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70)
70화
칼테르 요새를 잠식했던 악마의 저주, 광기의 낙인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상당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 모두가 부상자였다.
그중에는 장애가 생기고 불구가 된 이들도 있었다.
델토로 가문의 가주, 이예르는 책임감을 느끼고 돈을 아끼지 않으며 최대한 치료하고자 애썼다.
바다의 신 아콰니엘, 불의 신 이그니스.
빛의 신 루멘과 함께 대륙에서 가장 명성 높은 교단의 사제들을 초대했고, 각 산지의 재료들을 이용해 온갖 치료약을 만드는 치료사들을 초빙했다.
심지어 숲의 엘프족 주술사들과 사막의 오크족 주술사까지 불러들여 많은 환자를 치료하려는 것이었다.
“영웅님. 이것 좀 드시죠.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험상궂은 생김새의 오크가 내게 황토색 가루와 물을 내밀었다.
오크의 이름은 고드록. 사막에서 넘어온 오크 주술사였다.
험악한 외형과 달리 순박한 오크였는데, 에스트콕 성에서는 이름난 주술사이자 다친 이를 보살피는 걸 좋아하는 마음씨 좋은 치료사였다.
“저, 고드록씨. 혹시 이 가루, 뭐로 만들었습니까?”
“사막 도마뱀의 꼬리와 심장, 샌드 웜의 촉수, 푸른 사막벌의 유충을 말려 빻은 겁니다. 전부 근육 회복에 도움이 되는 재료들이죠.”
고드록은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고드록은 분명 친절한 오크였다.
나 말고도 다른 환자들을 정성으로 보살폈고, 필요한 약재는 사비를 사용해서라도 구해주었으니까.
물론 그것과 별개로 그가 주는 약은 좀······ 꺼렸다.
‘벌레 간 걸 먹으라니······.’
그의 치료는 주술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 굳이 먹지 않아도 몸은 괜찮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예요. 사막의 생명 중에서도 가장 생명력이 강한 녀석들인 만큼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요. 어서 쭉 들이키세요.”
내 말에 고드록은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내밀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향도 토할 것 같네’
내 얼굴이 일그러질수록, 고드록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요. 그렇게. 쭉, 쭉 들이키세요.”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흡사 미숫가루를 먹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정신은 깎여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막의 원기 가루를 섭취하여 체력이 더욱 빠르게 회복됩니다.]효과가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제이드 씨 있습니까?”
“엇, 남작님.”
그때 문을 열고 이예르가 들어왔다.
고드록이 먼저 일어나 예를 갖췄다.
“일어나세요, 고드록. 아직 남작은 아니에요.”
“이제 곧 남작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이예르가 무릎 꿇은 고드록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를 잡아당기는 이예르의 팔만 덜덜 떨렸다.
뒤늦게 눈치챈 고드록이 슬며시 일어났다.
오크는 오크다.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머리 두어 개는 더 크고 배는 무겁다.
힘 차이는 뭐 말할 것도 없다. 고릴라도 패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그보다 제이드씨와 잠시 이야기 좀 하려고 해서요.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어요?”
“알겠습니다.”
이예르의 말에 고드록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이예르님 오랜만이에요.”
“하하, 그러게요. 생각보다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데요?”
현재 이예르의 모습은 차기 남작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부스스했다.
“또 행정 잡무까지 직접 하신 겁니까?”
“아직 이게 편해서요.”
“행정직이나 관리를 하나 뽑으시죠.”
칼테르 요새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된 이후, 이예르는 남작위를 잇기로 했다.
지금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는지 그의 안경 사이로 눈그늘이 진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예르님.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제가 온 건 두 가지 때문인데······ 일단 이것 먼저 보시죠.”
이예르는 품속에서 종이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왕성에서 보낸 공문입니다.”
“공문이라면······. 아.”
며칠 전 루퍼스에게 칼테르 요새에 대한 보고를 제출했었다.
