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69)
69화
은혜를 갚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하다니.
이예르 이 녀석······ 앞으로 남작가를 이끌게 될 텐데 말을 함부로 하면 위험하다는 걸 아직 모르네.
뭐 나야, 감사할 따름이지!
“무엇이든, 해주시겠다고 약조하시는 겁니다?”
내가 다시 한번 묻자, 이예르는 헛기침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죠.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래, 이 정도 은혜에는 백지 수표를 내밀어주시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보다······.
“이예르님는 어떻게 할 겁니까?”
내 말에 이예르의 표정이 굳었다.
꽤 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
죽은 델토로 남작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즉 사실상 동생인 이예르가 차기 델토로 남작인 셈이다.
하지만 요새의 악마와 다치고 죽은 이들이 많았기에, 에스트콕 성은 당분간 혼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진실을 밝혀야지요. 요새의 악마와 형님이 악마를 탐했던 것도 말이죠.”
이예르는 결심했다는 듯 올곧은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꽤 의외였다.
“델토로 남작가에도 타격이 클 텐데요?”
“로이암 경을 비롯한 숭고한 이들이 탈영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서 썼습니다.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예르의 태도를 보아하니 델토로 남작가는 잠시 휘청일지언정 건재할 듯했다.
가신들의 명예를 존중하는 자세에서 선군으로서의 자질이 엿보였다.
물론, 그가 아니더라도 이곳의 진실은 반드시 퍼져나갈 것이다.
동부, 칼테르 요새에 잠들어 있던 악마에 관해서.
그리고 그 악마를 막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근 숭고한 기사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그 악마를 홀로 처리한 한 영웅에 대해서.
‘이런 재밌는 일들을 어떻게 함구하겠어?’
이 일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입이 근질거릴 거다.
나는 요새 안의 어느 방으로 안내받았다.
휴식과 치료를 위해서 내게 특별히 배정된 방이었다.
나는 우선 1왕자 루퍼스에게 보낼 보고서를 적어서 새의 다리에 묶었다.
회색의 비둘기가 이곳의 모든 진실을 담은 편지를 든 채 비상했다.
* * *
마누스 왕성 회의장.
내무부의 관료들이 모여서 각 전선에서 전해오는 통신을 기록하고, 전선으로 향하는 물자와 병사들, 그리고 모든 전선의 현황을 확인하는 곳이었다.
동시에 아군을 전선의 어느 곳으로 이동시킬지, 페르딤의 동향을 예측하여 수비하는 일종의 최고 지휘부로써, 중요한 회의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 회의실의 분위기는 달랐다.
다름 아닌 페르딤 공화국 측에서 보낸 휴전 제의 때문이었다.
전쟁은 현재 소강상태에 접어 들어 있었다.
휴전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앞으로의 향방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의실에는 열띤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아케르 요새의 침공을 막아냈다는군요.”
“그랑힐 시에 숨어든 흑마법사들을 잡았다지. 자칫하면 보급에 큰 차질이 생길 뻔했지.”
“회색 숲 전선에서 승전고를 울렸다더군.”
이야기의 주인공은 귀족도, 기사도 아닌 병사였다.
그는 얼마 전까지 한낱 징집병에 불과했고 지금도 평민 신분이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제이드.
“흥, 그 소문을 믿는 건가?”
“과장되었을 것이 뻔하지.”
대다수 귀족과 관료들은 그 이야기 자체를 부정하거나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아 했다.
태어날 때부터 사교와 정치를 배우며, 왕국의 대소사를 피부로 겪어온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
소문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소문은 계절풍과 같다.
어떤 바람으로 부느냐에 따라 뱃길이 바뀐다.
그에 따라서, 어느 항구는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힐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항구는 번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계하는 것이다. 제이드라는 소문이 거대한 바람이 되지 않기를.
제이드라는 돛을 단 배가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귀족들은 슬쩍 회의장에 참석한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솔레른 그란디스 백작.
