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37)
37화
그랑힐 시 4구역의 한적한 작은 술집.
두 사내가 맥주잔을 기울이며 떠들어댔다.
“그거 들었어? 언데드 때문에 폐쇄된 5구역 중 일부가 열렸다는데?”
“뭐? 그거 진짜야? 5구역은 언데드 때문에 닫았잖아? 심각하다며?”
“거기 참여한 용병 한 명이 내 사촌이거든? 이번에 온 웬 지원군들이 5구역 광장을 정화하고 수복했다는군. 보통내기가 아니었다는데?”
“크─ 대단하구먼! 아, 그보다 이번에 내가 여관에서 이쁜 창부를 만났는데······.”
두 사내가 잠시 눈을 빛냈지만 이내 시시껄렁한 주제로 넘어갔다.
한편, 사내들의 뒤쪽의 다른 테이블.
로브를 입은 이들이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저들끼리 속삭이기 시작했다.
“젠장. 저거 분명 제이드일 거야. 내가 활약했어야 했는데.”
로브를 둘러쓴 거한, 데릭이 입을 삐죽이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안 그래도 요즘 로빈이 자꾸 부대장 자리를 넘보는 것 같단 말이지. 어떻게 생각해?”
데릭의 뾰로통한 시선이 맞은편의 로버트와 지미로 향했다.
“데릭. 자네는 제이드가 믿고 맡긴 임무를 이끌고 있지 않나? 진정한 부대장이지.”
“그, 그런가? 크흠. 그렇게 말하니 맞는 것 같기도 하군.”
로버트의 어화둥둥에 데릭이 눈을 굴리더니 히쭉 웃곤 맥주를 들이켰다.
“풋!”
“뭐야? 꼬맹이 왜 웃어?”
“아니요. 그냥 웃긴 생각이 나서요. 아 맞아 로버트 아저씨. 여기 지도요.”
데릭이 눈을 낮게 뜬 채 지미를 노려보았지만 지미는 태연하게 화두를 돌렸다.
“마부용 도로망 지도라서 작은 골목들은 생략되어 있을 수도 있다네요.”
“고맙다. 지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런데 아저씨. 지도는 왜 필요하신 거예요?”
분명 그랑힐 시는 로버트의 고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여기에 온 건 나도 5년 만이거든. 달라진 점이 있는지 확인 좀 하려고 말이야.”
의아해하는 지미에게 로버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도를 빠르게 훑은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달라진 곳은 많이 없구나. 아무튼 이제 일어나세. 제이드가 맡긴 임무를 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적당히 말을 둘러댄 로버트가 일어났다.
로버트의 잔에 줄지 않은 맥주가 흔들렸다.
술집을 나온 일행은 4구역 골목 안쪽의 우물로 향했다.
커다란 도시인 그랑힐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인접한 세렌스 강을 이용해 각 구역마다도 우물들이 여럿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분명 커다란 도시이다.
그런데 데릭이 보기에는 이상하게 건물들이 묘하게 낡았다.
“이봐 로버트 그랑힐 시는 부자 동네 아니었어? 여기 집이나 벽이 다 낡아 빠졌는데?”
“예전엔 그랬지.”
남의 고향에 큰 무례가 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별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입가에는 쓴 미소가 자리 잡았다.
골목 구석에 다다르자 작은 우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저씨 여기요.”
지미가 재빠르게 양동이로 우물물을 펐고, 로버트가 품속에서 손톱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달맞이꽃의 특수한 기관, 달샘이었다.
그걸 보자 제이드의 명령이 떠올랐다.
– 아저씨. 이건 달샘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난번에 채취했던 달머금꽃의 기관 중 하나죠. 이 달샘을 우물에 넣었을 때 연기나 빛이 난다면 그 물은 오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요.
– 가령 ······마기라던가 말이죠. 로버트 아저씨는 지미, 데릭을 데리고 4구역의 물이 오염된 상태인지 확인해주세요.
