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9
69 내가 대신
* * *
수요일 이른 아침.
새봄동 ⌜별 헤는 밤⌟ 꽃집.
“서진아, 그냥 내버려 둬. 엄마가 하면 되는데 굳이······.”
“겨우 청소만 도와드리는 건데요. 그리고 어차피 시간 되면 학원 가야 해요.”
최근 며칠 간은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는 꽃집에 나와 일손을 도왔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꽃집은 무척 바쁘다.
졸업과 입학이 몰려 있는 시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일 년 매출의 상당수가 이때 나온다고 하셨다.
덕분에 알바 아주머니들도 꽃집에 꽤 계셨지만, 나도 틈틈이 나와 청소 정도는 도와드리고 있었다.
이게 마음이 편했다.
“효자 났네. 효자 났어.”
“어떻게 서진이는 매년 한결같을까? 이뻐 죽겠어!”
“거기에 올해는 설화 예중까지 붙었다면서요?”
“어머. 우리 옆집 애는 떨어졌다는데. 서진이 대단하네?”
“서진이 엄마는 앞으로 밥 안 먹어도 돼. 그냥 배가 부를 거라니까?”
아주머니들의 잡담.
어머니는 머쓱하게 웃으시면서도 내게 어서 가보라고 이야기하셨다.
“입학하고 나면 시간도 더 없어질 텐데 지금이라도 놀아둬. 응? 서진이 너 얼마 전까지 엄청 바빴잖아.”
“그건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쓰읍! 잔말 말고! 가만히 있어 봐. 엄마가 오늘은 용돈이라도 챙겨 줄게. 오후에 친구 만난다고 그랬지?”
“네. 그런데 저 돈 많······”
“쓰읍! 엄마가 준다는데!”
“······.”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결국 나는 어머니께 용돈 5만 원을 받고 난 뒤에 꽃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어머니도 바쁘시고, 아버지도 유럽 여행으로 출판사를 오래 비운 탓에 정신이 없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끼리 ⌜13월의 이야기⌟를 보러 가는 시기는 조금 뒤로 미뤘다.
오늘 하은이랑 함께 영화를 보러 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혼자보다는 친구랑 같이 가면 더 좋을 테니까.’
이하은이 한창 피아노 학원에 있을 시간, 나는 어학원에서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개학 전까지는 오전 시간을 거의 풀로 수업을 잡아놨는데, 덕분에 리스닝과 토킹 실력도 조금씩 늘고 있었다. 콩쿠르 전까지 일상 회화는 가능해졌으면 했다.
1, 2, 3교시 수업이 끝나고 학원 바깥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가의 골목길.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이곳 조각상 앞이 약속 장소였다.
‘그냥 학원에서 만나면 될 텐데.’
확실히 특이한 이하은.
오늘은 뭔가 요구 사항이 많은 날이었다.
잠깐 기다리자 쪼끄마한 그림자가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좀 크긴 했나. 내가 반년 사이에 7, 8cm 정도 컸듯, 하은이도 그 정도는 큰 것 같았다.
‘뭐··· 그래서 결국은 똑같은 느낌이 나지만.’
하은이는 드디어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내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겨 온다.
“마, 많이 기다렸어?”
“아니. 얼마 안 기다렸어. 그리고 너 안 늦었어. 내가 빨리 온 거야.”
하은이가 한숨을 내쉰다.
“휴. 그러면 다행이다.”
“그런데 우리 어학원 끝나는 시간은 똑같지 않았나? 학원에서 뭐 하다가 온 거야?”
“어······ 잠깐······ 선생님께 물어볼 게 있었거든.”
“평소엔 나한테 물어봤었잖아?”
“그, 그랬지?”
“그런데?”
“······.”
살짝 당황한 표정.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은 오히려 당당했다.
“크흠! 하여튼 그런 게 있었어! 넌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니?”
“예술가는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니까 그렇지?”
“······ 그래. 이게 한서진이지. 그래도 지금은 잠깐 그 예술가 모드는 꺼두자. 우리 영화 보러 가는 거였잖아.”
“영화도 예술가의 관점으로 봐야 이해가 잘 될 것 같은데.”
“서진아. 일반 관객들 관점도 중요한 거야. 사실, 음악가들은 자기 음악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잖아? 그런데 오늘이 그런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
“어때?”
