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12
112 의외의 연주
* * *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 안.
“서진아, 들었어? 들었어? 우리 표 벌써 매진됐대! 이번 갈라쇼는 기대가 큰가 봐. 아무래도 나랑 최연소 우승자 때문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안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열심히 독일 언론 기사를 읽어주기 바빴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수연이는 안나의 말이 궁금했는지 나를 빼꼼 쳐다봤고, 나는 통역부터 해줬다.
이야기를 들은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토닥토닥해줬다.
“역시 오빠야. 콩쿠르 수고했어. 이제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오빠 연주를 알아봐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하네.”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럼 수연이가 내 연주를 제일 먼저 알아봐 줬던 건가?”
“당연하지! 내가 2년 반 전부터 말했잖아. 오빠는 분명 잘 될 거라고. 기억 안나?”
“······ 수연이는 2년 반 전이 기억이 나?”
“오빠. 나 기억력 좋아. 오빠 연주는 그때도 멋있었거든. 아직도 선명해! 어때? 이제는 내 말이 맞다는 게 증명이 됐지?”
“정말로 수연이 말처럼 됐네.”
“엣헴.”이라고 외치며 흐뭇해하는 수연이.
정말 믿음직한 동생이었다.
한편, 안나는 우리를 빤히 보다가 조금 투덜거렸다.
대화에 끼고 싶은데 왜 통역을 해주지 않냐면서 말이다.
조금··· 귀찮은 동생 같은 애였다.
“흥. 두고 봐. 나도 한국어 공부할 테니까. 이렇게 날 따돌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걸?”
“그래. 열심히 해라.”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안나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는 걸 보아, 일단 수연이보다 어린 동생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에틀링겐에서 베를린으로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 중간에 한 번 환승을 해야 했다.
두 번째로 탄 기차는 훨씬 고급스럽고 좌석도 더 넓었다.
거기에다가 소소한 차이점도 있었는데.
“이 기차엔 스낵 칸이 따로 있거든. 우리 놀러 가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군것질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안나는 나와 수연이를 끌고 스낵 칸으로 갔고, 루이스는 조금 뒤에야 합류했다.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 슈퍼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기차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
창밖을 향해 있는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 수 있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나름대로 낭만은 있네.’
기차에서 독일의 자연을 구경하며 먹는 아이스크림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었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가 입 주변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수연이만 봐도,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티슈로 수연이 입을 닦아 주고 나서, 나 역시 풍경 감상에 합류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음악과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나눴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과거에는 베를린 심포니라고 불렸던 곳.
카이 호프만 지휘자님께서 상임 지휘자가 되고 난 뒤, 격변을 거쳐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됐다.
역사도 있고, 전통성도 강한 오케스트라기에 자존심도 강한 모양.
몇 년 전, 악장이 되신 분 역시 한 성격 하신다고 했다.
“알렉산드라 로덴. 완벽주의자 악장. 베를린에서 꽤 유명한 분이셔.”
“완벽주의자?”
“심할 때는 새벽 3시까지 전화를 하신대. 연습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아니면 해석을 바꿔보는 건 어떻겠냐고. 지휘자와 단원들을 괴롭히는 걸로도 유명하신 분이야. 실제로 불려 나간 사례도 있다고 들었어.”
“대단한 분이구나.”
“호프만 선생님도 고개를 저으시더라고. 그러니까 너도 조심하라고. 나랑 루이스야 1부 독주만 하면 되지만, 2부를 맞은 너는 악장님하고도 대화를 해야 하잖아? 새벽에 불려 나가면 어떻게 하겠어.”
“그러네. 열심히 해야겠다. 연주에 대한 설득도 잘해야겠고.”
“크흠. 참고로 서진이 너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정보야. 그러니까 나한테 고마워하도록 해.”
“······ 정말 고맙네.”
안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알면 됐어. 그보다 아이스크림 하나 더 안 먹을래? 내가 하나 사줄게.”
알다가도 모를 성격이라니까.
하필이면 잔돈이 없던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고, 안나는 다시 “고마워하도록 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원래 열차 자리로 돌아왔을 때, 안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기차 복도를 지나가는 안나에게 나를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에틀링겐에서 지나가다가 몇 번 뵙긴 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에 곧바로 든 생각이 있었다.
‘엄청 점잖은 분이시네. 안나하고 다르게.’
말투고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대단히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춰주시는 분이었다.
“한국에서 독일까지 와서 고생이 많죠. 익숙하지 않은 곳에 와서 본인의 기량을 전부 선보인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멋진 연주를 보여주셔서 정말로 놀랐어요. 에틀링겐 1등, 진심으로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중간에 안나가 많이 도와줘서 힘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덕분에 에틀링겐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진짜? 진짜? 내가 힘이 됐어?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었어!”
