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10
110 이들 앞으로
* * *
베를린의 한 음악대학.
“이번 에틀링겐 이야기 들었어? 우승자가 동양인 아이라고 하더라고.”
“뭐? 동양인?”
“그것도 최연소래. 13살. 지금 에틀링겐에서 난리가 났다던데?”
“······.”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
에틀링겐 역사상 동양의 아이가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최종 파이널까지 올라와 수상을 하는 경우는 제법 있었지만, 우승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클래식은 유럽의 음악이다.
그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정서를 이해해야 하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청소년 연주자에게 있어서 그건 무척 어려운 일.
같은 기간, 같은 공부를 했다면, 아무래도 유럽 출신의 연주자가 우승하기 쉽다.
그래서 몇 안 되는 에틀링겐의 동양인 우승자들은 대부분 유학파였다.
아주 어린 시절에 유럽으로 넘어와 현지에서 공부한 아이들.
그런데 이번엔 그조차 아니라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한 아이라고?”
“대박이지? 거기에다가 이전에 콩쿠르에 나간 적조차 없었대. 에틀링겐이 첫 콩쿠르라고 하던데?”
유럽의 언론은 한서진이 3등을 했었던 ‘대한민국의 작은 콩쿠르’는 인정을 해주지도 않았다.
세계에서 보았을 때, 그다지 공신력이 없는 콩쿠르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
이로써 대한민국의 작은 아이는 에틀링겐이 발견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친구의 설명을 듣던 남자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안나는? 작년에 우리 학교 오케스트라랑 협연도 했었잖아. 걔도 이번에 에틀링겐 나간 거 아녔어?”
“안나 베커는 그 아이한테 밀려서 2등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 뮌헨의 천재가?”
“대이변이 생겼지. 조금 전에 막 발표가 난 거라 아직은 잠잠한 것 같은데 금방 시끄러워질 거야.”
“와······. 안나만 해도 청소년 중에서 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믿기지가 않네.”
“나도 동감이야. 그래서 이번 에틀링겐 갈라쇼는 꼭 가보려고.”
“나도 그래야겠다. 표는 아직 있지?”
“좋은 자리는 벌써 다 나갔더라고. 빨리 예약해야 해.”
“야! 그거부터 말을 해줬어야지!”
“네가 질문이 많아서 그랬던 거거든?”
“······.”
“······.”
한참 대화를 나누던 두 음대생은 말없이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갈라쇼 예약을 위해 예매 사이트에 들어간다.
다행히 S석 두 자리 예약에 성공한 이들.
R석은 구하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였다.
에틀링겐 콩쿠르 갈라쇼.
1위, 2위, 3위 수상자들이 선보이는 특별 무대.
2위와 3위를 한 수상자는 1부 공연에서 피아노 독주곡을 선보이게 되고.
1위를 한 수상자는 2부에서 독일의 유명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게 된다.
급한 마음에 예약부터 하고 나서 공연 정보를 살피던 음대생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를 확인하고 다시 한번 멍하니 친구를 바라봤다.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 지휘자······ 카이 호프만?”
“이것도 역대급이지. 특히 그 아이는 마에스트로와 협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잖아. 그것도 유럽 데뷔무대로 말이야.”
“······.”
클래식 음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명문 음대를 다니고 있는 두 대학생.
흔히 엘리트라 불리는 이 학생들조차 평생 얻어보지 못했던 기회를 겨우 ‘13살의 아이’가 얻게 된 것이다.
유럽의 언론도 이 내용들을 집중해서 보도했다.
새로운 천재의 등장.
천재와 마에스트로가 보여줄 갈라쇼.
해당 공연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직까지도 조금 얼떨떨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월간 앙상블⌟의 최선영 기자님께서 숙소로 찾아오셨다.
어제 시상식 이후 여러 언론사와 정신없이 인터뷰를 했었다.
에틀링겐 궁전을 빠져나오는 데만 해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였으니······.
현지에서 에틀링겐 콩쿠르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만, ⌜월간 앙상블⌟과 인터뷰를 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이렇게 따로 약속을 잡은 거였다.
인터뷰는 확실히 ‘지난번’보다는 훨씬 길었다.
내 음악에 대해 깊이 있게 질문해주셨고, 특히 ⌜황제⌟를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대해 꼼꼼히 물어보셨다.
나는 천천히 생각하며 할 수 있는 대답은 전부 해드렸다.
“그렇다면 사실상······ 에틀링겐은 6개월 정도 준비했던 거네?”
“그렇죠. 지난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갔으니까요.”