“······.”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을 청산유수로 하기 시작한 이하은. 그런데 또 영 틀린 말은 아니라 쉽게 수긍이 됐다.
“맞는 말이네. 관점을 바꿔 본다라. 좋은 지적이었어.”
“그렇지?”
“그러면 오늘은··· 네가 말한 예술가 모드는 꺼보도록 할게.”
“좋아. 그렇게 하는 거야. 점점 나아지고 있어.”
“······.”
하은이에게는 내가 이 영화의 음악을 만들었다고 알려줬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대중들에게 MJ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말이다.
괜히 나중에 알게 되면 서운해할 것 같았다.
하은이는 내가 하는 일을 늘 응원해줬다. 최근 일들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랬었다.
콩쿠르에서 별 볼 일 없는 성적을 받았을 때 나한테 음료수를 사주기도 했고, 말도 자주 걸어줬었다. 당시, 반응을 해주지 않았던 건 오히려 나였다.
얘랑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옛날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조금 사소한 일들까지도.
‘그러고 보니 꽤 오래된 친구였네···.’
하은이는 나보다 살짝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이야기해준다.
아침에 길에서 봤던 못생긴 고양이 이야기.
수업을 듣는데 코를 골며 자던 옆 좌석 언니 이야기.
그리고 영화가 무척 기대된다는 이야기까지.
신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영화관이 있는 건물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건물 1층에 들어가기 전.
나는 하은이가 말하는 걸 지켜보다가 무심히 물어봤다.
“그런데 너, 머리 풀은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 어?”
“보통 때는 뒤쪽으로 질끈 묶고 다니잖아. 오늘은 웬일로 풀었네?”
“······.”
이하은은 내 말 때문인지 괜히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렸다.
“이거··· 지금 안 거야?”
“아니. 처음부터 알았는데 우리 계속 다른 이야기 했었잖아. 그냥 지금 물어본 것뿐이야.”
“······ 그렇구나.”
“너 머리 생각보다 길구나?”
“조금은. 피아노 칠 때 불편해서 보통 땐 묶고 다니거든.”
“역시. 피아노 때문에 그런 것 같더라고. 그런데 너 그 머리도 잘 어울린다.”
“······ 으, 응? 그, 그런가.”
“이만 가자. 우리 할 일이 많아. 팸플릿도 챙겨야 하고, 팝콘이랑 나초도 사야 하고, 추로스랑 핫도그도 노려볼 만해. 밥 먹는 대신 영화 보면서 때우자고 한 거니까 든든해야 하잖아.”
“난······ 괜찮은데.”
“안 먹으면 죽을 수도 있어. 위험을 감수하지는 마.”
“······.”
“참고로 오늘은 내가 다 쏠 거다? 저번에 네가 떡볶이 샀잖아. 거기에 나 오늘 용돈까지 받았거든. 너 오늘은 다른 말 하면 안 된다?”
“그, 그래도 어떻게 그래!”
“또! 또! 뭘 그래도야. 지난번부터 정해져 있던 거니까. 오늘은 무조건 내가 살 거야. 알았지?”
“······.”
이하은은 나를 보며, 피아니스트답게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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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점심 무렵의 영화관은 한가했다.
매표소나 매점 근처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긴 했지만,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덕분에 군것질거리를 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특히 달콤한 맛이 나는 캐러멜 팝콘.
하은이는 내가 들고 있는 팝콘을 조심스럽게 하나 집어 먹더니 탄성을 질렀다.
“와! 맛있어!”
“항상 이게 진리거든. 그런데 이거 처음 먹어봐?”
“그건 아닌데, 오늘은 괜히 더 맛있는 것 같아서.”
“원래 오랜만에 먹으면 더 맛있긴 해.”
“음. 그런가?”
그사이 주문했던 나초와 음료수, 추로스가 모두 나왔다.
잠시 후 영화관 입장이 시작됐다.
영화관 앱에서 티켓 정보를 띄워 스태프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그 스태프가 나와 하은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저··· 손님, 죄송한데 보호자 분하고는 같이 안 오신 건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상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당당하게 헛기침을 한번 했고, 하은이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금 더 으스대고 싶기도 했는데.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우리는 곧바로 스태프에게 청소년증을 보여줬다. 콩쿠르에 참여할 때 요긴하게 쓰이던 청소년 신분증이다.