“그런가요. 오히려 안나가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보기가 좋네요. 언제 뮌헨에 놀러 올 일 있으면 꼭 연락해주세요.”
“응! 응! 무조건 연락해줘!”
“알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그렇게 할게요.”
“그래요.”
“서진아! 뮌헨이 베를린보다 훨씬 좋아! 여름에도 엄청 시원해!”
안나의 부모님은 뮌헨에서 병원을 운영한다고 하셨다.
두 분이 다 의사라고.
워낙 바쁘셔서 평소에 안나의 공연을 보러오기는 힘든 편인데, 이번엔 규모가 있는 콩쿠르라서 시간을 내서 에틀링겐까지 오셨단다.
“그래도 이번에는 안나의 갈라쇼까지 보고 나서 뮌헨으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안나랑 오랜만에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요.”
그리고 만약 시간이 괜찮다면 내게 식사를 한 끼 대접해주고 싶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안나는 어머니 품에 안기며 “역시 엄마가 최고야! 서진이 맛있는 거 사주자! 독일 맛있는 음식 많잖아. 그치? 그치?”라며 칭얼거렸고, 어머니는 그런 안나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어주셨다.
나와 안나, 수연이가 원래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안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너도 사람이니까 쉴 때가 있을 거 아냐. 시간 맞춰서 같이 뮌헨에 가자. 휴가 때 가족들하고 다 같이 놀러 오는 건 어때? 나도 영재원에 쉬는 날 신청할 수 있거든. 아예 뮌헨에 있는 우리 집에서 지내도 돼. 우리 집 넓어! 방도 많아!”
“······.”
나는 안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안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나는 답을 알 것 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안나. 너··· 외동이지?”
“그런데 왜? 그것보다 나 외동인 거 어떻게 알았어?”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
“······?”
이 철없는 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기차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 * *
“드디어 베를린이다! 그리웠어!”
베를린에 거주한 지 겨우 ‘2년’됐다고 하는 안나는 터줏대감 행세를 하며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첫 만남을 가지는 건 내일.
오늘은 개인 연습 이외의 일정은 없었다.
에틀링겐을 떠날 때도 그랬지만, 몇몇 음악가분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눠야 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계신 분.
막스 리히터 선생님은 담담히 말을 이어가셨다.
“시간만 가능하다면 갈라쇼까지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오늘 저녁엔 프랑스로 가봐야 해서 말이다.”
“리사이틀이 있다고 하셨죠.”
“그래. 슬슬 나이를 생각해야 하다 보니 연습 기간도 길게 잡아야 하더구나. 세월이 조금은 야속한 거지.”
리히터 선생님은 내게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고 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상관없이 언제든.
그 말은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리히터 선생님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를 가볍게 포옹해주셨다.
나는 선생님께, 어제 들려주셨던 녹턴 20번이 무척 좋았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드렸다.
“그게 네게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구나.”
“아마 그럴 거예요.”
“······ 그래.”
리히터 선생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베를린 중앙역을 먼저 떠나셨다.
조금 아쉬운 듯한 헤어짐.
그런 기분이 들어서 리히터 선생님의 뒷모습을 조금 더 지켜봐야 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나는 연습실로 향했다.
이번에 독일에 왔을 때 사용해봤던 연습실이라 다시 안내받을 필요는 없었다.
중간에 강유한 교수님께서 찾아와 연습을 도와주고 가신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도 없었다.
“앗! 이제야 끝났나 보네? 진짜로 연습 열심히 하는구나? 너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한참 기다렸어!”
딱 한 가지.
연습실 입구에서 안나가 쪼그려 앉아 나를 기다리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알고 봤더니 안나도 이곳 연습실을 원래부터 사용했었다고 한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한 50분 정도?”
“너도 참 정성이구나.”
“왜! 뭐! 너 웃긴다? 참고로 약속은 약속이거든?”
안나가 말하는 약속이란, 에틀링겐 시상식 때 ‘조용히 하고 있으면 하루는 너랑 열심히 놀아줄게.’라고 했던 내 말에서 시작된 거였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졸졸졸 나를 따라다니는 안나를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긴 했다.
그래서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신나게 놀아주기로 했다.
“원래는 하루종일이라고 했었잖아?”
“어린애들은 그렇게 늦게까지 놀면 안 돼요.”
“네가 나보다 한 살이나 어리거든?”
“그러니까 애들은 늦게까지 놀면 안 된다고.”
“치. 이럴 때만 자기가 어리다고 하더라.”
안나는 결국 수긍을 해줬다.
베를린은 유명한 관광지다.
성당부터 시작해서 제국의회의사당, 브란덴부르크 문, 포츠담 광장, 박물관, 미술관 등 볼 것투성이였다.
조금만 검색해봐도 나오는 내용.
