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죽음으로 향하는 운명
“…그나저나, 목을 축일 만한 게 있을까요?”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이 그를 바라봤다. 메말라 갈라진 입술을 보자, 그녀는 급하게 그를 소파에 앉혔다.
“여기서 쉬고 계세요, 수통을 빌려 올게요.”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먼저 뒤돌아 뛰어간 아델라엔의 뒷모습을 바라본 알렉스는 소파의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몸이 편했다. 그러자 잠기운이 조금씩 찾아왔다. 그러나 알렉스는 애써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잠을 쫓아냈다.
그때, 알렉스의 눈에 한 권의 책이 보였다. 낡은 책의 겉에는 이상한 제목이 활자로 찍혀 있었다.
“황태자 관찰일기……?”
알렉스는 조심스레 책을 펼쳐 촤르르 훑어봤다. 곳곳에는 황태자와 피오나의 모습을 그린 삽화가 있었다.
“…뭐지?”
삽화 속의 두 사람은 소설의 페이지가 뒤로 넘어갈수록 더더욱 가까워졌다. 손을 잡는 것에서 시작해 포옹하고,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자 도저히 책에 눈길을 둘 수 없었다. 남사스럽고 이상한 건 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여자들이 즐겨 보는 연애 소설과 같은 구조와 내용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일종의 암호인가? 그림 속에 단서를 감추고 책의 글자를 조합하는 암호 기법을 이용한 건가?
알렉스는 더욱더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 알렉스의 눈에 한 부분이 들어왔다. 황태자가 신년 무도회에서 피오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악단이 ‘이멜다의 봄’이라는 곡을 연주하자, 황태자가 피오나와 함께 자리를 피하고,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는 내용이었다.
황후가 암살되었던 그때 연주된 곡이 이멜다의 봄. 알렉스의 머릿속에서 순간 스워포드의 보고가 스치고 지나갔다.
‘로피츠 공녀가 이멜다의 봄이라는 곡이 들려올 때까지 있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설마.”
알렉스는 계속해서 책을 앞뒤로 훑어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들을 때는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던 피오나의 말이 조금씩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황후의 죽음도, 몇 개월 전 발발한 전쟁도 과거 사건을 풀어내듯 서술되어 있었다.
책의 내용이 진행되며 나오는 장면들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델라인은 끊임없이 피오나를 향해 모략을 퍼부었고, 결국 많은 이야기가 그러하듯 ‘응징’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당장에라도 책을 덮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정보들로 인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그러나 그의 손은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 끝에 나타난 건.
“…….”
‘매닝햄 대위’의 죽음. 전략적 가치가 없는 위치에서의 허무한 죽음. 그것도 파견 중대 전원과 함께한, 집단 자살이나 다름없는 처절한 죽음이었다.
그때, 그의 귀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델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알렉스의 손에 들린 책이 있었다.
그때, 피오나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자, 그러면… 아델라인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요? 설마, 당신에게까지 모든 걸 숨기고 있는 걸까요?’
‘올해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도, 어쩌면 당신의 처참한 최후까지도?’
알고 있었던 걸까.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눈빛을 읽으며, 어쩌면 피오나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머릿속은 더욱 혼란으로 가득 찼다.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어디까지, 아델라인에 대한 피오나의 말을 믿어야 할까.
어디까지 아델라인을 믿어야 할까, 라는. 평소라면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질문이 머릿속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델라인이니 믿어야 한다, 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잠재우려 했지만, 질문들은 머릿속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델라인의 몸이 순간 크게 떨리는 게 보였다. 몸뿐만 아니라 눈빛도 함께 흔들리는 게 너무나도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눈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무엇에 대한 걱정일까,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직, 그는 알 수 없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조심스레 아델라인을 향해 다가갔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건 확실했는지,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그녀의 고개는 아래를 향했다.
아델라인의 몸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수통을 주웠다. 차가웠다. 아마 자신을 위해 우물에서 새로 떠 온 물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의 앞에서 떨고 있는 아델라인에 대한 생각이 차차 정리되어 갔다.
알렉스는 천천히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녀의 떨림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한줄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델라인. 내게 사랑한다고 먼저 말해 준 아델라인이다. 먼저 자신에게 다가와 주고, 먼저 자신을 믿어 준 그녀다. 그러니 지금은… 제가 그에 보답할 차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찰나의 순간 고민을 한 알렉스는 숨을 잠깐 들이쉰 뒤,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괜찮아요.”
그 한 마디에, 그녀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떨림은 차차 잦아들어 갔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머리를 품에 묻은 채 그녀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삭여 나갔다.
