 친서를 보내두었지만, 그래도 확인해주세요. 조만간 에드가 황족 숙소에 방문할 수 있도록 제 때 호출해야지요.”
어쨌든 로르텔 케헬른의 움직임도 주시해야할 필요가 있다. 진짜로 무서운 건 그 여자다.
그 여자가 당황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그건 너무 머나먼 이야기인 것 같아, 페니아 황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람을 다루는 군주의 길이란 멀고도 험한 법이었다.
*
“…뭐에요?”
벙찐 얼굴을 한 로르텔이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완전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됐다.”
“안녕, 로르텔.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예니카가 빙그레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찌나 미소가 화사한지, 꽃잎이 휘날리는 것만 같았다.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의 화려한 응접실은 그 깔끔한 모습에 비해 사용횟수가 영 적다.
아켄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세워진 상회 지점을 찾아오는 귀빈은 거의 없으니, 일 년에 너덧번이나 쓰면 많이 쓴 것이다. 이렇게 잘 꾸며놓고 쓰질 않으니 보는 입장에선 아까울 뿐이다.
로르텔과 예니카는 마주보고 호호 웃더니, 세상에서 가장 사람 좋은 미소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죄송해요. 예니카 선배님까지 오실 줄은 몰라서 퓰란산 로즈마리 티를 두 잔 밖에 준비하지 못했네요. 냉수 드실래요?”
“응! 괜찮아! 상회 탕비물자 창고에 잔뜩 쌓여있었던 것 같긴 한데, 매매품이라서 손님한테 내주지는 못하나봐?”
“네, 그렇네요! 오면 온다고 미리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정말 진심으로 준비 해뒀을텐데요. 에드 선배님이랑 단 둘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어서 차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네요.”
“나는 냉수 마시련다. 예니카, 네가 마셔라.”
예니카는 그 말에 빙그레 웃더니 응! 하며 찻잔을 받아들고, 로르텔은 뭐가 그리 아니꼬운지 반달눈을 뜬 채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뭐, 편지 내용은 다 확인하고 왔어. 보아하니 엘테에 대한 이야기였나.”
“네, 맞아요. 엘테 상회 쪽에서 실각 작업은 끝난 모양이긴 한데, 생각보다 쿨하게 실각안을 받아들여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대요.”
현자의 봉서 쟁탈전에서 글래스트 토벌전으로 이어지는 2막의 클라이막스 시나리오는 큰 얼개에서 변하지 않았다.
다만, 엘테의 조기 실각과 크레핀의 참전이라는 이변은 확실히 대처해야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악신 메뷸러의 힘을 다루는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지금 시점에서는 쓰러뜨릴 수 없다.
좀 더 나와 테일리의 스펙이 올라오는 후반부를 위해 이야기를 ‘유예’ 시켜야만 한다.
애초에 크레핀의 대척점에 서서 그를 토벌하는 페니아 황녀는, 지금 시점에서 그 세력이 너무나도 미약하다.
1황녀와 2황녀에게 견제를 받아 황실 권력에 손을 뻗을 수도 없고, 아직 학생회장에 오르지도 못해서 학사 내에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혹시나 에드 선배님한테 해코지가 갈 수 있어서 걱정이 되네요. 그래서 신변에 별 다른 문제가 없는지 확인차 불렀던 거에요.”
“그렇구나. 확실히, 궁지에 몰린 엘테가 무슨 짓을 할지는 알 수가 없으니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겠군.”
“그래봤자 미약해진 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겠지만요. 아 맞다, 마공학 용품 좀 가져가실래요?”
로르텔은 그렇게 말하고 수납장을 열더니 여러 수정구슬과 마법서, 각인용 깃펜과 잉크 따위를 잔뜩 빼내었다.
“오랜 기간 동안 거래 내역이 없는 품목들이라서 그냥 가져가셔도 전혀 부담이 안 된답니다.”
“로르텔. 이거 누가봐두 먼지 하나 안 묻은 신상품들 아니야? 매물을 공짜로 주는 건 상인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지탄받게 된다며.”
“어머나, 예니카 선배님. 물건을 보는 눈썰미가 없으시네요. 잘 봐요, 모두 하자 있는 품목이랍니다.”
예니카는 그 말을 듣고 뽈뽈대며 장식장으로 가더니, 물건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았다. 수정구슬은 작게나마 금가 있는 것이 있고, 깃펜은 구석진 부분이 부러져 있으며, 마법 잉크는 포장이 살짝 열려 흘러나오고 있었다.
“척 봐도 일부러 하자를 만들어냈잖아! 이렇게 반짝반짝한 물건에 이런 하자가 있는 게 말이 돼!”
“뭐, 그거야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니구요. 결국 중요한 건 팔 수 있는 물건이냐 아니냐인 것 아닐까요?”
“…”
“뭐, 에드 선배님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냐 마냐 하는 것도 중요할테구요.”
로르텔이 그리 말하자 예니카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거 고맙긴 한데, 이것도 공짜로 받기는 좀 뭐하고… 아직 저번에 받았던 마공학 용품들 대금도 지불이 안됐잖아.”
“아, 지불은 다음 계약으로 이관했어요. 한 번에 결제 하는 게 받는 입장에서도 편하고, 선배님도 늦게 지불할수록 편하잖아요? 지불 기일은 밀면 밀수록 좋은 법이죠.”
“그렇기야 한데, 지불 기일이 벌써 네 번째 밀리지 않았냐?”
“뭐어, 계약만 꾸준히 갱신하러 와주시면 별로 문제 될 거 없어요. 저희 입장에선 소액이니까.”