“이야. 너 진짜로 대단하구나? 그 정도 연주를 보여줬는데 겨우 6개월 준비했던 거라고? 그 전에 오케스트라 협주 경험도 없었고?”
“네. 그래도 많은 분들께 도움을 받았어요. 강유한 교수님. 박하선 선생님. 그리고······.”
“네 친구?”
“네.”
“그런데 그 친구 이름은 안 알려줄 거야?”
“그게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요.”
나는 적당히 농담처럼 넘어갔고, 최선영 기자님도 그렇게 세세히 질문을 해오시진 않았다.
다만.
“그런데 네 친구라면 설화 예중 출신일 거고. 1학년에. 네게 영향을 끼칠 정도의 친구라면······.”
최선영 기자님께서 씨익 웃으신다.
“나는 왠지 알 것도 같네. 친구끼리도 잘 지내는 모양이구나. 부럽다. 한창 좋을 때인 것 같아서.”
“거의 탐정 같으시네요.”
“내 일이 그런 거니까.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어지는 질문은 호프만 지휘자님과 강유한 교수님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나와 그분들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인터뷰가 거의 마무리됐다.
“인터넷 기사는 오늘 바로 올라갈 거고, ⌜월간 앙상블⌟에는 다음 달에 이 내용이 실릴 거야. 갈라쇼 내용까지 같이 언급될 것 같네.”
“그러면 갈라쇼가 끝날 때까지는 독일에 계시겠네요?”
“덕분에 독일에 더 머무르게 됐어. 네 갈라쇼도 기대하고 있을게.”
그때.
저 멀리서 호시탐탐 눈치를 보고 있던 내 매니저(?)가 음료수 두 개를 들고 도도도 걸어왔다.
마침 딱 떨어진, 최선영 기자님의 컵을 보며 의향을 물어본다.
“기자님, 혹시 음료수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오렌지 주스와 사과주스 두 개가 준비되어 있는데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제게 말씀하시면 되세요. 참고로 과자도 준비가 되어 있어요.”
“······.”
수연이를 보고 입술을 움찔거리던 최선영 기자님은 박장대소를 하셨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연이.
기자님은 수연이와 눈을 마주쳤다.
“너는 어쩜 이렇게 이쁘니! 오빠 따라 독일까지 온 거야? 고생이 많네~”
“고, 고생 아니에요! 오빠가 여기까지 따라와도 된다고 먼저 허락해준 거예요. 그리고 또··· 저는 그냥······ 그냥······”
수연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오빠를 좋아해서······ 떨어져 있긴 싫었으니까요······.”라고 중얼거렸고, 이에 최선영 기자님은 큭큭 웃으며 수연이에게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부탁했다.
임무를 마친 수연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도도도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다. 뭐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콕 박고 이쪽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런 수연이를 달래기 바쁘셨고, 기자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셨다.
“저런 동생 있으면 없던 힘도 생기겠다.”
“그런 면이 있죠.”
“가족도 화목한 것 같고. 네 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네.”
은근한 물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수연이를 떠올리면서 연주를 하기도 해요. 밝음이나 따뜻함을 표현할 때 동생 생각이 나거든요.”
“역시 그렇구나. 형제애가 무척 좋아 보이네.”
“정말로 착한 애라서요. 오빠인 제가 더 잘해줘야죠.”
“큭큭. 보기 좋다. 그런데 수연이는 따로 음악은 안 배우니? 오빠가 이 정도면 부모님께서 욕심이 생길 법도 한데.”
“저희 부모님께서는 그런 분들이 아니셔서요. 그리고 시작한다고 해도 너무 일러요.”
“그래?”
나만 해도 한국 나이 9살,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처음 시작했다.
그래도 충분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밀러 아저씨를 만나기 전까지 무척 고생하긴 했지만.’
막상 수연이도 딱히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이대로 무럭무럭 자라줬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최선영 기자님은 나중에 베를린에서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숙소에서 나가셨다.
수연이는 그제야 빼꼼 눈치를 보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휴. 오빠가 유명해져서 큰일 났어. 앞으로도 바쁘겠다.”
“그래도 든든한 매니저가 있어서 괜찮아. 방금도 수연이가 멋지게 답변해줬잖아.”
“······ 응?”
“수연이가 오빠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거 있잖아. 그 내용으로 기사가 두 줄은 나가겠던데?”
“······!”
놀란 토끼 눈.
내 옆에 앉아 있던 수연이는 볼을 붉히며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수연이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어줬다.
잠시 후.
아침 식사를 다 먹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한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슬슬 에틀링겐 소식이 대한민국에 전해지기 시작한 모양.
