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80)
80화
날이 밝았다.
항복한 약탈자들은 포박해서 창고에 박아두었다.
살려둘 가치가 없는 놈들이지만, 우리가 구태여 목숨을 취할 이유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알아서 한을 담아서 철저히 응징할 것이다.
이후 밝혀진 사실은, 이 마을의 촌장 아들이라는 작자가 약탈자들과 결탁했었다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사업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나?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자라온 마을을 약탈자들에게 넘길 생각하다니······.
그 쓰레기 같은 놈은 마을 사람들에게 몇 시간 동안 구타당했다.
이로써 리테로 마을이 약탈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기쁨을 즐기기에는 잃은 게 너무나 컸다.
그간 마을 사람 절반이 사라졌다고 한다.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에그록에게 목이 매달려서.
단순히 기뻐하기엔 멍울진 상처가 너무 많았다.
약탈자들의 시체와 부서진 건물 잔해를 치웠고, 놈들이 있던 흔적을 지우기 바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주민들은 나와 대원들에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미성이 들려왔다.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트루디아였다.
그녀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막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재앙 때문에 약탈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거예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저······ 드이제 씨.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그러는 사이 트루디아가 이어 말했다.
“대체 신기루 연구회를 어떻게 알았죠?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죠?”
트루디아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신기루 연구회는 비밀 결사나 다름없었다. 근데 그걸 알고 있으니 내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미래에 사막의 재앙을 막아내서 당신들이 유명해졌어요─ 라고 할 수는 없겠지.’
나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기로 했다.
[스킬 – 화술 (LV. 4)을 발동합니다.]“사막에서 우연히 만난 나그네에게 부탁을 받았습니다.”
“나그네라니, 누구죠?”
내 말에 트루디아가 갸웃거렸다.
“사막에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죽어가던 여행자였죠.”
나는 씁쓸한 표정을 연기했다.
“그분은 자신이 신기루 연구회의 일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살리려 했지만······ 그분은 제 손을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은 잘 안다며 말이죠. 그러면서 제게 부탁하더군요. 신기루 연구회의 숭고한 일을 도와달라고. 보수는 얼마든지 주겠다고 말이죠.”
그럴 듯하고 가슴을 울리지만,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슬쩍 보수도 언급했다. 그래도 돈은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트루디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죽어가던 회원이라는 말에 글썽였다.
“그럴 수가······ 혹시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온몸이 심하게 망가져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막의 재앙을 이야기했을 때, 그분의 눈빛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숙명을 죽어서도 지키고자 하는 영웅의 눈빛이었죠. 저는 그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나 소설을 써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쨌든, 신기루 연구회는 사막의 험준한 오지를 돌아다니며 열쇠를 찾아다녔기에 유명을 달리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렇기에 트루디아 역시 내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사막의 어머니여, 고요의 모래로 보듬어 주시길.”
트루디아가 오른손을 이마에 붙이고 짧게 기도했다.
‘뭐, 이 정도 거짓말은 괜찮겠지.’
실제로 죽은 이도 없었고, 나는 의심 없이 신기루 연구회를 도울 수 있으니 실로 선의의 거짓말 아니겠는가.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정보]– 제목 : 모래에 숨은 연구회
– 설명 : 사막의 숨은 조직 ‘신기루 연구회’와 마주했습니다. 그들과 합류하여 재앙을 막아내십시오.
– 보상 : 신기루 연구회 호감도 상승, 퀘스트 ‘사막의 재앙’ 연계
[화술을 이용해 상대를 완벽히 설득했습니다.] [스킬 화술(LV. 4)의 레벨이 (LV. 5)로 상승합니다!] [더욱 능숙하게 상대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드이제 씨.”
나는 떠오른 퀘스트에 만족스레 웃으며 트루디아와 손을 잡았다.
트루디아를 제외한 두 신기루 회원, 남자와 노인은 이곳에 남기로 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 뒤에 남아서 연락망을 유지할 필요도 있다고.
이처럼 신기루 연구회는 사막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진 점조직 형태였다.
그로써 각지에서 벌어지는 재앙에 관한 정보들을 빠르게 교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달간 약탈자들에게 잡혀 있었던 만큼, 체류된 정보를 분류하고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트루디아만 있으면 되겠지.’
나는 회원들과 손을 붙잡고 인사하는 트루디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어깨에 멘 짐꾸러미 속 석판이었다.
‘이제 바티스타로 가기만 하면 된다.’
사막의 대도시 바티스타.
그곳이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다.
* * *
도시 바티스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사막의 대도시 바티스타.
“여기가······ 사막이라고?”
대원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나 역시 말문을 잃었다.
내 앞에 보이는 건 도시를 둘러싼 커다란 오아시스였다.
건조했던 사막의 공기는 어디 갔는지, 숨을 들이쉬자 청량감이 느껴졌다.
