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66)
루시 메이릴 (3)
내딛는 걸음마다 낙엽이 튀었다.
반쯤 부유하듯 산을 노닐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중턱이다.
대충 보이는 침엽수의 꼭대기 언저리에 앉아 산을 굽어보았다. 알록달록 물들었던 숲의 색조도 어느새 착 가라앉아있다.
늦가을의 단풍은 그렇게 하나둘 사라지고, 산은 다음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소녀는 멍하니 하늘을 본다.
코를 킁킁대고 숨을 한 번 들이쉬어 보니, 끈적한 습기가 폐에 들러붙는다.
“비가 오려나.”
작게 되뇌어 보았다. 본래 제 목소리보다 훨씬 앳되고 청아한 느낌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 소녀는 자기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각하고 만다. 아 이거 꿈이구나.
고개를 내려서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을 보니, 평소 입고 다니던 아카데미 교복이 아니라 그 옛날 산속을 거닐 때 두르고 다녔던 낡은 블라우스다.
보이는 풍경 또한 아켄섬이 아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제국 북부의 라멜른 산맥지대. 쭉쭉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들 틈바구니로 낡은 오두막 또한 보인다.
이제와서 유년 시절의 꿈을 꾸는 이유는 또 무언가.
굳이 그런 걸 분석할 정도로 생각이 깊은 소녀는 아니다. 다만, 이왕 꾸는 꿈이면 좋은 기억을 되새김질 하고 싶다.
떠오르는 건 저 풍경 속 오두막의 주인이다.
덥수룩한 수염에 자글자글한 주름살, 허리는 구부정하지만 심지만큼은 올곧은 인간이다.
학술가를 자칭하는 자, 하지만 마법사로서도 일류다. 그런 주제에 평소에 하는 것이라곤 장작을 패거나,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벽난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악기를 뜯는 일 따위다.
하나 같이 별 거 아닌 것들이다.
소녀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대마법사. 그가 어떤 생애를 살아왔는가는 소녀에게 있어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이왕 옛꿈을 꾸는 김에 그 영감 얼굴이나 볼까. 그런 생각이 들어 소녀는 가볍게 다리에 힘을 주고 나무를 박찬다.
창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퍼덕 대는 옷자락 소리가 귀를 두들긴다.
재빨리 몸을 날려 오두막 앞에 도달한 소녀는 자연스레 몸을 감아 착지했다.
예전의 그 낡은 오두막 모습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쪽에 예쁘게 나있는 창문을 보니 그림자가 일렁인다. 포근한 벽난로 불빛 앞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소녀를 기다리고 있을 영감의 뒷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걸어 오두막에 다가간다. 그녀답지 않게 괜시리 기분이 들뜬다.
– 투둑. 툭. 툭.
그러나 소녀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쭉 가슴께를 눅눅하게 만들던 습한 공기. 그 복선을 회수하듯, 이윽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져 소녀를 적신다. 눅눅한 물기 때문에 옷이 피부에 들러붙는다. 머리칼 몇 가닥도 볼에 철썩 붙어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잠시간 쏟아지는 빗줄기를 올려다보다, 다시금 오두막으로 시선을 돌린 소녀는 헛숨을 집어삼킨다.
방금까지만 해도 포근해보이던 오두막에 불이 꺼져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던 모닥불 빛도 단 몇 초만에 사라지고 없다.
처마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져있고, 깔끔하던 문고리도 먼지가 자욱하다.
이거 악몽이구나.
자각했음에도 몸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재빠르게 문을 열고 쳐다본 오두막 내부에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다.
어두컴컴한 실내. 눅눅한 공기 사이로 영감이 고개를 조금씩 돌린다.
살점 하나 없는 해골이다. 이빨을 딱딱대며 소녀를 바라본다.
세월이 흘러 이미 뼈는 바스라져있고, 안구가 들어있었어야 할 구멍 사이로 지네가 기어간다.
계속해서 이빨을 딱딱대다 이내 소녀에게 속삭인다. 왜 날 살리지 않았지? 기회가 있었는데 왜 나를 모른체 했지?
소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늘 그렇듯 멍한 눈으로 해골을 가만히 쳐다본다.
해골은 소녀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네 곁에 있는 것들이 영원할 거라 생각 하지 마. 언젠가 나처럼 세월의 풍파에 바스라져 사라지고, 너는 홀로 남아 죽을 날을 세게 될 거야. 상실이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찾아온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리 말한 뒤 딱 하고 부딪힌 채 멈춘 이빨의 모습이 마치 소름끼치게 웃는 것만 같다.
