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te of the Perennial Sub Male Lead is in My Hands RAW novel - Chapter (5)
흑발이 원래 이렇게 ‘있어 보이는’ 색이던가?
마리엔은 실로 깊은 고뇌에 빠졌다. 맹세컨대 자신은 단 한 번도 흑발 남자 캐릭터에게 빠진 적이 없었다. 그들을 이루는 속성이 전반적으로 마리엔 개인의 취향과 안 맞았다.
대신 색소가 옅다거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라는 묘사가 나오면 즉시 그 대상에게 마음이 갔다. 온화한 목소리에 쓸쓸함이 깃들 때면 한숨이 나오도록 좋았다.
여주인공에게 헌신하다가 헌신짝이 되면 그야말로 최고였다. 안타까움과 별개로 최고다. 헌신짝 수준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바쳤다는 뜻이니까.
그러다가 한 번씩 절망 끝에 흑화하기도 하는데, 같은 흑화도 다정한 갈색 머리 서브남이 하면 맛이 남달랐다. 지나치게 뻔한 하수만 안 쓴다면 좋을 텐데. 보통은 주인공들 사이만 돈독하게 만들어주고는 흑발 손에 정리됐다.
이렇게 갈발을 찬양하다 보면 간혹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갈색 머리기만 하면 무조건 좋아하는 거냐고 말이다.
그럼 마리엔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갈색 머리면 무조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처연한 속성에 머리카락이 갈색이면 매력이 더 플러스되는 거라고.
하지만 침착한 대답과는 다르게 내심 양심이 찔렸다. 내가 진짜 색깔론자인가?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던 마리엔 디디는 오늘에 이르러 자신의 지난 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머리를 검게 물들인 바일레온 때문이다.
‘거 분위기 한번 위험하네.’
머리를 염색했다고 얼굴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바일레온의 부드러운 외모는 그대로였다. 그는 평소대로 회의를 진행하고, 사람들을 대하고, 어린 시녀의 실수에 너그러이 웃었다.
여간해선 언짢은 기색을 비치지 않는 바일레온 비어스 그 자체였다.
한데 희한하게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우선 머리가 검어지자 본래의 흰 피부가 더 부각됐다. 햇볕 아래 아름드리나무를 떠올리게 만들던 초록색 눈은, 검은 머리와 어울리면서 정밀히 세공한 에메랄드처럼 바뀌었다. 바일레온의 녹안은 본인의 턱선만큼이나 날카로운 빛을 자아냈다.
한마디로 차가운 고위귀족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는데, 이 분위기로 미소를 지으니까 사람들 반응이 대단해졌다.
‘근데 말이야. 오데트가 좋아하라고 바꾼 건데 왜 애먼 여자들만 좋아하고 있지?’
시녀들이며 다른 부서 직원들, 황궁을 방문한 귀부인과 귀족 영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일레온에게 러브레터를 써댔다. 어디 러브레터뿐인가. 여자들은 바일레온의 앞에 끊임없이 손수건을 흘리기도 했다.
마리엔의 새 일거리가 바로 그거였다. 두어 걸음 뒤에서 바일레온을 따르다가 여자들이 흘린 손수건을 냉큼 집어 건네주는 것 말이다.
이젠 척하면 척이었다. 여자들의 눈빛만 봐도 상대가 어느 타이밍에 손수건을 흘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이 방면에 뛰어나냐면, 하루는 손수건이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에서 천 쪼가리를 낚아챈 적도 있었다.
‘훠이! 훠이! 피라미는 저리 가.’
마리엔은 전력을 다해 수비 작전을 펼쳤다. 오데트 아닌 여자가 바일레온에게 달라붙는 건 무의미했다. 하다못해 질투심 유발 효과라도 볼 수 있으면 나을 텐데. 오데트와 질투는 하늘과 땅처럼 먼 이야기였다.
바일레온이 머리를 검게 물들인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드디어 그와 오데트가 십오 분간 장미정원을 산책한다는 소식이 마리엔 귀에 들려왔다. 마리엔은 뛸 듯이 기뻤다. 바일레온이 염색을 한 후로 그들의 첫 만남이다.
