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97
297화. 벤투스
푸우욱.
발톱이 휘둘러진 순간.
뺨에 길쭉이 베인 상처가 생긴 타이니가 그대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지만, 벤투스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지친 놈의 숨통을 끊는 거였지, 저런 얕은 상처 따위를 내는 게 아니었으니까.
벤투스가 일부러 빗맞힌 것도, 놈이 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작은 단검이 그의 앞발을 파고들었기 때문.
바로.
“넌, 내 거!”
지난번에 이어 또다시 자신을 가로막은 건방진 작은 인간.
그 인간이 쏟아 낸 음성에서는 선명한 분노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감히!’
누가 누구에게?
그야말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살기가 들끓었지만, 벤투스는 목표를 잊지 않았다.
그분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이 짜증 나는 작은 인간이 아니라, 노을빛 재앙을 연달아 쏟아내는 저 괴물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놈은 스친 공격의 여파만으로 쓰러질 정도로 힘이 빠져 버린 상황.
스륵.
스피드에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앞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다.
한순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진 벤투스는 비틀거리는 타이니의 뒤쪽에 곧바로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앙!
다시 내질러진 공격은 이번에도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보랏빛 머리 인간에게 가로막혔다.
“크륵!?”
이전에도 한 번 자신을 가로막은 적이 있는 인간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재주를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면 허공과 지상.
아니, 정확히는…….
‘그림자.’
눈앞의 인간이 자신의 속도를 따라잡은 이유를 알아낸 벤투스가 비로소 목표를 바꿔서, 쓰러져 있는 놈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루나 쪽으로 옮겼다.
“크르르.”
– 처음부터 내 목숨을 노리지 않은 것이 네 실수다, 인간.
스슥.
다시금 사라진 벤투스의 몸이 루나의 등 뒤에서 나타나자, 루나가 그대로 그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벤투스의 발톱이 정확히 자신의 그림자를 노려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푸우욱.
쾅!
“큭!”
동시에 그의 그림자에서 튕겨 나오듯 나가떨어지는 루나.
“크?”
– 막아?
벤투스의 눈에 놀란 감정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루나에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스륵.
바로 다시 ‘괴물’의 옆으로 이동해 발톱을 휘두르는데.
쾅!!!
쿨럭.
다시금 루나가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그 일격을 막아 내며 피를 토했다.
“크와아앙!”
– 또! 또! 방해를!!!
분노를 토해 낸 벤투스의 살기가 비로소 오롯이 루나에게 집중되는데.
그 대상이 된 자는 오히려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한테 집중해라, 짐승.’
루나는 벤투스의 반응에 집중하면서도 주변의 상황을 빠르게 훑었다.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이미 이곳의 후방과 공중에서는 연합군과 마물 군단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 크롸롸롸롸!
– 으아아악!
연합군 진영의 한복판에서 솟구친 거대한 뿔 달린 철갑 두더지와 자이언트 웜이 엄청난 희생자를 만들어 내는 광경도.
– 놈은 우리가 상대한다!
– 전방 주시!
– 각 기사단은 집단 전투 스킬을 끝까지 유지하라!!
그런 악마들을 향해 검제와 저릭을 비롯한 연합의 영웅들이 오러를 빛내며 달려드는 광경도.
– 크와와왕!
– 캬아아악!
– 끄악!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마수들의 피와 지상을 흥건하게 적시는 인간의 피가 난무하는 전장의 광경도, 그대로 시야에 담겼다.
현세에 강림한 지옥의 풍경이 이러할까.
‘그런데도 이게 고작 7죄종의 군단 중 하나라니.’
확실히 승기는 연합군이 잡고 있었지만, 마수병단의 핵심 전력은 동생이 그 ‘크게 한 방’으로 대다수 쓸어 버린 데다 적의 군단장은 아직 강림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중에는 대체 어떻게 전쟁을 치를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암담한 광경이었지만, 루나는 억지로나마 전의를 북돋웠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곳에 신경을 쓰는 적도, 아군도 없다는 것.
– 끼에에에!
원래 계획은 크게 한 방을 쏟아 내고 탈진한 타이니를 보호하는 동시에 그 충격을 피했을 이놈을 에스티나와 함께 상대하는 거였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허공을 새까맣게 뒤덮은 비행형 마물들에게 발이 묶인 듯했다.
