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11
110. 의기투합 >
해나가 평소에 그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지, 단 이틀 만에 아주 절실하게 느꼈다. 그녀가 해주던 여러 가지 조언도 필요했고, 어지르기만 하는 그렘린들을 말려줄 사람도 필요했다. 그녀가 휴가를 간 이틀, 항상 깨끗했던 오두막은 이미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태주는 마법 빗자루만으론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겨우 이틀이었지만, 해나 없이 혼자서 그렘린 네 마리와 태산이까지 돌보느라 단 한 시간도 편하게 쉬지 못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어지르는 그렘린도 신경 쓰였고, 아이 모습인 태산이를 혼자 두는 일도 신경 쓰였다.
특히 산이로 바뀐 태산이에게선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태산이가 호랑이 모습일 때는 정원에 혼자 다녀도 안심이었다. 높은 나무나 바위에 올라가도 걱정이 되지 않았는데, 아이 모습이 되자, 시야에서 벗어나면 불안했다.
‘대본 연습은 무슨. 편하게 밥 먹을 시간도 없었으니.’
그는 현실로 오기 전까지 태산이와 그렘린의 놀이 상대를 해주었다. 숨바꼭질, 술래잡기, 공던지기. 몸으로 할 수 있는 놀이는 대부분 해주었다. 개월 수가 늘면서 그렘린의 체력이 부쩍 좋아져 놀아줘도, 놀아줘도 지치질 않았다. 태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만 돌이 건전지 같은 녀석들.’
허브 티 만들기는 결국 자동으로 세팅했다. 시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지하 제약 공방에 말썽꾼들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쩔수 없었다.
정원을 돌보는 일도 애들이 낮잠 자는 시간에 겨우 작물만 수확했다. 도저히 분갈이나 포기나누기 같은 일은 할 수 없었다. 과실수들을 수확하는 것도 무리였다. 모든 일은 해나가 돌아온 뒤로 미뤄두었다.
오늘은 해나도 그도 없는 정원에서 희와 제피르 둘이 그렘린을 돌봐야 했다. 바쁠 둘을 생각해서 현실로 오기 전에 상점에서 자동 급식 그릇을 사두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작동되게 세팅을 해두었지만, 그렘린들이 낯선 사료 그릇을 잘 쓸지 걱정이었다.
“산아. 안 졸려?”
“앙.”
“더 안자니? 좀 잘 것이지….”
꾸벅꾸벅 조는 녀석을 안고 왔는데, 잠이 다 깼는지 눈에 잠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녀석이 자면 자신도 좀 더 잘 생각이었는데, 말똥말똥한 눈을 보니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간만에 회복 약을 챙겨온 자신을 칭찬했다. 어쩐지 꼭 챙겨야 할 것 같은 기분을 외면하지 않고 챙겨서 다행이었다. 회복 약 한 병을 단숨에 마신 태주가 태산이를 안고 일어났다.
비싼 아파트에 설치된 월풀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따끈한 물에 담그고 나오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오늘은 오전에 촬영장으로 가야 했다. 한동안은 오전에 리딩하고 오후에 촬영하는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구멍난 조연 자리가 메꿔진 것은 다행이었지만, 오전부터 밤까지 빽빽하게 일정이 잡혀서 피곤할 것 같았다.
‘휴일도 없이 말이지.’
– 위이잉.
“앙! 앙!”
“착하지. 금방 끝나. 잘 말려야지. 감기 안 걸리게.”
“앙.”
드라이기 소음이 싫은 건 아이 모습이라도 여전한 것 같았다. 태산이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익숙하게 품에 가두고 머리를 말려주었다. 잔병치레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것은 알지만, 아이 몸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됐다.”
“앙.”
“킥. 산이 화났어? 화내지 마. 이제 추워져서 머리 잘 말려야 해.”
“앙.”
휙 돌아앉아서 화났다고 티를 내는 태산이를 억지로 몸을 돌리게 하진 않았다. 가만히 뒤에서 감싸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달댔다. 태산이 힘을 빼고 그에게 몸을 기대는 게 느껴졌다. 태주는 그대로 아이를 안고 일어났다.
“쿠첼 벌써 일어났어요?”
“태주 씨 잘 잤습니까? 산이도 잘 잤습니까?”
“앙.”
“하하하. 반가운가 보네요.”
조식 서비스로 아침을 해결한 후에 태주가 향후 일정을 쿠첼루스에게 알려주었다. 한동안은 아침에 나가서 자정쯤 들어오게 될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제 분량을 좀 당겨서 찍어둬서, 나중에는 괜찮을 거예요.”
“언제까지 그런 일정이 이어집니까?”
