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성벽 밖의 결투가 끝났다.
승자는 제이드였다.
루퍼스는 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제이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왕국의 끄트머리까지 쫓겨온 자신이, 현재로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내. 사실상 루퍼스에게 남은 마지막 등불과도 같은 존재.
지금까지 제이드가 행한 행보 하나하나가 놀랍고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건 방금의 결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숙부 코하르펜의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추격해온 기사.
제이드는 그를 몰아붙여서 그가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걸 밝혀냈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숙부가 악마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니······.’
그런데 제이드가 악마의 하수인을 죽였다. 그것도 혼자서.
심지어 그 과정은 더욱이 터무니없었다.
제이드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의 운무가 펼쳐졌고 그 안에서 오러가 응집했다.
총 5개의 검기가 허공에서 생성되었고, 쏘아져 나가서 괴물을 베어냈다.
‘그건 대체 뭐였지?’
그것을 목격한 루퍼스는 전율했다.
마나 하트와 단절된 오러가 그토록 오랫동안 형체를 유지할 수 있다니?
상식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제이드는 정식 수련을 받은 기사도 아닌 용병이 아니던가?
‘······재능?’
그건 단순히 재능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루퍼스를 놀라게 만든 것은 제이드 일신의 무력만이 아니었다.
그가 일으키는 기적들은 그의 검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었다.
‘대체······.’
성벽 밖.
제이드를 향해, 오백에 가까운 병력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400여 명의 병사와 30여 명의 기사가 말이다.
루퍼스는 자신의 시야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지금 일어나는 게 사실이란 뜻이다.
홀로 적진으로 걸어 들어가서, 자신을 적대하던 이들에게서 충성을 얻어낸 것이다.
금화를 뿌린 것도 아니다.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다.
제이드가 한 일은 그저 그들을 향해서 무어라고 외쳤을 뿐.
그간 활약했던 제이드의 모든 업적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것이 작금의 상황이었다.
125명이라는 열세에서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되려 430명이라는 병력을 얻어낸 것이다.
‘기적이다.’
한편,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루퍼스만이 아니었다.
그리핀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자, 왕실 마법사인 일레인 모르지에.
그는 코하르펜 군의 후방에서, 아군 병력이 일제히 항복하는 광경에 황당함을 느꼈다.
‘고작 용병의 세치혀에 넘어간다니. 이게 동부의 수준이란 말인가.’
기가 찰 일이다.
자신들을 지휘하던 기사가 악마의 힘을 다루고 있던 것도, 그 기사를 죽인 게 용병이란 것도 말이다.
작금의 상황 전부 일레인에겐 우스꽝스러운 연극 같았다.
일레인의 금빛 동공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먼저 조각난 채 새까맣게 타버린 고른의 시체.
저 기사는 분명 코하르펜이 고용한 이센디오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고른의 정체를 과연 이센디오가 몰랐을까? 제국의 기사들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오히려 이센디오 역시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아무리 제국의 기사일지라도 오러 마스터를 어떻게 쓰러트렸나 싶었더니 저런 사특한 힘을······.’
코하르펜 공작이, 글레바 후작이 과연 몰랐을까? 그럴 리가.
‘늑대를 잡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하지만 이미 자신 역시 한배를 탄 상황.
차라리 저 정보를 이용해 글레바 후작에게서 두둑한 지원을 받아내는 편이 이득일 터다.
‘문제는 저놈이다.’
일레인은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항복한 병력들 사이에서 우뚝 서서 병력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시야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일레인 역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지?’
놈이 고른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기술.
제이드가 방사한 마력이 스스로 응집하더니 오러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나.
몇몇 머저리들이 마법이라며 중얼거렸지만, 그건 마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레인은 왕실 마법사로서 쌓아온 지식과 통찰, 그리고 기저에 깔린 본능까지 전부 경종을 울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능력이다.’
제이드는 위험하다고 말이다.
‘저놈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놈을 죽일 수는 없었다.
대부분 기사와 병사가 제이드에게 투항한 상황.
남은 건 자신이 이끄는 44인의 그리핀 부대뿐이었다.
일레인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글레바 후작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왕과 왕자를 죽이더라도 모든 가문을 복속시키고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병력이 필요할 테니까.
그 병력을 이끌고 온다면, 제아무리 제이드라고 할지라도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 후퇴한다.