목이 빠져라 장미정원 방향만 쳐다보던 마리엔은 저 멀리 바일레온이 보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떠셨어요?”
마리엔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전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잘 어울린대요? 괜찮대요? 예전과 달라 보인대요?”
마리엔은 숨도 안 쉬고 질문을 쏟아냈다. 숨 따위야 바일레온의 답을 듣고 나서 쉬어도 괜찮았다.
“익숙하지만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 당신은 과연 내가 알던 남자? 야릇하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을 받으셨대요?”
“그게.”
“빨리! 빨리, 빨리, 빨리요!”
마리엔은 안달이 난 나머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얼른 듣고 싶었다.
설령 오데트가 바뀐 머리 색에 대해 아무 반응을 안 보였대도 괜찮았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흑발로 염색했다고 해서 오데트가 바로 사랑에 빠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처음엔 적응이 안 돼도, 자꾸 보다 보면 점점 눈길이 더 오래 머물 수도 있는 거니까.
“혹시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아뇨.”
바일레온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셨죠.”
“눈을…… 동그랗게!”
좋은 징조다.
“아주 잠깐 말을 잇지 못하시다가.”
더 좋은 징조!
“웃으시더군요.”
“웃……!”
바일레온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려던 마리엔은 거기서 멈췄다. 상대를 보고 웃는 것은 대부분 좋은 뜻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까만걸. 순간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아…….”
오데트가 한 말이 바일레온의 나직한 목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검은 머리도 잘 어울리지만 난 어째 예전 머리 색이 나은 것 같아. 경에겐 그쪽이 더 어울려.”
제 말이요. 4황녀 전하.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비어스 경처럼 결 좋은 아몬드 빛 머리카락이야말로 흔치 않아요.
마리엔은 억울함에 입술을 샐룩거렸다.
근데 이 사람한텐 갈색 머리가 더 어울린대놓고 왜 흑발 놈이랑 결혼하시는 건데요.
마리엔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오데트를 제외한 모두가 바일레온의 검은 머리에 열광하건만! 정작 오데트는 예전의 갈색이 낫다고 말했단다. 머리야 다시 염색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머리 색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니 이 예견된 낙담을 어찌하면 좋나.
“디디 보좌관, 설마 우는 건 아니죠?”
바일레온이 고개를 약간 숙여 마리엔의 얼굴을 살폈다. 186센티미터의 그가 아담한 마리엔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안…… 울어……요…….”
“목소리부터 울먹거리는데.”
“아니에요…….”
“나보다 디디 보좌관의 기대가 컸나 봐요.”
바일레온이 상냥하게 웃었다.
“전하의 반응이 어떻든 괜찮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속상해하는 걸 보면.”
마리엔은 실제로 울지 않기 위해 얼굴근육에 힘을 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짜 괜찮았다. 좀 의기소침해졌을 뿐이지 견딜 만은 했다. 한데 바일레온이 너무 다정하게 대해주니까 정말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속, 상한 게 아니라……. 흐응…….”
“그런 게 아니면 뭐지. 내 머리 색을 바꾸는 게 밀정으로서의 첫 임무였어요?”
“밀정 아니에요. 흑, 흐으.”
“중요한 첫 임무도 아니다. 그러면 다시 방금 전의 이유로 돌아가는데.”
밀정의 임무 어쩌고는 괜히 하는 소리다. 바일레온은 이제 마리엔 디디가 밀정이 아닌 걸 안다. 염색 제안을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그날 당장 마리엔에 대해 조사를 해봤댔다. 일 처리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일은 그렇게 잘하면서 사랑할 땐 결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조금은 더 대담하게 다가가봐도 좋을 텐데. 그런다고 해서 오데트가 정색하고 싫어하지도 않을 텐데.
바일레온은 그저 오데트가 검은 머리를 좋아한다는 수하의 귀띔에 염색을 감행했다. 그럴 만큼 오데트를 좋아하면서, 그는 지금 마리엔을 달래고 있었다.
‘이 사람을 정말 어쩌면 좋지. 지금 누가 누굴 위로해?’
