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Surgeon RAW novel - Chapter (102)
제4화 픽스턴(fix-tern) (1)
거나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모두들 알게 모르게 한영철에 대한 말은 삼갔다.
얼굴이 벌게진 손일석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경석이 형, 천안이야 성민이하고 창수 형밖에 없으니까 픽스턴 확정이지만, 서울은 누가 돌 것 같아요?”
픽스턴(Fix-tern).
마지막 남은 3주 동안 자신이 합격한 과에서 근무하는 인턴을 픽스턴이라고 한다. 미리 자신의 과를 경험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이게 묘한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본래의 스케줄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다른 과와 협의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만한 수고를 한 만큼 합격자들 중 성적이 가장 좋은 인턴들이 하게 된다.
특히 올해 서울 병원의 경우에는 픽스턴은 2명인데 공교롭게도 합격자가 6명이나 있어 더욱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경석이 눈을 부라렸다.
“뻔한 걸 뭘 물어봐. 신현수하고 저놈이지.”
일제히 시선이 쏠리자 김지훈이 머쓱한 웃음을 보였다.
“왜 날 보고 그래요. 일석이도 있는데. 사실 이 자식이 덜렁거리는 것 같아도 진국이에요. 일도 나보다 더 깔끔하게 할걸요?”
손일석이 감동 먹은 얼굴로 김지훈을 와락 안았다.
“지훈아, 내가 널 키운 보람이 있구나. 고맙다. 다들 내 진가를 몰라. 자세하게 얘기 좀 해 줘라.”
그때 김경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석이 일 잘하는 건 우리도 잘 알지. 하지만 지훈이나 현수가 픽스턴이라는 사실은 더 잘 알아.”
손일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차분하고 담담한 말에 농담처럼 반박하고 싶어도 이미 분위기가 넘어가 그럴 수 없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잔을 들었다.
“경수야, 아무 때나 심각해지지 말고 분위기 좀 살리자. 우리 화기애애해지면 안 되겠니?”
“그래, 알았어. 지훈아, 픽스턴 잘 돌아. 일석아, 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맞고 틀리고를 떠나 쓸데없이 진지한 김경수였다.
김지훈이 힐끗 째려보며 잔을 높이 들었다.
“누가 돌면 어때. 형, 멋지게 건배사 한마디 하시죠.”
“음! 알았어. 희망찬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소주잔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려는 순간 김경수의 목소리에 다들 흠칫거렸다. 설마 또?
“참! 서연이가 마취과 한대. 내가 알기로는 적성 자체가 수술실하고는 거리가 먼데, 의외지 않아?”
“서연이가? 아니, 내가 모르는 사실을 네가 어떻게 알았어? 야! 내가 경수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니, 나도 강호 생활 접어야 할 때가 됐나 보다.”
“강호고 뭐고, 서연이 덕에 편했으면 좋겠다.”
마취과는 외과 전공의들을 쥐고 흔들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소 무리한 수술을 부탁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그때 마취과가 거부하면 깨지는 건 1년차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슬며시 잔을 비웠다.
일정에 따라 내내 윤서연의 얼굴을 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절대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새 마취과가 도마에 올랐다.
“경수야, 마취과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아직 합격 발표도 안 났는데 뭐 하러 그런 얘기를 해.”
“역시 지훈이는 겸손해.”
엉뚱한 대답을 한 김경수가 잔을 들었다.
어느새 자리를 마무리할 시간이 됐다. 다들 아쉬워했지만 내일 근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오성민과 유창수는 천안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즐거웠던 술자리가 끝났다.
목까지 술기운이 오른 김지훈이 공중전화를 찾았다.
(여보세요?)
“경아 씨?”
(지훈 씨?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그동안 시험 준비하느라 바빴나 봐요.)
고경아의 목소리에 살짝 원망이 실렸다.
사실 이리저리 일이 겹친 탓에 전화까지 뜸하게 했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인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지금 나올 수 있어요?”
(지금이요? 11시가 넘었어요.)
“잠깐이면 돼요. 오늘 면접까지 다 끝났는데 얼굴 안 보여 줄래요?”
잠시 고민하던 고경아가 조건을 달았다.
(나 화장도 다 지웠거든요. 얼굴 보고 뭐라고 그러면 안 돼요. 약속할 수 있죠?)
웃음이 나왔다.