그리핀 부대만이 읽을 수 있는 마력 패턴으로 신호를 보낸 일레인이 그리핀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삐이이익!
커다란 함성을 내지른 그리핀들이 하나둘 하늘로 날아올랐다.
“음?”
그런데 그 수가 적었다.
정확히 44마리의 그리핀 중 21마리의 그리핀만이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당황한 일레인이 아래를 바라보았다.
마법사의 협박에도 그리핀을 조종하지 않는 라이더들.
몇몇 마법사들은 서로에게 지팡이를 겨누기도 했다.
“마법사란 놈들이 고작 용병 놈의 말에 설득당한 것인가?”
기가 찬 일레인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하나같이 머저리이지 않은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 못 하는 머저리들이다.
“일레인 대장.”
그때 뒤편에서 그리핀을 탄 여인이 보였다.
알리나, 자신과 같은 왕실 마법사이자, 그리핀 부대의 부지휘관.
그녀는 저 아래의 머저리들과는 다르게 올바른 판단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일레인이 그녀를 향해 말하며 그리핀의 속도를 높였다.
“알리나.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후방의 부대와 합류해서 놈들을 제거한다.”
“아뇨.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뭐?”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일레인이 몸을 우뚝 멈췄다. 아니, 움직이지 않았다.
석고가 된 듯 뻣뻣해진 몸이 덜덜 떨렸다.
날개를 편 그리핀의 몸체가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제야 일레인은 주변을 감싼 십수 겹의 마력장을 볼 수 있었다.
“염동 마법······!”
무형의 마력이 일레인을 공중에서 억압하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쇠사슬들이 일레인을 옥죄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당황한 일레인이 알리나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알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까지 자신을 향해 겨눈 완드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게 시사하는 것은······.
“······루퍼스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마법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냐?!”
어차피 루퍼스는 떨어지는 별이다. 코하르펜이라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지 않았나.
시기적절이 그를 이용하고 손쉽게 공을 세워 이득을 얻으면 된단 말이다.
일레인은 그렇게 소리쳤다.
알리나는 그런 일레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들이 계산적인 건 알지만 당신만큼은 아닐 겁니다. 저 역시 왕가에 대한 충성은 깊지 않지만······.”
그리핀을 탄 알리나의 싸늘한 시선이 고른의 사체와 일레인을 향했다.
“······적어도 선을 넘진 않을 겁니다.”
악마의 하수인이 연관된 이상, 저들의 행보는 위험하다.
이 이상 그들과 엮이지 않는 게 낫다.
그것이 알리나와 그리핀 부대의 계산이었다.
“······너─”
묘한 표정을 지은 일레인이 무어라 중얼거리려 했지만, 겹겹이 쌓인 염동의 마법이 그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속수무책으로 추락하는 일레인의 육신.
그것은 곧 암석산의 한 면에 처박혔다.
콰직!
알리나는 곤죽이 된 알레인의 사체를 내려다보고는 칼테르 요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퍼스 저하가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
마법사는 계산적인 존재다.
그리고 알리나는 이 혼란에 빠진 마누스에 대한 계산을 마쳤다.
루퍼스가, 정확히는 제이드를 데리고 있는 루퍼스라면 마누스를 평정할 것이라고.
* * *
나는 금색 머리칼의 여인과 그 휘하의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저, 왕실 마법사 알리나 아엘린 외 마법사 39명. 루퍼스 저하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리핀 부대의 부지휘관 알리나 아엘린.
그녀는 도망치던 그리핀 부대의 일레인 모르지에를 처형하고 내게 항복했다.
그리핀 한 마리의 발톱에는 일레인의 시체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판단이 빠르네.’
그리핀 부대은 역적 중의 역적이었다.
왕실 직속 부대임에도 배신하여 왕자를 추격하는 중대한 우를 범했다.
아무리 항복한다고 해도 죄를 묻지 않기 힘들 상황이었다.
그런데 달아날 수 있었음에도 제 지휘관을 직접 죽이고 그 시체를 바치며 충성을 맹세한다면?
‘그림이 이쁘지.’
그리고.
“저는 기사 휴고라고 합니다. 명예롭게 행동하는 당신의 모습에 감복했습니다.”