그 포문을 연 건 설하 누나였다.
– 나 지금 독일로 날아가? 우리 동생이 1등을 했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일단 표부터 끊어야겠다!
“진정하세요. 오늘도 촬영 있다고 하셨잖아요.”
– 네가 1등을 했는데 어떻게 진정해! 너 그럼 이제 프로 연주자 되는 거야? 그런 거야?
“그 정도는 아녜요. 베를린에서 공연이 있긴 하지만······”
– 맞네! 공연! 너 데뷔하는 거잖아? 서진이 너는 누나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다 준비해갈게!
“······.”
대체 뭘 준비하시겠다는 건지.
나는 잔뜩 들떠 있는 설하 누나를 진정시키기 바빴다.
그다음으로 전화가 온 건 이하은이었다.
이번엔 영상 통화.
독일 기준으로 아침 시간이 될 때까지 전화하고 싶은 걸 참고 또 참았단다.
– 꺄아앜! 에틀링겐 1등? 어떻게 해! 너무 잘 됐다! 솔직히 네 연주면 그럴 만했다니까!
“고마워.”
– 나도 네가 ⌜황제⌟ 연습하는 거 중간중간 봤었잖아? 진짜로 최고였거든! 가능만 하다면 나도 독일로 확 가버리는 건데. 너 축하해주러 말이야.
물론, 나는 이하은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쟤 역시 갈라 콘서트를 준비해야 했으니까.
“백월 청소년 콩쿠르 1등 축하해. 나도 어제 파이널 끝나고 나서야 알았어. 정신이 없어서.”
– 앗. 어떻게 알았어?
“인터넷에 결과가 떴던데? 검색해봤지.”
독일의 저녁 시간은 한국 기준으로 새벽이었다.
축하 전화를 하겠다고 새벽에 자는 애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하은의 결과가 좋았기에 나 역시 전화하는 걸 잠시 미뤘었다.
– 크흐흠. 뭐 그런 것까지 찾아봤대. 대단한 것도 아닌데~
살짝 콧대를 세우는 이하은.
그런데 그때.
– 뭘 대단한 게 아냐? 시상식 때 펑펑 울었으면서! 그리고 너 서진이한테 전화 언제 오나 핸드폰만 보고 있었잖아.
– 소, 소연아. 너 어디서 나왔어?
화면 속에서 백소연이 이하은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나타났다.
– 여기 학교거든? 복도 지나가다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서 와봤더니. 어휴. 서진이한테 영상 통화할 거면 나나 불러주지 그랬어?
– 저기······ 부르려고 했는데에.
– 했는데?
– 일단 통화가 되는지 확인을 해본 거야. 확인을···.
– 지금 21세기거든? 전화가 안 터지는 게 어딨어? 얘가 별걸 다 확인하네?
– ······.
잔뜩 당황하는 이하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백소연은 에틀링겐 콩쿠르 1등을 축하해줬다.
그리고 나 역시, 백소연의 백월 콩쿠르 2등을 축하해줬다.
둘은 일찍부터 학교에 나와 백월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방학인데도 설화 예중 연습실의 문은 상시 열려있다고 한다.
“그러면 너희 둘도 예당에서 데뷔하는 거네?”
– 그렇지. 특히 하은이 얘는 완전 기대 중이야. 요즘 얘가 습관처럼 하는 말이 ‘서진이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는 부족해! 나 더 잘하고 싶어. 그래야 걔 옆에 설 수 있을 테니까.’거든? 장난 아냐. 참. 그리고 얘 파이널에서 드레스 입은 게 얼마나 이뻤는 줄 알아? 내가 사진이라도 보내 줄······.
– 저기!!! 소연아? 너 오늘 이상한 것 같아!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래?
– 엇? 이하은! 너 지금 어, 어딜 찌르는 거야!
– 너 옆구리 찌르는 거 싫어하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 나만 공격당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 와앜!
– 백소연! 어딜 도망가?
티격태격.
전화만 하고 있는데도 마치 설화 예중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이하은의 승리로 끝났는지, 우리는 조금 편하게 통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은이는 신주원 소식도 전해왔다.
경기도청 주최의 콩쿠르에서 2등을 했다고.
이로써 우리 A반 멤버들은 각자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았다.
– 물론, 네가 우리 반 최고 성적을 내주긴 했지. 에틀링겐이라······. 나도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네.
“하은이 너라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거야. 내 생각엔 지금의 너라면 파이널 무대까지 충분히 올라올 것 같거든.”
– 에이~ 굳이 나 띄워줄 필요 없어.