‘칭찬 일색이었지.’
다만 하나같이 칭찬과 함께 휘하로 들어오길 원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단호히 거절했던 게 살짝 찜찜했는데, 다행이네.
종이 봉투를 받아 열자 그 안에는······.
“······자유다.”
봉투 안에는 다름 아닌 제대증서가 들어있었다.
그 안의 내용은 나를 마누스의 영웅으로서 인정하며, 나와 휘하 20명의 병사를 전원 제대시켜준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루퍼스! 약속을 지키는 명예를 아는 기사이자, 백성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선왕의 재목을 지닌 사내!
띠링!
[퀘스트 ‘동부의 탈영병’을 클리어했습니다.] [마누스 왕국군 소속 항목이 사라집니다.] [새로 조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루퍼스 마누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10)] [현재 호감도 (57/100)]이제 완전히 자유의 신분이네.
대원들에게 알려줘도 좋아할 것이다.
만족스럽게 제대증서를 바라보자 이예르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제대를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따로 할 일이 없다면, 저, 저희 그, 저희 델토로 남작가에서······.”
“그건 어렵겠습니다.”
거절 의사를 바치자 이예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남작위도 거절했는데, 남작가에서 일을 해? 말도 안 되지.
“큼. 그렇군요.”
“하지만 비슷하게는 가능할 것 같군요.”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예르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이예르님. 델토로 남작가가 시급한 건 역시 병력이지요.”
칼테르 요새.
델토르 남작 영지 안에 있는, 오르투스의 암석산의 요새.
고대에 지어진 유적이지만, 암석 자체를 오러로 깎아내어서 만든 천예의 요새.
현재는 인근 철광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키는 요충지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 정상 운영이 불가능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병력의 부족.
더군다나 악마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요새로 오기 꺼리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우리 예비 남작 이예르씨께서는 고민이 많으실 텐데.
“네,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비슷하게’라는 건······?”
“저는 제 부하들을 데리고 용병대 일을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본거지를 정하지 못했거든요.”
“그, 그 말은 저보고 제이드씨를 고용하란 겁니까?”
내 말에 이예르가 안경을 고쳐세우고 물었다.
“정확히는······ 칼테르 요새를, 제 용병대가 본거지로 삼을 수 있게 해주십쇼.”
“그게 무슨 소리죠?”
당황한 기색의 이예르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병력을 운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도 돈도 아니다. 바로 본거지다.
그리고 이곳 칼테르 요새는 사실상 빈집이다.
나는 이 빈집에 새로 살림을 차리고 싶다는 것이지.
이건, 내가 이곳 오르투스로 출발할 때부터 기획해둔 것이었다.
칼테르 요새를 차지하는 것.
“이예르씨. 분명 칼테르 요새를 구해준 대가로 뭐든 해준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저희가 요새를 본거지 삼는 동안 손해는 없을 겁니다.”
이예르는 내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했었지.
내 요구는 이곳, 칼테르 요새다.
“그래도 그건 어려울······ 아니 잠시만요.”
눈빛을 바꾼 이예르가 무언가 계산을 하는 듯했다.
이럴 때 더 흔들어야지.
“당연히 요새의 소유권은 델토로 남작가에서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저희가 요새의 유지보수를 도맡아 할 것이고요. 저희는 본거지를 얻고, 델토로 남작가의 국방비 부담은 줄어드는 거죠.”
이예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헛기침했다.
저렇게 속마음을 내비치다니. 똑똑하고 계산을 빠르지만, 아직 협상에 능숙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델토로 남작가에 있다는 소문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허세 같은 말이지만, 내가 가진 최고의 패는 역시나 내 명성이었다.
어떤 소문은 매우 큰 힘이 된다.
델토로 남작가는 한때 동부의 패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그런 가문 중 하나였다.
