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memaker of the Dungeon RAW novel - Chapter 135
던전 안의 살림꾼 135화
* * *
김기환은 4년 차 A급 전투계 헌터였다.
얼마 전, B급에서 A급으로 랭크 업을 하며 청룡 길드에 근거리 딜러로 스카우트되었다.
급수 높은 던전 위주로 공략을 다니는지라, 위험 수당이 어마어마한 자리였다.
거기다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 길드 중 하나인 청룡에, 그것도 스카우트를 받아 들어가다니!’
본래도 남부럽지 않은 길드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그이지만, 이건 어깨가 들썩이다 못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갈 정도의 일이었다.
그는 요 며칠, 청룡 길드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헌터 전용 휴게실을 매일같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아는 얼굴 한 명쯤은 만들어 두는 게 좋겠지.’
아무리 제멋대로에 개인주의적인 헌터들이라지만, 어쨌든 길드도 사람 모인 곳이었다. 어느 정도의 사교는 필요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오늘따라 헌터 휴게실이 유독 붐볐다. 사람이 평소의 세 배, 아니, 네 배 가까이 많았다.
어느새 사람은 늘어나고 늘어나 앉을 자리까지 부족해졌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대규모 토벌이라도 끝났나?’
의아할 때쯤이었다.
“온다! 온다! 온다!”
“발소리 들려?”
“오늘 뭐 먹는지 힌트 들은 사람?”
옹기종기 모여 앉은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게실 문을 활짝 열었다.
문 너머에는…….
“앗, 문 열어 주셔서 고마워요.”
노란 앞치마에 머릿수건을 두른 자그마한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자기 몸집만 한 커다란 카트를 밀고 있었는데, 카트에는 무엇인가가 잔뜩 담겨 있었다.
“이 팀장님!”
“완전 기다렸어요!”
“오늘 메뉴는 뭐야, 뭐야?”
“응끼약!”
헌터들은 자석에 들러붙는 철가루처럼 그녀를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고랭크의 헌터들이 엄청난 기세를 풍기며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데도,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익숙하다는 듯 상황 지휘를 시작했다.
“이 박스 좀 풀어서 테이블 위에 음료수 좀 올려놔 주실래요? 아, 일회용 접시는 원래 두던 데에 두시면 되고요. 고마워요, 헌터님.”
헌터들은 그녀의 지시를 따라 척척 움직였다. 보스 몬스터를 앞에 둔 토벌팀도 이렇게 손발이 완벽하게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빙계 능력자 헌터님 계시죠? 오늘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자의 부름에 신이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낯선 광경에 김기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세를 보면 일반인이거나, 하급 각성자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보통 길드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특히, 김기환이 있었던 길드는 등급에 따라, 그리고 각성 여부에 따라 차별이 심한 편이었으므로 더더욱 낯선 풍경이었다.
그가 상황을 관찰하는 사이, 여자는 자기 몸만큼 커다란 솥을 앞에 두고 손을 짝짝 마주쳤다.
“요즘 날이 부쩍 더워져서 오늘은 화채 하려고요. 과일은 미리 손질해 왔어요.”
그녀는 플라스틱 통에 손질해 담아 온 수박, 딸기, 파인애플 등을 솥 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리고 가져온 청량음료를 콸콸 부어 넣었다.
고작 그뿐인데, 굉장히 노련해 보이는 게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헌터님, 이거 살얼음 낄 정도로만 차갑게 해 주세요.”
“옙!”
“너무 흥분해서 다 얼려 버리면 안 돼요.”
“그럼요, 제가 그 정도 애송이로 보입니까?”
“하하. 지난번엔 냉국 다 얼려 버리셨잖아요.”
“……그건 그때고요.”
여자는 불러온 빙계 각성자를 이용해 화채를 차게 식혔다.
아사삭, 솥 안에 담긴 화채에 살얼음 끼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국자를 휘둘렀다.
“오늘은 성공했네요. 다들 그릇 들고 차례대로 줄 서서 오세요! 새치기하거나 서로 밀쳐서 싸우면 안 줄 거예요!”
“네엡!”
헌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흐름에 엉겁결에 김기환까지 휘말려 얌전히 줄을 서게 될 정도였다.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김기환이 정신을 차렸을 때쯤엔, 이미 일회용 그릇과 수저를 들고 여자의 앞까지 도달한 후였다.
“처음 보는 헌터님이네요. 저는 이희나라고 해요. 맛있게 드세요.”
앞치마를 입은 여자는 자신을 ‘희나’라고 소개하며 김기환이 든 그릇에 화채를 한 국자 크게 떠 주었다.
“아, 예에. 예.”
무해하기 그지없는 환한 웃음에 김기환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하는 사람이길래 처음 보는 나를 이렇게 챙겨 주지?’
괜스레 마음 한쪽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화채를 받아 반쯤 얼떨떨한 채로 자리에 돌아왔다.
먼저 화채를 받은 헌터들은 정신없이 일회용 그릇을 핥아먹고 있었다. 영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꼴불견이군.’
김기환은 자신은 저런 꼴을 보이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숟가락을 들어 화채를 떠먹었다.
순간, 김기환의 미뢰에 불꽃이 튀었다.
‘……어?’
시원한 얼음 조각에 아삭아삭한 과일, 탄산의 톡 쏘는 청량감…….
분명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화채에 불과한데, 무엇인가가 그의 혀를 사로잡았다.