제이드가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란디스 백작의 직속 부하가 되었으니 뭔가 더 들었을 수도 있겠지.’
지금은 자신의 대장이 시킨 임무를 수행하면 될 뿐이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양동이에 담그자 달샘이 새파랗게 빛나며 보글보글 끓었다.
이윽고 탁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걸 본 로버트의 입이 작게 구겨졌다.
“으음. 여기도 마찬가지군. 이걸로 5번째구나. 지미. 여기에 표시해주겠니?”
“네, 아저씨.”
로버트의 지시에 지미가 고개를 끄덕이곤 지도에 원을 그렸다.
그랑힐 시 4구역 부분에 그려진 원이 총 다섯 개였다.
우물에서 이상 현상을 발견한 게 5번째라는 뜻이었다.
4구역의 우물이 총 여섯 개였으니 대부분이 오염된 셈이었다.
“그런데 로버트. 왜 이렇게 숨기고 다니는 거야?”
“비밀 임무이지 않나?”
“아니, 그런 것 치고도 너무 얼굴을 숨기잖아. 사람만 지나가도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던데. 이 동네 출신이라더니, 무슨 일 있던 거야?”
데릭의 추궁에 로버트는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그건······.”
“아, 알겠다! 누구 과부라도 건드린 거 아니야? 그래서 쫓겨난 거고. 걱정 마 누가 형씨를 건들면 내가 흠씬 패줄 테니까.”
“내가 망나니도 아니고 그러겠나? 괜히 애먼 사람 때리지 말게.”
낄낄거리는 데릭의 말에 피식 웃은 로버트가 짐을 챙겼다.
“여기 4구역은 병사들을 좋아하지 않거든.”
“병사들을 안 좋아한다고?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네. 아무튼 갑옷을 보여서 좋을 건 없다는 말일세. 이제 그만 움직이지.”
확인이 끝났으니 이제 본대로 합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로버트? 자네 로버트인가?”
별안간 뒤에서 들려온 한 사내의 목소리에 로버트의 얼굴이 굳었다.
로버트는 못 들은 척 움직이려 했으나 데릭과 지미가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하는 수 수없이 로버트도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로버트 맞군!”
깔끔하게 수염을 다듬은 중년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로버트의 얼굴이 굳었다.
“······사람 잘못 보셨소.”
“나 파울일세! 자네와 함께 잡화점을 꾸리지 않았나! 같이 상인회도 이끌었고!”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로버트가 로브를 깊게 누르며 고개를 돌렸지만 사내가 다급히 붙잡았다.
“······자네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이 갑옷은 또 뭐고······ 설마 자네 지금 병사인 건가?”
놀란 듯 중얼거리는 파울을 보며 로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기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파울. 내가 마을로 돌아온 걸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말아 주게. 금방 떠날 거야.”
“자네가 날 납득시킬 수 있다면 말일세.”
파울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로버트의 눈에 들어왔다.
뒤늦게나마 파울을 제지하려는 데릭을 말리고 로버트가 말을 이었다.
“맞네. 나는 지금 아케르 요새의 병사로 활동 중이네.”
“자네 정말 미쳤군! 젊은 나이도 아닌데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경악스러워하면서도 목소리를 낮춘 파울을 향해 로버트가 말했다.
“지금 일어난 5구역의 언데드 역병. 어쩌면 4구역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어. 파울 자네도 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언데드 역병이······? 맙소사, 그게 사실인가?”
“그래.”
“고맙네. 그보다 자네는······.”
입을 달싹인 파울이 로버트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푹 숙였다.
“로버트. 우리는 아무도 자네를 원망하지 않고 있네.”
“나도 알고 있네. 다들 착한 사람들이니까. 다만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야.”
“······로라 때문인가?”
“······.”
파울의 말에 로버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가빠진 숨을 참았다.