영화 ⌜13월의 이야기⌟는 만 12세 이용가였다.
만 12세가 아니라면 보호자를 동반해야 볼 수 있는 영화.
하지만 우리에게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
청소년증을 살피던 스태프는 큭큭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해줬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손님들.”
7관으로 들어가는 길에 하은이는 들 뜬 상태로 말을 걸어왔다.
“나 솔직히 긴장했는데! 대박이다! 만 12살 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신나네!”
“나도 괜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니까?”
“그런데 우리한테 신분증 검사를 한 거면··· 어려 보인다는 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이하은, 너 동안이었구나.”
“큭큭. 그래. 서진이 너도 동안처럼 보였나 보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7관에 앞에 도착했다.
영화관 좌석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저마다 수다를 떨고 있었다.
7관 J 열 9번, 10번.
자리에 앉자 스크린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창 광고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하은이가 놀라며 내게 귓속말을 한다.
“권설하 가수님 맞지?”
“응. 저번에 화장품 CF 찍었다고 하시더라고. 잘나가시더라.”
“대박이다···. 엄청 이쁘시네···. 세련되고···.”
“그런데 막상 직접 보면 허당끼가 많은 분이라 오히려 걱정이 돼. 물가에 내놓은 애 같다고 해야 하나? 누나긴 하지만, 나이만 누나거든.”
“그래? 의외네.”
“응.”
‘저번에 대기실 사건도 있었고···.’
이건 진심이었다
하은이는 내게 ⌜13월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살짝 물어왔다. 나는 영화 내용 보다도 ⌜닿지 않는 편지⌟ 해석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해줬다.
어떤 장음계와 단음계를 썼는지.
어떤 느낌으로 곡을 만들었는지.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말이다.
하은이는 목소리를 더더욱 낮춰 대답했다.
“작곡가한테 직접 설명 들을 수 있다는 게 뭔가 신기하다.”
“마지막 씬에만 나오는 음악이니까 계속 신경 쓰고 있을 필요는 없어. 영화는 그냥 편하게 봐.”
“예술인 모드는 끄고서?”
“바로 그거지.”
10분 정도가 흐르자 영화관의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스크린 화면에 마침내 제목이 떠오른다.
대본, 그리고 편집 전의 조각 영상으로만 봤었던 영화.
⌜13월의 이야기⌟.
그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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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후.’
한편, 이하은은 콜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구분이 잘 안 갔다.
‘어두워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에 온 건 꽤 오랜만이었으니까.
* * *
영화는 주인공 경태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려서부터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던 경태.
하지만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제대로 지원을 받지도 못한 채, 고등학생 때부터 알바를 하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아버지는 경태의 그런 점을 안타까워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도 않은데,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본의 아니게 화를 내고 만다.
경태는 아버지와 대립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달동네에 있는 주택에서 밤에 홀로 옥상에 올라가 연기를 연습한다.
가지고 있는 것은 오래된 스마트폰 하나.
교보재는 그것뿐이었다.
다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대학교 연극영화과 실기 시험에서 실수하게 되고, 재수를 하게 된다.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하게 된 경태는 서희라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다니는 선배를 만나게 된다.
작가가 꿈이라는 서희.
둘은 공통점을 알아보고 조금씩 사랑을 싹틔우기 시작한다.
서로의 행복을 바라면서.
서로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오랜 고난이 지나고 나면 결국 나무에 열매가 맺히듯, 경태는 단번에 재수에 성공하게 된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모든 걸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학교생활은 즐거웠고, 서희와도 행복했으며, 내 손에 모든 게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경태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죽음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망했고, 아버지께 인사를 건넬 시간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계셨다. 본인의 사업 실패로 진 빚을 가족들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 하루에 18시간씩 일했다.
막노동, 대리운전, 배달 대행.
수년간 홀로 짐을 짊어진 아버지는 억 단위의 빚을 1,500만 원까지 줄였고, 그 끝이 보이려는 순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서희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문자로 간략하게 온 이야기였기에, 학교마저 휴학했기에, 방법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줄 알았던 순간, 세상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
경태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대학교 학생증뿐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어져 버렸다.
경태는 군대에 간다.
물질도 관계도 정신도 내다 버릴 수 있는 곳.
그곳에서의 삶에 경태는 오히려 위안을 받는다.
복학을 한 경태는 끝없이 도전한다.
