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90)
학생회장 선거전 (3)
불가능.
그 세글자 낱말의 무게감이 가슴을 굳세게 짓누른다.
실베니아에 와서 신입생으로 생활하는 동안 타냐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정말로 페니아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면 타냐는 무슨 수를 쓰든 그녀를 이길 수 없다.
황실에서 생활할 때부터 쌓아온 신념 어린 이미지, 클로엘 제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든 그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강대한 인지도, 본인은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신분이라는 불리한 지위이고, 페니아는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두루 지지 받고 있어 기반마저 튼튼하다.
그 어떤 변수가 일어난다고 한들 타냐의 승률은 완전히 제로다.
타냐 로스테일러는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을 이길 수 없다. 이 명제는 절대로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타냐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
현실과 낭만은 엄연히 다른 법. 타냐는 학사생활에 들어가면서 그 사실을 다시금 가슴에 새겼다.
입학하기 전 실베니아에 대해 타냐가 가진 환상과 낭만은 그야말로 상상속에 존재하는 마법의 성 같은 것이었다.
허나, 일단 이루어지고나면 꿈은 현실로 격하 당한다.
언제나 낭만에 갇혀 살수는 없게 되고, 당장 해치워야할 일과 과제들이 어깨 위에 차곡차곡 쌓여나가게 되어있다.
타냐는 차근차근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스스로 깨우친 것은,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점이다.
실베니아에 입학하게 된 것은 경사로울 일이지만, 세상 만사가 다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흘러가기만 하리란 희망은 일찌감치 버려둘 필요가 있다.
‘그래, 분명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것도 많을테고… 마냥 행복한 일만 가득하진 않을 거야. 아무리 실베니아라 하더라도 훌륭한 사람만 있을 거란 보장은 없고, 또 훌륭한 선배님들이 항상 나에게 호감을 가지리란 법도 없지.’
그렇다고 해서 기죽어선 안된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계자로서,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영애로서의 모습을 견지해야만 한다.
이런 곳에서 추태를 드러내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타냐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리 학사 생활이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센 마음으로 잘 버텨나가리라고 진즉부터 다짐하고 있었다.
물론 학사 생활은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오, 타냐. 원소학 실습 나가냐. 수업 받으면서 불편한 건 따로 없고? 슬슬 밤낮으로 기온차가 좀 있던데 감기 조심하고, 언제 엘카랑 같이 차나 한 잔 하자.”
원소학 수업 동기들과 함께 실습 나가는 길에 마주친 직스가 타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자, 동기들이 수군대며 쳐다보았다.
– ‘저거 직스 선배님 아니야? 2학년은 물론이고 학사 전체에서도 강자로 꽤 유명하신 분이잖아…’
– ‘우와 직스 선배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봐, 하긴… 로스테일러가 차녀 정도면 인맥도 평범하진 않을테니까…’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 타냐. 곧 봉서 거래 관련해서 협상 자리 한 번 가질 생각인데 언제쯤 괜찮니? 편한 시간 알려주면 내가 자리 마련해둘테니 한 번 오렴.”
학생 식당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을 때에는 로르텔이 먼저 말을 걸어오더니, 타냐에게 빙그레 웃으며 일 이야기를 했다.
– ‘저 분… 분명 엘테 상회 아켄섬 지부 대표이신 로르텔 선배님 아니야?’
– ‘우와, 타냐양… 엘테 상회의 실권자랑도 안면을 튼 사이였구나.’
– ‘거기다가 협상이니 뭐니 하는 거 보니 개인적으로 거래도 튼 모양인가봐.’
– ‘우와아… 동갑인데… 뭔가 훨씬 더 사는 세계가 넓은 것 같은 느낌이네… 분명 저런 사업적인 이야기나 공적인 자리도 익숙하겠지…’
“안녕.”
학사 수업이 전부 마무리 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길이 갈라지기 전까지 동기생들과 나란히 길을 걷던 타냐를 보고, 졸린듯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좀비처럼 걷던 루시가 스윽 인사를 건넸다.
별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조막만한 손을 슥 흔들어서 인사를 하고, 가던 길로 계속 지나갈 뿐이었다.