빙긋빙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대는 로르텔을 바라보더니, 예니카는 갑자기 볼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냥 빨리 빨리 지불 끝내버리고 계약도 끝내버리는게 피차 편한 거 아냐? 에드도 남은 돈 어떻게 쓸지 계획 세우려면 털어낼 돈은 다 털어 내버려야지.”
“그거야, ‘저희들’이 알아서 논의할 문제 아닐까요?”
“아- 진짜아-!”
애꿎은 바닥을 꾹꾹 밟으며 투닥대는 예니카와, 능청스럽게 흘려넘기는 로르텔을 뒷전으로 한 채 나는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 그건 그래도… 에드가…
– 선배님이 그러시는 데에는…
또 다시, 익숙한 감각이 전신에 스며든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소리들이 마치 머나먼 메아리처럼 들리고, 무중력 상태로 허공을 부유하는 느낌에 몸을 맡기고 정신을 잠시 내려놓게 된다.
그러고 보면, 엘테 상회 방문이 끝나고 나서도 해야 할 일이 아직도 잔뜩이다.
캠프에 말려놓았던 육포를 루시가 손대기 전에 얼른 갈무리 해놓아야 한다.
오두막 내부 청소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의자, 책상, 침대 틀을 들여놓기 전에 마무리 청소다.
침대에 쓸 매트릭스도 하나 만들어 둬야 한다.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현대식 매트릭스를 만드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천을 기워서 그 안에 깃털이나 애매하게 남은 옷감, 잡동사니 직물을 채워넣어 푹신하게 만들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엊그저께 잡아두었던 새끼 사슴도 손질해두어야 한다. 가죽을 뜯어내고 내장을 비워낸 다음 부위별로 잘라 훈연 시키는 작업은 시간을 무지 많이 잡아먹는다.
원소학 수업, 중급 마법 개론 과제도 끝내지 못했다. 마법역사 과제도 남아있었고, 다음 주에 있을 약초학 실습도 준비해둬야 한다.
생각해보면 화살도 바닥이 났다. 내일 등교 시간 조깅할 때 입을 운동복도 잘 말랐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오두막 창문 작업도 마쳐야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땔감도 더 쌓아놔야 한다. 겨울 내내 식량을 보존해둘 방법도 찾아둬야 한다. 제대로 된 방한복을 조달할만한 방법도 알아둬야 한다.
– 에드, 에드!
– 선배님?
천천히 할 일을 정리하고 있자니 또 다시 몽롱한 기분이다.
물속을 유영하는 기분에 빠져, 조금씩 소파에 몸이 파묻혀가는 감각을 느꼈다.
….
…….
[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
그 인간, 예전과는 다르게 정신을 좀 차린 것 같긴 해요.
과묵하게 수업만 받고, 조용히 과제 처리 하다가 귀가하는 생활만 반복하던데요.
기숙사에서 쫓겨났다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요? 이런 외진 섬에서 제대로 된 숙박 시설을 찾기도 힘들 거고, 아예 무일푼일 텐데.
의외로 공부 좀 잘해요. 노력파던데요?
옛날에 재수 없는 모습이 좀 생각나서 가까이 하기는 싫었는데, 성실하고 규칙적인 거 하나는 인정해야죠 뭐.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이었나 싶긴 하던데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인식이 좀 희석 된 건가?
가끔 강의실에서 보는데 한 마디도 안 해요. 진짜 공부만 하는 인간인가봐요. 웬일이래.
“의외로 건실한 인간이었던 걸까.”
개과천선해서 새 사람 되는 흉내를 낼 수 있는 건 아무리 길어도 한 달까지다.
보통 한 달 쯤 지나면 자기 본성대로 되돌아가기 마련이건만, 거진 반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캠프에서 말도 안 되는 생활을 반복해온 것이다.
“…”
황족 숙소 개인 침실.
페니아 황녀는 으리으리한 크기의 개인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슬슬 정말로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캠프에서 우직한 모습으로 낚시를 하던 태도나, 글라스칸 토벌전에서 당황하지 않고 확실하게 정답을 제시하던 모습. 정말로 학업에만 열중하고 있다고 말하는 학생들의 평판. 그를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로르텔의 경고.
그 외에도 직감이나 자잘한 단서가 끊임없이 페니아 황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쩌면, 네 통찰안은 빗나갔을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멀쩡하고 건실한 소년을 가문에서 쫓아내고, 무일푼으로 숲속에서 생존해나가게 만든 자기의 판단 또한… 빗나간 게 되는 것일까.
어쨌든 에드에게는 친서를 보냈다 클레르를 통해 황족 숙소에 한 번 방문할 것을 지시했다.
황족의 명령이니만큼, 필시 에드는 황족 숙소로 올 것이다.
그 때야 말로 그 남자의 속내를 제대로 간파해내자.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하면… 이젠 정말 제대로 인정하도록 하자.
“황녀님.”
“클레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호위대장 클레르가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보고할 것이 있어서 왔을 테고, 그게 무엇인지는 뻔하다.
“내일 일정 정해졌나요? 에드 로스테일러는 몇 시 쯤…”
“황녀님. 아무래도 그는 당분간 방문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죠? 아무리 그래도 황명인데… 개인의 의사로 거절하려거든 그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권위를 세우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페니아 황녀가 친서까지 써서 내린 명령은 황명에 준한다. 거절했다면 이유가 확실히 있을 것이다.
“….과로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항상 철인 같았던 인간이다.
그 소식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 활동과 학업을 무리해서 겸한 끝에 한계에 달한 것이겠지요. 그는 현재 혼수상태입니다.”
허나 성실함에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