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
화마(火魔)
그 말이 이리도 적절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불길이 인간이 세운 가장 거대한 도시를, 가장 위대한 문명을 잡아먹고 있었다.
게걸스럽게.
잿더미라는 부스러기만을 남긴 채.
그 혼란 속에서 돌아다니는 건 수도의 백성이었던 시체들.
그리고 기괴하게 생긴 악마들과 마수들이었다.
실시간으로 멸망해가는 이 도시의 이름은 베나룸.
바로 헬리오스 제국의 수도였다.
그리고 현재, 멸망해가는 도시를 바라보는 두 사내가 있었으니.
그들의 이름은 퍼셀과 스카.
제1 황태자, 카웰이 대륙에 남겨둔 심복들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네요? 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당연한 결과였다. 황제도, 황태자 전하도 없다. 이미 수도는 그 기능을 상실한 셈이지.”
붕괴하기 시작하는 황성을 바라본 둘은 수도의 서쪽을 바라보았다.
피난민의 행렬은 끊겼으나, 이따금 미처 탈출하지 못한 이들이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게 보였다.
그런 길의 한쪽엔 기사들 것으로 짐작되는 시신의 산이 보였다.
피난민과 저항군을 이끌던 엔힐 공작.
그녀는 추격해오던 마수들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를 비롯한 휘하의 기사들 모조리 전멸했다.
“흐음······. 이건 좀 그렇네요.”
마력으로 안력을 강화한 퍼셀이 엔힐 공작과 시선을 교차했다.
아니, 정확히 교차는 아니었다.
엔힐 공작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으니까.
감기지 못한 그녀의 눈동자를 퍼셀 혼자 바라본 셈이다.
그런 그녀의 뒤로, 이름 모를 기사들과 병사, 운이 없게 휘말린 피난민까지.
곳곳에 널린 시신들을 보았을 땐, 아무리 퍼셀이라도 웃음을 흘릴 수는 없었다.
“저희가 좀 더 적극적이어야 했던 거 아닙니까?”
퍼셀과 스카는 한 가지의 임무를 받았다.
제국 내부에서 공작하여 최대한 시간을 끌어달라는 것.
하지만 그들의 생각 이상으로 악마들의 군세는 거대했고, 강력했다.
둘은 엔힐 공작을 도와 반 마이어스 파를 결집했고 저항군의 창설을 도왔다.
하지만 그 노력은 제국 수도 시민의 대피라는 결과에 그쳤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이 이상 노출되었다간 마이어스와 악마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할 것이다.”
“흐음······.”
“그보다 더 큰 문제라면 피난민들을 이끌고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느냐이지.”
현재 죽은 엔힐 공작 대신 피난민을 이끄는 이는 파가튼 사령관이다.
문제는 그토록 많은 피난민을 이끌고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는가이다.
그때, 저 멀리 수도의 관문으로부터 언데드 무리가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이들, 그리고 최후까지 수도에 남아 항전하던 병사들이었다.
그 규모만 수만.
누군가는 좌절하고, 희망을 포기할 규모.
하지만 스카는 저 규모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놈들은 규모를 더 키울 것이다. 막지 못할 언데드 군세로 말이지.”
“휘유~ 그걸 막을 방법은 있어요?”
“없다. 지금 병력으로는 무리지. 오히려 자살행위에 가깝다.”
“엔힐 공작처럼 말이죠?”
“······사족이 길군.”
퍼셀이 현재 상황을 비꼬듯 말하자, 스카가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스카는 하려던 말을 이었다.
“결론은 우리에게, 아니 인류에게 유리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거다. 그곳에서 수성전을 벌여야 하지.”
그리고 둘은 그 장소를 그들의 주군에게 이미 들은 바 있다.
“마누스 왕국의 칼테르 요새라고 했던가요?”
“그래. 고대부터 있던 천혜의 요새라더군. 아공간 마법과 성역이 부여되어서 꽤 많은 병력이 들어간다는 듯하다.”
스카의 설명에 퍼셀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뭐가 문제지?”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다른 요새들도 많은데, 굳이 거기까지 가는 게 맞아요?”