본래 정계에서 밀려나서 하직으로 밀려났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이빨 빠진 사자.
그런데 그가 지금 이 왕성의 회의장에 다시금 나타나지 않았는가?
제이드라는 돛이, 그를 이곳으로 밀어준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제이드는 솔레른의 휘하였으니까.
귀족들은 솔레른을 경계하며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몇 귀족과 관리들은, 은근슬쩍 솔레른에게 다가가서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별것 아니지마는, 바람의 방향은 바뀌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솔레른을 경계하는 이들이 혀를 끌끌 찼다.
“어찌 일개 병사가 그런 위업을 이루겠습니까? 과장이고 일부 진실일지라도······ 우연이겠지요.”
“회색 숲 전선의 전공이 어찌 병사에게 있겠습니까? 그곳을 지켜오던 건 바르손 경 아니오?”
“검술과 오러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없는 병사에겐 한계가 있을 것이지.”
“혹시 압니까? 백작이 자신의 복귀를 위해서 꾸민 연극일 지도.”
제이드를 헐뜯는 쪽은 주로 글레바 백작 휘하의 귀족과 관리들이었다.
‘또 헛소문을 퍼트리는군.’
그란디스 백작은 그것이 언짢았지만, 잠자코 지켜보았다.
저 말을 받아치는 순간, 저들은 탐욕스러운 이리떼처럼 자신을 물고 뜯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란디스 백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끼이익.
그런데 그때 닫혀 있던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풀거리는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사내.
회색 숲 전선의 총사령관이자 국왕 루브릭 2세의 장자.
언젠가 차기 왕위를 계승할 자.
루퍼스 마누스.
그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모든 귀족과 관료가 일어나 루퍼스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1왕자 저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이번 회의를 주최한 이가 바로 루퍼스였으니까.
루퍼스가 회의실을 한 번 빙 둘러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경들에게 알릴 좋은 소식이 있소. 동부의 탈영병 문제로 골치를 앓던 칼테르 요새의 문제를 해결했소.”
“오오!”
“그것이 사실입니까?”
에스트콕의 탈영병 문제가 벌어진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근처에 철광산이 있는 만큼, 마누스의 안보 전략에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는 골칫거리였다.
책임이 있는 델토로 남작가에서도 쉽게 해결하지 못해 어쩌고 있나 싶었는데, 루퍼스가 번듯하게 해결한 것이다. 심지어 최전방을 지휘하면서.
루퍼스의 입지가 한층 견고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전선을 아우르는 총사령관님이십니다! 두 달간 계속된 문제를 해결하시다니!”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신 겁니까? 설마 루포르 기사단을?”
한 귀족의 말에 다른 이들도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번에 신설된 루포르 기사단에 대한 귀족들의 기대감은 지대했다.
루퍼스가 직접 십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기재들을 선별해서 만든 기사단.
경험은 적으나 그 재능만큼은 진짜였으니, 총사령관이 그들에게 중요한 경험을 심어주기 위해서 탈영병 문제 해결을 명했으리라.
전쟁은 왕국민 전체에게 고달픈 일이었다. 그렇기에 영웅의 전설이 필요했다.
평민이나 병사가 아닌 귀족과 기사의 전설이.
그래야지만, 귀족들을 우러러보게 될 테니까.
그런데.
모두가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기대하는 그 순간.
루퍼스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인물이었다.
“제이드.”
일순간 정적이 일었다.
“전선의 영웅인 제이드. 그에게 내가 따로 임무를 내렸소.”
“제, 제이드 말입니까?”
루퍼스는 그 반응에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봉인된 악마를 처치했다는군.”
“······예?”
“제이드? 그 소문의 제이드가 이번에 또?”
장내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이제는.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이드.
그자의 이름이 마누스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 * *
장장 5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 끝에 마누스 왕국은 휴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정전 협정까지 이어가서, 이 피의 굴레를 끊는 것으로 갈피를 잡았다.