“거짓말 아냐. 그러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해봐. 혹시 알아? 내년엔 진짜로 네가 에틀링겐에 오게 될지.”
– ······.
괜히 볼을 긁적이던 이하은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인사말을 꺼냈다.
– 그러면 갈라쇼 잘하고 와! 유럽 데뷔. 너라면 정말 멋지게 할 수 있을 거야.
“너도. 분명 예당에서 멋지게 데뷔할 수 있을 거야.”
– 응!
활짝 웃는 이하은.
수연이하고도 인사를 나눈 이하은은 전화 통화를 끊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은 없었다.
인터뷰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고, 베를린으로 출발하는 건 내일 아침이었다.
오늘은, 지금까지 쉼 없이 파이널까지 달려온 수상자들의 휴가 같은 날이었다.
점심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에틀링겐 시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맛있는 점심을 사 먹었고, 쇼핑도 조금 했다.
기념품 샵이 잘 마련이 되어있었기에 살만한 게 제법 많았는데, 고생한 수연이를 위해 곰돌이 인형도 찾아서 선물을 해줬다.
“크흠. 얘는 이제부터 이름이 쿠르야. 성이 콩이고.”
“걔는 한씨 가문이 아니구나.”
“에틀링겐 출신의 궁정 악사거든. 얘가 한 씨일 수는 없지.”
“엄격하네.”
“그럼~ 하지만 내가 이뻐해 줄 거야. 쿠르는 분명한 성과를 낸 아이거든.”
이야기를 하면서도 인형을 끌어안고 한껏 좋아하는 수연이.
정말이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저녁 무렵 우리는 숙소에서 준비를 해야 했다.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어머니는 깔끔한 정장을 입으셨고, 수연이도 귀여운 드레스를 입었다.
나는 수연이 손을 잡고 에틀링겐 도시를 걸었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도시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에틀링겐 궁전에도 은은한 조명이 들어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가게에는 손님이 가득했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 소리는 귀를 간지럽혔다.
수연이는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다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긴 너무 이쁜 도시인 것 같아. 아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야.”
“그러게. 너무 좋은 곳이네.”
“고마워, 오빠.”
갑자기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수연이는 나를 보며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수연이가 종종 쓰는 말을 따라 해봤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남매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수연이는 내 말을 듣고서 한동안 키득키득 웃었다.
약속 장소는 숙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식당.
그곳 입구에 서 있던 웨이터분은 단번에 나를 알아봐 주셨다.
“한서진 피아니스트였죠. 멋진 에틀링겐 무대였어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은 이미 와 계신가요?”
“오신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습니다. 혹시 찾는 분이 계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그런가요. 그러면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에틀링겐 콩쿠르의 소소한 뒤풀이였다.
수상자와 가족들.
에틀링겐 오케스트라 단원과 콩쿠르 관계자들.
콩쿠르를 만들어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자리였다.
식당은 굉장히 고풍스러웠다.
미슐랭을 받은 식당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그런 걸 떠나서 연식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풍스러운 장식과 거대한 샹들리에.
몇 년이 됐을지 모를 엔틱 가구들은 ‘진짜 이곳이 유럽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는 2층으로 안내를 받았다.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자 꽤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도착한 2층에서는 가장 시끄러운 애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서진아! 왜 이렇게 늦었어! 다들 기다렸잖아!”
파이널 때 입었던 드레스를 다시 차려입은 금발의 여자아이.
안나 베커였다.
나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고 나서 대답했다.
“아직 약속 시간 20분 전인데?”
“원래 이런 파티는 한 시간 먼저 와도 된단 말이야! 이리로 와봐!”
“······.”
내 손목을 낚아채는 안나.
어머니는 웃음을 터트리며 수연이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셨다.
2층 홀 안쪽에는 이미 많은 음악가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신다.
안나의 씩씩한 등장 덕분에 자연히 시선이 우리에게 쏠린 모양이었다.
얼핏, 오리엔테이션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숨 막히는 고요.
콩쿠르 특유의 날 선 느낌.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음악가분들은 하나 같이 나를 반겨주셨다.
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주신다.
강유한 교수님.
클로에 로랑 피아니스트님.
카이 호프만 지휘자님.
레온 하우저 지휘자님.
요나스 브란트 원장님.
“잘 왔다. 서진아.”
막스 리히터 선생님까지.
감히 말도 못 걸만한 음악가분들이 내게 손짓을 해주신다.
이 느낌은 굉장히 묘했다.
조금은 독특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건 무척이나 따뜻했다.
나는 그들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런 주저함 없이.
조금은 당당하게.
이들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