밤 11시가 넘어 집에 있는 여자를 불러내는데 멋진 옷차림에 화장까지 기대하는 남자가 있을까?
“지금 깜깜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집 앞에 포장마차 하나 있던데.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나와요.”
15분쯤 걸어 집 앞에 도착했다.
빨간 비닐로 싸인 포장마차 앞에 서 있는 고경아가 보였다.
한겨울 추위에 코가 빨갰다.
“춥죠. 빨리 들어가서 따뜻한 국물 좀 먹죠.”
“술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또 먹으려고요?”
“좋은 날엔 좋은 사람과 함께. 하하하!”
얼렁뚱땅 말을 넘긴 김지훈이 안으로 들어서자 고경아가 눈을 흘기며 옆에 앉았다. 모자에 가려 예쁜 눈이 안 보였다.
“경아 씨, 모자 안 벗어요?”
“나 화장 안 했다고 말했잖아요.”
“아니,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요?”
“어쩔 수 없을 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안 돼요.”
설마 떡 진 머리로 나오진 않았을 텐데, 이해하지 못할 구석이 참 많은 존재가 바로 여자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신 김지훈이 술을 따랐다.
“시험하고 면접은 잘 보셨어요?”
“그럼요. 내가 떨어지면 붙을 사람 한 명도 없어요.”
“호호호!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거 아니에요? 어땠어요?”
시험과 면접에 대해 말하던 김지훈이 점점 흥분했다.
자신의 꿈과 희망, 그리고 외과 수련에 대한 기대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고경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한영철에 대한 말이 나왔다.
너무 안타깝고 아프다는 말에 고경아가 눈가를 붉혔다.
자연스럽게 정갑수에 대한 일까지 나왔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죽일 놈을 찾자 고경아가 조그마한 주먹을 꽉 쥐며 함께 분개했다.
“그런 사람은 한 대 팍 때려 줘야 하는데.”
“그렇죠? 어휴! 다음번에 걸리면 그냥 작살을 내 버릴 겁니다. 정갑수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인턴을 했는데 최소한 영철이한테 미안하다든가, 아니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요, 사람이면 당연히 그래야죠.”
“경아 씨, 오늘 정말 맘에 든다. 한 잔 마셔요.”
고경아가 정말 화가 났는지 잔을 쭉 비웠다.
마침 다른 손님도 없던 차라 마음 놓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포장마차 주인이 맞장구를 쳤다.
“야아! 가만히 보니까 손님 정말 진국이시네. 말씀하시는 게 완전 의사야. 여자 친구분도 아주 미인이시고.”
“어? 아저씨, 지금 얼굴이 보여요?”
포장마차 주인이 헛기침을 했다.
“보이는 데까지만 봐도 그냥 미인이시라는 걸 딱 알겠는데요. 장사하다 보면 그냥 보여요. 내가 장담하는데, 여자 친구분보다 예쁜 여자 보기 정말 힘들 겁니다.”
김지훈의 기분이 한껏 떴다.
“그래요? 이거 가만있을 수가 없네. 여기 곰장어 하나 더 주세요. 경아 씨,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켜요.”
“지훈 씨, 안주 많이 남았는데 뭘 또 시켜요.”
“어허! 다 먹고 가면 되죠.”
“그럼요. 남으면 싸 가셔도 되죠. 프라이팬에 살짝 데우기만 하면 지금하고 똑같습니다.”
미인이라는 말에 기분 나쁠 여자는 없었다.
하지만 고경아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아니요. 곰장어도 주지 마세요. 일단 안주 다 먹으면 그때 시킬게요.”
포장마차 주인이 혀를 차며 눈을 부라렸다.
모처럼 안주 매상을 올릴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한껏 미인이라고 띄워 준 여인 때문에 말이다.
즐거운 시간은 쏜살처럼 흐른다.
어느덧 12시가 훌쩍 넘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을 했다.
‘오늘따라 너무 예뻐 보이네. 서연이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경아 씨의 마음을 알아볼까? 아니지, 이거 자칫하면 양다리 걸쳤다고 잘린다. 어후! 훈철이 형 말도 맞지만, 이것도 아닌 것 같네.’
현실과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김지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고경아가 손을 흔들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확신이 서면 그땐 인정사정 안 보고 냅다 달리자. 갈등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힘드네.’