“저 기사 벨로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이드. 당신의 고귀한 행동이 저희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제 가문, 또는 주군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부러뜨리고는, 그것을 밟은 채 부복한 기사들.
로가드 가문의 기사 휴고, 스네임 가문의 서자이자 기사 벨로린 등 삼십이 넘는 기사들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 기사들을 일일이 일으켰다.
내 손을 맞잡고 일어나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들어찼다.
왕이 직접 손을 내민다 해도, 이것보단 덜 기뻐할 것 같았다.
‘화술의 효과 때문인가? 호감도가 너무 세게 오른 것 같은데.’
실제로 떠오른 메시지가 쉼 없이 올라오기도 했고 말이다.
적어도 저들이 거짓으로 귀순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충성을 받아낸 병력을 이끌고 칼테르 요새로 다시 입성했다.
요새의 병사들과 대원들은 환호했으나,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홀로 결투를 벌이고 오백의 병력을 전부 흡수한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긴 하니까.
“······제이드. 너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성으로 들어오자 루퍼스가 기사 아론의 호위를 받으며 다가왔다.
루퍼스는 감탄하면서도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호위 기사 아론이 루퍼스에게 다가오려는 기사들을 저지했다.
“멈춰서라. 저하에게 다가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든 반기를 들었다는 죄는 씻을 수 없는 낙인이다.
휴고와 벨로린 등 기사들은 그 처지를 이해하기에 고개를 깊게 숙일 뿐이었다.
“괜찮다. 휴고 경. 제이드가 보증하지 않느냐. 나 역시 저들을 믿겠다.”
루퍼스는 그런 아론을 물리고 기사들 앞에 섰다.
“그대들은 한때 나와 함께 싸웠던 나의 검들이니까.”
“······저하!”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한 몸 저하께 바쳐 명예를 되찾겠습니다!”
루퍼스의 너른 아량에 감동한 기사들은 더욱 깊이 고개 숙였다.
‘물론 루퍼스도 진심으로 용서하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겠지만.’
뭐가 됐든 저들을 완벽하게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열세니까.
충성심이 차오른 기사들은 루퍼스의 질문에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전부 불었다.
현재 수도의 동향, 그리고 왕성에 있을 코하르펜 공작의 움직임 등을 말이다.
그렇게 몇 가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코하르펜 공작이 결국 왕성을 점거했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국왕 루브릭 2세의 서거(逝去).
“······아론, 그리고 제이드를 빼고 잠시 나가 있거라.”
그 이야기를 들은 루퍼스는 잠시 기사들을 물렸다.
루퍼스는 잠시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나는 루퍼스의 어깨가 아주 살짝,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 공간에 무거운 정적이 자리 잡았다.
정적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루퍼스가 입을 다시 연 건 그로부터 10분이 지나서였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직접 그 사실을 마주하게 되니 당혹스럽구나.”
“저하.”
“괜찮다. 나는 마누스다.”
아론 경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루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결심한 듯 루퍼스의 붉은 눈동자가 불꽃처럼 짙게 타올랐다.
“내 자리를 찾으러 갈 것이다.”
그 불꽃 같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 * *
나는 귀순한 그리핀 라이더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칼테르 요새에 그리핀들이 줄지어 앉았고, 그 앞에 고글을 착용한 라이더들이 도열했다.
내가 그들 앞에 서서 말했다.
“당신들이 해줘야 할 게 있습니다.”
“······저희가 말입니까?”
그리핀 라이더들.
왕성 직속 부대 출신의 정예들이지만, 전투에 동원될 때는 전투 마법사들의 지휘를 받게 된다. 그래야지만 일종의 폭격기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리핀 라이더들이 반기에 협력한 것은, 전투 마법사들의 협박 때문이었다.
계급은 높으나, 귀족 신분이 아닌 그들은 권력의 완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마누스의 날개가 우리의 새로운 힘이 되어줄 것이다.
“제이드. 뭐든 말만 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돕겠네.”
쥬리핀, 나와 함께 루퍼스에게 합류했던 그리핀 라이더.
그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나는 그리핀 라이더들에게 보따리를 하나씩 건네주며 말했다.
“지금 즉시, 왕국 전역으로 이걸 퍼트려 주십시오.”
“이건······?”
