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0
9. 매니저
매니저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단단한 생김새처럼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복동생의 조혈모세포이식 수술 공여 때문에 입원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내일부터 삼 일간이요?”
“네, 그 뒤엔 2주 정도 회복기를 가지고요. 회복기엔 무리한 운동만 안 하면 평소처럼 지내도 되고요.”
“휴우. 사실대로 말씀해주셔서 다행입니다만, 처음 하는 스케쥴이 담당 연기자의 입원이라니.”
“나쁜 일로 입원하는 것도 아닌데요. 게다가 겨우 삼 일이고요.”
태주 자신도 조금 멋쩍었다. 처음 업무에 관해서 얘기하는 자리인데, 이복동생 얘기를 꺼내는 것이 조금 민망했다. 남의 가정사에 관여하기 불편할 게 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몇 년을 같이 일하게 될지 모르는데 숨기고 싶지 않았다.
이어서 태주는 자신의 부모님이 현재 이혼절차를 밟는 중이고, 자신은 동생과 둘이 살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또 대학교는 등록 마감이 곧 끝난다는 얘기와 등록할 생각이 별로 없다는 얘기도 했다.
“Y대라 확실히 좋은 학교네요, 학부도 그렇고. 아깝지 않습니까?”
“별로요. 아마 등록해도 제대로 다니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럼 우선 프로필 재촬영이나 연기 수업 같은 건 모두 퇴원 후로 일정을 잡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음. 대본 좀 챙겨주세요. 이미 방영한 드라마도 괜찮고, 영화도 괜찮아요, 연습용으로 쓸 거예요.”
알았다고 대답한 견우는 태주가 입원할 병원, 담당 의사 연락처 등을 하나하나 물으며 꼼꼼하게 확인했다. 태주는 견우가 작성하라고 준 질문지에 답변을 채우면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러 장의 질문지에 답을 다 채우고 견우에게 건네줬다.
“특기가 상당히 많네요. 이전 프로필에선 못 봤는데, 바이올린이랑 승마, 펜싱에 피아노. 색소폰, 플루트, 중국어, 일본어, 영어까지 이걸 전부 할 수 있습니까?”
“네. 전부 할 수 있어요. 프로필에서 뺀 이유는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였는데, 어차피 새로 프로필 작성할 거니까, 잘하는 거로 추려서 촬영하면 되겠죠.”
“승마에 펜싱, 거기다 여러 가지의 악기까지. 확실히 경쟁력 있는 특기입니다.”
승마는 촬영에 쓰이는 일이 많아서 회귀 전에도 틈틈이 했었다. 펜싱은 정말 가끔 했지만, 기본은 잊지 않았다. 그 외에 액션스쿨에서 배운 것들도 좀 있었지만, 지금 몸은 그다지 단련되지 않은 편이라 적지 않았다.
“질문지에 보니 하고 싶지 않은 배역에 요리사 역이 있네요. 요리사 역은 별로 많지 않지만, 다들 선호하는 역인데 왜 싫어하시는 건가요?”
“최악이에요.”
“네?”
“제 요리 솜씨는 정말 최악이에요. 아무리 촬영이라지만 식재료도 아깝고, 농부들한테 미안해서 못하겠어요.”
“네?”
자신을 보는 눈빛이 바뀐 걸 알았지만, 정말 솔직한 태주의 마음이었다. 요리사 역을 하려면 분명 연습한다고 어마어마한 양의 재료를 망칠 게 뻔했다. 최근 정원에서 농사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버리게 될 요리재료가 너무 아까웠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요리를 주제로 하는 작품은 많지 않으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이나 물건, 중고등학교 교우관계, 학업성적 등에 관해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태산의 동영상에 같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문제가 될만한 것은 아니지만, 트리즈라는 회사 성향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미리 얘기했다.
이전에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았었다. 예능은 출연하지 않았고, 카메오도 거의 하지 않았다. 작품 선정 능력 때문에 많이 시달리기도 했고, 태주의 인지도만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대부분 거절했었다.
광고도 많이 찍는 편은 아니었다. 많아야 일 년에 두세 개 정도만 촬영했고, 그중 하나는 공익광고였다. 광고 촬영을 자주 거절해서 매니저였던 운석이 형이 회사에서 제법 시달렸었다.