일대의 땅 역시 단단하여 풀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커다란 오아시스 4개를 둘러싼 도시는 모래바람을 막아줄 커다란 벽이 사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안쪽에는 반듯한 석조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광장에는 분수까지 있었다.
호수 위의 도시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웅장함이 들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문은 동서남북으로 총 4개였다.
그곳으로 수많은 마차와 수레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본다면 개미굴로 개미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게 사막의 도시라고? 삭막할 줄 알았는데 엄청 아름답잖아?”
“그랑힐 시랑 다를 바가 없네.”
대원들도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우리의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드로거가 웃으며 말했다.
“크크. 여기 바티스타는 다른 왕국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그보다 더할 거예요. 고대 사막 왕국이 멸망한 뒤 생긴 첫 번째 도시였으니까요.”
드로거의 말을 트루디아가 덧붙이며 바티스타의 탄생 비화를 설명해주었다.
과거, 이곳 사막에도 왕국이 존재했다. 오크와 인간들이 함께 어우러졌던 국가.
하지만 왕국이 모종의 이유로 쇠락한 뒤, 드넓은 사막은 인간과 오크들 각자의 부족을 중심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 바티스타는 그 시기에, 왕국의 수도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세운 도시였다.
“법과 질서가 사라진 직후, 보물을 쥐고 있던 이들은 보물을 지킬 방법을 찾아야 했죠. 그 방안은 보물을 가진 자와 연합하는 거였고요. 서로 지킬 게 있으니까, 서로를 건들지 않고 외부의 위협에 함께 맞서며 도시를 키운 거예요.”
부유한 부족들과 상인들이 모인 연맹체가 바로 바티스타다.
돈만 있다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유 도시.
모든 걸 돈으로 살 수도 있었고, 모든 걸 돈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각종 음식, 유희, 심지어 사람까지 말이다.
바티스타 안으로 들어온 뒤 드로거 일행은 상행을 위해 먼저 갈라지기로 했다.
“우리는 이제 여기까지겠군.”
“다사다난했지만, 제이······ 아니, 드이제. 자네와 함께 가는 건 즐거웠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연락하지.”
드로거 일행은 작별 인사를 한 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로빈을 불러서 푸른잉어상단 바티스타 지부에 쪽지를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푸른잉어상단이라면 너와 협력하는 상단 아닌가? 그랑힐 시에서 만났던.”
“어. 여기에도 있거든. 부탁할게.”
마누스 왕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푸른잉어상단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고, 돈으로 돌아가는 바티스타에도 역시 존재했다.
이곳은 돈으로 돌아가는 도시인 만큼, 푸른잉어상단의 영향력이 상당할 것이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나와 함께 트루디아를 따라 신기루 연구회로 향했다.
많은 인파를 뚫고 골목으로 들어가는 그때, 문득 궁금함이 들었다.
“트루디아 씨. 그런데 신기루 연구회가 바티스타에 자리를 잡을 정도면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당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은 거죠?”
“음? 그러게? 그냥 도우러 오면 되는 거잖아?”
트루디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사실······ 부끄럽지만, 연구회에는 그다지 힘이 없어요.”
사막 전역에 퍼져 있는 점조직이 힘이 없다라······ 특이한 케이스네.
“정확히는 줄어들고 있는 거죠. 이 도시가 꽤 오래되었다고 했죠?”
“적어도 오백 년은 됐다고 들었습니다.”
“신기루 연구회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와 비슷하거나 좀 더 적겠죠.”
신기루 연구회는 고대 사막 왕국이 운영했던 왕립 주술사회였다.
그들은 사막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재앙’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이었다고.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재앙의 위험성을 잊은 거죠. 이제는 귀족 두 분이 지원해주는 게 전부고요. 이번에 열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던 거죠.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드이제 씨에게 보수를 드릴 정도는 있으니까.”
내가 오해할까 봐 다급히 트루디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로 오해할 리가.
“아, 슬슬 다 왔네요. 여기가 신기루 연구회에요.”
“이런 곳에 비밀 결사가 있다고?”
신기루 연구회가 있는 곳은 골목 안쪽의 작은 서점이었다.
그것도 고서적을 주로 파는 서점.
“윽. 나는 책은 질색인데.”
데릭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큭큭. 데릭, 넌 글자도 모르잖아?”
“둘 다 조용히 해 좀. 책 파는 곳에는 정숙이 기본이라고.”
나는 그 안을 향해 발걸음을 가볍게 내디뎠다.
* * *
신기루 협회 회의장.
작은 고서점에 비해 넓은 회의실에서 여러 명의 인간과 오크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가장 늙은 오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앙은 얼마나 진척되었다고 합니까?”
늙은 오크의 물음에 대답한 건 안경을 쓴 중년의 인간 사내였다.