“황태자 전하가 직접 보고 결정하신 거다. 제이드가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었다더군.”
“또 제이드에요? 대체 그자는 뭘 알고 준비했대?”
퍼셀은 고갤 저으며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흥미로운 사내. 그러면서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악마와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자라고 하지 않았나.”
“흐음······ 부디 마계에서도 그 실력이 발휘되길······ 아니, 좀 빨리 발휘되길 바라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으면.
대륙 전체의 종족이 적의 편에, 망자가 되어 서 있을 테니까.
* * *
[망령왕의 군대의 의지를 계승했습니다.] [마계를 정복하십시오.]눈앞의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번 탐사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 네 녀석은······? 아니, 이 기운은······ 그 무기들은 설마?
신관처럼 차려입은 기이한 악마.
놈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가는 걸 보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
나는 단원들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다들 오래 기다렸지?”
“제이드, 그 무기들은 대체······.”
“너희 거야. 각자 가져가.”
부웅─
내가 손짓하자, 상자 모양의 모노리스가 단원들의 앞으로 날아갔다.
철커덕!
모노리스가 열리자, 모습을 드러낸 건 무기고처럼 가득 차 있는 새로운 무기들.
커다란 도끼부터 기다란 창, 단검과 활까지.
동굴 안쪽에서 발견한 온갖 무기들을 가지고 왔다.
바로 이름 없는 전사들의 무기였다.
“이거······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뭐야, 힘이 더 넘치는데?”
그리고 그 무기들은 전부 별의 조각으로 이루어진바.
단원들이 무기를 쥐는 그 순간.
두근.
녀석들의 심장들과 연결된 흑암성.
그 힘이 크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이내 그 힘은 각자의 무기를 통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보라색의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우와아앗! 뭐, 뭐야?! 오, 오러?”
“지금 오러가 나온 거야? 심지어 제이드가 쓰는 것과 똑같은데?”
그래. 그 모습은 마치 오러와도 같았다.
그것도 내가 사용하는 흑암성의 오러.
물론 오러를 깨우친 건 아니다.
나와 연결된 흑암성의 기운이 분출된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황을 바꾸긴 충분하지.’
크르르륵!
키익! 키이익······!
물 밀듯 달려들어 오던 마수들은 겁에 질린 듯 움츠렸고, 심지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 별의 군대의 무기들······! 그걸 기어이 찾아내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그런 우리의 모습에 악마가 분노한 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끝이 떨리는 걸 나는 눈치챘다.
마치 두려움이라도 느끼듯이.
당장 달려들 것만 같은 말과 달리 저 악마 또한 주춤하고 있었다.
‘기세는 이미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곧장 밀어붙이기로 판단.
나는 도로시를 향해 신호했다.
“공포는 저들을 위축시킬지니.”
그때 옆에서 도로시가 마법을 발동했다.
동시에 검보라빛 파장이 일며 마수들을 일제히 약화시켰다.
나는 도로시를 향해 엄지를 치키며 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세이비어 결사단! 저 악마와 마수들을 살려 보내지 마라!”
“하하! 역시 우리 대장은 제이드밖에 없다고.”
“데릭은 호통만 친단 말이지.”
그러자, 녀석들이 눈을 빛내며 곧장 달려들었다.
“시끄러, 이 자식들아! 나보다 마수들 못 죽이면 그대로 기합이다!”
데릭이 새로운 도끼를 휘두르자, 그 궤적을 따라 검보라빛 기운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
그 기운에 휩쓸려 날아가는 마수들을 향해 로빈이 화살을 쏘며 마무리했다.
그 옆에서도 단원들이 각자 무기를 휘두르며 마수들을 처치해나갔다.
‘무기를 얻자마자 전황이 완전히 달라졌어. 더 강해진 거야.’
나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단원들은 마수들을 상대하는 데엔 문제없었지만, 마수들을 전부 막아낼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놈들은 다가오지도, 벽과 천장을 기어 오지도 못했다.