해외 진출에 관한 얘기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태주는 해외 진출을 반기지 않는 편이었다. 한국의 영화시상식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지도 못했는데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했고, 전형적인 동양인 이미지에 편중된 배역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었다.
훌륭한 신체 조건 덕에 모델 제안을 받은 적도 많았지만, 런웨이에 서는 일은 없었다. 드라마 ost를 부른 적은 있었다. 홍보에 도움이 된다는 설득에 녹음했었지만, 방송에서 부른 일은 없었다.
‘아! 지금 생각하니까, 운석이 형이 장난 아니게 힘들었겠다. 영화랑 드라마 외의 일은 거의 다 거절했잖아. 엄청 시달렸겠네.’
트리즈는 자신을 어떻게 관리할지 궁금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데뷔부터 큰 문제 없이 승승장구하는 태주를 그다지 건들지 않았다. 운석이 형이 조율을 잘하기도 했지만, 간판인 다른 배우와 태주 두 명이 회사를 먹여 살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일에서 태주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그 동영상은 저도 봤습니다.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편집에 신경을 써주시길 바랍니다.”
“편집이요? 지금은 동생이 하고 있는데, 괜찮지 않아요?”
“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살고 계신 집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장면이나 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하시라는 얘깁니다. 창밖에 보이는 건물이나 배달 음식 상자의 주소 같은 것들이요. 팬들은 그런 작은 정보로도 어디에 사는지 알아내곤 합니다.”
“아아! 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요. 치킨 자주 시키는데 안 찍히게 주의하라 할게요.”
“치킨···. 네, 그런 부분만 주의해주십시오.”
*
김견우는 자신이 담당하게 된 배우 이태주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오디션 영상에서 봤을 때는, 귀족 같은 이미지가 강해서 조금 어렵게 느껴졌는데 실제로 본 모습은 꽤 달랐다. 머리는 좋아 보였는데 이상하게 어딘가 허술해 보였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비해 재주도 많고 의욕도 충분해 보였다.
“연기 하나만 보면 이미 탑클래스인데. 다른 부분은 어떨지 모르겠네. 퇴원하고 나면 코디네이터랑 기획팀이랑 회의를 해봐야지.”
사실 이번 오디션은 트리즈 입장에서도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는 검증된 배우만을 섭외했다. 수년간 활동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사람을 오랫동안 여러 번에 걸쳐 검증한 후에야 데려왔다. 연기력은 물론이고 주변의 평판과 인성도 확인했다.
그런 회사 방침과 다르게 신인배우팀이 만들어진 계기는 사실 별것 없었다. 대표님과 친한 다른 기획사 분들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트리즈의 회사 방침이 화두에 올랐다. 신인을 전혀 키우지 않는 대표님을 보고 모 회사의 대표가 이기적이다, 돈밖에 모른다며 면박을 준 일이 계기가 되었다.
연기자를 한 명의 예술가로 여기는 대표님은 쉽게 계약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맺은 계약은 수익보다 작품에 매진하는 연기자를 선호하는 대표님의 성향이 반영된 계약들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신인은 모두 배제되었다. 업계에 도는 트리즈는 신인을 받지 않는다는 소문에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신인 배우가 전혀 없는 점을 문제로 꼽고 있었다. 현재 계약된 배우 중 가장 어린 배우가 마흔하나였다.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계약된 배우들이 모두 지긋한 나잇대라 그런지 후학 양성에 관심이 있는 배우가 좀 있었다. 그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회사 방침에 대해 쓴소리를 하곤 했다.
“덕분에 기회를 잡은 사람이 있으니. 결과적으로 괜찮은 건가.”
신인배우팀. 총괄 우원희 팀장에 스타일리스트 이미나와 로드매니저 최형식 그리고 본인으로 구성된 팀이다. 다른 배우의 일정을 따라 다니면서 일을 배우고 있는 최형식을 제외하고 모두 경력이 꽤 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대표님이 이를 갈고 있다는 얘기가 있으니 지원도 중견 배우 못지않을 것이다.