– ‘저, 저 사람… 사실상 실베니아 최고의 천재라는 루시 메이릴 선배잖아?’
– ‘나 저 선배님이 말하는 거 처음 봤어. 실제로 말을 하기도 하는구나.’
– ‘누가 됐든 심드렁하게 대해서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는 사람이라던데, 타냐양은 인사까지 주고 받는 사이가 됐나봐. 다른 선배님들이야 그렇다쳐도 루시 선배님한테는 대체 어떻게…?’
– ‘역시 우리 같은 일반 학생들이랑은 인맥의 넓이 자체가 다르구나… 뭐라고 해야할까… 벽이 느껴지네…’
타냐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오필리스관 동기들과 함께 기숙사로 돌아왔다.
근 며칠 간 학사 내에서 타냐의 지위와 평가가 말도 안되게 드높아진 느낌이다.
특히 선배들을 우러러 보는 동기들 사이에서, 여러 유명한 강자들과 두루 인맥을 트고 있는 타냐 또한 덩달아 평가가 격상되어 버린 것 같다.
물론 로스테일러가의 차녀라는 신분만으로도 어디 가서 꿀릴 명함은 절대 아니지만, 학업과 성과에 더 치중해서 사람을 평하는 실베니아 특유의 문화와 겹치니 더더욱 타냐의 위세는 드높아져 갔다.
악역영애로서는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추종자’마저 벌써 생겼다.
오필리스관의 복도를 가로지르는 타냐를 뒤따라 걷고 있는 두명의 소녀, 카일리와 테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황홀한 얼굴로 이야기 했다.
“역시 타냐양. 행동에 기품있고, 인맥도 넓지만, 그렇다고 뽐내지도 않는 모습… 너무 멋져…! 저런 고귀함은 역시 타고나야 하는 거겠지…?”
“정말 저런 기품 어린 모습의 절반만 따라갈 수 있어도 한이 없을텐데…!”
테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카일리가 고귀함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또 웃기는 일이었다.
자기 방 앞까지 도달하자 타냐는 지그시 뒤를 돌아보았다. 보란 듯이 오호호 하고 하이텐션으로 웃어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과한 관심에 기죽은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우후훗. 두 사람 다 오늘 학사 일정 소화하느라 수고했어. 여러모로 피곤했을텐데 슬슬 방에 돌아가서 쉬어.”
“물론이에요, 타냐양! 타냐양도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하루도 파이팅이에요! 어디까지든 따라갈게요…!”
동기생들끼리 굳이 존댓말을 내뱉는 모습에 벌써 위화감이 느껴진다.
“내일도 모레도 열심히 해서 타냐양 같이 기품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힘내야겠어요!”
테리가 그리 말하자, 타냐는 지그시 웃어보이며 이야기했다.
“어머, 좋은 자세야. 나도 물론 부족함 많은 사람이지만, 매일매일 스스로를 갈고 닦다 보면 분명 테리양도 그에 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학생이 될 수 있을 거야. 내일도 힘내자.”
눈에서 반짝반짝 거리는 존경의 빛을 쏴대는 학생들을 뒤로한 채, 타냐는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서 방문에 등을 기댄 채, 식은 땀을 뻘뻘 흘려대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한다.
“나… 아무것도 안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신입생 사이에서 이미 타냐의 팬덤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 어쩌다가 이렇게…?”
하여튼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고개를 들어 책상을 바라보면, 실베니아에 입학하기 전에 써놓은 여러 메모들이 가득했다.
오필리스관에 입주하기 전에 준비해둬야할 물품들, 학사 일정 소화하면서 필요한 학용품들, 따로 더 학습해둬야할 취약 과목들, 학생 사이에서 결례가 되지 않게 스스로 행동에 주의할 점들 등… 실베니아에 입학하기 전에 타냐가 열렬하게 준비하고 생각해두었던 사항들이다.
대부분은 학사 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잘 마무리 되었으므로 거의 쓸모가 없어진 메모들이다. 정리해서 필요 없는 것들은 없앨 필요가 있었다.
그 메모들을 뒤지다보면,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메모들이 남아 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수치. 반드시 배제되어야 할 쓰레기. 실베니아에 도착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가장 먼저 학교에서 치워버려야할 인물.