꾹 쥔 주먹이 작게 떨렸다.
“아니, 그 아이는 상관없어.”
“로라의 무덤을 찾아갈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알고 있어. 역병이 돌았으니까.”
그랑힐 시의 묘지는 5구역에 전부 안치되어 있었다.
로라의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뒤이은 말에 로버트가 몸을 멈췄다.
“로라는 거기에 없네.”
“······뭐?”
파울은 잠시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로버트는 어떻겠는가. 하지만 반드시 알려야만 했다.
“자네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야. ······마티스 총독. 그가 로라를 데려갔네.”
“그, 게 무슨······.”
로버트의 굳세었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티스.
글레바 백작의 아들이자, 그랑힐 시의 총독 직위에 앉은 사내.
하지만 로버트에겐 달랐다.
죽은 딸의 연인이었기에.
* * *
기사를 따라가자 골목 안쪽에서 머리를 반만 밀어 넘긴 모히칸 스타일의 사내가 다가왔다.
“이걸 쓰십쇼.”
사내가 내민 건 복면이었다.
다만 조금의 구멍도 뚫리지 않아 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복면.
“지금부터 갈 곳은 비밀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어서 써라.”
다시 사내를 바라보자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고 옆에서 기사가 보챘다.
“너희는 손님을 이렇게 대하나?”
“손님이 아니었으면 기절시켰을 거다.”
놈들은 솔튼의 부하인 만큼 나를 해할 가능성은 없었다. 다만 기분이 나빴다.
쯧.
하는 수 없이 복면을 받아 들고 머리에 쓰자 대낮이었음에도 시야가 캄캄해졌다.
‘생각보다 고급 소재군.’
부드러운 착용감에 나쁘진 않았다.
뒤이어 수갑이라도 찬 것처럼 내 손목이 앞으로 모이며 조여졌다.
“허튼짓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을 거다.”
“하게 되면?”
“못 돌아가겠지.”
등 뒤에 섰는지 기사의 말이 뒤에서 들려왔다.
뒤이어 녀석이 천천히 뒤에서 밀었고 나는 앞으로 걸었다.
시야가 차단되자 나머지 감각이 예민해졌고 두 손을 구속한 수갑의 금속 특유의 시린 촉감이 느껴졌다.
오러를 일으키면 부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수갑을 툭툭 건드리는 순간.
띠링!
[사물의 기억을 읽으시겠습니까?] [사물의 기억 중 당신과 운명으로 엮인 것들이 보입니다.]경쾌한 알림과 함께 떠오른 시스템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이코메트리? 맞아 이걸 얻었었지.’
얻었을 때 정신없어서 확인 못 한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운명이라······ 나와 관련된 걸 자동으로 알려주는 건가? 굉장히 편한데.’
물론 제한은 있는 듯했다.
1시간이라······.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앞이 안 보이는 채로 걷는 것뿐이다.
그럴 거라면······.
‘읽겠다.’
나는 속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의지에 호응하듯 내 몸속의 마력이 빠져나갔다.
‘무슨······?’
다만 예상한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마치 걸레의 모든 물을 쥐어 짜내듯이 모든 마력이 빨려 나갔고 순간 몸이 휘청였다.
“큽.”
“어이, 무슨 일이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기사의 질문에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최소 1시간이 이 정도로 빠져나간다고?’
녀석들에게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 망정이지 지금 내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을 듯했다.
[기억을 불러옵니다.]후우우.
마지막으로 떠오른 메시지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니 생겨났다.
마치 내 뇌에 USB를 꽂은 것처럼 새롭게 기억이 연결되었다.
[이거 준비해봤자 소용없는 거 아니냐? 5구역 수복 때 마력을 다뤘다는 말이 있던데?] [몰라 새꺄. 그냥 하라니까 하는 거지.]어두운 방안.
소파에 앉아서 떠드는 남자 둘이 보였다.