“무슨 일을 하려 해도 퇴원부터 하고 상태를 봐야 하니, 원. 우 팀장님한테 한 소리 듣겠는걸.”
생긴 것과 다르게 조금 맹한 자신의 배우를 생각하며 우 팀장에게 보고하러 갔다.
*
태주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말초혈액 조혈모세포이식’이라는 방식으로 조혈모세포를 공여하게 되었다. 3일간 2회에 걸쳐 조혈모세포를 채집한 후 이식한다. 오전에 이미 1차 채집을 마쳤다. 지금은 체온이 조금 올라 쉬는 중이었다.
“매니저님 회사에서 일 보셔도 돼요. 저 어디 나갈 생각 없는데.”
“아뇨. 퇴원하실 때까지 있겠습니다.”
수혈을 많이 하는 것뿐이라며 태주가 태연하게 설명해서 가볍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첫 번째 채집을 마치고 핏기없는 얼굴로 돌아온 태주를 보자 욕이 나왔다.
친동생에게 비밀로 하고 공여를 결정했다고 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병실에는 태주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태주는 본인이 불편해서 거절했다고 했지만, 무슨 생각으로 삼 일간 혼자 지내려 했는지 멱살을 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빈혈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 병실로 돌아왔을 때 놀란 것을 생각하면 정말 멱살 정도는 잡아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을 해맑게 전하는 꼴에 기가 찼다.
“냉장고에요, 딸기 있는데 같이 먹어요. 네, 그거에요.”
태주가 가리킨 것은 성인 남성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딸기였다. 투명한 봉투에 낱개로 포장된 딸기를 씻어서 건네주자 반색하면서 먹었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슈퍼딸기예요. 드세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한 태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기를 먹었다. 딸기는 태주 말대로 정말 달고 맛있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입매가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마 이럴 걸 알고 태주가 딸기를 권한 것 같았다.
“맛있죠? 흐흐. 매니저님 저 엄청 건강해요. 이식 수술하기 전에 건강검진 했거든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습니까. 간병인도 없다 하는데.”
“에이, 병 걸린 것도 아닌데 무슨 간병인이 필요해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회복되겠죠.”
견우는 여전히 상황파악 못 하는 제 배우를 한 대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이 걱정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꼴을 보니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제법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게 습관이 된 사람들이 가끔 이렇다. 주변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한다. 아니 알고 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무시하고 자기 결정대로 일을 처리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은 곁에서 계속 상기시켜야 겨우 주위를 돌아본다. 아마 태주도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쉬십시오.”
“혹시 대본 가져온 것 없으세요?”
“열 아직 안 내렸습니다. 대본은 정상 체온으로 내려오면 건네드리죠.”
“네에.”
아쉬운 얼굴로, 그래도 얌전히 말을 듣는 태주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잠시 메일들을 확인하는 사이에 태주는 잠이 들어있었다.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내일 오후에 한 번 더 채집한다고 하는데 얼굴을 보니 말리고 싶었다.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
부웅.
떠나가는 차를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 얼마나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지 마치 갓 입대한 이등병이 된 느낌이었다. 몸이 좀 굳은 것 같아 산책하려고 병실을 나서다 붙잡혀서 눕혀졌을 때는 정말 당황했다. 보이는 그대로 힘이 아주 세서, 반항도 못 하고 얌전히 침대에 누워서 쉬었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걸 돌려보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 얌전히 쉬겠다고 몇 번을 약속한 후에야, 겨우겨우 돌려보낼 수 있었다.
“와, 우 팀장님도 그렇고 매니저님도 쉽지 않네. 어쩐지 스타일리스트도 그럴 것 같단 말이지.”
같이 일할 사람들을 상대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이런 사람들이니 남지혁을 수년간 돌볼 수 있었겠다 싶었다. 남지혁이 트리즈와 계약을 끝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몰락하기 시작한 걸 보면 확실했다. 관리 능력이 엄청난 사람들로 팀을 짠 게 분명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운석이 형보다 깐깐한 건 확실해.”
새로운 둥지가 될 트리즈에서의 생활이 기대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되는 태주였다. 이번에는 좀 여유 있게 배우 생활을 할 생각이었는데 잘 될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