입학 전의 타냐가 그렇게 평가해두었던 기록들이 한다발이다. 타냐는 그 메모들을 지그시 쳐다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완전히 개과천선 했는지 어떤지는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사람 본성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본가에도 일단은 지켜보고 있겠다고 보고를 했다.
그러나… 지금 타냐가 학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귀한 대우를 받는 것도 대부분은… 바로 그 에드 로스테일러의 동생이라는 점이 한 몫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오라버니의 인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에드 로스테일러를 적대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공격하여 그를 내쫓는 행위는…
“그럼 나는 그냥 영락없는 쓰레기잖아…!”
학사 내에서의 평가가 바닥에 쑤셔박히는 것 이전의 문제다. 그냥 타냐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건 도덕적으로 말도 안되는 행위인 것이다.
제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에드를 적대한다는 정신나간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는다.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왜 내가 쓰레기가 되냐 마냐를 고민하고 있는거지…? 쓰레기는 분명… 내가 아니라 오라버니였는데…???”
타냐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양손으로 머리를 북북 긁어대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된 거야…?? 어쩌다가…??”
*
이튿날, 로스테일러 본가에서 가신 두명이 도착했다. 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오랜만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타냐 아가씨.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기쁩니다.”
“학업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도움 드릴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고귀한 재학생들이 한가득이다.
학생들의 생활을 보조하는 개인 비서나 메이드들을 모두 대동 할 수 있게 허가해줬다가는, 몰려든 외부인력 때문에 학사 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정신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교수동 내부에 개인 비서나 메이드를 대동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신분이 고귀한 학생들의 생활 편의를 돌봐주는 고급 인력 기관,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부서를 따로 두고 있다.
실베니아 내부에서 이런 학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황녀와 성녀, 단 둘 뿐이다.
그렇기에, 원칙대로라면 외부인 신분인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신들이 실베니아 학사에 체류 허가를 받기는 힘들다.
“아버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네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요, 카덱, 녹스.”
이름을 불린 두 가신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어렸을 적부터 봉사해온 정말 믿음직한 심복이었다. 사람을 함부로 쓰지 않는 바로 그 크레핀조차도 믿고 모든 일을 맡길 정도로 신뢰가 두터운 인물들이다.
이런 심복을 아켄섬까지 파견해준 것에 타냐는 깊은 감사를 느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학생 개인 비서로 파견하는 건 학사 차원에서 금지하고 있습니다만, 저희는 사업상의 이유를 대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엘테 상회와의 거래 건은 학사에서도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따라서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이 마무리 되면, 저희는 아마 다시 학사를 떠나야할 것입니다.”
새학기야말로 신입생이 가장 바쁜 시기다.
당장 몰아치는 수업과 행사는 많은데, 타냐는 그 와중에 학생회장 선거전도 치러야하고,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만 해도 타냐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이다. 가문 차원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저 카덱은 봉서 매입 협상 관련해서 시세 정보 규합하고, 엘테 상회 쪽의 예산 상태 정보를 수소문 해보겠습니다. 구체적인 협상 일정도 확정해서 보고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카덱.”
“저 녹스는 타냐 아가씨께서 학업에 집중하시는 동안, 학생회장 선거 관련한 일정을 조율하는 일을 맡겠습니다. 무엇보다 페니아 황녀님의 출마 소문이 도는 만큼, 그 쪽 진영에서 어떤 공약을 내걸지에 대한 정보를…”
“그건… 괜찮아요, 녹스.”
“…예?”
개인 책상에 앉아서 머리칼을 정리하던 타냐는 한숨을 푹 흘렸다.
황금처럼 빛나는 머릿결을 쓸던 손이 잠시간 멈추고, 그대로 창밖을 올려다보자 초봄의 드높은 하늘이 맑게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방금 도착해서 정보가 최신화되어 있지 않나 보네요. 오늘 아침에 새로 나온 소식이 있거든요.”
타냐의 입장에서는 분명 호재다.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하늘로 지르며 환호성을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허나, 타냐는 그렇게 신을 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타냐 본인조차 알 수가 없었다.
*
“페니아 황녀님은 학생 회장 선거에 안나가신대.”
“…뭐?”
이른바 청천벽력이다.
