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어울리지 않는 이름
늦은 저녁, 황후궁 식당.
홀로 식사를 마친 황후는 차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30년 전 즈음이었다. 황후궁의 시녀 중 한 명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7년 전 즈음이었다. 사관학교 생도 중 귀족 출신만을 대상으로 하던 황궁의 임관식이 평민에게까지 확대된 것은.
5년 전이었다. 사랑하는 아들 중 한 명이 머나먼 타향에 묻힌 것은. 그리고, 황태자에게서 ‘라이플맨의 손에 동생이 죽었다’라고 전해 들은 것은.
재작년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라이플맨 장교가, 황궁에 자리 잡은 것은.
황후는 불안해져 오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태연함을 가장하며 차를 천천히 입에 머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찻물을 목구멍으로 넘겨도 가슴속은 여전히 요동쳤다.
한 가지 생각이, 그녀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 내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산책을 하다가 고개를 살짝이라도 들면, 황궁 건물의 지붕에 자리 잡아 라이플을 들고 앉아 있는 라이플맨들이 보였다. 라이플맨 간부들은 황궁에 온 경비대 간부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언제 자신을 향한 비수가 될지, 황후는 알 수 없었다. 그 점이 더욱 황후를 두려움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황후는 애써 감정을 유지하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찻잔의 차를 비워 냈다. 찻잔에 남은 향기를 들이마시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황후의 귀에 들려왔다. 찻잔에서 시선을 떼자, 거친 숨을 내뱉는 시녀가 보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황후의 곁에 다가와 다른 사용인들이 듣지 못하도록 나지막이 속삭였다.
“황후 마마. 침실을 정돈하던 중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시녀가 건넨 쪽지. 그것은 오늘 낮에도 본 폭파 딱지였다. 그러나 다른 점이라면, 뒷면에는 신문지를 잘라 낱자를 붙인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
황후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방에서 물 건너온 도자기 찻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났지만, 황후의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오직 한 장교의 목소리만이, 종이에 적힌 문장을 친절히 읽어 주고 있었다.
[오늘 자정, 5월 궁의 휴게실. 괜히 다른 사람 건드리지 말고 오시지요. 돌려줄 것도 있으니.]* * *
시간이 흘렀다. 3월도 반절이 넘게 지나간 날의 밤은 어느덧 외투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나 외투로 감싼 황후의 몸은 잘게 떨고 있었다. 외투가 없다면 볼품없이 떨리는 옷자락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었다.
랜턴을 들 시녀 한 명만을 데리고 5월 궁으로 가자, 스산한 느낌이 황후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분명 화재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5월 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더뎌져 갔다.
두 사람이 쪽문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끝에 놓여 불을 밝히고 있는 한 도막 양초가 먼저 누군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줬다.
황후는 조심히 그 양초로 다가갔다. 초를 받친 촛대에는 아직 촛농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상대도 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증거. 황후는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며 휴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촛불 하나만이 밝히고 있는 방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촛불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깊고 푸른 눈빛도, 황후의 눈을 향했다.
“오셨군요.”
당당한 표정의 알렉스를 본 황후는 이를 갈며 노기가 담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한 평민 주제에…….”
“앉으시지요, 이야기를 나눌 것이 꽤 많지 않습니까.”
황후를 앞에 두고도, 알렉스는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려드려야 할 물건도 있고.”
“…….”
황후는 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노기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알렉스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다음, 시녀를 향해 말했다.
“나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하지만.”
“나가라고 했다.”
황후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하자, 시녀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 문을 닫았다. 그러자 둘밖에 없는 휴게실은 정적에 휘감겼다.
그 정적을 끊은 건,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찔리는 게 많으십니까?”
달그락.
알렉스의 손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황후 앞으로 굴러갔다. 황후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닥에는 마도구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황후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황후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군사 시설에 대한 도청 시도는 중범죄입니다.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황실의 재산과 건물을 관리하는 게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아, 그렇다면 황후 마마께서 관사를 제공하실 때 동의하셨던 사항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알렉스는 입꼬리를 살짝 틀어 올리며 황후를 향해 말했다.
“법 조항들과 판례들을 조금 훑어봤습니다. 그러니 조금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하더군요. 황족과 황후가 법의 처벌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명시적인 단서가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알렉스의 말에, 황후는 독기 어린 눈빛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뭐, 결혼하고 애까지 딸린 중대원들에게 시녀를 접근시킨다든지… 하는 건 묻지 않겠습니다. 입에 담긴 조금 추하잖습니까?”
