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512)
제 513화
혈마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천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
혈마가 어깨를 으쓱한다.
“물론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마교가 이 땅을 지배한 것은 부정하지 못해. 그런데.”
“그런데?”
“천마신교의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 바로 라그나로크라는 존재의 멸滅.”
저건 틀린 말이 아닐 거다. 왜냐면 부교주 천월이라는 놈이 나한테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다만 다른 것은 그 내부 사정이다. 구체적인 내부 사정.
“천월, 그놈에게 들었겠지만 이 땅의 주인은 항상 천마였고 땅의 지명은 항상 천마신교였네. 그들의 목적은 자연스럽게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입되었지. 주입식 교육이라고 해도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것이야. 하지만, 그건 그들의 목적이고 그들만의 사정이 아닌가.”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혈마는 마치 이단아 같았다.
이 천마신교라는 곳은 교敎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아수라를 신으로 모시며 아수라를 죽인 라그나로크를 멸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철한 종교.
그 종교가 땅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 교리도 땅을 지배한다.
문제는 혈마가 그것을 따를 생각이 없다는 거다.
“라그나로크인지 뭔지 하는 ‘미래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해 ‘현재의 자유’를 제한한다? 대체 왜 그래야 하지?”
“음…….”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이를 가리지 않아. 골골대며 금방 죽을 것 같았던 뒷방 늙은이가 수십 년을 더 살 수도 있고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세 살배기 꼬맹이가 곧 죽을 수도 있고.”
그게 세상이긴 하지.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은 동물이라네. 자연의 섭리라는 말일세. 그 짧은 생,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생이기에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좋은 여자나 좋은 남자를 만나 자식을 가지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 그게 인간 아니냔 말이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천마신교가 그런 것까지 관리하나?”
혈마가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모르고 있었나?”
“뭘?”
“하, 천월 그 새끼가 그럼 그렇지. 자세한 건 하나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구만.”
의문이 깊어진다. 뭔 소리야 이게.
“잘 들으시게. 이 천마신교에서는 말일세. ‘혼인’이 엄격하게 ‘제한’된다네.”
눈썹이 찌푸려진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거든.
“제한?”
“자네도 그 정도 경지까지 올라갔으니 알 것 아닌가. 자식의 재능은 부모의 재능으로 결정된다는 거.”
“…….”
“부모 중 한쪽의 재능이 신화경 정도고 한쪽이 일반인이라면 그 아이는 최소 초절정의 재능까지는 얻게 돼. 개척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는 개인의 문제지. 하지만 그 재능을 얻게 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네.”
“확실하다?”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확실하다는 것은 추측이 아니라는 거다. 왜 확신하는 걸까.
“여러 가지 ‘표본’이 있었으니 의심할 필요가 없지. 왜 천마신교가 이토록이나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겠는가.”
조용히 팔짱을 끼고는 혈마에게 턱짓했다. 계속 해 보라는 그 몸짓에 혈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두 부모가 전부 신화경의 재능, 아니지. 최소 생사경의 재능만 가지고 있어도 그 아이는 최소 생사경까지는 올라가. 물론 앞서도 말했듯 재능만 그러하다는 거지. 개인의 노력 여하와 의지의 차이에 따라 갈라지긴 하겠지만 이게 정설이라네.”
혈마가 코앞에 놓인 술잔을 쭉 들이켠다.
“그래, 내 말로 눈치챘겠지만 이 천마신교는 생사경의 고수나 신화경의 고수가 되면 거의 반강제로 혼인을 맺게 돼. 물론 말만 혼인이지. 그냥 씨받이나 다름이 없어.”
“씨받이?”
“아주 엿 같고 재미있는 게 하나 있다네. 바로 부인 교체, 무인들끼리 부인을 교체하는 그런 게 지금 이 천마신교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이게 사람 사는 곳인가? 짐승도 이 정도는 아니야.”
전에 하후영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구음절맥이라는 건 혈맥섬유화와 비슷하다고, 그게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 동대륙에서도 아서 군나르가 했던 것처럼 더 강한 무인을 만들기 위해 온갖 ‘실험’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거다.
하후영과 하후돈이 어디 출신이라고 했더라.
금방 떠올랐다.
흑마문이라는 곳 출신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 보니까 그 흑마문이 사실은 이쪽 천마신교에서 파생된 문파였나 보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흑마문이라고 아나?”
“흑마문? 아, 흑마문. 흑마창제 하후돈의 본가. 알지. 내 웬만한 건 알지. 왜냐면.”
“왜냐면?”
“흑마문의 문주가 원래는 백마문 출신의 무인이었거든.”
혹시나 하였던 건데 그게 진짜였네.
“언제였더라. 한 500년인가? 그때의 천마가 백마문의 하후패라는 남자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고 하더군. 사실 그 거래가 뭔지 나는 잘 몰라. 지금의 천마 정도면 알겠지. 중요한 건 그 하후패라는 남자가 무림으로 갔고 그곳에서 흑마문이라는 문파를 만들었다는 거지. 더 중요한 건 30년 전에 현재의 흑마창제 하후돈에게 멸문당했다는 건데, 그게 끝이라네. 그런데 갑자기 흑마문은 왜?”