‘고작 과일 화채가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건가?’
이건 단순한 화채가 아니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먹던 추억의 맛이 났다.
김기환은 허겁지겁 화채를 퍼먹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던 헌터들과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이건…… 대단한 맛이군.’
화채가 주는 여운에서 벗어났을 때, 자신을 ‘희나’라 밝힌 여자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었다.
‘……꿈이었나?’
김기환은 홀린 듯 희나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희나를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기 있다!’
하루 사이, 김기환은 희나에 대해 많은 꽤 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그녀가 음식과 청소 관련 스킬을 가진 비전투계 각성자라는 사실과, 그 덕분에 각성자 관리 부서의 팀장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사실 지금의 만남도 반쯤은 의도한 것이었다.
희나의 사무실 근처를 오전 내내 어슬렁거리다가 겨우 만난 것이었으니까.
‘인사를 나누고 싶다! 가까워지고 싶다!’
화채도 화채였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보고 빙긋이 웃던 미소가 머릿속 한구석에 박혀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기환은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희나를 불렀다.
“저, 이희나 팀장ㄴ……!”
아니, 부르려 했다.
“윽!”
무엇인가 작은 덩어리들이 김기환의 오금을 강하게 때렸다. 덕분에 그는 자리에서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
“희나 씨.”
누군가가 말머리를 가로챘다.
‘어떤 새끼가 방해를……!’
이건 100퍼센트 속셈을 가지고 그를 방해한 거였다.
김기환은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이를 갈며 고개를 휙 들었다.
‘……헉!’
그리고 잘 알다 못해 익숙하게까지 보이는 얼굴과 마주했다.
‘강진현이잖아?’
청룡 길드의 최고 전력이자 대한민국 최고 헌터, ‘파괴하는 손’ 강진현이었다.
스치듯 마주친 시선이 차가웠다.
묘한 위압감에 명치 언저리가 울렁거렸다.
‘S급……. 등급상으로는 A급과 고작 한 단계 차이 날 뿐인데!’
하지만 그와 강진현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결국 김기환은 중압감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매일 출석 도장 찍더니, 오늘은 늦었군.”
낯익은 헌터 하나가 김기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며칠 사이 얼굴을 튼 이 중 하나였다.
“표정이 영 안 좋은데. 누구랑 한판 뜨고 왔어?”
“그건……, 글쎄요.”
기운에 밀려 꼬리를 말고 도망 온 것을 누군가와 싸우고 온 것이라고 말할 수나 있을까?
김기환은 그 사실을 솔직히 말하는 대신, 물었다.
“어제 봤던 그 이희나 팀장 말입니다. 강진현 헌터와 무슨 사이입니까?”
“아, 이 팀장이랑 강 헌터?”
반쯤 드러누워 있던 헌터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왜, 그 금붕어 똥이 또 이 팀장 졸졸 따라다니디?”
“금붕어…… 똥이라뇨?”
“어제는 일이 밀려서 그런지 똥 없던데, 오늘은 나타났나 봐.”
정황상 금붕어 똥이 강진현이라는 사실 정도는 추정할 수 있었다.
김기환은 잠시 인지 부조화에 시달렸다.
‘S급 헌터가…… 금붕어 똥 취급을 받고 있다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헌터는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어 갔다.
“이 팀장이 은근 실세지. 그 손맛 보면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어. 괜히 천하의 강진현까지 졸졸 쫓아다니면서 눈알 부라리고 다니겠어?”
그러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 헌터가 사람을 보통 귀찮게 하나? 얼마 전에 들었는데, 글쎄 휴가까지 따라 내고 쫓아다닌다더라고.”
“아니야, 그건 와전된 소문이야.”
다른 헌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기환은 얼떨결에 옆자리를 내줬다.
“내 생각에 희나 씨도 그게 싫지는 않은 것 같아.”
“어허이. 사람이 좋아서 잘해 주는 걸 이상하게 착각하면 안 되지.”
“아니야. 그저께 들었는데, 휴가 내고 둘이 데이트 다녀왔다던데?”
“데이트…… 말입니까?”
김기환은 얼떨떨하게 말을 따라 읊었다.
‘어쩐지, 눈빛이 보통이 아니라더니. 견제였던 것인가?’
물론 김기환이 한 일이라곤 희나를 부르려 했던 것밖에 없지만…….
“확실해? 괜한 소문 냈다가 이 팀장 곤란해지는 거 아냐?”
“아니, 내가 소문을 낸다고 언제 그랬어? 그냥 사실이 그러니까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다는 거지. 거기다 이거, 꽤 신뢰할 만한 정보원에게 들었다고.”
헌터들은 한참 동안 쑤군덕거렸고, 결론은 이렇게 났다.
둘이 같이 휴가 내고 데이트 다녀왔다는 소문은 참인 것 같음.
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공표할 만한 관계는 아닌 듯함.
그러니 매너 있게 모른 척해 주는 것이 도리임.
“이 팀장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까, 이건 모른 척해 주기다.”
헌터들은 모두 희나를 몹시 좋아하는 듯,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 미리 입을 맞췄다.
심지어 이 사실을 길드 밖에 누설하는 놈이 있다면, 팔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마석에다 살벌하게 맹세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김기환은 괜한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뭔가 시작도 못 하고 끝나 버린 것 같은데.’
대체 그 ‘시작’이 무엇인지는 그조차도 확실히 모르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