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518)
제 519화
“네가 붙여 준 내 별명이 구두쇠였지?”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버는 돈도 많으면서 저한테 한 푼도 쓴 적 없잖아요.”
혈마의 별명은 구두쇠였다. 돈을 정말 쓰지 않는다. 심지어 가지고 있는 옷도 적색 장포 5벌이 끝이다. 그 장포를 10년 동안 번갈아 가면서 입었다. 속옷은 그나마 좀 많다. 한 8장 정도. 그것도 10년 동안 썼다. 짠돌이 수준을 넘었다. 구두쇠는 정말 순화된 표현이었다.
혈마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 주먹을.
후웅-!
뻐억-!
오판석의 복부에 꽂았다.
“커헉!”
털썩, 오판석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 떨리는 눈동자가 혈마를 올려다본다. 혈마가 말했다.
“네가 오늘부터 혈마교의 교주다.”
“……뭐……라는 겁니까. 쿨럭.”
양불휘는 곧바로 오판석의 멱살을 움켜쥐었고 그대로 집어 던졌다.
어디로 집어 던졌냐면 혈마교의 병사들이 몰려 있는 그곳으로.
동시에 양손을 펼쳤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다.
허공에 수식이 그려진다.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이 혈마교의 새끼들이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깨달은 천월은, 너무 늦게 반응했다.
혈마가 웃으며 말했다.
“이때를 대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 전부는 못 보내.”
천월이 달려든다. 흑풍대의 무인들도 달려들었다. 하지만 늦었다.
“[매스, 텔레포트].”
붉은 빛이 혈마교의 교원들을 덮었다. 오판석도 덮었고 모두를 덮었다. 고작 1초가 지났을 때 그들의 몸이 사라졌다.
약 2만의 혈마교의 병사들이 있던 그 장소가 텅 비어 버린 것이다.
혈마가 고개를 들었다. 천월은 혈마의 앞에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 오판석이 있던 그곳을 향해 있었는데 천천히, 그의 고개가 돌아간다.
천월의 표정은 싸늘했다. 혈마는 안다. 저게 제대로 빡친 놈의 표정이라는 것을. 혈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웃음과는 사뭇 달랐다. 그건 뼛속 깊이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미소였으니까.
“그 표정을 다시 보는 게 얼마 만이지? 한 14년 됐…….”
뻐어억-!
천월의 주먹에 얼굴을 맞고 멀리 날아갔다. 바닥에 서너 번 정도 튕기고는 그대로 털썩 드러누웠다.
크크.
웃음이 나온다. 원래는 혈마교의 모든 교원들을 ‘도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를 보내지 못하는 경우와 2만 명이라도 보내는 경우.
혈마는 책임자다. 한 단체의 수장이다. 선택해야 했고 했을 뿐이다.
나머지 18만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전에 몇 놈 데려가야겠다.
그때였다. 혈마의 머리 위로 그늘이 진다. 서쪽의 황제가 머리맡에 있었다. 그는 내려다보고 있었고 혈마는 올려다본다.
뭔가 익숙한 상황이었다. 아까 백마 단리백이 이런 상황에 있지 않았었나.
“뭘 그렇게 쳐다보시나.”
“그냥.”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물었었지. 뒤통수를 칠 거냐고.”
“그랬지.”
“안 치니까 걱정 마시게.”
그런 혈마에게 잭은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했다.
“너. 갈 곳은 있냐?”
“……있지.”
“어디?”
“지옥.”
솔직히 혈마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했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 나가겠어.
그런 혈마에게 잭이 말했다.
“지옥 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하, 거기 가는 데 나이 제한이 있나?”
“그거야 모르지.”
“…….”
“가기 전에 자식은 보고 가야 될 거 아니야. 결혼하는 게 소원이라며?”
“……소원까지는 아닌데.”
그냥 그러려니 했다.
“너, 밀로스 제국으로 올래?”
사실 이게 본론이었다. 혈마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뭐?”
“서대륙으로 올 생각 있냐고.”
* * *
신의 부운영의 일과는 간단했다. 잠에서 깨고 명상을 한다. 이후 연구를 하고 부상자가 생기면 치료를 한다. 천외천의 무인이나 무림의 무인이나, 어떤 식으로든 신의는 하루에 한 번 이상 누군가를 치료했다. 그렇게 저녁때가 되면 신의는 다시 명상을 한다.
명상의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보통 저녁에 하는 명상은 최소 3시간이 걸린다.
이건 신의 나름의 수련법이다. 보통 무인들이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대련을 하는 것과 다르지만 분명, 나름의 수련이었다. 정신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련.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검존이 와서 지랄해댄 건 그렇다 치고 하루에 꾸준히 하던 명상을 굳이 멈출 이유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서 신의는 걷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온 모든 세월이 보인다.
천천히 걸었다. 불빛들이 춤을 추고, 세월이 엮여간다. 여기까지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이후 시작되었다.
쿠궁.
신의의 미간이 구겨진다. 무언가가 달라졌다.
걸음을 멈췄다. 심상이 얽혀가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침입한, 그런 느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새하얀 공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서 신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이게?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그런 거랑은 달랐다. 바보도 아니고 설마 그걸 구분하지 못할까.
그 순간.
-때가 되었다.
신의의 미간이 구겨진다.
“누구요?”
-혼돈이 필요하다.