황후궁의 시녀들이 고의적으로 중대원들에게 접근한 일까지 언급하자, 황후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점점 두려움이 커지며 황후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 이 몸을 추궁하는 건가?”
“추궁당할 짓을 안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후 마마.”
그는 다리를 풀고 황후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하며 옅은 살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베른 이후로 제 인내심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서. 서로 주의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알렉스의 목소리와 눈빛을 마주한 황후의 몸이 크게 떨렸다.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황후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러나 마치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려는 듯, 황후는 얼굴을 붉히며 성을 냈다.
“감히, 근본도 없는 네가 이 제국의 황후에게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냐!”
“먼저 할 짓 못 할 짓 가리지 못한 건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알렉스는 황후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황후를 응시했다. 잠시 알렉스가 입을 다물자,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알렉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 마마께서 멀쩡히 숨 쉬며 지금의 영화를 누리실 수 있는 것이 누구 덕인지, 굳이 제 입으로 말해 드려야겠습니까?”
“공을 치하해 주는 것을 바라는 게냐?”
황후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냥 황후 마마와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고, 제 주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항상 먼저 선을 넘으시는 건 황후마마이시더군요.”
알렉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바깥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사뭇 뜨거워진 방 안의 공기를 식혔다. 찬 바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힌 알렉스는 말을 이어 나갔다.
“황후 마마께서 저에게, 그리고 제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뻗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얼굴 붉힐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얼굴이 원래의 온도를 되찾자, 알렉스는 창문을 닫고 뒤를 돌아 황후를 향해 질문했다.
“혹시, 아직 호더빌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겁니까.”
알렉스의 말에, 황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를 바라보는 황후의 눈에는 증오와 한이 섞여 있었다.
“네, 네가 감히……! 네가 어떻게!”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간 건지, 팔걸이를 쥔 황후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 손을 슬쩍 본 알렉스는 창틀에 몸을 기대며 황후의 눈을 응시했다.
“제게 원한을 돌려 마음이 편해지신다면야 몇 번이고 그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지켜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돌연 번뜩이는 눈으로 황후를 바라봤다.
“그 감정이 행동으로 변해 선을 넘고, 그 행동이 제 주변 사람들을 상처 입히면.”
알렉스는 한 발짝, 황후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저도, 제가 가진 모든 수단으로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민 주제에, 내게 맞서겠다는 것이냐?”
황후의 물음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경보병 대위, 알렉스 매닝햄으로서는 많이 힘들겠지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알렉스는 천천히, 황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만.”
그는 황후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목소리의 크기를 죽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고작 반 발자국 사이로 좁혀지자, 알렉스는 황후의 귀에 입을 가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알렉스… 베르크. 라면?”
주어도 없이 의문 부호로 엉성하게 끝맺은 문장. 그러나 황후는 눈을 부릅뜨며 뒤로 몸을 젖혔다. 알렉스는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꽤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 시나리오는?”
알렉스의 말에, 황후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떠올렸던 추론이 맞아떨어졌다는 확신이 들자, 지금까지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퍼즐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로피츠 공작이 한낱 평민 장교가 자신의 외동딸과 교제하는 것을 말없이 허락한 것도, 황제가 한낱 평민 장교와 독대를 가진 뒤 아델라인을 도우러 온 것도. 필즈먼이 황궁에 ‘파견 중대’라는 이름의 부대를 만들어 알렉스에게 지휘를 맡긴 것도,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저 오만함도, 황태자와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알렉스의 방금 발언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했다.
그러자 황후의 머릿속에서는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고리를 붙잡았다.
“하나 알아 두시지요, 황후마마.”
그런 그녀를 붙잡듯, 알렉스는 황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언제까지나 알렉스 매닝햄으로 살다 가고 싶습니다. 누군가 선을 넘지 않는 한, 그렇게 살다 죽을 겁니다.”
알렉스는 뒤를 돌아본 황후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 부디 도와주시지요.”
그 말을 들은 황후는, 이를 뿌득뿌득 간 뒤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갔다. 다급한 황후의 걸음과 그 걸음을 쫓는 시녀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황후가 나가고, 알렉스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을 감고 그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후가 과민반응한 소문. 그 소문이 황후의 역린을 건드린 듯했다. 그리고 그게 알렉스의 목적이었다.
이 정도면 황후의 움직임을 잠시 억제한다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껏 날이 선 대원들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우연의 일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