아무런 전조조차 없이 갑자기 나타난 재앙이다.
학생회관의 세 건물 중 가장 커다란 네일관.
작년 1학기 때 예니카가 때려 부숴버렸던 전적이 있지만, 1년 남짓 지난 지금에서야 완전히 복구가 끝나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한참 학기 중의 학생회관은 시장통이나 다름 없다. 학생 행정 업무는 대부분 학생 회관에서 접수를 받는 데다가, 학생 복지 시설도 전부 여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그마한 잡화점이나 다과점도 전부 여기에 몰려있다. 생활동까지 나가서 사먹기에는 거리가 있으므로 남는 시간에 교수동에서 시간을 떼우려는 학생들은 모두 학생회관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얼음이 둥둥 떠있는 감귤 주스 두 잔이 목재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래저래 예니카에게 신세진 것이 많으므로 내가 샀다.
“오늘 황실 비서가 황족 숙소 쪽에서 대표로 공표했다던데…? 몇 시간 전에 있었던 따끈따끈한 소식이야. 다들 수근거리고 있더라구.”
예니카는 주스를 홀짝거리면서 화사한 얼굴로 웃었다. 주스 한 잔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이, 하여튼 뭘 사주는 맛이 있는 소녀다.
“그럼… 공표만 했을 뿐이니까… 번복할 수는 있는 거네…?”
“뭐어, 황녀님을 지지하려 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번복해달라고 하소연을 하더라구.”
나는 미간을 좁히고 그대로 생각에 빠졌다.
4막의 최종 보스, 크레핀 로스테일러.
대륙 최대의 권력가 로스테일러 가문을 잡으려거든, 페니아 황녀 정도 되는 권력자가 뛰어들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로스테일러 가문과 대등하게 신경전을 펼칠 수 있는 집단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일처리가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세간 사람들 대부분은 그를 악인이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의심한다 한들 증거조차 없다.
그런 크레핀의 어둠을 최초로 눈치채고, 처음으로 적대하기 시작하는 자가 바로 페니아 황녀다. 처음에는 직감으로 시작했던 의심이, 학생회장으로서 크레핀과 제대로 조우하기 시작하면서 확신으로 변해나가는 것이다.
또한, 페니아가 학생회장으로서 휘두르는 학사 권력들은 실베니아 아카데미를 노리는 크레핀의 마수로부터 학교를 지켜내는데에 절대적인 이점이 된다. 황실 권력은 막대하긴 하지만, 학사 내부의 섬세하고 미시적인 부분까지 두루 영향력을 미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황실 권력과 학사 권력. 두 권력을 모두 손에 쥐고 나서야 페니아는 비로소 크레핀과의 학사 방어전을 제대로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이 될 것이다.
“흐음…”
크레핀을 잡으려거든 지금부터 페니아 황녀와 로스테일러 가문이 대립각을 세워줄 필요가 있다.
일단 상황이 그렇게만 흘러간다면, 페니아 황녀는 이보다 든든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우군이 된다. 사실 애초에 그렇게 흘러갔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에드.”
한참 생각에 빠져있는데, 면전에 예니카의 얼굴이 확 꽉차게 들어왔다. 예니카는 고개를 쑥 내밀고서 볼을 부풀리고는, 툴툴거리며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 뭔가 고민을 하구, 불안한 표정을 짓네.”
“뭐?”
“잘 들어, 에드.”
예니카는 휙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 자리까지 와서 탁 앉았다.
그리고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나 화났다는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사실 예니카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일종의 시위에 가까운 행동일 뿐이다.
“나도 이제 슬슬 감이 온단말야. 또 에드가 뭔가 무모한 짓을 할 것 같다는 예감 말이야.”
“야… 그건…”
“에드가 뭘 하든 그건 에드 맘이니까, 내가 이거 해라, 저건 하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입장이야. 그래도 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에드 혼자 다치고, 피 흘리고, 그런 건 절대로 용납 못 하겠어.”
예니카는 뾰루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뭔가 하려거든 나한테도 상담해 줘. 뭐가 됐든 도와줄테니까.”
