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9
9 길
* * *
내가 눈을 떴을 땐, 어떤 소설의 도입부처럼 낯설고 하얀 천장이 보였다.
삐- 삐- 삐- 거리는 일정한 신호음도 들린다.
창문을 열어 놨는지 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남색 커튼이 치마처럼 흩날리고 있다. 소금기가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바람. 미지근한 공기가 얼굴에 그대로 쐬어 졌다.
내 팔에는 이상한 것들이 많이 달려 있었다. 이름표. 종이 반창고. 누군가 매직으로 낙서도 해놨다. 주사 줄처럼 보이는 것들도 달려 있다. 가만 봤더니 역시나. 내 생각대로 주사 줄이 맞는듯했다.
나는 앉고 싶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순간 두통이 몰려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다.
‘그보다···.’
여기는 어디지? 지금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건가?
여러 의문을 가진 채 나는 무심결에 바닥을 향해 발을 디뎠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팔에 꽂혀있던 주사 줄이 드드득 빠지며 나는 바닥을 향해 그대로 넘어졌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왜? 넘어져서 생긴 고통보다 이상한 위화감 때문에 기분이 더 나빴다.
누군가 문을 덜컥 여는 소리가 들린다. 다급한 발소리. 마침내 목소리도 들렸다.
“얘! 괜찮니! 그보다 언제 일어난 거야! 선생님을 찾아야 하는데···. 아니다. 일단 일어나자! 침대까지만 움직일 수 있겠니? 할 수 있지?”
“······.”
“앗! 그러고 보니 영어를 못하겠구나. 내 정신 좀 봐! 그러니까···. 일단 나한테 팔을···. 어···. 거기에···. 팔이 달려 있잖아? 팔? 팔 아니?”
정신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그녀에게 대꾸를 해줬다.
“억양이 특이하시긴 해도 다 알아듣긴 했어요. 저 영어 할줄 알아요.”
“어···?”
“저 부축 좀 해주시겠어요. 팔 좀 잡아주세요.”
“아! 팔! 그래, 그래야지!”
그녀의 도움을 받은 나는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팔과 다리 이곳 저곳을 만져봤다. 그 모습은 왠지 내 상태를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침대의 벨을 누른다. 떨어진 주사 줄을 치운다. 달려 나가서 사람도 찾는다. 진짜로 정신이 없어 보인다니까.
나는 그제야 방 안을 둘러봤다. 의자와 책상, 수납장 같은 게 드문드문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작은 화장대에 붙어있는 거울이 눈에 띄었다.
‘···어린애?’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막 탔던 당시의 어린 내가 나를 쳐다본다. 내가 손을 들자 같이 손을 든다. 내가 얼굴을 만지자 같이 얼굴을 만진다. 마치 도플갱어처럼 환자복을 입은 어린애는 나를 따라 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엔 사람이 많았다. 10명 정도. 그중 가운데 서 있는 중년의 남자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모든 게 혼란스럽다.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맞니?”
“아···. 네.”
“다행이네. 그럼 아저씨가 몇 가지 질문을 해볼 테니까 생각나는 대로 말해주면 돼. 먼저 이름이 뭐니?”
“한서진이죠···.”
“나이는?”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그냥 네 상태를 확인하는 거야. 오늘 날짜는? 아니면 계절은 알 수 있겠니?”
“날짜까진 모르겠는데···. 계절은 여름이겠죠.”
“그러면 깨어나기 전의 일들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있을까? 아무거나 괜찮은데.”
“······.”
“마지막으로 봤던 풍경이라든가. 먹었던 식사 메뉴라든가. 편하게 말하면 돼.”
“먹은 건 말린 생선을···.”
“언제?”
“······.”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음.”
“······.”
나는 주변을 다시 살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무리가 나를 쳐다본다 . 슥슥슥. 각자 무언가를 메모한다.
그들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내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명찰이 내 시선을 잡았다.
Jang Loong, M.D., Ph.D.
Singapore General Hospital
‘M.D., Ph.D.라면···.’
“의사?”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를 망치에 맞은 것 같았다.
텅 비어있던 기억의 공백이 순식간에 메꿔지는 것 같았다.
우린 탈출에 성공했다.
그 망망대해를 뚫고 우린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진짜로!