그러니.
‘내가 버텨야 해.’
스륵.
콰아아아아앙!
“큭!”
쿨럭.
– 빌어먹게도 귀찮게 구는구나!
다시금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낸 몸이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사라지는 벤투스의 몸.
콰콰콰쾅!
쏟아지는 파상 공세를 거듭 막아 내 보지만, 충격이 누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크르르.”
– 고작 한 번 허물을 벗은 인간이 어떻게?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루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지금 손에 들린 단검 덕분이었다.
천 개의 눈에게서 빼 온 핵을 이용해 모르스의 가보, 움브라를 가공하여 만든 초월무구. 움브라-테그멘(Umbra-Tegmen).
그란돌이 드워프들의 보구 테그멘을 능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 초월무구는 분명 엄청난 효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나는 아직 그 권능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소요자의 모든 능력을 100% 증가시키고 육체와 장비에 마나 메탈에 준하는 방어력을 부여하는 그림자 갑옷 하나뿐.
그나마도 제한이 있었다.
‘앞으로 잘해야 삼십 합 정도.’
그리고.
“크르르.”
– 그것, 신의 무구로구나. 그러나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제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다.
파바바바박.
쾅!
“크…….”
차라리 진짜 놈의 말대로, 처음 놈이 타이니를 공격하려 했을 때 급소를 노리는 것이 나았을까.
자신에게는 죽음의 오러가 있으니…….
‘아니, 아니야.’
그러다 실패했다면 동생이 죽었을 것이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큰 도박. 백번을 다시 생각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아직 승산은 있어.’
루나의 시선은 지난번 자신이 상처를 냈던 놈의 앞발을 향해 있었다.
비록 벽을 넘을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움브라-테크멘을 제련하면서 실력은 확실히 상승했다.
이제 자신은 죽음의 오러를 터트릴 시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경지도 높고 훨씬 강한 생명력을 가진 마족.
놈의 앞발에 죽음의 오러를 남겨 놓긴 했지만, 그걸 섣불리 터트렸다간 괜히 경각심만 심어 줄 것 같아서 발동을 늦춰 놓은 것.
콰아아앙!
“큽.”
주르르륵.
‘딱 한 번만, 한 개의 상처만 더.’
한 번의 공격을 추가로 성공시켜서 죽음의 오러를 하나 더 심을 수 있다면.
두 군데에서 동시에 죽음의 오러를 퍼트려, 치명상에 가까운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라면 분명히 타이니를 전장에서 빼낼 수 있다.
‘아니, 아니지.’
이런 약한 생각이라니.
파바바바박.
콰콰콰콰콰쾅.
‘끄읍.’
전생 당시, 막막함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이놈을 죽인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동생의 설명을 들어 보면 전생의 자신은 죽음의 오러도 없었고, 그때 썼다는 황실의 초월무구가 움브라-테그멘보다 뛰어났을 확률도 낮다.
‘아무리 지금은 기습이 아니라 해도.’
할 수 있다.
루나는 그 순간 마음속 목표를 바꿨다.
타격을 입히고 타이니를 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벤투스를 죽여 버리는 것으로.
– 벤투스의 약점은 하나야. 그 속도를 컨트롤하기 위해, 공격 직전에는 반드시 잠깐 멈춰 선다는 것. 정말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파바박.
쾅!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한 번의 틈을 찾고자 했다.
그런데 그때.
“크와아앙!”
– 흥! 이제야 알겠군.
벤투스의 포효와 함께, 갑자기 그의 머리 전면에 검붉은색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응?’
이런 건 못 들어 봤는데?
생각지도 못한 마법이 시전되자 루나가 살짝 당황하는 그때.
– 죽어라!!
벤투스의 영파와 함께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검붉은 불꽃이, 그녀가 아닌 쓰러진 타이니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황급히 그림자 도약을 쓰려는 찰나.
“크릉!”
– 어림없다.
벤투스는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강대한 마기를 쏟아부어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
– 인간! 마기도 이용하길래 잠시 헷갈렸다만, 여기까지다.
동시에 눈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사자의 이빨.