“예니카. 이미 너한테는 여러모로 빚진 게 많은 입장이다. 정령술 관련한 도움이나, 캠프 일이나…”
“그런 건 내가 빚이라고 생각 안하면 빚이 아닌 거야. 내가 당사자잖아.”
능청스러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예니카는 진심이다.
“나는 에드가 쓸 데 없이 다치거나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 그래두 고생 많이하는데 사서 더 힘들어질 필요는 없잖아.”
“…”
나는 잠시간 고민했지만, 지그시 쳐다보는 예니카의 눈빛을 더 모른 체하기는 영 힘들었다.
“나는 페니아 황녀님이 학생회장이 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비단 에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걸.”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예니카는 부드럽게 잘 받아들였다.
“하지만 의외인 부분도 있네. 페니아 황녀님은… 에드한테 되게 못되게 굴었잖아. 에드가 그런 페니아 황녀님을 지지할 거란 생각은 못했어.”
“그래?”
망나니처럼 굴다가 페니아에 의해 파문당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 것은… 사실 자업자득이긴 하다. 당시의 에드 로스테일러는 내가 아니긴 했지만.
“응. 게다가 타냐도 있으니까 말야. 나도 타냐를 지지하려 했거든. 에드 동생이기도 하구, 미안한 일을 좀 하기도 했구, 신입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기도 하구.”
예니카는 땋은 머리카락을 휙휙 감아가며 두런두런 이야기 했다.
“그리고… 당사자가 출마하지 않겠다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다만…”
원래대로라면 페니아 황녀는 학생회장 선거에 아무런 고민 없이 출마했어야 한다.
그리고 타냐와의 피 튀기는 혈투…처럼 보이는 경쟁을 하지만 실상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한다.
타냐와 페니아 사이의 간극은 가볍게 매꿔질 수 없는 수준이다. 일단 출마하기만 한다면 그냥 페니아가 이긴다고 봐도 될 수준이다.
그러나, 대체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출마 자체를 포기한단 말인가.
“최소한, 왜 출마를 안하는 건지 이유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자기확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 쿵.
음료수 잔이 하나 더 테이블에 내려꽂혔다. 그리고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사람은 현재 2학년 마법부 소속인 직스 에펠슈타인이었다.
“확실히 봄이 되니까 낮에는 외투를 입을 필요가 없네요. 어후, 땀이 날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학생회관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외투를 벗어서 한 손에 감고 있는 직스는 음료수를 두어 모금 벌컥대더니, 후우 하고 숨을 푹 내쉬었다.
“직스?”
“반가운 얼굴이다 싶더니만, 보는 눈도 많은데 대낮부터 너무 후끈하신 거 아닙니까. 뭐, 두 분 자유지만…”
직스는 그리 말하며 음료수 컵을 내려놓았다.
그 말을 듣고 예니카는 허리를 휙하고 꼿꼿이 세우더니, 거의 몇십센티 까지 줄어들었던 거리를 다시금 얼른 벌렸다. 그제서야 거리감을 눈치챈 느낌이다.
“응?! 이 정도면 가까운가?! 그렇게 가깝다고 할 정도인가…?! 가, 가깝긴 한가…? 오, 오해 받을만한 거리인가…? 그래도 후, 후끈후끈 하다니 표현이 너무 남사스럽잖아!”
예니카는 자기 얼굴에 휙휙 부채질을 하면서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선배님들 두 분이서 오붓하게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이런 식으로 자리 깔고 끼어드는 것도 예의가 아닌 건 압니다마는…”
직스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번에는 긴가민가 해서 말씀 못드린 사항이 있거든요. 최근에서야 모종의 확신이 생겨서요.”
“뭐?”
“저는 동급생이고, 같이 들어가는 수업도 꽤 있어서 페니아 황녀님 얼굴을 볼 일이 꽤 있지 않습니까?”
직스는 유년 시절을 통째로 북방 초원지대에서 야생의 삶을 살며 보낸 남자다.
지금이야 신사적이고, 예의를 갖출 줄 아는 남자처럼 보이지만, 그건 모두 이슬란 가문에서 살면서 후천적으로 학습한 예절들이다.
인간이기 이전에 야수로서 살았던 삶. 그 삶이 직스에게 주었던 직감은, 인간의 오감들보다 한 차원 높은 영역의 감각인 것이다.