“사막 심부에서부터 조금씩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몇 달도 안 되어 재앙이 기어 나오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재앙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노인 오크, 달카드가 고개를 숙이며 침음했다.
‘차라리 예견된 재앙이 선조의 짓궂은 장난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사막을 갉아먹었던 대재앙이 다시금 깨어나리라!
그런 예언이 있었다.
다만, 시기가 불명했기에 그저 후대를 위한 경고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혜로운 집단은 최악을 대비해야 하는 법.
고대 사막 왕국 시절부터 신기루 연구회에서 경계해온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신기루 연구회는 힘이 없었다.
시간의 풍파 속에서 지혜는 끊어지고 사명감은 무뎌졌다.
그나마 대를 이은 소수의 연구자가 사막 전역에 흩어진 고서적을 뒤져서, 재앙을 막을 열쇠조차 겨우 행방을 알아내지 않았나.
신기루 연구회의 회원들 대부분이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달카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주변 부족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믿지 않는 부족이 절반, 인지한 부족이 절반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딱히 그렇다 할 대응은 하지 않더군요.”
“이놈의 사막은 단합이 안 되니······. 이미 땅을 잃고 움직이는 부족들도 있었을 텐데. 경각심을 못 느끼는 건가.”
재앙의 전조라 하여도 드넓은 사막으로 본다면 국소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사안을 인지한 이들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며 넘겼다.
사막에서는 횡단하던 이들이 죽어 나가고, 마을이 사라지는 건 늘 있는 일이니까.
“원래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에는 위기를 모르는 법이죠. 사막 왕국이 쇠락했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모습입니다.”
달카드에게 설명하던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달카드는 화제를 돌렸다.
“열쇠의 확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석판은 확보했습니다만······ 석판을 전달해오던 트루디아 일행이 현재 에그록의 사막정의단이 마을을 점거하면서 붙잡혔다고 보고가······.”
말을 흐리는 사내의 말에 달카드는 안경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예 사냥꾼 에그록이 이끄는 사막정의단. 오크 약탈 부족을 제외한다면 손에 꼽을 정도로 악명높은 인간 약탈자들 아닌가. 그런 이들에게 걸렸다니.
달카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악운이 겹쳤군요. 방법은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용병들을 보내 구출하는 것밖엔 없습니다. 다만 석판의 가치를 알게 되는 순간 사막정의단이 빼앗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놈들을 제압할 정도의 용병을 고용하려면······ 당장은 자금이 부족합니다.”
“사막의 어머니시여······.”
정녕 이대로 무기력하게 재앙을 마주해야 한단 말인가.
달카드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기도했다.
‘부디 자비의 바람을 불어주시길.’
그 순간이었다.
덜컹!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고서점을 지키던 협회원 한 명이 다급히 들어왔다.
“다, 달카드님! 트루디아! 트루디아가 왔습니다! 석판을 지닌 그 회원 말입니다!”
회원의 말과 함께 석판을 든 여인이 들어왔다. 트루디아였다.
“트루디아! 대체 어떻게 돌아온 겁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무사히 살아 돌아왔군요. 다행입니다.”
고심하던 회원들이 놀랐다. 대체 어떻게 에그록 약탈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단 말인가?
달카드는 순간 사막의 어머니가 보낸 기적인가 싶었다.
그리고 트루디아 뒤에 한 사내가 따라 들어왔다.
“이분은, 드이제에요. 절 구해주셨어요.”
트루디아가 설명하길, 리테로 마을을 들르던 용병대의 대장 드이제가, 에그록과 사막정의단을 토벌하고 마을을 구했다고 한다.
그로써 발이 묶여 있던 트루디아가 석판을 운반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드이제의 말을 들어보니, 사막에 묻힌 신기루 연구회 회원 중 한 명이 도움을 요청했다고.
“사막에 묻힌 회원이라니, 누구지?”
“최근에 부고가 전해진 회원이 있었나?”
의아해하는 회원들도 있었다.
“······아마도 전달자 갸롯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마누스 왕국이 있는 서쪽으로 간다고 했는데, 드이제 씨, 맞습니까?”
“아, 네, 뭐······ 이름은 모르지만, 그 근처가 맞긴 합니다.”
그러자 용병대장 드이제가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모래에 묻힌 갸롯을 애도하는 듯했다.
달카드와 회원들은 그런 드이제의 모습에 감동했다.
자신들을 미치광이 음모론자라고 치부하며 욕하고 비웃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그는 거친 용병임에도 진심으로 자신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심지어.
“저 역시 신기루 연구회를 돕고 싶습니다.”
“오······ 그래 주신다면 저희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보수는 반드시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일손 중에서도 무력이 부족했던바, 달카드가 대표로서 드이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일단은 잠시 회의 때문에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러자 드이제가 난색을 표했다.