“앞으로 한 달 정도는 계속 그럴 것 같아요. 1월 중순에 전체 촬영 일정이 끝날 것 같지만, 아마 전 12월 말까지만 찍으면 될 거에요.”
“그렇군요. 태산인 제가 돌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쿠첼루스가 아니라면 태산이를 이렇게 편하게 맡기지 못했을 것이다. 정원의 일도 알고 있고, 태산이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쿠첼루스에게 잘해주자고 속으로 한 번 더 다짐했다.
태주는 정원에서 챙겨온 허브 티 중 제일 좋은 것을 쿠첼루스에게 주고 나머지는 쇼핑백에 잘 챙겼다. 회사에 보낼 것과 촬영장에 가져가서 자신이 마실 것이었다. 지인에게 선물로 보낼 허브 티는 나중에 해나가 휴가에서 돌아오면 만들 생각이었다.
앞으로 태산이 촬영장에 가고 싶어 해도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추워지는 날씨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촬영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외부의 견제도 그렇고 새로 합류하는 조연들도 그렇고. 생각보다 어수선하고 환경이 좋지 않았다.
“다녀올게요. 산이 집 잘 보고 있어. 알았지.”
“앙!”
“형 다녀올게.”
“에쭈. 앙.”
“읔.”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 태주를 보고 태산이 칭얼댔다. 호랑이일 때도 두고 가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더 심했다. 아이 모습으로 칭얼대니 발걸음이 잘 떼지지 않았다.
“음. 쿠첼. 매니저님 번호 알죠?”
“네.”
“저희 1시쯤 점심 먹을 거예요. 그때 맞춰서 오실래요? 맛있는 것 사드릴게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태주는 쿠첼루스가 태산이에게 이따 촬영장으로 보러 가자고 달래는 모습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촬영장이 가까운 곳이라 쿠체루스가 방문하기 괜찮았지만, 앞으로는 지방 촬영도 잡혀 있었다.
촬영장 방문은 태산이가 호랑이 모습일 때는 견우나 미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괜찮았다. 그러나 산이 모습으로 있을 때는 촬영장 방문부터 문제였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돌봐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보호자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앞으로 산이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 어떻게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
주차장에서 리딩 장소로 가는 도중 박지헌을 만났다. 조연이 하차하기 전에 만난 후로 촬영장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 역시 태주처럼 단독 씬을 당겨서 찍느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처음 세 명의 조연이 빠진 후로 하차하는 배우가 더 나오는 바람에 주연인 그도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연도 다 채웠고, 그들의 실력도 상당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박지헌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 손에 뭘 그리 바리바리 들고 왔어?”
“오랜만이에요. 이건 허브 티예요.”
“아아. 그게 그거구나.”
“어? 아세요?”
태주의 허브 티와 과일은 꽤 유명했다. 먹어본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할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하지만 파는 것이 아니라서 구할 수가 없었다. 물건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태주와의 친분이었다. 태주의 허브 티와 과일은 그와 친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희소한 것이었다.
“허브 티 효과 좋다고 세라가 자랑하던데. 난 왜 안 줘?”
“형은 차 안 마신다면서요?”
“그래도 몸에 좋은 건 먹어줘야지.”
“어휴. 아재.”
“이게.”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면서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제법 도착해 있었다. 태주와 박지헌이 들어서자 잠시 시선이 몰렸었지만, 금세 다들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태주 역시 가져온 물건들을 자기 자리 근처에 내려놓고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뭐하냐?”
“허브 티라고 했잖아요.”
“보온병에 타온 줄 알았지. 누가 티포트를 챙겨올 줄 알았겠어?”
“한 잔 드려요?”
“응.”
태주는 자신이 아끼는 티 포트와 직접 블렌딩 한 허브 티를 챙겨왔다. 우린 차를 텀블러에 담아 오는 게 아닌 테이블 위에 티포트를 세팅하고 느긋하게 차를 우리고 있었다.
“하여간 특이해.”
“흥. 우선 마셔보세요. 마시고 난 후에 더 달라고 하실 걸요?”
“그래, 그래.”
쿠첼루스에게 선물하려고 모아둔 상급 허브로 블렌딩 한 허브 티였다. 맛도 효과도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태주가 차를 우리자 방안에 허브 향이 가득 퍼질 정도로 향도 진했다.
“와! 무슨 허브 티가 이래? 향이 너무 진해서 거북할 줄 알았는데, 이건 부드럽게 넘어가네. 맛은 또 엄청 상쾌하고 깔끔하고.”
“하하하. 맛있죠? 이거 제가 블렌딩 한 거예요.”
“맛있어. 진짜 괜찮네.”
차를 마시면서 풀린 분위기에서 태주가 박지헌에게 드라마 잘 찍자는 얘기를 했다. 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태주의 모습에 박지헌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진정해라. 안 그러던 애가 왜 이리 과격해졌어?”