“자기 무리를 잃은 우두머리 늑대를 본 적 있으십니까, 에드 선배님.”
능청스럽던 어조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무리를 죽음으로 몰아본 경험이 있는 우두머리는, 그 눈에 생기가 없어집니다. 새끼 늑대들 특유의… 영롱하고 살의에 찬 눈빛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사냥감을 만나도 사냥하지 않고, 맹수를 만나도 적의를 내비치질 않습니다.”
팔짱을 낀 채 나지막이 이야기를 내뱉는 직스의 말은 모두 경험담일 것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때를 떠올리는 모습.
초원의 한 구석에서 자기 몸집보다 큰 상처 투성이 늑대를 마주한 경험.
공포에 차 덜덜 떠는 손으로 무기를 집어들어 보았겠지만, 큰 의미는 찾기 힘들었을 터.
“대놓고 활을 조준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내 직스는 지그시 눈을 뜨고서는, 조용히 이야기 했다.
“저한테는 페니아 황녀님의 눈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반가운 얼굴이 보이길래 인사차 찾아왔을 뿐입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방해는 무슨. 나도 반갑다.”
“내일은 간만에 봄비가 내린답니다. 기숙사 나오실 때 유념하시길.”
직스는 빈 음료수잔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 인사를 건넨 뒤, 이리저리 팔을 꺾으며 학생회관 출구 쪽으로 떠났다.
괜히 열이 올라왔는지, 자기 얼굴에 슥슥 부채질을 하고 있는 예니카를 옆에 둔 채… 나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최악의 가능성은… 페니아 황녀가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한 적개심 자체를 잃어버린 상황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페니아 황녀가 로스테일러 가문을 상대로 다시금 적개심을 불태울만한 이유를 만들어줘야만 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럴만한 이유를 만들어낼 방법은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 같다.”
“응? 왜 그래, 에드?”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
그가 마신 메뷸러를 미약한 상태로 일찍 소환하게 된 것은, 전방위적인 정치적 압박을 끝끝내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압박의 핵심은 바로 페니아를 필두로한 황실 세력이다. 그 세력 없이 크레핀을 상대하는 상황은… 지금 시점에선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다.
어지간해서는 피해야할 상황이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똑바로 마주해야만 한다.
“어쨌든 내일 비가 온다고 하니까, 물 정령 수련하기에는 괜찮은 환경이겠네.”
당장 움직일 수 있을만한 여건은 안되므로, 일단은 해둬야 할 일 먼저 생각해야겠다.
“이왕이면 바다 근처가 좋겠다. 내일 북쪽 절벽가에서 한 번 중위 정령을 다뤄봐야겠어.”
“응, 나도 원소학 수업 끝나고 한 번 가볼게.”
“그래. 고맙다. 나는 일단 캠프로 돌아가봐야겠다.”
예니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하여튼,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여러모로 예니카에게 빚진 게 많은 입장이었다.
*
“으음.”
코 끝을 킁킁대자 꽃내음이 피어난다. 봄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포근한 햇볕도 그렇고, 뺨을 간질이는 고즈넉한 산들바람도 그렇다. 하나 같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따스한 이불에 파묻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 사박, 사박.
캠프 너머에서 들려오는 풀 밟는 소리.
오두막 지붕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던 소녀는 괜시리 발을 휘적댔다. 육포 몇 조각 입에 문채 소년의 무릎에 드러누울 생각에 콧노래도 흥얼거려본다.
문득 콧잔등에 슬쩍 느껴지는 습기. 특유의 감각은 엇나간 적이 없다.
루시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늘을 다시금 올려다 보았다. 모처럼 봄이건만, 내일은 바깥에 나오기 힘들 듯 하다.
“비가 오려나.”
비는 싫다.
추적추적 몸을 때리는 빗줄기는 괜시리 루시의 기분을 음울하게 만든다. 이왕 비가 올거라면 빨리 지나가는 게 좋다.
루시는 그리 생각하며, 모닥불 근처로 뛰어내려갔다.
타닥대는 불가 옆에 드러누워서, 저 멀리 풀밭을 헤치고 오는 금발 소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괜시리 흘러나오는 콧노래에 손끝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