선공해온 페르딤 공화국에 대한 반발감과 분노가 컸으나, 그런 감정 때문에 복수를 꿈꾸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마누스 왕국이 밀리던 추세였으니까.
그렇기에 이렇다 할 보상을 요구하지도 못한 채, 휴전 수용이 가결되었다.
“그란디스 백작.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아케르 요새로 돌아가려는 그란디스 백작에게 1왕자 루퍼스가 다가왔다.
“저하, 무슨 일이십니까?”
“왕국에 충성했던 그란디스 백작과 회포를 푸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 그보다 회의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전선에 나가보지 않았던 관리들이 아는 체하던 게 참 역하더군. 그렇지 않나?”
루퍼스는 글레바 백작 휘하의 관리들을 비하하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란디스 백작은 달갑지 않았다. 도리어 경계심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했다.
‘무슨 생각이지?’
원래도 둘 사이는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상 자신의 부하였던 제이드를 뺏어간 인물 아닌가.
그렇기에 내부 사정을 모르는 다른 귀족들이 찾아와서, 승전을 축하한다고 아부했을 때도 그란디스 백작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누스의 검은 사자라는 칭호답게 백작의 신체는 아직 정정하군. 다음에 대련 한번 어떤가? 검은 사자의 검은 어떨지 기대되는군.”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저하께서 제 검을 하나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란디스 백작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속뜻을 눈치챈 루퍼스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를 본 그란디스 백작이 언짢아지기 전 루퍼스가 말했다.
“백작, 오해가 있군. 나는 그자를 가지지 못했네.”
루퍼스는 왕성에 도착하기 전 받았던 편지를 꺼내 그란디스 백작에게 건넸다.
“백작의 말대로 내가 욕심을 부리긴 했지, 듣자 하니 기사직을 권했다 들었는데 맞나?”
“······거절당했습니다.”
“이건 비밀이지만······ 글레바 백작도 기사직을 권했다가 거절당했다지.”
그 지점에서 솔레른 그란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글레바가······ 그 여자가 제이드를 노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네. 나는 심지어 남작위를 권했지.”
루퍼스의 말에 그란디스 백작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글레바 백작. 그녀의 기사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귀족의 기회마저 권유받은 것이 놀라웠다.
‘그런데 거절했단 말인가? 귀족이 될 기회를?’
그란디스 백작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루퍼스가 공감한다는 듯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게 자유를 요구하더군. 자기 휘하의 부하 20명과 함께 말이야.”
“······자유.”
“그 조건은 전쟁이 끝날 때였지. 그런데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는데.”
루퍼스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칼테르 요새로 몇 번이고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것도 받지 않더군. 심지가 굳세. 그리고 이미 마누스의 이름으로 약조한바······ 그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네. 왕국의 명령으로 징집했던 자이니 너무 원망치 말아 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란디스 백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백작과 1왕자, 둘의 얼굴에는 각자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백작, 어찌 방법은 없겠나? 그자를 거둘 방법 말이야.”
“이미 한번 뺏겼던 부하입니다. 제게는 특별한 책략은 없습니다.”
“하하, 그 부분은 미안하게 되었네. 아무래도 방법은 없는 듯하군······. 알겠네. 이만 가보게.”
루퍼스의 말에 그란디스 백작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 성을 빠져나왔다.
그런 백작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애초에 품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군.’
새끼 늑대 정도였다면 충견으로나마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드, 놈은 맹수였다.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맹수.
일개 병사의 이름이 이토록 널리 퍼져나가다니······ 유례없는 이야기가 쓰이고 있었다.
‘오히려 다행이다. 그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니.’
그런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제이드와 최대한 우호적일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이제는 제이드라는 검을 쥘 수는 없었다.
다만 그 검이 유사시에 자신의 옆자리에서 뽑힐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하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전략적 동반자로서, 동등한 위치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