베를린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안나는 자기만 믿으라고 하더니, 막상 별게 없었다.
“쇼핑몰?”
“응. 나도 살 게 있어서.”
“너 베를린 잘 알고 있다면서?”
안나는 의외로 핵심을 찔러왔다.
“너 서울 산다고 그랬지?”
“맞아.”
“그러면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장소가 어디야?”
“아마 경복궁 정도겠나?”
“궁궐? 그러면 거기 일 년에 몇 번 가는데?”
“······.”
일 년이 아니라 내 생에 통틀어서 두 번 가본 게 전부였다.
한 번은 내가 무척 어렸을 때.
한 번은 수연이가 막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그 내용을 안나에게 말해줬다.
“봐봐. 실제로 이곳에 살다 보면 ‘관광지’는 생각보다 안 가게 된다고. 거기에다가 너는 베를린에 사는 음악가들이 가는 장소가 궁금하다고 그랬잖아?”
“그랬지. 너 의외로 날카롭구나.”
“······ 의외라니?”
“아니야. 미안. 계속해봐.”
“크흠.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가는 코스가 더 괜찮아. 한 마디로 현지인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너 베를린 겨우 2년 살았다고 했잖아. 현지인이라고 봐도 되는 거야?”
“······ 루이스의 말은 그렇게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어. 알겠어?”
뭐, 어찌 됐든.
우리는 신나게 베를린의 쇼핑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안나는 생각보다 영리했다.
뜬금없이 옷을 고르면서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묻다가도, 내가 지쳐 보일 때면 넉넉하게 휴식 시간을 줬다.
먹을 것도 사주고, 마실 것도 사준다.
심지어 기념품도 하나 사줬다.
“피아노 모양 오르골?”
“독일 전통 음악이 나오는 거야. 하나쯤은 가지고 있도록 해.”
“그런데 너, 왜 나한테 계속 뭘 사주는 거야?”
“그냥. 네가 나보다 한 살 어리니까 신경 써 주는 것뿐이야.”
“······?”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쇼핑몰 내에 있는 목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여기가 엄청 저렴한 서점이거든? 관광지에 있는 서점보다 30%는 싸게 살 수 있어. 악보나 책을 골라보도록 해.”
“굉장하네.”
“봐봐. ‘안나 베커’ 말씀을 들으면 언제나 이득을 보게 되어 있다니까?”
“그런데 그 말투는 안 쓰면 안 돼? 가끔씩 놀라게 되는데.”
“안 돼. 이건 내 아이덴티티거든. 네가 참도록 해.”
“······.”
그래도 안나 덕분에 악보 몇 개를 진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음악사에 관련된 책도 두 권을 골랐는데,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들어 보이는 책이었다.
“서진이 너 그거 다 읽을 수 있겠어? 꽤 어려워 보이는데.”
“사전 찾아가면서 읽으면 되겠지.”
“으음. 그래?”
안나는 내 책을 빼앗아서 스윽 훑어봤다.
그러고는 슬쩍 내게 말한다.
“뭐···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던가. 나는 읽을 만하거든.”
“꽤 귀찮을 일이 될 텐데?”
“겸사겸사 나도 공부하지 뭐. 대신에 내가 잘 모르는 게 있을 때······ 너도 나한테 잘 설명해줬으면 좋겠어.”
내 눈치를 살짝 보는 안나.
나는 피식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해줬다.
“정말?”
“내가 뭐 하러 거짓말까지 하겠어.”
“진짜지? 그러면 평소에 너한테 전화··· 해도 되는 거야?”
“마음대로 해. 그런데 나 지금까지 네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었네. 너 번호가 뭐야?”
“······!”
안나는 내 스마트폰을 받자마자 단숨에 번호를 입력해줬고, 나는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러봤다.
벨 소리를 듣고는 무슨 물 만난 고양이처럼 놀라는 안나.
그러면서도 환한 미소는 숨기지를 못한다.
쇼핑몰에서 대략적인 쇼핑을 마치고 우리는 악기사가 모여있는 골목으로 갔다.
출출해지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커리부어스트를 사 먹었는데, 소시지와 감자튀김에 연한 카레 맛이 나는 소스가 올라가 있는 독일 대표 간식이었다.
“어때? 맛있지?”
“와. 진짜 맛있는데? 소시지부터 다르네.”
“맞아. 여기가 베를린 최고 맛집이거든. 내 오래된 단골집이야.”
“그러면 2년 정도 됐겠네?”
“······ 응.”
악기사 골목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평일 이 시간에는 원래 사람이 별로 없다고.
덕분에 편하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골목을 벗어나자 거대한 광장이 하나 나왔다.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벤치가 군데군데 있었고,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악기사도 몇 곳 보였다.
그리고 광장의 한쪽에는.
“피아노가 다 있네? 버스킹을 할 수 있는 곳인가 봐.”