여전히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해골은 조금씩 가루가 되어서 사라진다.
해골은 그렇게 완전히 형태를 잃고, 입고 있던 옷가지만 남아 풀썩하고 의자에 내려앉는다.
-화악!
루시는 눈을 뜨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
장소는 폐관동 203호실이다.
학사는 오필리스관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적어도 다음 학기는 되어야 다시 입사할 수 있을 듯 했다.
그 전까지는 옛날에 쓰던 폐관동을 최대한 호화롭게 치장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반파 전 오필리스관 만큼 고급스러울 수는 없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필리스관 메이드들의 훌륭한 솜씨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 건물이 좀 안좋은 것 빼고는 전체적으로 참을만 하다는 여론이었다.
루시는 식은 땀을 슥슥 닦고는 그대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 뒤 곧바로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새벽공기가 식은땀을 날려보낸다.
생활동 외곽 부분과 교수동 초입부가 눈에 들어온다.
기숙사 통금 시간은 진즉 지났다. 야심한 시각이지만, 루시는 메이드가 억지로 입혀놓은 프릴 잠옷을 벗지도 않은 채 마녀 모자만 얼른 얹어쓴 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온몸에 막대한 마력이 발하고, 순식간에 고위 공간계 마법을 발현해낸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루시는 지금 당장 북쪽숲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대로 순식간에 북쪽숲까지 당도한 루시는 낡은 오두막 앞에 착지했다.
“….”
숨을 한 번 삼키고, 스윽 창문 안을 들여다 봤다. 흔들거리는 벽난로 불빛 앞. 조악한 침대에서 허름한 이불을 덮은 채 잠을 자고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눈에 들어왔다.
이유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와, 루시는 그대로 오두막 외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대로 있자니 캠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어지간한 곳에서는 다 드러누워서 낮잠을 자 본 경험이 있는 루시이기에,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는 캠프의 모습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땔감의 저축량이 더 늘어나질 않는다. 식량도 마찬가지다. 작업대 발 한쪽이 부러졌지만 수리하지 않는다. 훈연기는 작동하지 않은지 한참 됐다. 숲 가운데에 설치되어있어야 할 덫도 죄다 캠프에 전시되어 있다.
이 캠프의 주인은 이제… 캠프와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루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루시는 공허한 기분이 들어, 홀로 다리를 감싸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추적추적한 하늘 또한 루시를 내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그 차분한 말 한마디에, 딱히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 [ 마법 능력 상세 ]
등급 : 능숙한 마법학도 전문 분야 : 원소 공통 마법 : 빠른 캐스팅 Lv 9 마나 감지 Lv 9 불 원소 마법 : 발화 Lv 15 바람 원소 마법 : 바람 칼날 Lv 14 중급 마법이 습득 가능해졌습니다!
정령계 마법 : 정령 감응 Lv 13 정령 이해 Lv 13 정령 현현 Lv 3 감각 공유 Lv 3 정령 슬롯 : 하위 불 정령 머그 감응 단계: 3 정령식 효율 : 좋음 고유 부여 스킬 : 화복의 가호 (일시적 화염 면역 폭증) 폭성 (하급 폭발 마법)
불마법 능력 증대 정령 슬롯 : 비어 있음 새로운 정령 슬롯! : 비어 있음
“슬슬 중위 정령이랑도 계약할 수 있을 걸, 에드. 메릴다가 빨리 에드랑 계약하고 싶다는데, 이대로가면 진짜 가능해질 수도 있겠어.”
날이 많이 추워졌다.
2학기말 평가도 곧 시작이다. 이미 학사 장학생 제도에 신청을 넣었지만, 그래도 성적 장학금을 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학업에 시간을 좀 할애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분야의 단련이 허술해져도 안 될 일이므로, 결국 다시 시간 안배의 중요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령학 분야에는 좋은 스승이 있다는 점이다.
“에드는 성장세가 정말 대단하네. 이미 정령 감응력은 일반적인 초보 정령사들을 상회하고 있구, 그 기본이 되는 마나 감응력도 꽤 수준이 올랐어.”
타닥대는 모닥불 앞, 나무 등걸에 앉아서 정령술을 연습하던 차였다.
적당히 예니카의 코치를 받으며 정령 현현을 반복 숙달하고, 머그와의 감각 공유 또한 능숙하게 될 때까지 익히고 있었다.
숙련된 정령사는 정령과 오감 모두를 공유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가장 중요한 시각만 공유할 수 있도록 훈련 하는게 효율적이라고 한다.