그중 한 사내는 조금 전 나에게 수갑을 내밀었던 사내였다.
타박한 사내가 이어 말했다.
[마나를 썼든, 마법을 썼든 어르신이 흥미를 느낀 사내야. 그래도 된 놈이라는 거지. 설마 난동을 피우겠어?] [하긴······ 어르신은 통제 불능의 망나니를 가장 싫어하시지.]사내들은 서로의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서 어르신이라는 건 솔튼을 얘기하는 건가.’
[일단 난 녀석을 데리고 올 테니까 통신 오는 거 있는지 확인해.]얼마 안 가 사내는 방 안을 나와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녀석이 나오는 장소가······.
‘포목점?’
사내의, 아니 솔튼의 은거지가 어디 있었나 싶었더니 1구역에 위치한 곳이었다.
사내는 골목 사이를 누비더니 지하로 내려가 올라왔다.
몇 개의 골목과 지하를 지나자 4구역으로 넘어와 있었다.
‘구역별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군.’
그랑힐 시 지하에 저런 방대한 시설을 숨겨두다니······.
이 정도는 되어야 그랑힐 시의 숨은 주인인가 싶었다.
뒤이어 사내는 나를 만나서 포박하는 것으로 수갑의 기억이 끝났다.
‘사이코메트리. 이거 물건이군.’
예상치 못하게 얻은 스킬에 감탄하는 사이 나는 어느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니 경첩이 우는 소리에 그렇게 짐작했지만, 기억 속에서 보았던 장소라는 걸 직감했다.
이 순간에도 복면을 벗기지 않았기에 계단을 내려가는 데 애를 먹었다.
“도착했다. 들어가라.”
끼이익.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가는 듯했고, 누군가 어깨를 눌러서 의자에 앉게 했다.
훅!
그리고 한 녀석이 복면을 벗기자 눈앞에 나타난 촛불에 눈을 찡그렸다.
“뭐야? 누가 때렸어? 분명 조심히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아, 아닙니다! 저희는 때린 적이 없습니다!”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때렸다고?
점차 초점이 돌아오는 시야 한구석에 벗긴 복면이 보였다.
근데 그곳에 빨간 액체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인중 위로 느껴지는 축축한 이 느낌은······.
슬쩍 혀를 올리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마력이 부족합니다.]미친 스킬 한 번에 마력이 얼마나 빠져나간 거야?
한계 이상으로 마력을 계속 뽑아내다간 마나하트뿐만 아니라 마력의 통로인 신체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자칫하면 폐인이 될 뻔한 셈이다.
‘사이코메트리 이거 생각보다 위험한 스킬이네.’
어쩐지 마력이 쭉 빨려 나간다 싶더니······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이야.
온몸에서 느껴지는 탈력감에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빈틈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에스코트가 너무 거친 거 아냐? 환영 인사가 마음에 안 드는데.”
일전에 솔튼의 대역으로 보았던 평범한 인상의 남자.
코라스가 앞에 앉아있었기에.
“양해 바라지. 이곳의 위치는 꽤 기밀이라서 말이야.”
“기밀이면 애초에 데리고 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글쎄. 알려주지도 않지만, 함부로 알아내지도 못할 거다. 외부인이 알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거든.”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다만 녀석의 미소가 내 말에 단박에 내려갔다.
“그래? 그러면 새로 지어야겠군. 포목점 지하. 맞지?”
“······.”
“부유하다는 1구역에 지은 것치곤 너무 허름한 것 같은데. 이참에 새로 바꾸는 건 어때?”
“너······ 그걸 어떻게.”
당황으로 물드는 녀석의 표정은 꽤 볼만했다.
“그만. 실망이란 실망은 다 시키는구나. 코라스.”
탁!
바닥을 치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녀석의 굳었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코라스의 뒤쪽.
뚜벅뚜벅.