“여정을 함께하길 허락해주셨다면, 회의에 참가하여 제 얕은 식견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달카드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이런 자가 있기에 우리가 오래전부터 재앙을 막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이지.’
어쩌면 사막의 어머니가 보낸 의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달카드는 더욱 차분한 목소리로 정중히 말했다.
“드이제 님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으나 지금의 안건은 용병의 검이 아닌, 정치와 로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오랫동안 사막에서 활동한 신기루 연구회조차, 이 사막 안의 정치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서부 출신 용병단이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미안하지만, 오로지 검과 도끼로 승부하는 용병들의 생각은 오히려 방해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에둘러서 표현한 달카드였다.
“그리고······ 아직 공개하기에는 민감한 정보가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수긍했는지, 드이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갔다.
“고맙지만, 용병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은 명확하니까.”
“그렇죠. 이번 회의에서 고민할 일은 사막의 유력자들을 설득할 전략이니까요.”
다시 회원들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트루디아. 석판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네, 여기요.”
달카드는 트루디아에게 건네받은 석판을 쓸었다.
문헌에서 본 적 있던 문양과 모습이었다.
“열쇠가 맞군요. 다행입니다.”
이제 석판을 찾았으니, 남은 건 석판을 가동할 ‘자격자’를 찾는 것이다.
“유적을 조종할 두 번째 열쇠는 사막 왕국의 혈통을 이은 피였지요.”
사막 왕국 적통의 피. 그것이 석판을 작동시킬 두 번째 열쇠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사막 왕국의 후손들은 하나둘 사막을 떠나거나, 일찍이 죽었고, 가문 역시 한 줌의 모래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달카드님. 운이 좋게도 후손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다행이군요.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말을 꺼냈던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이······ 노예로 추정됩니다. 그것도 헥토르의 노예.”
“예? 그게 무슨.”
헥토르. 도시 바티스타에서 가장 큰 손이자 권력자인 오크였다.
상단 출신의 그는 바티스타에 콜로세움을 지었고 ‘황금바람 검투회’이라는 검투 대회 운영사를 세워서, 검투 경기로 커다란 수익을 내고 있는 이였다.
“젠장, 헥토르라면 말이 안 통할 텐데.”
“어떻게 접촉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돈을 주고 사 올 방법이라도······.”
“그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헥토르의 성격은 탐욕스러우면서 포악했다.
자신보다 급이 낮다고 생각하는 이든 함부로 만나주지도 않았고, 심기를 거스르면 머리를 날려버리는 이 아니던가.
지금의 연구회의 상황을 본다면, 헥토르와 만날 수 있기는커녕 그의 귀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힘들 터.
계획은 다시 난항에 빠지고 말았다.
덜컹!
그때 또다시 고서점을 지키고 있던 회원이 다급히 들어왔다.
“달카드님! 지금 밖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라니. 누구길래 그렇게 호들갑입니까?”
고대하던 상황이 안 풀리기 때문일까. 중년의 사내가 언짢아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 그것이 푸른잉어상단의 지배인이십니다.”
그러나 회원의 말에 회의장의 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푸른잉어상단의 지배인이라면······!”
“제인! 그녀가 여길 왜?”
푸른잉어상단은 마누스 왕국을 꿰찬 거대 상단 아닌가?
아무리 마누스 왕국의 현 상황이 좋지 않아도, 푸른잉어상단의 재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인은 특유의 수완으로 푸른잉어상단을 바티스타에서 영향력을 키운 입지 전적의 거물이었다.
“맙소사. 그분께서 여길 왜 찾으신 거지?”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함부로 감히 얽히기 힘든 인물 아닌가?
회의장의 모든 이들에게 의아함과 혼란이 떠올랐다.
탁!
문서를 덮은 달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나중으로 미뤄야겠소. 그런 거물께서 여길 찾아온 거라면, 필시 무슨 문제가 있겠지.”
급히 밖으로 나가자 입구에 정장을 입은 흑발의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더운 날씨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달카드 연구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제인님. 이곳은 어쩐 일로······.”
제인은 달카드에게 눈인사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제 손님이 이곳에 오셨다고 해서요.”
“제, 제인님의 손님 말입니까?”
달카드와 회원들은 어리둥절했다.
푸른잉어상단의 지배인인 제인의 손님이라면 꽤나 거물일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오늘은 전부 회원들만 있었다.
“아, 저기 계시는군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던 제인이 한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있던 건······ 트루디아가 데려온 용병대와 용병대장 드이제가 아닌가?
······설마?
제인은 그 어느 때보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단주께서 극진히 모시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순간, 말을 잃었고 턱이 벌어졌다.
“어머니······ 이, 이게 대체?”
달카드는 다시 한번 사막의 어머니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