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of another world is well fed RAW novel - Chapter 75
이안의 말에 도미닉이 곧장 생각에 빠졌다.
‘사막? 사하르 님이라면…’
이안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상단을 잘 모른다. 하지만 듣기로 사막의 대상인들은 수십 척이나 되는 배를 몰고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며 교역을 한다고 하던데, 아닌가?”
“맞아요. 해상 왕국만큼이나 해상 교역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사막의 상인들이지요.”
“물론 사하르 님을 무조건 믿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우정을 나눈 사이니…”
“에이, 돈 앞에 그런 건 소용 없다니까요.”
“…그런가.”
“그래도,”
도미닉이 싱긋 웃었다.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지도 모르죠.”
표면적으로 에버그린에게 필요한 건 튼튼한 배와 경험 많은 선원들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기술과 교역품을 훔쳐가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수많은 승냥이 떼를 피하는 것!
아직 외국에까지 소문이 퍼지기엔 이른 시기였으니 지금 에버그린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자들은 수도를 거점으로 한 제국 북부의 상인들이었다.
물증은 없어도 지난 번, 시장실을 뒤집어 놓은 도둑도 아마 그들 중 하나일거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는 도미닉.
“서신, 아니 통신을 보내야겠네요.”
엘프의 도시를 발견했다는 비밀을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사막이니 지금 시점에서는 가장 믿을만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행정관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회의실의 긴 테이블.
상석에 앉은 도미닉이 동그란 수정구를 바라보며 메마른 침을 삼켰다.
자리한 모든 이들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중이었다.
느릿하게 묘한 말투가 수정구에서 흘러나왔다.
사하르였다.
역시나.
먼 곳에 앉아서 에버그린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어디 사하르 님 뿐이겠어?’
규모가 커지고 교역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에버그린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러니 대륙에서 힘 깨나 쓴다 하는 집단이라면 어디든 밀정 하나 쯤은 에버그린에 보내놨을 것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나, 계절이 지날 때마다 돈 될 만한 것들이 툭 툭 튀어나오는데다 신기한 것들이 가득한 곳이다보니 소문을 수집하려는 시도 역시 계속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
다행히 도시로 승격하기 이전부터 에버그린에 아예 이주하려고 하는 이들은 가려받은 데다가, 지금도 여전히 중심부에서 주민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철저히 조사하는 중이었기에 그나마 아직까지는 별다른 사건 사고가 생기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 아이가 기뻐하면 되었어. 어릴 때부터 예술에 조예가 깊던 아이라 평범한 길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으나 이리 결단을 내리다니, 열 길 사람 속은 훤히 알아도 내 딸자식 속을 몰랐구나.] “모든 아버지들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천하의 사하르도 딸내미 얘기에 혀가 길어지는 것을 보면 제법 딸바보 냄새가 났다.
[알아서 잘 돌봐주리라 생각하네만 그 아이, 무대에 서더라도 결코 우스워져서는 안 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쉽게 이야기 말라. 태양의 어여쁨을 받을 아이이니 생채기가 나선 안 돼.] “…?”
수정구에서 들려온 말에 사하르가 낯빛이 창백해진 채로 종이에다 글을 써서 들어보였다.
– 술탄의 여인!
“으허엉?”
일개 떠돌이 전쟁고아가 촌장이 되었다가 이제는 시장까지 벼락출세를 했건만 어째 땅이 문제인건지 툭하면 신분 높은 이들이 모여든다.
뭔 팔자가 이러나 싶은 도미닉이었다.
‘어쩐지 그 비싼 걸 덜렁덜렁 가지고 다니더라. 에휴. 이젠 앞으로 라비아 님 눈치까지 보게 생겼네, 젠장.’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그래도 만만한 건 이안과 카림 정도 뿐인가. 입이 썼다.
미래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걱정이 되었다.
음유시인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 세상이었다. 점을 치는 집시나 떠돌이 악사 정도의 취급이 보통인 세상.
에버그린은 관광도시의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 덕에 악사와 음유시인들의 대우가 매우 유한 편이었지만 바로 옆의 도시만 가더라도 험한 꼴을 당할 지도 몰랐다.
도미닉은 이것을 걱정한 것이다.
“어… 저… 술.. 아니, 그, 사막의 태양의 여인이, 아니, 여인께서 무대에 오르더라도 괜찮은 겁니까?”
[타고난 재능을 뽐내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도…”
[그대의 걱정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알고 있으나 사막은 예술에 무지한 이를 경멸하니 그대로 두어도 좋지 않으료? 그저 태양의 분노가 두려우니 그 아이를 보는 관중들의 눈에 탐욕이 아닌 경배가 담기도록 하라.]
“…예?”
이게 뭔 말이야.
하여튼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는 양반이었다.
나는 그런 건 못합니다, 바빠요.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곧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보지 않아도 웃고 있을 사하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 사하르 님. 라비아 님의 일은 어떻게든 수를 내어 보겠습니다. 그럼 중형선은 이에 대한 선물로 주시는 것이겠지요?”
[허허. 여전히 그 급한 말투는 여전하구나. 그래, 배 한 척 내어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회의실 안의 행정관들이 모조리 소리없이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이렇게 해결이 될 줄이야!
아, 취소.
좋다 말았다.
“원하시는 조건을 최대한 맞춰드리려 하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글쎄.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겠는가.]
도미닉이 입술을 짓씹었다.
도자기로 거래를 해 보려고 해도 이미 충분히 좋은 비율로 거래를 성사시킨지가 오래였다.