보따리를 받아 든 쥬리핀이 갸웃거리며 내용물을 바라보고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흐어어억! 제이드 이, 이건?”
보따리에서 나온 건 새까만 덩어리였다.
“고른, 악마의 하수인의 시체 조각입니다.”
짐승의 손을 닮고, 털이 자란 신체 조각들을 보따리에 넣은 것이었다.
“이걸 마누스 전역으로 퍼트려주십시오. 그리고 코하르펜이 악마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소문 내주세요. ······그리고 누가 죽였는지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요새 안의 병력을 바라보았다.
본디 125명이었으나 500명이 추가되었다.
여기에다가 에스트콕 성에서 대기 중인 병력까지 합친다면······.
‘······1천.’
추격자들에게 쫓기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백 명도 안 되는 소수였다.
그런데 벌써 1천이 모였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우리의 깃발 아래로 들어올 것임을, 나는 확신했다.
‘마누스 전역에 퍼져 있는 내 명성이 무기가 될 거다.’
외부의 적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단결하게 한다.
페르딤 공화국과의 전쟁이, 마누스 왕국에게는 단결의 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쟁을 종결지은, 전쟁 영웅이 아니던가?
적병들이 내 연설에 감화되어 루퍼스의 아래로 귀순한 것도 그 명성 덕분이었다.
나는 이 명성을 이용해 전쟁의 흐름을 바꿀 것이다.
‘코하르펜 공작이 왕을 죽이고 왕성을 차지했다고 해도 마누스 전체를 집어삼킬 수는 없다.’
코하르펜의 세력에 반대하지만,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한 이들이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령을 통해 내 이야기를 듣고, 점차 고개를 들 것이다.
점차 많은 이들이 고개를 들 것이고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리라.
삐이이익─!
나는 성벽 너머로 날아가는 그리핀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리핀 위에 탄 그리핀 라이더들과 짐에 실린 보따리들.
반격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 * *
제이드의 명령을 받은 그리핀 라이더들은 동부에서 마누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남부에 위치한 칸델 지방으로.
북부에 위치한 디킨스 성으로.
서부의 에르뒴 산맥 일대로.
그리핀 라이더들은 성으로 날아들었고, 보따리를 전하며 각 영주들에게 알렸다.
코하르펜 공작. 그가 반역을 저지르고 왕위를 강탈했음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악마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를 막기 위해 1왕자 루퍼스가 전쟁 영웅 제이드와 함께 힘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마누스 전역으로 이야기는 퍼져나갔다.
영주들은 보따리 속에 들어 있던 살점 조각이 악마의 것이라는 걸,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 영주들은 직접 교단의 사제들을 불러 진위를 확인했다.
“이걸 믿을 수 있을 것 같소? 놈들이 조작된 것을 뿌릴 수도 있지 않소?”
“쉿! 말조심하시오. 내 방금 주신교단에 가서 확인하고 왔소. 마기가 깃들었다는군.”
“그게 사실이오?”
“게다가······ 이걸 잡았다는 제이드. 그자는 지난 전쟁 때 주신 교단의 명예 훈장인 실버 크로스까지 받았다는군.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오? 교단이 검증한 인물이라는 거지.”
“헉······ 그러면 교단이 루퍼스 왕자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니오? 페르딤과의 전쟁을 끝낸 것도 사실상 교단이었는데, 이번에도 개입한다면······ 진짜 판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오?”
하지만 나날이 퍼져가는 소문과 이야기 속에서 영주들은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며, 이것이 단순히 거짓된 소문이 아님을 알았다.
그 소문은 수도, 마누스 왕성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코하르펜의 귀까지 당도했다.
화려한 만찬이 식탁에 올라와 있는 홀.
그곳에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코하르펜은 들고 있던 술잔을 집어 던졌다.
카앙!
금으로 만든 술잔이 벽을 튕기며 홀을 울렸다.
“······이센디오 경. 그대에게는 계속해서 실망하게 되는군.”
코하르펜의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달아오른 얼굴과 턱 끝까지 올라온 핏줄은 그가 진노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믿었고, 그대는 내게 약조했을 텐데.”
소문을 듣고 언짢은 건 이센디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른. 녀석이 죽었다고······.’
심지어 악마의 모습처럼 변한 채 죽었다고 한다.
그 뜻은 명확했다. 정수의 부작용.