하지만 루나는 자신에게 다가온 사신의 손길보다도 조금 떨어진 곳, 타이니에게 쏟아지는 검은 불꽃을 주시할 뿐이었다.
위기감 속에서 한없이 가속된 의식에 의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하지만 마치 정지된 듯한 그 시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돼!!!’
속으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찰나.
– 에이씨, 좀 더 좋은 기회를 노리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영파가 들려오며, 쓰러진 타이니의 몸에서 노을빛의 반투명한 분신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마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분리된 분신이 녹턴을 집어 들어 쏟아지는 검은 불꽃을 향해 휘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었다.
‘어……?’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 분신 혼자 느릿하게나마 움직이는 듯한 광경.
그 현실감 없는 광경에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데.
– 지금이야, 누나.
다시금 전달된 타이니의 뜻이 그녀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그래, 동생이 분명 기회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설마 그게……?
– 벤투스를 죽여.
이 전투가 시작될 때 타이니가 전해 왔던 영파의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이해한 순간.
정지된 것처럼 느려졌던 셋의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꽈아아아앙!
– 아니!?
타이니의 분신이 벤투스의 마법을 분쇄하며 그 정신과 마기를 뒤흔들어서 얻어 낸 것은 아주 작은 틈일 뿐이었다.
벤투스가 아주 잠깐 당황하며 보인, 한순간의 틈.
하지만.
스륵.
그 틈을 뚫고 뒤늦게나마 그림자 도약을 시전한 루나가, 타이니를 지키는 대신 벤투스의 뒤를 잡았고.
– 어딜!
반 박자 늦게 뒤를 돌아본 벤투스의 발톱과 루나의 단검이 서로를 향해 엇갈릴 때.
루나는 방어를 포기한 채, 최대로 증폭된 죽음의 오러를 벤투스의 뒷덜미에 찔러 넣었다.
푸우욱.
쾅!
“크아아아앙!”
쿵.
쿵.
그 순간에도 몸을 비튼 벤투스의 등줄기에, 암흑 오러보다 더 짙고 선명한 검은 오러가 기다란 상처를 만들어 내는 순간.
루나의 몸은 형편없이 튕겨 나가 타이니가 있는 방향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끙.”
턱.
“억!”
우당탕탕.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타이니가 루나의 몸을 받아 내며 나뒹구는데.
벤투스는 차마 그런 그들을 쫓아 끝을 낼 수가 없었다.
“크롸아아아아아!”
등줄기와 앞발에서 시작되어 전신을 파고들기 시작하는 죽음의 기운 앞에서는, 아무리 폭식의 장군 서열 1위라 해도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쿵. 쿵. 쿵.
– 어찌 이런, 이런 일이……!
벤투스가 지면을 나뒹굴며 주변의 마기를 흡수해 봤지만, 그보다 짙게 뿌려지는 죽음의 기운은 그의 전신을 조금씩, 조금씩 더 장악해 갈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래도, 적당히 몸은 사리지, 끙.”
쿨럭.
“그럼, 저거, 못 죽여. 캬악, 퉤. 아, 아파. 살살.”
“참아. 끙차.”
동시에 피를 토해 낸 남매가 여력을 끌어모아 서로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설 때.
– 크롸아아아아아!
– 캬아아아아악!
멀리 연합군의 중심에서도 거대한 두더지와 웜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토하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 이겼다!
타이니와 루나의 머릿속에 동시에 비슷한 생각이 스치는 순간.
“크와아아앙!”
– 이대로,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크르!”
– 마수병단의 모든 것은 오직 위대한 마수왕의 것이니.
“크르르르르.”
– 동지들이여,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치라!
다 죽어 가는 벤투스의 몸에서 거대한 마기가 빠져나오고, 그 빈 자리를 메꾸려는 듯 죽음의 오러가 순식간에 놈의 몸을 장악해 버렸다.
그리고.
쿵.
– 쾅.
– 우르르르릉.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폭식의 장군 셋이 거의 동시에 그 몸뚱이를 땅에 누이는 순간.
쏟아지는 마기와 마물들의 피가 일시에 차원문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이런 씨X……!”
차원문에서 튀어나오던 하급 마물들이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그 안에서 점차 강한 마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
“아르곤!!! 당장 튀어 와!!!!”
타이니의 고함이 전장을 관통하며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