커피와 향신료까지 더해 비율을 조정해 놓은 것이라 이제 와서 이것을 패로 삼기엔 서로의 신뢰 문제에 타격을 받을 것이다.
‘사하르 님과의 신뢰가 무너지면 안 돼. 그럼 에버그린은 고립이다.’
도미닉은 물론 행정관들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회의실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망설임이 길어지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사하르였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으로 갚는 것이 이치에 맞으리라.]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숙련된 선원들을 받으려면 숙련된 다른 장인을 보내란 말씀이십니까?”
[비슷하나 다르지. 우리가 문화도 성향도 다른 제국인 장인을 어디에다 쓸까.]
“그럼…?”
[내 몇몇 이들을 선발하여 보내지. 선원의 숫자만큼. 그대의 땅에 전문기술을 교육하는 곳이 있다고 했으니 자네가 이들을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만들어서 다시 돌려준다면 좋은 거래가 되지 않겠나.]
여전히 느긋하고, 고저가 없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유학생을 받으란 말이구나!’
도미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건 없는 제안이다.
사하르의 말처럼 능력있는 선원과 항해사를 키워내려면 얼마가 더 걸릴 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끈도 없는 다른 해상 상단과 덜컥 계약을 하는 것도 리스크가 너무 컸다.
‘도자기의 이문이 너무 많이 남는다는 게 문제일 줄이야. 배신 한 번 하면 팔자가 피는 액수가 되니. 쯧-.’
그러니 사하르가 더한 조건을 걸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도미닉의 입장에선 학생 몇 명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일은 별 것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이 사하르가 제국인의 편의를 보아준 것이 아니라 사막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떠들어대겠지. 어디로 보아도 좋은 일이렸다.]카림이 빠르게 종이에 이것 저것 적으며 이득과 손실을 따져보는가 싶더니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도미닉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우리 쪽도 손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막의 인재들을 가르치게 된다면야 수도의 귀족들에게 욕을 좀 먹기야 하겠지만, 뭐, 알 바야?’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을 숨 쉬듯 하는 수도 귀족들이 또 말을 얹어대겠지만 어차피 남부와 대척하고 있는데다가,
‘그것들은 이번 일이 아니라도 남부에 욕을 해대니까.’
두 지역의 해묵은 감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도미닉에겐 정치적인 문제를 막아줄 싱클레어 백작이 있지 않은가.
‘머리 아픈 문제는 영주 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내가 뭐 귀족도 아니고, 일개 도시 시장인데 지역 감정까지 고려해야겠어?’
생각을 마친 도미닉이 환하게 웃으며 수정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약서, 바로 보내겠습니다.”
몇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기는 해도, 본격적으로 수금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
그 동안 아카데미는 첫 번째 시험이 치뤄졌고, 중앙 광장 주변 상가는 모두 공사가 끝나 상점이 입점했으며, 항구에는 중소형 배를 댈만한 최소한의 시설이 갖춰졌다.
여전히 물류를 내리기엔 진창에 그럴 만한 공간도 나오지 않아서 교역을 원하는 배를 입항시키는 것은 무리였지만, 주인의 배 한 척 어거지로 끼워넣는 것 정도는 할 만 해졌다는 의미였다.
“이제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혹시 사고라도 난 것… 퉤퉤퉤! 어우, 재수 없는 소리 할 뻔 했네.”
혼자 손톱을 깨물며 중얼중얼 거리던 도미닉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전용 마차까지 생겼지만 그래도 마차와 배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건 랜덤 뽑기잖아. 이왕이면 멋있는 거! 끝내주는 거!’
설마 사하르가 다 부서져 가는 걸 보냈으면 어떡하나, 계약서에 상태에 대해서도 명시를 했어야 했다, 별 생각을 다하며 불안에 떠는 도미닉이었다.
“사막의 이름난 대상이 그렇게 치졸한 일을 하겠는가.”
“…이런 거 아껴서 부자됐는지도 모르잖아요.”
“사람을 좀 믿으며 사는 법을 배워.”
언젠가 들은 적 있던 말을 그대로 갚아주는 이안.
도미닉이 가자미 눈을 뜨며 흘겨봤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바다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겼다는 승리의 미소와 함께.
“어?”
“왜요, 내가 또 속을 줄 알고… 어? 어!”
그 때, 타이밍 좋게 마주보는 섬 뒤 쪽에서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도미닉은 넋을 놓고 미끄러지듯 물살을 가르는 배에 시선을 빼앗겼다.
쏴아아아-.
소리까지 멋있었다.
‘이거, 자동차 엔진음이랑은 사이즈가 다르잖아?’
– 돛을 접어라!
– 노를 거둬라!
아름다운 몸체를 뽐내는 중형 갤리선.
그 위에 탄 선원들의 고함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좋은 놈으로 보냈구만?”
“스톤해머님? 어떻게 여기까지 직접 오셨어요?”
“내 작품을 실어나를 놈인데 내 두 눈으로 상태를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왔지. 온 김에 맥주도 좀 먹고.”
“잘하셨어요. 맥주는 제가 살게요.”
“높은 인간. 이제 돈을 제법 번 모양이로구나. 끌끌.”
스톤해머와 잠깐 수다를 떠는 사이 갤리선에서 작은 조각배들이 내려지고, 조각배 위에 한 사람씩 승선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항구에 접하기가 어렵겠다고 판단한 것 같네. 음. 옳은 판단이야. 예상했던 것보다 큰 놈이 왔어.”
스톤해머의 말에 도미닉과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가 하는 말이니 정답일 테니까.
“…엥?”
그 때, 조각배 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스톤해머가 혀를 끌끌 찼다.
“저거 인간 아닌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