“그냥.”
“그냥…… 그냥이라…… 좋아. 그럼 내 마저 말해도 되겠는가?”
“할 말이 더 있어?”
“있지. 아주 많지. 천마신교라는 새끼들이 얼마나 웃긴 새끼들이냐면 혼약에 대한 제한이 천마교를 제외한 다른 교의 교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네.”
이것 봐라.
“표정 보니까 눈치채셨군. 그래, 그 생각이 맞네. 각 교의 교주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술수지. 천마신교의 황제는 천마야. 예를 들면 백마교의 교주가 신화경의 여무인과 정분이 나면 천마는 그 여무인을 다른 무인과 강제로 결혼시키지.”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웃긴 건지 혈마가 웃음을 터트린다.
“웃긴 건 그런 비합리적인 상황을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상쇄시킨다는 거야. 이 얼마나 악랄한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마가 이 땅의 지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80% 정도는 이거 때문일걸.”
혈마의 눈이 빛난다.
“천월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천마신교의 땅에 있다고 모두가 천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게. 난, 천마가 아주 싫어. 증오하기까지 해. 힘이 부족해서 이 혈마교를 천마신교로부터 독립시키지 못한다는 게 내 한이야. 아, 이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구만. 내 꿈이 뭔지 아시는가?”
꿈이라…….
되게 오랜만에 들어 본다. 이 혈마라는 남자가 생각 외로 낭만적이네.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데?”
“이 혈마교를 독립시키는 거. 우리 혈마교의 교원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게 내 꿈이라네.”
“꽤 포부가 큰 꿈이네?”
“클클. 그렇지. 큰 꿈이지.”
혈마는 계속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다 살아나니 감성적이 됐구만, 먼저 들어가 보겠네. 마저 쉬다 들어가시게.”
혈마가 몸을 돌린다. 걸음을 옮기는데 계속 클클거리며 웃는다. 자기가 생각해도 웃겼나 보다.
그렇게 혈마는 사라졌다.
나와 스승님, 단둘만이 남은 주막에서 나는 조용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자작을 하며 웃었다. 하늘이 뻥 뚫린 주막은 생각 외로 운치가 있었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난 어린애가 아니다. 34년을 살았고 14살로 회귀를 했지만 거기서 대충 연도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지금 나는 35살이다. 적은 나이는 아닌 거지.
술을 마셔 보지 못했다면 그건 더 웃기는 일이었을 거다.
그대로 술을 쭉 들이켰다. 그대로 음미했다. 혀의 시작과 끝, 목 넘김까지. 이 술의 맛을 짧게 평가하면 달달했다.
그냥 달달했다.
이거, 내 기준에서는 굉장히 후하게 준 거다.
시중에서 파는 쓰레기 같은 술은 그냥 쓰기만 하다. 쓴맛으로 먹는 이들도 있다지만 난 아니다. 쓴맛에 추가로 어떤 맛이 있는지, 그걸 본다. 이 술은 점수로 따지면 80점은 넘을 정도로 괜찮은 술이었다.
[술 넘기는 게 꽤나 익숙하구나.]“그래 보입니까?”
[많이 마셔 본 모양인데. 누구랑 마셨느냐?]웃고 말았다. 내가 누구랑 술을 마시겠어.
“스승님이랑 마셨습니다. 스승님에게 배웠고.”
[……그래?]“예. 저는 모든 것을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 제 기억 속의 스승님이 지금 제 앞에 계신 스승님과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라 해도 저에게 스승님은 스승님입니다.”
눈앞의 스승님과 내 기억 속의 스승님은 다르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남자의 기준으로 여자에게 전 여자 친구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나쁜 버릇이다. 하지만 숨길 수가 없다.
우리 스승님은 누군가가 거짓말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니까. 그런 스승님에게 천천히 이야기했다.
“술도 스승님에게 배웠고 생각하는 법도, 그리고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도, 그리고 여자도, 그 모든 것을 저는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이제는 제가 스승님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스승님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피어오른다.
“예. 청출어람 모르십니까?”
[알지. 아는데 내가 배울 게 있는지는 모르겠구나.]고개를 저었다. 배울 게 없을 수가 없다. 왜냐면 눈앞에 있거든.
“저에 대해서 아셔야지요.”
스승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너에 대해서?]“예.”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 것이냐.]무슨 의미긴.
“누군가를 몇 번 마주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가려면 몇 번 마주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오래, 지속적으로, 그리고 자주 보며 알아가는 거죠.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주고 다른 것을 맞춰 가고.”
스승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스승님의 눈도 살짝 풀렸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구나.]이렇게,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한 번 더 웃고 말았다.
나는 항상 스승님을 스승님으로 보지 않았다. 여자로 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발렌타인은 여자로서 웃고 있었다.
우리는 말 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렇게 한동안 있었다. 아마 계속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스승님과 나는 동시에 한숨을 터트렸다.
후우.
그대로 주막의 구석, 굉장히 그늘진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만 쳐다보고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