아니, 오히려 겁에 질려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 전진해라! 놈들을 사냥하란 말이다!
악마가 당황한 목소리로 손을 까닥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두 마수들의 몸이 억지로 움직이듯 주우욱 끌려 나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단원들의 신무기 앞에서는 마수들은 금세 고깃덩이가 될 뿐이었다.
– 놈! 내 직접 네놈을 잡아 별의 힘을 없애리라!
그에 분노한 녀석이 몸집을 크게 부풀렸다.
부우우욱!
흰색 면사가 찢어지며 드러나는 악마의 단단한 근육.
동시에 전신에서 자라난 회색 털이 놈의 몸을 뒤덮었다.
송곳처럼 자라나는 손톱과 이빨.
늑대 같은 그 모습은 마치 라이칸스로프를 연상케했다.
동시에 놈의 몸뚱어리에서 피어오른 마기가 마수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수들의 동공이 검게 물들며 이빨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악마를 노려! 악마가 마수를 조종한다!”
– 놈들의 목을 물어뜯어라! 내 손수 목을 뽑아내 주마!
나와 악마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런데 그때.
“바위여 저들의 발을 묶고 짓눌러라.”
도로시의 목소리와 함께 마수들의 다리가 땅속으로 훅 가라앉았다.
동시에 땅을 박차려던 마수들은 그대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잘했어, 도로시!”
“역시, 마법사야! 이젠 우리한테 맡겨!”
그 사실을 상기한 단원들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악마의 힘에 강화되었건만, 도로시의 마법에 허수아비로 전락한 마수들.
놈들은 그대로 단원들의 무기에 훅훅 쓰러져갔다.
쿵!
– 죽어라!
그 반대편에서 발톱을 드러낸 악마가 달려들었다,
이빨과 발톱을 단원들을 향했지만, 시선은 내게 향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을 다 죽이고 네게 갈 것이다. -라는 듯한 시선.
하지만 그건 놈에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너무 무시하는군.’
푹!
달려들던 악마의 한쪽 눈에 화살이 박히는 게 보였다.
──!
놈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창날이 어깨를 꿰뚫었다.
각각 로빈과 드렌트의 공격이었다.
‘이래 봬도 나와 함께 악전고투 해온 단원들이거든.’
이미 단원들은 정예병, 아니 하나하나가 뛰어난 장수라고 할 수 있었다.
흑암성의 힘을 나처럼 제대로 다룰 수 없었기에 그간 악마와의 싸움에서 활약하지 못했다만-
‘-이젠 아니다.’
이름 없는 전사들의 무기를 얻은 녀석들은 흑암성의 기운을 말 그대로 휘두를 수 있으니 말이다.
– 크아아악!
악마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브룩과 롭의 검에 베인 것이다.
터엉!
뒤따라 방패가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푹!
단검이 녀석의 손을 찍었다.
콰직!
메이스가 허벅지를 찍었다.
순식간에 난자되고, 깊은 상처를 입은 악마가 주저앉았다.
그 앞으로 선 데릭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새로운 도끼의 날에 검보라빛의 광채가 띄었다.
당황한 악마가 몸을 내빼려 했으나.
– 자, 잠깐. 기다─
“뒤져!”
걸걸한 데릭의 외침과 동시에 도끼가 단두대처럼 내리꽂혔다.
콰아앙!
늑대 같던 악마의 몸이 그대로 쪼개졌다.
정확히 반으로 양분된 시체는 이내 새하얗게 변하더니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결사단 돌격대장 데릭이 하급 지배의 악마 하운돌프를 처치했습니다.] [결사단 수색대장 로빈이 하급 지배의 악마 하운돌프의 처치에 기여했습니다.] [결사단 돌격대원 드렌트가······]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씩 웃었다.
녀석들은 강해진 것이다.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 * *
악마를 처리한 후, 남은 마수들을 죽이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로시의 마법에 움직이지 못하는 마수들을 죽이는 건 우리에겐 손쉬운 일이었으니까.
마수들을 처리하는 단원들을 바라본 뒤, 나는 카웰에게 다가갔다.