“혹시 부모님 이름은 기억나? 형제나 친구도 좋고.”
의사는 내가 감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귀찮게 계속 말을 걸었다.
나는 그딴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부터 되묻기로 했다.
“밀러 아저씨는요?”
“응?”
“그러니까 마크 밀러, 저랑 같은 배에 있던 사람이요.”
“··· 누구라고?”
“마크 밀러요. 40대 후반의 백인 남자. 분명 제 옆에 있었을 텐데요.”
“······.”
의사들이 갑자기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아니, 대체 지금 뭘 하는 건데?
내가 무어라 따지려는 순간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비행기 사고가 났던 기억은···.”
나는 그 뻔뻔한 모습에 결국 짜증이 나버렸다.
“네. 네. 네. 정확히 기억이 다 나요. 데이비드 리드 기장님이 몰던 AC 2505편 말하는 거잖아요. 대한민국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그게 추락해버렸죠. 제가 그 비행기에 탔었는데 그런 걸 모르겠어요?”
“······.”
“그러니까 제 질문에 먼저 답변부터 해주세요. 마크 밀러. 그도 여기 병원에 있어요? 저랑 같이 구조된 거 맞죠? 설마 그를 놓쳤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
“저기요. 선생님?”
“······.”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한숨부터 쉬는 의사. 그는 내게 이상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AC 2505편 승객들은 모두 생존했어요.”
“그러면 마크 밀러도···.”
“아뇨. 그중 마지막 생존자가 한서진 군이었고요.”
“네?”
비행기 승객이 모두 생존했는데 내가 마지막 생존자라고?
저게 뭔 이상한 소리인가?
내가 의문을 가져서인지, 나를 이해시켜보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의사는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참고로 이 비행기 사고의 승객들은 전부 이 병원에 입원 중이에요. 총 250명의 승객이 탑승했고, 승무원은 6명, 기장 1명, 부기장 1명이 전부죠. 저는 그 258명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전담 의사고요. 그중에 마크 밀러라는 사람은 없어요.”
“······.”
“참고로 이런 큰 사고에선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트라우마 생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서진 군 문제는 차차 해결을 해보자고요.”
“······.”
나는 참다가 참다가 결국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 * *
내 성화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아예 내게 생존자 명단을 보여줬다.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 명단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어때요. 마크 밀러라는 사람은 없죠?’
‘······.’
‘차라리 이렇게 마주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서진 군에게 보여준 거예요.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푹 쉬는 걸로 하죠. 지금은 안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시겠죠.’
‘······.’
그들의 말처럼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밀러 아저씨의 문제도 그렇지만, 지금의 내 모습 또한 문제였다.
나는 사고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12살에 머물러 있었다. 제법 컸던 내 키는 줄어 있었고, 까맣게 탔었던 피부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갔다고 해야 하나?
처음부터 나이를 먹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의사가 나이를 묻는 질문에 내가 15살이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잠깐의 헤프닝이 생기기도 했다.
다들 놀란 눈치였다. 의사는 이 부분도 내일 이야기를 하자며 쉬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비행기 사고 15일 후에 구출이 됐다는 모양이다.
15일.
무인도에서 보냈던 시간은 3년.
내 시간에는 분명 괴리가 생겨 있었다.
내가 이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사이, 부모님에게서 부터 전화가 왔다. 내 목소리를 듣고 펑펑 우시는 분들. 나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게 얼마만의 부모님 목소리인가. 대체 얼마만의···.
부모님은 지금 말레이시아 쪽 구조팀에 합류해 있다고 했다. 비행기 좌석이 생기는 대로 싱가포르로 넘어오시겠다고.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몇몇 사람들이 나를 보러 오기도 했다. ‘15일’만에 구출됐다는 내가 세간에서는 꽤 시끄러운 모양이다. 자기들이 최대한 언론을 진정시키고 있지만, 일단 병원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는 권고를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병원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9시였다.
째각째각 움직이는 초침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았겼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시계더라···.’
모르겠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내 지난 3년이 부정되고 있는데. 이 모든 게 쉽게 이해될 리는 없었다.
내게는 간호사 한 명이 전담으로 붙었다. 내가 쳐다보자 싱긋 웃는다. 그녀는 내가 병원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봤던 그 정신없는 사람이었다.