촛대의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코라스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큼. 제이드. 이 분은 이 자리의 주인이시자─”
“됐다. 소개는 안 해도 저놈이 더 잘 알겠지.”
손을 내저은 솔튼이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처음 뵙는군요. 아케르 요새의 별동대장 제이드입니다.”
“흥. 처음은 무슨. 회의 때도 보지 않았나. 쓸데없이 능청스럽기는.”
솔튼이 낮은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기껏 미소를 지어 인사했더니······.
“그래서······ 어떻게, 어디까지 아는 거지? 나에 관해서 말이다.”
역시 그 대목이 가장 걸렸나 보네.
솔튼. 골목 세계의 왕 중의 하나.
그는 철저하게 신분을 숨긴 채 그랑힐 시를. 그리고 마누스 왕국을. 어쩌면 전 대륙에 영향을 끼친다.
그런 과분한 일을 행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베일 뒤에 숨는 것.
‘내가 자신을 정체를 알고 있는 게 거슬리겠지.’
하지만 내게는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글쎄요. 정보는 반만 보여줄 때 더욱 비싸지는 법이라서요”
“그 말은······.”
내 말에 솔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작아졌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
이 말은 먼 미래에 솔튼이 역사적인 자리에서 남긴 말이었다.
페르딤 공화국의 총통과 엘프 집정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했었던가?
아마도 지금도 엇비슷한 이념을 지니고 있겠지.
“클클. 그렇지. 정보에 대해 잘 아는 놈이군. 좋아 네 녀석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묻지 않겠다.”
솔튼의 주름진 입가가 작게 달싹였다.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 앞에 마주 앉을 용기가 있다는 건, 내 구미를 당기게 할만한 걸 가졌다는 뜻이겠지.”
“아니죠. 이 자리에 저를 불렀다는 건, 저에게 사고 싶은 게 생겼다는 뜻이겠죠.”
나는 솔튼의 말을 정정했다.
‘이 거래의 주도권을 가지는 건 솔튼이 아니라 나지.’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노인의 하얀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내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아. 이미 가진 게 많기 때문이지. 그런데 네 녀석에게 내가 사고 싶은 게 있다고······.”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코라스와 사내들이 검을 살짝 뽑았다.
허튼짓하지 말라는 명백한 경고.
그러나 솔튼이 손을 들어 올리자 놈들은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게 뭐지?”
“이 도시죠.”
언뜻 들으면 황당무계할 말이었다.
뒤에 서 있던 코라스와 사내들도 벙찐 표정을 지었으니.
당연했다. 내게는 이 도시, 그랑힐 시의 소유권이 전혀 없으니.
‘하지만 나는 이 도시를 구할 수 있지.’
이 도시의 소유권? 죽음의 도시로 전락하는 순간 쓸모없어진다.
솔튼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 도시가 처한 위협의 정도를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총독이나 교단과 별개로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일 테니.
사이코메트리 때 정보원들이 중얼거린 말을 보아 외부의 세력과도 접촉하고 있는 듯하고.
솔튼도 내 앞선 활약을 지켜보며 내 필요성을 깨달았을 거다.
곧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게 필요한 것이지.”
“제가 드릴 수 있습니다.”
잠깐의 정적.
“······값을 어떻게 치르길 바라나?”
나는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도구를 얻는 게 아니다.
내 두 번째 삶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타이밍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돈이다.
“언데드를 상대할 수 있는 물약의 제조법을 알고 있습니다.”
회의 때는 모른다고 했지만, 솔튼은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일부러 숨겼었군.”
“제조 시설과 유통망을 제공해주신다면, 수익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위기는 기회다.
흑마법사가 만들어 낼 재앙은, 전 대륙으로 뻗쳐 나갈 것이고.
나는 그 시기에 돈을 벌 것이다.
그것도 막대한 돈을 말이다.
거대한 용병단을 꾸리고도 남을.
몇 개의 왕국을 좌우할 정도의 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