감각 공유는 마나 효율이 별로 좋지 않고, 일정 거리 이상 벌어지면 급격하게 효과가 떨어져서 그 예니카조차도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잘 활용하지 않으니… 약간 계륵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하다.
그래도 익힐 수 있는 건 다 익혀둬야지.
[ 꾸준히 이런 저런 물건에 정령식을 부여하면서 경험을 쌓은 보람이 있군요. 에드 도련님. ]머그가 예니카의 어깨에 앉아서 방방 뛰었다. 그러나 마냥 기뻐보이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뭔가 신경 쓰인다는 듯이 쭈뼛거리고 있는 낌새다.
“그…. 루시… 내가 뭔가 잘못했어…?”
예니카는 어떻게든 빙긋빙긋 웃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대체 얘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는데, 아침부터 루시는 내게 들러붙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도끼눈을 뜬 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해가 중천에 뜨거나 배가 고파지는 게 아닌 이상 움직이질 않는 루시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아침 일찍부터 캠프 구석에 와서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
평소에는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이 이를 악물고 단정한 용모를 유지시켜주는데,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기숙사를 탈출했는지 잠옷처럼 보이는 가벼운 프릴 드레스 하나만 걸치고 있다 살다보면 이유 없이 부지런해지는 날도 분명 있다. 그 팔자 좋은 루시한테도 1년에 하루 이틀 쯤은 그런 날이 있나 보다.
대충 그리 생각하고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려 했건만, 갑자기 내 옷깃을 잡아쥐고는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것이다.
– ‘…뭐냐?’
– ‘…’
뭐 할 말 있냐며 쳐다보면 그냥 멍한 얼굴로 묵언 수행이다. 그렇다고 옷깃을 놔주진 않는다.
이를 악물고 뿌리치기도 좀 뭐하기에 그런 기묘한 상태로 오전을 보낸 와중이다.
나는 모처럼 주말을 맞이해서 아침 일찍부터 단련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슬슬 중급 마법을 익힐 실력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니, 아침에는 중위 마법에 대한 참고 서적을 숙독하며 이리 저리 마력을 휘둘러보았다.
그 와중에도 루시는 내 무릎에 배를 깔고 드러눕더니, 시위라도 하듯이 발을 휘저으며 떨어지질 않았다.
좀 이른 점심을 먹을 때에는 기어이 등판에 들러 붙어 있고, 그 뒤 정령술을 독학하기 시작하자 내가 앉아 있는 나무 등걸 뒤에 등을 맞대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본다.
안 그래도 주말은 바쁘다.
학사 일정에 치이는 평일에 비해서 좀 더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에, 평일 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모두 몰아서 처리하는 날이다.
시간이 남는 방과 후나 자기 전 쉬는 시간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해야할 일들이 많고 시간이 촉박할 때는 집요하게 들러붙는 것이 묘하게 날 놀리는 건가 싶다.
그러다가도 누군가가 나타나면 갑자기 인상을 확 바꾸고 몸을 쭈뼛 세운다.
조깅을 하던 직스가 지나가자, 갑자기 묘한 소리를 내면서 접근하지 못하게 하지를 않나…
단정한 옷과 장신구를 든 벨 마이아가 급하게 찾아와 갈아입히려 들자, 의외로 온순하게 벨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싶어서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보니 뜨겁기는 커녕 차갑다.
“내, 내가 뭐 잘못 했으면 사과할게… 응…?”
그런 묘한 상태로 점심께가 지나고, 예니카가 정령술 숙달 훈련을 도와주러 찾아올 때 쯤 되자 오히려 루시는 더 날이 선 모습이 되었다.
뭔가 예니카를 특별히 더 적대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사실 적개심보다는 공포감에 가까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벌떡 일어나 예니카가 접근하지 못하게 자꾸 가로막는데…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하면 고개를 붕붕 가로저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예니카가 반경 몇 미터 안에 접근하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쳐다보고 있으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벌써 며칠 째 루시에게 적대 당하는 예니카는 그저 억울할 노릇이었다.
저런 태도로 대우받다 보면 뭔가 화날 법도 한데, 애초에 예니카의 천성이 착한 것도 있고, 뭔가 루시가 평소같지 않은 위화감을 풍기는 것도 있어서 어쩔 줄 몰라하고만 있다.
“진짜 뭘 잘못 먹었나봐. 원체 변덕 심한 애니까 이러다가도 금방 화가 풀리겠지.”
나는 그리 말해둘 수밖에 없었다.