“어휴. 형 이 기사 좀 봐봐요.”
“뭔데?”
태주는 고양이를 휴게소에 버린 온더탑의 김성진 기사를 찾아서 박지헌에게 보여줬다. 차를 마시면서 천천히 기사를 읽던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 뭐야? 지금 키우던 고양이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린 거야?”
“네. 걔가 이번에 아스타에 나와요.”
“허 참. 인간말종 같은 게. 못 키울 거면 좋은 주인을 찾아줄 것이지.”
“워후. 형 진정하세요.”
이번엔 태주가 그에게 진정하라 말했다. 박지헌은 잠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차도 한 모금 마시고 숨도 여러 번 크게 쉬더니, 얘기를 풀어놨다.
그는 강아지 세 마리를 키우는 강아지 아빠였다. 그중 한 마리가 열다섯으로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펫 로스라는 주제에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데 김성진이 그것을 관심을 끄는 용도로 사용한 기사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는 얘기였다.
“너도 고양이 키우지? 촬영장에도 자주 데려온다며?”
“얼마 전까지야 제 위주로 촬영하니까 데려왔었는데, 이제는 무리죠. 날도 추워지고 일정도 빡빡해서.”
“엄청 귀엽다고 난리던데.”
“귀여워요. 똑똑하고 활발하고. 장난기가 많은데, 그래도 엄청 착해요.”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박지헌과 촬영을 이어온 메인 감독 박상현이었다. 태주와 박지헌이 그를 반갑게 맞아줬다. 태주는 차를 한잔 따라주면서 그의 질문에 답했다.
“아스타 발라버리자는 얘기요.”
“네?”
“야!”
“동 시간대 정면 대결이잖아요. 제대로 밟고 왕좌를 차지하자고, 지헌 형이랑 의지를 다지는 중이었어요.”
“아이고. 태주야.”
“하하하.”
박지헌이 옆에서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도 전의로 활활 타는 건 마찬가지였다.
LT 제작사 제작, 도깨비 무사에서 그를 곤란하게 만든 방 CP가 대표로 옮겨간 곳이다. 아스타의 주연배우 김동현, 그와 포지션이 겹쳐 10년 넘게 여러 곳에서 부딪히며 경쟁 중이다. 마지막으로 온더탑의 김성진,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 없었다.
감독의 이른 등장에 태주 쪽을 주시하던 다른 배우들의 눈이 과격한 그의 멘트에 놀란 듯 크게 떠졌다. 태주는 그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작가님 대본 아주 좋죠. 배우들?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이런데 감독님은 자신 없으세요?”
“무슨 그런 말씀을. 자신이 없을 리가요? 킥. 좋아요. 아주 제대로 보여주자고요. 돈 만 때려 넣는다고 다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하하하. 감독님이 뭘 좀 아시네요.”
태주에게 호언장담한 박상현 감독이 방 안을 둘러봤다. 안 보는 척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마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개중엔 상대가 아스타, 대규모 자본의 드라마라 여전히 꺼리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연과 주 조연이 투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톱배우와 주연급인 젊은 배우, 말만큼이나 실력이 보장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먼저 시작한 촬영에서 이미 그것을 충분히 증명했다.
그런 두 사람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침침했던 시야가 밝아진 기분이었다.
‘태주 씨 한 명 이쪽으로 합류한 건데, 분위기가 확 살아나네.’
이복동생 역을 찾지 못할 때 박지헌이 태주가 다른 드라마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며 무척 아쉬워했었다. 그는 태주만 합류할 수 있으면 촬영장 분위기나 작품 완성도가 아주 좋아질 거라면서 여러 번 얘기했다.
박지헌의 칭찬이 계속되자, 작가도 감독도 호기심이 생겼다. 두 사람은 여건상 섭외할 수 없는 배우였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태주의 작품을 확인해 봤다. 그리고 박지헌과 같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렇게 아쉬워하던 중 태주의 드라마가 편성이 늦춰지며 일정이 비는 일이 벌어졌다. 그 사실을 박지헌이 확인해주자마자 조건이고 뭐고 보지 않고 바로 대본부터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섭외된 태주는….
‘최고의 선택이었지.’
태주의 발언 후에 장 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모두 생수와 커피가 놓여있는 테이블 위에 혼자 티 세트를 세팅해두고 느긋하게 대본을 확인하는 태주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초조한 표정이던 사람들이 그의 여유와 자신감이 묻어나는 태도를 훔쳐보고 안심하는 것 같았다.
“차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얼추 모이신 것 같으니,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네.”
감독의 말과 함께 묘한 열기와 전외가 깔린 리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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