“심심해? 누나가 놀아줄까?”
“아뇨.”
“왜? 이 누나는 심심한데. 뭐라도 할까? 으음. 혹시 좋아하는 게임이라도 있니?”
“게임···. 이요?”
“응. 혹시 퍼즐게임 같은 거 좋아하나 해서. 같이 할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누나가 좀 찾아볼까?”
“······.”
아!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무인도에서 지냈다. 그래서 바로 떠올리지 못 했다.
간호사 누나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스마트폰.
저걸로는 내가 인터넷에서 무엇이든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부탁을 했다.
“저 잠깐만 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간호사는 너무나 쉽게 내게 스마트폰을 건네줬다. 편하게 쓰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가장 먼저 검색 사이트에 들어갔다.
손이 살짝 떨려왔지만 상관없다.
여기에 검색할 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Mark Millar
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나는 고민 없이 첫 번째 항목을 터치했다.
마크 밀러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
그 아래에 상세 항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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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밀러는 5세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하토비체 음악원에서 여러 유명 교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제13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손목건초염으로 대회를 포기.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게 된다.
(중략)
피아니스트로 성공하지 못한 그는 버클리 음대에 입학. 작곡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LA와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마크 밀러는 그다지 주목받는 작곡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말년에 작곡한 몇몇 곡들이 사후에 재발견되며 큰 인기를 끌게 된다.
특히 빌보드 HOT 100에서 1위의 기염을 토한 ⌜Live forever⌟는 아직도 리스너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당시 24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그해의 상이라는 상은 모두 휩쓴 ⌜Live forever⌟는 지금까지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 곡을 발표하며 마크 밀러를 기리고 있다.
마크 밀러는 한창의 나이 47세에 공연 리허설 요청으로 싱가포르로 가던 길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당시 비행기에 타고 있던 전원 모두 사망했으며 이후 모든 항공사는 안전교육을 더욱 강화하여···.
나는 글을 읽는 것을 멈췄다.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내 현실과 나 이외의 현실이 복잡하게 엉켰다.
밀러 아저씨는 10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무인도에서 3년을 지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시간은 1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파악한 사실은 여기까지였다.
‘10년 전···.’
한 마디로 밀러 아저씨는 내가 2살 때 비행기 사고를 당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모든 건 착각이라는 걸까.
의사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트라우마 때문에 생긴 가짜 기억일까?
글쎄···.
그렇다기엔 지난 3년간의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다.
내가 지금 유창하게 말하는 영어는 또 어떤가.
밀러 아저씨가 알려준 내 머리에 있는 지식들은?
무인도에서의 모든 기억이 가짜다?
그것만큼은 절대 아닐 것이다.
나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소지품을 볼 수 있을까요?”
“응? 네가 여기 병원에 도착했을 땐 소지품이라고 할만 한 게 없었는데. 입고 있던 옷이 전부였거든.”
“기타 케이스는요?”
“그런 건 없었어. 만약 궁금한 게 있으면 너를 구조한 분들한테 물어봐야 할 거 같아. 지금은 여기 안 계시긴 하지만.”
“그럼 제가 입었던 옷은 먼저 볼 수 있을까요?”
“그쯤이야 얼마든지.”
간호사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아래 놓여있던 종이 상자를 꺼내 내게 내민다.
상자의 뚜껑을 열어봤더니 낡디낡은 옷이 한 벌이 들어있다.
나는 옷에 있는 주머니를 하나씩 뒤져봤다.
‘아무것도 없으려나···.’
걱정하는 순간도 잠시.
셔츠 주머니 안쪽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두 개를 찾아냈다.
문득 알 것 같은 상황에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내건 분명히 기타 케이스에 넣어놨었는데.’
나는 그 종이 두 개를 천천히 펼쳤다.
하나는 AC2505라는 항공 편명과 한서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항공권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AC 162. 마크 밀러···.”
분명히 실존했었던, 그의 이름이 적힌 항공권이었다.
너무 오래돼 옅어질 대로 옅어진 밀러 아저씨의 항공권 뒤에는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비교적 선명하게.
– 내 영원한 친구 서진에게. 앞으로 찬란한 길이 열리길 바라면서.-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