“제이드 경, 대체 저건······.”
카웰과 기사들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카웰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카웰 공. 이 땅에 온 건 우리가 처음이 아닌 듯합니다.”
“그게 무슨······ 그 말은 저 무기들은 즉, 누군가의 유산이란 말이오?”
“정확합니다. 오래전 우리의 땅에서 악마들을 몰아낸, 잊힌 영웅들의 유산이죠.”
나는 고갤 끄덕였다.
잊히다 못해, 이제는 이름 없는 전사들이라 불린 자들의 무구였으니.
아마도 망령왕의 부하였을 그들은 이 곳에 왔다가, 그대로 이 땅에 묻혔다.
그만큼 마계엔 강한 적들이 많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의 마계는 빈집이거든.
마계에서 건너온 거대한 악마, 라웨굴.
그리고 놈의 부하로 보이는 핵심 악마들은 전부 대륙에 소환된 상황.
바로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이제 우리는 놈들의 심장부로 진격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카웰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모노리스 상자에 담긴 한 물건을 꺼내 바라보았다.
그건 기다란 깃발이었다.
낡아 헤진 천이 힘없이 늘어졌지만, 그 끝에 달린 푸른 보석이 반짝였다.
수많은 무기 사이에서 혼자 꼿꼿이 서 있던 깃발들.
하지만 이 깃발이야말로 가장 귀한 물건, 아니 아이템이었다.
– 이름 : 이름 없는 기수의 깃발
– 설명 : 고대 시절, 마계 원정을 온 기수의 깃발이다. 깃대 끝에 부착된 기이한 보석이 기수에게 힘을 부여한다.
– 효과 :
1) 공격 회피율 20% 상승
2) 인근의 마기 흡수
3) 마기 흡수 시, 기수의 주변으로 흑암성 부여
보유자의 경우, 흑암성 대폭 강화
‘요약하자면, 광역으로 흑암성의 힘을 부여한다는 거지.’
흑암성의 가치는 셀 수가 없다.
그런데 그걸 광역으로 부여할 수 있다고?
심지어 이미 흑암성이 있는 경우엔 강화라고 한다.
나는 카웰과 그 뒤에 선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나하나가 고강한 실력자들이 200여 명.
그들을 전투원으로 이용할 방법이 생겼다는 뜻이다.
‘아니면, 단원들을 강화할 수도 있겠지.’
이 깃발 하나만으로도 무궁무진한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다.
그에 흐뭇하게 깃발을 바라보고 있자, 데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드! 여기 출구가 있다!”
나는 카웰에게 다시금 어깨를 으쓱이곤 발을 돌렸다.
“일단, 나가시죠.”
이 동굴에서 퇴장할 시간이었다.
* * *
동굴 밖으로 나서자 우리를 맞이 한 건 협곡이었다.
“으으, 또 협곡이야?”
“젠장, 이젠 협곡만 보면 치가 떨리는군.”
브룩과 롭은 넓은 협곡을 보자 질린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북부에서 보았던 악마들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 사이, 방호복으로 단단히 싸맨 카웰은 입구의 주위를 살폈다.
“선장님. 이 정도 크기라면 비공정을 끌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수리는?”
“이대로라면 1시간 이내에 가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언제 악마들이 찾아올지 모른다.”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카웰은 선원들을 동굴 안으로 돌려보냈다.
“제이드 경. 우선 알바트리온은 여기서 수리를 해야 할 듯하오. 그대는 어떻게 하겠소?”
“우선 이 근처를 둘러보아야겠습니다. 라이프베슬도 그렇고, 마계에 상륙했을 때 온 마수들······ 아무래도 저희를 감시하는 악마가 있는 것 같거든요.”
나는 도로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악마를 역추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도 되겠소? 원정의 경험이 있으니, 길잡이 정도는 되어줄 수 있소.”
제국의 황태자가 직접 길잡이 해준다니.
그거참 영광이군.
내가 고갤 끄덕이자, 카웰은 방호복을 더욱 단단히 조여 맸다.