‘정수라도 빼돌렸었나. 두 개 이상 먹지 않고는 변할 일이 없는데 말이지······.’
그때 다시금 코하르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센디오 경!”
그에 얼굴을 구긴 이센디오가 식탁을 내리쳤다.
콰앙!
마력을 실은 주먹에 식탁이 쪼개졌다.
충격에 잠시 허공으로 띄워진 접시들이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져나갔다.
홀의 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이센디오를 경계했다.
코하르펜은 흠칫 놀라 의자를 뒤로 밀었다.
기사들이 몇 명이라 한들 저자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한순간 방 안이 싸늘해졌다.
그때 다시 미소를 지은 이센디오가 코하르펜을 향해 말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부하가 죽었다는 말에 감정이 격해져서.”
“······검을 집어넣어라. 네놈들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코하르펜의 말에 기사들이 급히 물러섰다.
* * *
주신교단 교단청 셀리움 지부.
파르르륵.
그곳을 향해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 뒤로도 서네 마리의 비둘기가 더 날아들었다.
“또 같은 이야기로군.”
로지네 추기경은 비둘기들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하나하나 찬찬히 읽은 후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을 벌컥 열며 주황색 머리칼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이네스. 내가 분명 들어올 때는 예의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똑똑. 신도 이네스가 추기경님을 긴히 뵙길 청합니다. 파이프 담배 냄새는 티 안 나게 다 날려버리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왔답니다.”
비꼬는 말투로 생글생글 웃는 이네스.
로지네 추기경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와이트 아울 기사단의 부단장이 이런 모습이니······.”
“그러는 기사단장님께서는 저를 왜 부르셨을까요?”
와이트 아울 기사단.
어둠 속에서 교단의 적을 상대하는 기사단의 단장이 바로 로지네 추기경이었다.
그리고 주황머리의 여인, 이네스는 로지네 추기경의 뒤를 이어 차기 기사단장이 될 아이였다.
끙 소리를 낸 로지네 추기경은 주제를 바꾸었다.
“최근, 마누스 왕국이 소란스럽더구나. 그런데 재미있는 소문도 함께 돌더구나.”
“소문이요?”
이네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로지네 추기경이 이렇게 운을 띄우면은,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대부분 그 지역에 가서 무언가를 알아보라는 막연한 파견 임무가 내려지곤 했으니까.
“악마의 힘을 빌린 기사가 나타났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그를 죽인 게 교단의 실버 크로스 훈장을 받은 이라고 하는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묻는 편지가 오고 있단다.”
로지네 추기경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책상의 편지를 가리켰다.
그의 책상에는 수십 통의 편지가 쌓여 있었다.
저렇게 온 편지만 해도 오늘만 열통, 어제까지 합하면 서른 통이 넘었다.
이네스는 곧장 연통 하나를 가져와 빠르게 훑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기억 속에 남은 한 남자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 있었으니.
“제이드?”
“아는 이름이더냐? 그자가 악마의 힘을 가진 기사를 죽였다더구나.”
로지네 추기경의 말에 이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피식 웃는 게 아니던가.
“······제이드, 아주 재미있게 살고 있나 보네?”
이네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이드, 그자는 제가 보증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내죠. 주신의 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요.”
주신의 검.
신의 적들을 처단하는 성기사들을 뜻했다.
성기사로 은유할 정도로, 이네스가 제이드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정말 조작되지 않았다는 거군······.”
그렇다면 악마의 힘을 빌린 이들이 마누스 왕국 내부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 터.
교단 병력을 파견하여 진상을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다.
‘점차 대륙이 시끄러워지고 있군.’
그때 이네스가 말했다.
“추기경님? 제가 마누스 왕국 안으로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마누스 왕국? 내전 중인 왕국으로는 무슨 일로?”
“마레오 공국의 제니온 산맥의 사건 있잖아요?”
제니온 산맥의 영지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사건이다.
그곳에 남은 희미한 마기에 흑마법사들이 엮여있다고 판단해 이네스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누스와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로지네 추기경의 물음에 이네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누스 출신 용병을 좀 고용할까 합니다.”
“······그 사태에, 용병을 쓰겠다고? 그것도 마누스까지 가서?”
로지네 추기경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네스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용병들이 솜씨 좋더라고요. 악마까지 잡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