그나마 로이암이라는 불세출의 기사가 있었으니까 무시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도 악마에게 당해서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명예로운 기사라는 명망을 얻었을지언정, 그의 존재감은 한풀 꺾인 것이다.
그것은 델토로 남작가는 지역 정치와 이권 다툼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심지어 남작이 죽고 그 동생인, 풋내기가 계승했다는 점에서도 무시당할 테고.
그런데 전쟁 영웅 제이드가 델토로 남작가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우호 관계다?
이만한 마케팅이 없지.
이예르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설득당할 걸 넘어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어졌을 거다.
나는 그와 손을 맞잡았다.
* * *
이예르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나는 성 밖으로 나왔다.
요새 안 곳곳에는 병사들과 사제들, 치료사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나는 성벽에 서서 숨을 돌렸다.
“영웅께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때 뒤에서 한 사내가 다가왔다.
로이암이었다, 그 옆에서 주신교단의 사제 한 명이 로이암을 부축해주고 있었다.
“로이암 경.”
“그렇게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네. 나는 격식 없는 게 좋거든.”
“알겠습니다, 로이암씨.”
“······그건 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피식 웃은 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로이암의 얼굴이 구겨졌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몇 달은 더 요양해야 한다는군. 바깥공기도 드디어 처음 맡는다네.”
로이암의 외모는 노인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중년인 헤겔과 나이 차가 거의 안 나는 걸 생각해본다면 로이암의 몸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 있었다.
광기의 저주가 가장 극심한 곳에서 가장 오래 버텼으니 심신 모두가 피폐해졌을 수밖에.
“고드록이라는 오크 주술사가 있습니다. 체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번 확인해보세요.”
“고맙군. 한번 알아보지. ······그리고 요새를 구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피식 웃으며 감사를 표한 로이암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마누스의 병사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맞나?”
“네, 앞으로는 용병 일을 할까 합니다.”
“전쟁 영웅의 칭호를 받은 용병이라······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여럿 모이겠군.”
로이암이 말한 대로 내가 만들 용병대에는 영웅이 이끄는 용병대라는 타이틀이 들어갈 것이다.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데도 중요할 테니까.
“내 몸이 다 나으면 언제 한번 대련이나 하지.”
“혹시 지난번 일로 마음에 담고 계신 건 아니겠죠?”
광기에 휩싸인 로이암을 대련에서 이긴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내가 그리 속 좁은 이로 보였나?”
내 말에 로이암이 피식 웃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지. 다만 아쉽긴 하더군. 정신만 온전하다면 승패의 방향이 달라졌을 텐데 말이지.”
“······.”
이 양반아, 승패가 아니라 생사겠지.
나는 소름이 돋았다.
“하하, 농담이네. 자네가 내 명예를 되찾아 주지 않았나. 뭐······ 진 것이 좀 아쉽긴 하지.”
속 좁은 것 맞는 것 같은데······.
나는 화제도 돌릴 겸 로이암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붉은 폭풍이란 기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내 절기지. 자네가 파훼했지만 말이네.”
말에 뼈가 있었지만 나는 흘려들으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이 기술은 혹시 누군가에게 전수받은 겁니까?”
“음? 아니네. 내가 직접 만든 기술이지. 헤겔 그 녀석이 제일 잘 알 테지. 그 녀석과 대련 중 얻은 깨달음이었거든.”
“아.”
“대부분 검기가 날아들면 뒤로 피하고 그래도 안 되면 좌우로 이동하지. 그래서 검기를 양쪽으로 퍼뜨려서 짐승의 아가리처럼 만들면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었어.”
로이암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붉은 폭풍은 분명 용사 카일이 쓰던 기술 중 하나다. 어떻게 배운 거지?’
카일이 칼테르 요새를 구하는 건 몇 년 후. 제아무리 로이암이라도 마수가 되었을 시점일 터다.
‘혹시 카일이······.’
나는 괜스레 성벽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병사들. 기사들. 남작가의 관료나 하인.
‘······이 주변에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