그 뒤, 나는 도로시와 함께 동굴의 입구와 그 주변을 살폈다.
동굴의 입구 옆에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이 바위로 동굴을 입구를 막아뒀던 것 같은데.
그 바위엔 정체 모를 뿌리들이 칭칭 감겨 있었고, 그 위로 기이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처럼 말이다.
아마 좀 전의 악마가 진입하면서 입구를 치운 것으로 보였다.
“누가 일부러 막아둔 거였을까요?”
“아마 그랬을 거야.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지.”
“누구에게서요? 이들은 이미······.”
도로시가 말을 흐리며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입구의 한쪽엔 해골의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나는 저 해골들이 이름 없는 전사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유해는 동굴의 바위처럼 뿌리로 칭칭 엉켜 있었다.
‘유해마저 봉인한 건가? 왜지?’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동시에 추론했다.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도록 한 건가?’
먼 옛날 마계를 공격했던 망령왕의 병력들.
그들의 원정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다지만 마계에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악마들은 이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이렇게 봉인한 것이 아닐까?
마치 니아브 대륙에서, 악마들을 봉인한 것처럼 말이다.
그때 해골 무더기를 관찰하는 도중,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체에 잠재된 영력이 이면의 소리를 듣습니다.]‘영력? 이게 갑자기 왜······?’
– 우우우우.
– 우리는. 잊지. 않는다.
– 기억하라. 주군의 의지를.
그 순간, 귓가를 스치는 아우성.
‘설마······?’
“도로시. 잠깐 뒤로 물러나 있어.”
“네? 네.”
도로시를 뒤로 물린 뒤, 나는 단검 하나를 꺼내 오러를 피워올렸다.
서걱!
그리고 그대로 휘두르자 뿌리가 잘려 나가며 흩뿌려졌다.
동시에 해골 무더기가 요동쳤다.
그러나 해골들은 그대로였다.
그 속에서 일어난 것은······ 녹색의 망령들.
그 형체는 살도 해골도 없다.
갑옷을 입은, 아니 갑옷으로 이루어진 영체, 유령 기사들이다.
말 그대로 망자의 군대.
“꺄아악! 유, 유령!”
도로시가 비명을 지르며 내 뒤로 찰싹 달라붙었다.
그 사이, 유령 기사들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마치 오랜만에 신체를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
– 풀렸다······ 봉인이.
– 아아, 이 묵직하고. 서늘한 감각. 드디어. ······인가.
– 지긋지긋한 봉인이 풀렸다. 해방. 이다.
중얼거리던 유령 기사 중 몇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 누구지? 이 봉인을 풀어낸 자가?
– 인간? 마계엔 인간이라고?
– 잠깐 이 힘은······!
그러더니 갑자기 유령 기사 전원이 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는 게 아닌가?
“히익!”
“진정해, 도로시. 아무 일 없을 거야. ······아마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그때, 어비스 킬러가 갑자기 반짝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흑암성이.
갑옷에 흡수되었던 망령왕의 검, 마기 포식자가 반응한 것이다.
– 별의······ 힘!
– 별의 힘이다!
동시에 유령 기사들의 투구에서 푸른 귀화가 일어났다.
– 주군의 후예시여!
– 아아, 주군께서 약속을 지키셨다!
– 언젠가 마계를 탈환하여, 우리의 영혼을 거두시겠다던 맹세를!
망령왕의 약속? 맹세?
눈이 있었을 곳에서 타오르는 푸른 귀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대들은, 왕의 기사들인가?”
– 그렇습니다, 후예시여.
“후예라니······.”
거창한 칭호에 말을 흐리는 그때.
[칭호 – ‘흑암성의 두 번째 후계자’가 반응합니다.] [스킬 – 망령왕의 검술(LV. 4)을 보유했습니다.] [스킬 – 망령왕의 호령(LV. 1)을 보유했습니다.] [특성 – 위대한 영웅[S]를 보유했습니다.] [이름 없는 유령 기사단의 통솔권을 얻습니다.]‘······뭐?’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전방의 유령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 후예이시여!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