아까 오데트 앞에서 한마디라도 하지. 유려한 말솜씨를 그런 데에 쓰면 좋잖아. 오데트가 예전 머리 색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하면, 그걸 구실로 삼아 대화를 이어나가든가. 일하러 가기 싫다고.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평생 전하와 정원을 거닐겠다고 했어야지.
하지만 바일레온은 십오 분이란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그래놓고는 여기서, 애먼 사람 기분까지 챙기고 있었다.
바보.
“속상하잖아요.”
바일레온의 말에 마리엔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나도 마음이 안 좋거든요.”
“…….”
“요 며칠간 나 역시 기대에 좀 부풀었나 봐요. 게다가 디디 보좌관이 그렇게나 애써줬는데 허탕 친 거니까.”
바일레온이 쓸쓸하게 웃었다.
“사실 머리 색이 중요하겠어요? 전하의 마음을 얻기엔 내 자질이 충분치 않은 거죠.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 마요. 디디 보좌관의 계책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부족한 탓이에요.”
그는 마리엔에게 손수건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면 자기 손수건을 건네줄 태세였다.
이 사람 위험하구나.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는 말이 있잖아. 세상엔 상대의 호의에 감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인간이 더 많은걸. 응석 부려도 다 받아주는 사람으로 인식돼버리면 본인만 힘들 텐데.
“왜 이렇게 친절하세요?”
따지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근데 마리엔 제 귀에도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바일레온의 얼굴에 의아함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내가 친절한 게 싫어요?”
“아뇨, 그런 뜻은 아니지만.”
“그럼 왜 화가 났을까.”
바일레온이 슬쩍 말끝을 늘였다.
“속도 없이 아무에게나 친절하게 굴고 다녀서?”
“…….”
“대꾸 못 하는 거 보니 내가 맞혔나 봐요.”
그는 재차 마리엔에게 손수건이 있냐고 물었다. 안주머니 속 손수건이 떠올랐지만, 왠지 바일레온이 보는 앞에서 꺼내기가 싫었다.
어제는 세탁물 내놓는 시간을 놓쳐서 마리엔이 직접 빨래를 했다. 그랬더니 세탁방에서 해줄 때처럼 얼룩이 말끔히 빠지지 않았다. 다림질 따위 시원하게 건너뛰었기 때문에 구김이 간 상태기도 했다.
그래봤자 손수건이다. 바일레온은 수하의 손수건이 좀 꼬질꼬질해도 개의치 않을 거다. 그가 신경 쓰는 쪽은 손수건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이니까.
손수건을 숨기고 싶은 건 마리엔 자신이었다.
“이 정도 눈물에 손수건은 과분해요.”
손등으로 눈가를 쓱쓱 닦아버리자 바일레온이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 그렇게 닦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자칫 어린애처럼 보였을까, 싶던 찰나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요.”
바일레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리엔은 눈가를 마저 닦고는 얼른 그를 따라갔다.
“다만 그 말을 한 사람은 디디 보좌관처럼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죠. 그냥 차분하게 말했어요.”
왠지 듣기도 전에 오데트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댄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 싫어.”
원작 소설에는 나오지 않은 말.
“난 나만의 것이 필요해. 나를 위해 손에 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나를 위해서가 아니면,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라도…… 판을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사람.”
과연 오데트가 할 법한 말이다.
“그래서 그댄 안 돼. 바일레온.”
바일레온이 읊조리듯이 말했다.
“내 이름을 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
“그 사람은 알까요? 바일레온 비어스는 좋은 사람이지만 아무에게나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바일레온이 고개를 돌려 마리엔을 힐끗 쳐다봤다. 마음이 안 좋은 나머지 그를 속없는 바보라고 욕한 게 떠올랐다. 소리 내서 말한 건 아니었어도 마리엔은 내심 뜨끔했다. 그런데 또다시 제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바일레온이 미소 지었다.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거든요.”
조금 더 또렷하게 번져나가는 미소.
“내가 친절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건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디디 보좌관 역시 좋은 사람이란 뜻이니까.”
“…….”
“눈물 보일 만큼 속상해해줘서, 고마워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마리엔은 그저 천천히 앞서 걸어가는 바일레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난 이제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