루시는 급기야 내 등에 매미처럼 달라 붙어서 예니카를 뚫어져라 째려보고 있었다.
팔다리를 휘감고 저리 가라는 듯이 응시하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제 물건 뺏어가는 걸 막으려는 꼬마 같다.
예니카는 불안한 얼굴로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고 캠프를 떠났다.
*
중위 불 마법 ‘일점 폭발’
발화 주문에서 발전된 마법으로, 시선이 닿는 곳에 마력을 집중해서 꽉 움켜쥐는 것으로 소규모 폭발을 일으키는 중급 마법이다.
화력과 규모는 결국 마력량에 비례하기에, 사용자에 따라서 화상을 입히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도 있고, 대마법사들은 아예 건물을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발화 주문에 비해서 굉장히 소소해 보이는 주문이지만, 괜히 중위 마법인 게 아니다. 일점 폭발의 이점은 그 압도적인 범용성에서 온다.
시전 시간이 길고, 불길이 번져나가는 게 뻔히 보이는 발화 마법은 대처하기 쉽다.
그러나, 목표로 한 지점에서부터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나는 ‘일점 폭발’은 충격량도 압도적이며, 마력의 흐름을 재빨리 캐치해내지 못하면 대처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당한다.
“하루 종일 해도 기초 습득이 안되나… 확실히 중위 마법부터는 습득 난이도가 확 올라가는 게 체감이 되는군.”
마법적 재능이 거의 없는 몸뚱아리이니 만큼 중위 마법을 습득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린다. 원소학 강의 때 어느 정도 예습을 했는데도 이 모양인가.
최적 효율의 훈련법으로 거진 하루 종일 수련했는 데도 스킬창에 이름이 올라올 생각을 안하니, 이쯤되면 나도 지친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지만, 딱히 성과는 없는 것 같아서 괜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에휴… 밥이나 먹자.”
나는 원소학 책을 덮고 대충 주변에 툭 던져두었다.
그리고 무릎 위의 짐 덩어리를 쑤욱 하고 들어올렸다.
루시는 도저히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내가 하루 종일 원소학 책을 읽으며 마력 흐름을 연구하는 동안 기어이 무릎 위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으하악…!”
루시는 조막만한 몸을 쫙 벌려서 기지개를 하더니, 이내 다시금 멍한 얼굴로 내뱉는 대사 또한 여전했다.
“…배고프네.”
“밥이나 먹으러 가라. 곧 오필리스관 학생들 식사 시간 끝난다.”
“응.”
의외로 별 반항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루시는 오필리스관 방향으로 도약하려다가, 문득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무 등걸에 바로 선 채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묻는다.
“있잖아.”
“왜.”
“나 가면 뭐할 거야?”
루시가 이런 질문을 던지다니, 정말로 별일이다 싶다.
나도 슬슬 밥이나 먹으려고 모닥불 터에 장작을 모아놓고 있는 동안, 루시는 지그시 나를 쳐다보았다.
“나야 뭐 밥 먹고 나서 할 일이 있지.”
“할 일?”
나는 고개를 스윽 돌려서 간이 목재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 위에는 글래스트 교수가 건네주었던 비밀 금고 열쇠가 있다.
슬슬 학사의 조사도 마무리 되었고, 글래스트 교수가 허가 없이 조성해놓은 비밀 연구실 입구도 폐쇄되었다.
나는 루시가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도서관에 진입해볼 생각이었다.
일단 진입해서 도서관 상태는 어떤지… 금고 안의 내용물은 뭔지 확인해둬야 했다.
더 이상 미루기도 애매하니, 오늘 밤 움직일 예정이다.
“그 전에 모닥불이랑 벽난로도 체크 해둬야겠지. 슬슬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수도 있어서, 잘못하면 진짜 얼어죽을 수도 있어.”
겨울 방학을 앞두고 있는 시기다.
옷을 잔뜩 껴입었지만, 해가 떨어지고 나면 입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당분간은 머그의 불꽃을 이용해서 이중난방을 유지할 생각이다. 당장 마력을 대량으로 써야할 곳은 없을테니, 땔감을 아끼는 쪽이 현명했다.
만약 덱스관에 입사한다면 이런 걱정도 안해도 되겠지.
덱스관 입사냐, 오두막 생활이냐. 저울의 양팔이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적어도 방학 시작하기 전까지는 확실히 정해야 향후 행동 방침을 설정하기 좋을텐데.
그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는 내 표정을 살피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는…
“같이 가자.”
그런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