오디션이라는 오디션은 모두 참가하고, 엑스트라 배역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상속 포기를 하면 됐을 아버지의 빚도 이때 다 갚아버린다. 그동안 이자가 쌓여 원금이 2배로 불어나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상실을 잊기 위해 움직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꿈마저 잃을 수 없었기에 노력했다.
기회는 우연한 곳에서 찾아왔다.
과거, 여자친구였던 서희가 썼던 극본 내용으로 모 방송국에서 오디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보다는 계속 이어가던 도전을 포기하는 게 더 싫었다.
경태는 당당하게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래서 드디어 서희를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서희의 극본은 더 이상 서희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그녀의 극본을 아까워하던 어느 선배가 이를 드라마로 만들기 시작한 거였다.
주인공에 캐스팅된 경태는 정신이 흔들릴 것 같은 상황 속에도 결국 그 작품을 맡게 된다.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경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인기는 나날이 상승한다.
과거의 아픔은 옅어져 갔고, 새로운 일과 새로운 만남에 충만해져 갔다.
세상은 경태를 행복한 사람으로 본다.
어린 나이에 성공한 톱스타.
일 년에 수십억을 버는 부자.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가?
아니면 불행한가?
그때,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온다.
대학 교수님의 초청으로, 신입생 대상 강의를 하러 가는 경태의 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학교에서 수많은 사람이 경태를 알아본다.
사인을 요청하고 악수를 하고 싶어 한다.
매니저와 경호원들이 그들을 막고, 경태는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2월 29일이었다.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아버지의 기일.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서희와의 이별을 떠올리는 날.
평상시에는 무심히 잊고 살다가도 이때가 되면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피아노가 노래를 시작한다.
봄을 노래하는 부드러움이 가을의 쓸쓸함으로 바뀐다.
경태는 대학교에 있는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지만, 음악만은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는 행복한가.
아니면 불행한가.
그게 아니라면.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4년이 되어야 겨우 한 번씩 찾아오는 이날은 너무나 야속했다.
남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이런 날을 맞이할 수 있는데.
경태는 그러지도 못했다.
경태는 서희와 시간을 보냈던 동아리 방을 찾아간다.
아직 방학 중이라 아무도 없었다.
서희의 흔적만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녀의 물건이 있는 것도, 글로 새겨진 게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경태에겐 그녀의 흔적이 보였다.
학교 카페에 가자, 은은한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태를 본 연주자가 돌연 연주를 멈춘다.
그의 주변은 사람들의 소음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피아노 멜로디는 돌연 자취를 감춰버렸다.
베토벤이 합창을 통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졌듯, 이 음악도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경태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는가 충만한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리워 보이는가.
그때.
다시 피아노 연주가 급격하게 진행된다.
연예인을 보느라 연주를 멈췄던 학교 카페의 피아니스트가 급히 피아노를 친다.
경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피아노만이 경태의 심정을 관객들에게 알려준다.
경태에게는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들이 그리운 게 아니었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에게, 짧디짧은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경태가 가진 그리움의 정체였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는다.
경태만 특별한 상실을 겪은 게 아니었다.
피아노 음악은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상실은 무엇이었고,
그걸 어떻게 해결했냐고.
그리움이 있을 땐,
어떻게 하냐고.
그들이 보고 싶을 땐,
목놓아 울 곳이 있냐고.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날의 서러움을,
당신들은 알 것 같냐고.
피아노는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행복하면서 불행할 수도 있다.
그리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러 장조와 단조를 거쳐, 처음의 F장조로 돌아온 피아노의 멜로디는···.
다시 한번 봄의 노래를 부른다.
당신에게 ⌜닿지 않는 편지⌟가 있다면.
내가 그 편지를 대신 전해주겠다고.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가진 이들을 위해,
다시 한번 노래를 해주겠다고 말이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한 소녀는 누군가에게 눈물을 들키기 싫었는지 연신 눈을 비빈다.
한 소년은 담담하게 피아노 음악을 감상했다.
영화의 크레딧 화면은 천천히 올라갔다.
영화관의 관객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그 화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날, 유명한 영화 평론가가 정성스럽게 블로그에 글을 쓴다.
천희태 감독의 탁월한 극본에 감사를,
정현우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감사를,
그리고.
MJ 작곡가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위로의 음악에···.
생애 처음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