“아델라인이 어떤 걸 숨기고 있었어도, 저는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그럴 사정이 있다면, 제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도 그랬는걸요.”
그는 아델라인의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느릿느릿한 손길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자, 하얗게 질려 있던 그녀의 얼굴도 차차 본래의 색을 찾아갔다.
그리고 품에 얼굴을 묻은 아델라인에게서 낮은 소리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수개월 동안 마음속 한편으로 밀어내고 억눌러 왔던 어두운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참 덧없더군요, 우리들의 죽음은.”
알렉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책에서 아델라인은 피오나를 질시하는 악녀로, 알렉스는 무능하고 게으른 장교로 서술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사람들이 으레 말하는 ‘가치 있는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참 처참하더군요, 우리들의 죽음은.”
세이드의 손에서 장난감처럼 다뤄지다 고통스럽게 죽는 아델라인이나, 무의미한 위치에서 부하들과 함께 끝까지 저항하다 죽는 알렉스나. 결코, 모두가 내심 원하는 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한 서술은, 저주에 가깝게 적혀 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처음에 아델라인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의 심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책 속에 묘사된 자신의 모습은 무능 그 자체였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초면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그것도 무능하고 게으르다 묘사된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얼마나 절박했으면 순순히 믿어 주는 시늉도 안 한 자신이 시키는 대로 안드레이를 집으로 들이고 제가 하라는 대로 했을까.
생각할수록 바보 같았다. 아델라인을 한순간이라도 의심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른 알렉스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등을 감싸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던 한마디 말을 꺼냈다.
“사랑해요, 아델라인. 당신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알렉스는 고개를 숙여,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동시에 그녀도 눈물로 짓무르고 실핏줄로 붉게 변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 그녀는 다시 얼굴을 그의 품에 묻으며 두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포옹을 받으며,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귀에 속삭였다.
“설령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항상 당신과 함께할게요.”
* * *
푸른 물결이 닥쳐왔다. 빠르지는 않지만, 느리지도 않았다. 알렉스는 주변을 살폈다. 지금까지 자라 오며 눈에 담아 왔던 붉은 장벽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밀려오는 거대한 물결에, 두려워 자리를 피할 법도 하지만, 그 누구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붉은 장벽에서 일제히 연기가 터져 나오고, 푸른 물결이 잠시 멈춰 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푸른 물결은 점점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알렉스는 두 손으로도 들기 버거운 탄약 자루를 품에 안고 장벽의 앞을 달려나갔다. 장벽 앞에 탄약포를 고루 뿌리자, 붉은 제복의 병사들은 서둘러 그것들을 주워 입으로 가져가 물어뜯고 장전하기를 반복했다.
그때, 밀려 들어오던 푸른 물결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바람을 타고 귀에 들려왔다.
총구가 겨눠졌다.
그 순간, 알렉스는 뒷목을 잡혀 붉은 장벽 뒤로 끌려 나왔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자그만 몸집을 가진 그는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흙바닥에 긁힌 살갗이 쓰라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방금까지 우뚝 서 있던 연대의 군기가 기우뚱, 쓰러져 알렉스를 덮쳤다.
* * *
알렉스는 슬며시 눈을 떴다. 달그락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렸다. 한겨울같이 춥던 그날의 공기는 어디로 가고, 봄날의 햇살에 따듯하게 데워진 마차 안의 공기만이 그의 살갗을 쓰다듬었다.
“으음…….”
옆을 돌아보자, 아델라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러자 표정이 한층 편안해지는 게 보였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얼굴을 바라본 뒤 머리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염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때, 아델라인의 머리를 묶고 있는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추수제 때 아델라인에게 급히 사 줬던 리본이었다.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알렉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있는 리본을 바라봤다. 하늘색 바탕에 수 놓인 다채로운 색의 자수.
“이 끈이 끊어질 때까지 함께 하리라, 였던가.”
알렉스는 노파가 말해 준 자수의 의미를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리본은 아직 새것같이 멀쩡했다. 물론 미신을 믿는 건 아니었다. 리본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사람 사이를 붙이고 떨어트릴까.
하지만 알렉스는 그 리본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 아델라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본 그녀는 말없이 알렉스에게 몸을 붙였다.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 복잡했던 아침이었기에, 두 사람은 그저 체온을 나누며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델라인은 천천히 입을 열어 알렉스에게 물음을 던졌다.
“던컨 중령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그녀의 물음에, 알렉스는 천천히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머릿속으로 고민하던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옛날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요.”
그는 이즐링턴의 숲이 점점 멀어져 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약간은 지루한, 백마 탄 왕자님도 아름다운 공주님도 없는 옛날이야기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