신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곳은 나만의 세상이다. 심상 세계가 개나 소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나 소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하면 무의식의 경계.
이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경지에 이른 무인들은 이 안에서 수련을 한다. 그런 공간에 다른 이가 진입한다? 말도 안 된다. 심지어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다.
“검존은 아닐 거고, 혹시 천마요?”
하얀 공간이 울린다. 이어서 아까의 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마天魔, 하늘의 악마라는 그 단어는 나에게서 시작이 되었다.
신의의 표정이 석고상처럼 굳어진다.
-아수라는 인간이다. 나는 혼돈에서 태어난 존재. 이무기였고 존재의 격을 벗은 불멸의 존재.
이 정도 이야기 했으면 충분하다. 신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 어느 순간에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다.
숨기고 있던 광기가 섞인 그런 미소가 아니라 환희에 찬 미소.
“혹시…… 라그나로크요?”
하얀 공간이 일렁인다. 큭큭, 공간이 웃는다.
이어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 불렸었지.
세상에.
라그나로크라니.
“이 의궁 지하에 일그러진 공간이 하나 있던데 그곳에서 당신의 몸을 찾았소. 혹시, 눈을 뜬 거요?”
라그나로크로 추정되는 그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까처럼 심상 세계가 울린다. 이제 보니 웃는 것 같다. 라그나로크가 웃으면 공간이 울린다. 참으로 흥미롭다.
-생각할수록 재미있어. 나를 죽이기 위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는 조직의 수장이, 하필이면 천마라는 단어를 쓰다니. 괴물을 죽이기 위해 괴물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
-그보다, 재미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더구나.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한 번 더 공간이 울린다. 문득 신의는 이 순간 그 남자가 떠올랐다. 서쪽의 황제.
그는 생각보다 웃음이 많았는데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저 존재도 웃음이 많은 것 같다.
우연일까.
우연인 것 같다.
-영혼에 대한 공부가 공간과 차원에 간섭을 한다…… 재미있어. 그보다 키메라를 만들었던데.
“……다, 지켜보고 계셨던 거요?”
-다는 아니지만 볼만한 것은 보았다.
신의는 조용히 침묵했다. 지금 이건 엄청난 일이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지금 과거의 절대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냥 절대자도 아니다. 그냥 이 세상에 생명체라는 것이 등장한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괴물이다. 대륙과 대륙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것은 그렇다 치고, 흘러가는 미래의 역사마저도 그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라그나로크는 그런 존재다.
-아이러니하더구나.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신의의 말투는 공손했다. 그런 신의의 귓가로 라그나로크의 목소리가 꽂혀 든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신의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시간이 얽혔어.
“……시간, 말씀이십니까.”
-같은 존재가 두 명이 보여.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았고,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했지?
신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시간을 돌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돌려진 것 맞는 것 같고, 그런데도 기억이 흐릿하니 참으로 흥미로워.
라그나로크는 굉장히, ‘인간적’이었다. 적어도 신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 신의에게 라그나로크가 물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지?
“……나는, 혼돈을 원합니다.”
조용했다. 신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말했다.
“세상이 혼돈에 빠지는 것을 원합니다.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누군가 무슨 행동을 할 때 그것에 대한 이유나 당위성 같은 것을 찾는 이들은 많다. 개연성을 찾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지금이 그러했다.
신의는 딱 하나를 원한다. 혼돈.
세상이 재미없으니까, 무슨 자신만의 뚜렷한 신념이나 그런 게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게 뭐가 필요한가. 세상이 혼란에 빠지면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한번 혼돈을 불러와 보고 싶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고 그게 목표가 되었을 뿐이다.
라그나로크가 말했다.
-그럼, 나와 거래를 하자꾸나.
“거래, 말씀이십니까?”
-키메라를 많이도 만들었던데, 그 키메라를 전부 ‘서대륙’이라는 곳으로 보내거라.
신의의 고개가 갸웃했다. 왜 굳이?
라그나로크는 짧게 대답했다.
-그냥.
“…….”
-그게 더 혼란스럽지 않겠느냐.
신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진짜 운명인가. 보아하니 이 라그나로크라는 존재는 ‘지금’ 매우 불완전한 상태인 것 같다.
“대륙 전체를 혼돈에 빠지게 하라, 그 말씀인 거요?”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긍정의 대답이라는 것을 신의는 안다.
대륙 전체를 혼돈에 빠지게 하는 것.
그게 신의의 목표다. 고작 키메라로 모든 게 혼돈에 빠질 리는 없다. 쉽게 말하면 그거다.
물꼬를 트는 것.
폭탄을 터트리기 위해서는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한다. 신의는 알아챘다. 라그나로크는 지금 말하고 있었다.
그 심지에 네가 불을 붙이라고. 불을 붙이는 방법마저 알려주었다. 키메라를 서대륙으로 보내라.
“흐흐.”
웃음이 새어 나온다. 혀로 입술을 핥았다.
라그나로크를 정의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혼돈에서 태어난 존재. 세상이 혼란에 빠지면 나타나는 존재.
신의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겠소.”
하얀 공간이 다시 한 번 울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신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밀실이었다. 심상 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거다.
방금 전 까지 벌어졌던 일들이 꿈만 같았다.
그럼에도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그건 꿈이 아니다.
분명 벌어졌던 일이다. 벌어진 일이다.
신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시록이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