각오를 다지며 비틀비틀 병원으로 돌아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노래를 불렀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슬픔을 주든, 기쁨을 주든 모두 친구였다.
김지훈이 눈물을 흘리다 말고 웃었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향기로운 꽃보다 진하다고.”
사랑은 더 힘들었다.
***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났다.
혹시 이변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전원 합격이었다.
24시간 근무를 시켜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직군이 전공의였다. 밉보이면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 월급을 정직원이나 간호사에 비해 턱없이 적게 줘도 항의는 고사하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비용 대비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당연히 티오를 다 채우는 게 병원으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 정갑수를 보며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좋겠지. 대신 일이나 똑바로 해. 괜히 함께 일하는 동기들 힘들게 하지 말고.’
한병원에서 근무하는 다른 대학 병원들과는 달리 모교 병원은 순환 근무였다. 4년 내내 3개월마다 서울, 천안, 구미 병원을 번갈아 가며 근무했다.
누가 정갑수와 함께 돌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재수 없으면 4년 동안 정갑수와 같은 병원을 돌게 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끔찍한 생각은 하지도 말자. 근데 픽스턴은 누가 돌지?”
내심 연락을 기다렸지만 그날 밤이 되도록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다음 날 3주간의 중환자실 근무를 끝낸 김지훈이 피곤한 얼굴로 짐을 꾸렸다.
다음 근무는 신경외과였다.
인턴으로서 마지막 도는 과였다.
픽스턴만 아니라면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합격 발표가 난 후에는 한시라도 빨리 일반 외과에서 근무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숙소에 올라와 잠깐 눈을 붙이려 할 때 손일석이 허겁지겁 나타났다.
“지훈아, 난리 났다.”
“무슨 난리?”
“픽스턴으로 신현수하고 정갑수를 돌린단다.”
“정갑수를? 뭐야, 그 인간이 왜?”
손일석이 답답한지 가운을 벗어 던졌다.
“씨팔! 뻔하지, 뭐. 현수야 이사장님 아들 아니래도 당연한 일이지만, 정갑수는 정말 심하지 않냐? 정치적이다 뭐다 그러더니 공무원한테도 줄을 대나 봐.”
말이 안 나왔다.
헛웃음만 흘리던 김지훈이 입가를 문질렀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한대?”
“몰라. 들리는 말로는 일과 끝나고 저녁에 돌린단다. 사실 기대도 안 했지만 너무 성질이 나네.”
“에휴! 백이 좋긴 좋구나. 정말 어이가 없네.”
식욕까지 싹 잃었다.
그때 김지훈과 손일석을 찾는 전화가 왔다.
이경석이었다.
픽스턴 문제로 최철한이 빨리 외과 병동으로 내려오라는 오더를 내렸다는 말을 전했다.
부랴부랴 손일석과 함께 병동으로 달려갔다. 병동 스테이션 옆에 있는 의국에 서울에서 근무하는 합격자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앉아. 이경석 선생님도 앉으세요. 모두 있는 자리에서는 편의상 반말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해해 주세요.”
“예, 선생님.”
최철한이 답답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이미 들었겠지만, 픽스턴은 신현수하고 정갑수가 돌 거야. 나머지는 원래 스케줄대로 근무하고, 오후 7시까지 이곳으로 와. 배워야 할 건 많고, 시간은 없으니까 정신 바짝 차려. 1년차 시작하고 나면 몰랐다는 소린 안 통해.”
“예, 선생님.”
“픽스턴 기간에도 오프는 없으니까 일이 없어도 항상 숙소에서 대기해. 정식 근무 시작되면 바로 혼자 우리 과 환자를 봐야 돼. 인원이 많아서 조금 곤란하긴 하지만, 1년차들 따라다니면서 응급실 근무도 확실하게 배우고.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자.”
오프가 없다는 소리에 다들 눈가를 찌푸렸다.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인 데다, 이렇게 되면 100일 당직이 아니라 120일 당직이 될 판이었다. 하지만 의국의 결정이었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
최철한이 몇 장의 서류를 꺼냈다.
“일단 입원 기록지 작성부터 시작한다.”
입원 기록지를 펼친 최철한이 설명을 시작했다.
첫 페이지에는 주 증상과 병력 및 가족력, 그리고 임프레션을 적는다. 인턴 돌 때 응급실에서 이미 해 봤던 일이지만 차원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