안나의 말처럼 악기가 주욱 세팅되어 있는 곳이 있었다.
‘여기··· 홍대 같은 곳이었구나.’
피아노 외에 밴드음악까지 연주할 수 있게끔 세팅이 되어 있었는데, 거대한 플래카드에 쓰여있는 ⌜월드 하모니아⌟라는 악기점 이름을 미루어 봤을 때 일종의 홍보 수단인 것 같았다.
안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나를 끌고 갔다.
그러곤 혼자 악기점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피아노 앞에 앉는다.
조금 오래된 듯한 업라이트 피아노.
안나는 내게 말했다.
“악기를 써도 된다는 허락은 받았어. 혹시 듣고 싶은 곡 있어?”
“갑자기?”
“오늘 기분이 좋거든. 왠지 연주하고 싶은 느낌이 들어서 그래.”
“그러면······.”
나는 고민을 하다가 슈베르트 곡 중에서 아무거나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안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부드러운 선율 위에 가벼운 위트가 엿보이는 주제가 나타난다.
그 주제는 점점 확장되면서 화려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선보였다.
광장에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춘다.
그랜드 피아노가 아닌데도 선명하게 들리는 피아노 소리.
안나는 장난스럽게 연주를 시작했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히 대단했다.
‘역시 잘하는구나.’
5분이 채 안 되는 소곡.
안나의 슈베르트는 상상 이상으로 유쾌했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연주였다.
연주가 끝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큰 박수를 보내줬다.
안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
“어땠어?”
“좋았어. 특히 유쾌함을 잘 표현한 것 같더라.”
“넌 역시 예리하구나.”
“내가?”
“그래. 완전히 내 생각을 읽혔네. 그보다 너는 연주 안 할 거야? 마침 관객분들도 몇 명 모였는데.”
안나가 주변을 둘러본다.
그 시선을 따라 광장을 살펴봤더니 대략 7, 8명 정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에잇! 오늘 내가 베를린 명소도 구경시켜줬잖아. 한 곡 정도만 연주해 주면 안 돼?”
“글쎄. 그런데 네가 구경시켜 준 곳이 명소는 아니지 않았어?”
“책하고 악보는 싸게 샀잖아. 그러면 명소지.”
“그런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안나 너도 듣고 싶은 곡 있어?”
“어? 진짜로 연주해주는 거야?”
“짧게. 한 곡만.”
“그러면······.”
안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내게 선곡을 일임했다.
의외의 곡을 연주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독특한 요청이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그래?”
“응!”
나는 버스킹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다시 훑어봤다.
어느새 악기점 주인분도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피아노 연주는 이미 안나가 보여줬고······.’
오랜만에 손을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버스킹 존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를 들어 올려 조율을 시작했다.
내 바로 앞에서 구경하던 안나가 눈을 껌벅거린다.
“서진이 너 기타도 칠 줄 알아?”
“조금은.”
“조금?”
“그동안 콩쿠르 준비한다고 바빠서 거의 못 쳤었거든. 어제 생각난 사람도 있고. 이게 좋을 것 같네.”
“······.”
조율을 마친 뒤 나는 다리를 꼬았다.
기타를 다리 위에 올리고 현을 쓸어내려 봤다.
부드럽게 들려오는 화음.
다행히 감이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연주할 곡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밀러 아저씨가 작곡한 ⌜Don’t Look Back⌟.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해왔지만.
후회가 남을 만한 선택은 하지 않았다는 노랫말이 인상적인 곡.
⌜Live Forever⌟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는 밀러 아저씨의 곡이었다.
리히터 선생님 덕분에 어제 밀러 아저씨가 많이 생각났다.
그래서 마침 기타를 연주하고 싶던 참이었다.
나는 연주를 시작했다.
E♭에서 Cₘ로.
A♭에서 A♭ₘ로.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진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안나 베커.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노랫말을 불러봤다.
오랜만에 직접 목소리를 내보고 싶었다.
⌜Don’t Look Back⌟의 가사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무척이나 아름다운 멜로디.
티 없이 맑은 목소리.
그 두 가지 소리가 섞이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서진이의 기타 연주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목소리를 내는 것 또한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눈을 감고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고 있는 음악가가.
정말로 대단해 보였다.
‘쟤는 대체······.’
너무나 의외의 상황에 놀라 안나 베커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며.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서진이의 연주는 짧았다.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서진이에게 환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손뼉을 쳐주고 있다.
한서진은 어쿠스틱 기타를 제자리에 두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나 베커는 무심결에 살짝 뒷걸음쳤지만, 한서진은 그걸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서진이는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해왔다.
“어때. 이 정도면 아예 예상을 못 했을 것 같은데. 의외의 연주였지?”
“······.”
안나 베커는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한 채로,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