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37
◈ 37화. 이젠 틀렸어
서늘한 가을바람이 단려화의 면사를 흔들고 지나갔다.
‘좋아.’
죽림으로 가득한 광평장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들에게 배정된 숙소는 광평장의 본채 바로 옆에 딸린 작은 별채였다.
사내들이 득시글거리는 광룡대였기에 진무립이 배려를 해준 까닭이다.
덩그러니 놓인 탁자, 그리고 침상 두 개가 전부인 방이었으나 창밖으로 작은 연못과 죽림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주변을 돌아보고 방에 들어가자 창밖을 응시하던 연소정이 일어났다.
“부대주에게 부탁해 지필묵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탁자 위에는 붓과 종이가 놓여 있었다.
“벌써 출발하려고?”
“여기서 화령도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달포가 넘게 걸립니다. 지금 출발해야 겨울이 오기 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줘.”
탁자 앞에 앉은 단려화는 미리 생각해둔 말을 서신에 담았다.
먹이 마르기 무섭게 비단에 서신을 감싼 연소정은 봇짐을 들었다.
“아가씨.”
단려화가 배시시 웃었다.
“잔소리를 하려고 그러지? 알았어. 절대 위험한 일은 하지 않고 얌전히 지낼 테니 조심해서 다녀와.”
빙그레 웃은 연소정은 죽립을 눌러썼다.
“나오지 마십시오.”
마중하려는 단려화를 한사코 말린 그녀는 때마침 정문으로 들어오는 진무립과 마주쳤다.
“진공자.”
“가려는 거냐?”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그녀는 진무립과 만난 이래 가장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그동안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진무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품에서 전낭을 꺼낸 진무립은 전표만 챙긴 뒤 남은 은자를 전부 건넸다.
“이게 뭡니까?”
“여비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연호위.”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였다.
전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소정은 진무립에게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대주.”
진무립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
사방으로 오 장 크기의 넓은 공간.
귀퉁이마다 횃불을 밝힌 지하 연무장에 진무립과 유대하가 마주 섰다.
일 장 높이의 천장을 힐끔 쳐다본 진무립이 한숨을 토했다.
“천장에 박힌 야명주까지 팔아먹은 거야?”
유대하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마도림에 들어온 이십 년 전에는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나마 태상림주님과 현 림주께서 백방으로 노력하신 덕분에 형편이 나아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곳으로 부르신 겁니까?”
“묵혈방주한테 얻어맞고 다니는 부하가 한심해서 좀 가르쳐볼까 한다.”
“제대로 싸웠다면 제가 이겼을 겁니다.”
“꼭 처맞은 놈들은 그렇게 말하더라.”
피식 웃은 진무립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마도림의 심법은 마기를 축적하는 것이 아닌가?”
“뿌리가 천산에 있으니 기본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기가 느껴지는 놈들이 별로 없단 말이지.”
“그걸 설명하려면 마도림의 역사에 대해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백오십 년 전, 천마신교의 내분으로 혈교가 탄생하고 천산은 무려 십 년에 걸쳐 내전을 벌였다.
마공을 익히고 일정 수준에 올라가면 나타나는 벽,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정체된 자들은 종종 마기가 골수까지 잠식하며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된다.
내전의 원인은 그런 자들을 실혼인으로 만들어 살인 병기로 쓰고자 한 이들과 그것에 반대한 이들 간의 싸움이었다.
어제까지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를 악랄하게 물어뜯기 시작하자 초중현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사천으로 내려와 이곳 죽림에 은거한다.
그리고 이곳 죽림에서 일평생 마공의 부작용을 연구하고 개선점을 찾기 시작했다.
마공에서 사기(死氣)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초중현은 위력이 반감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음기(陰氣)를 대체제로 사용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마도림의 기반이 되는 은월마기(殷月魔氣)다.
은월마기는 기존의 마기만큼 폭발적인 느낌은 없었으나 안정적으로 공력을 운용할 수 있다는 장점과 기존의 부작용이 없었다.
“사기를 제거한 마기를 마기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은월마기는 표면적으로 마기 특유의 기운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겉보기엔 정종 무공과 다를 게 없다는 건가?”
“저도 크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뭐가 다른지 잘 모릅니다. 은월마기란 제겐 공기와 같은 존재니 말입니다.”
“앉아서 심법을 운용해봐라.”
“예.”
자리에 앉은 유대하가 대주천을 시작하자 그 뒤에 앉은 진무립은 가만히 내력의 흐름을 관조했다.
‘마공을 익혔다고 경락의 위치가 남들과 다른 것은 아니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유대하가 내력을 갈무리하고 일어나자 진무립은 준비해온 서책을 꺼냈다.
“오늘부터 이걸 익혀라. 서책은 다 외우면 태워도 좋다.”
“이게 뭡니까?”
“은명진하검(隱鳴眞下劍)이다. 나와 스승님이 함께 만든 무공이지.”
유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 소공자께서 무공을 만드셨다는 겁니까?”
“스승님과 함께 만들었다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무공을 창안한다는 것은 일대종사나 가능한 일.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진무립이 무공을 만들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천에서 대외적으로 드러낸 무공 대부분을 나와 스승님이 만들었다고 하면 기절하겠군.’
은곡의 무공은 알아보는 이들이 많다.
하여 진무립은 스승이 창안한 무공들을 다듬어 상천의 무인들에게 가르쳤다.
천음지체의 뛰어난 오성을 타고난 진무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익힐 거야? 말 거야?”
유대하는 결심한 듯 비급을 챙겼다.
“대주에게 운명을 걸기로 한 이상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익혀보겠습니다.”
“강해지고 싶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은명진하검은 재능있는 자를 알아보는 검법이다. 네 재능이라면,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 수련에 매진한다면 생각보다 빨리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거다.”
“목숨을 걸겠습니다.”
유대하는 정중히 예를 갖췄다.
다음 날 아침.
은은한 햇살이 스며드는 광평장의 죽림에 광룡대가 집결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실까?”
“다음 임무인가?”
한경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아, 갑자기 배가 아프네. 대주께서 곧 오시려나.”
전유가 점잖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보게.”
무인들이 술렁이는 사이 진무립이 도착했다.
“대주를 뵙습니다!”
풍연의 선창에 이어 광룡대의 우렁찬 외침이 죽림의 잎사귀를 흔들었다.
“대주를 뵙습니다!”
그들을 둘러본 진무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 밑이 꺼먼 게 새벽까지 마신 모양이야.”
후영이 히죽 웃었다.
“언제 또 임무를 떠날지 모르니 마실 수 있을 때 마셔야 합니다.”
“잘했다.”
풍연이 공손한 어투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른 아침부터 소집하신 겁니까?”
“모두 자리에 앉아라.”
“예.”
쉰 명의 광룡대가 모두 바닥에 앉았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은 한경의 낯빛이 점점 흑색으로 물들어갔다.
‘아, 잠시 얘기하고 다녀올까?’
한경이 일어설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진무립이 입을 열었다.
“오늘 너희를 부른 것은 임무 때문이 아니다. 너희들의 선택을 듣기 위함이다.”
“선택이라니요?”
“림주께서는 본 림의 무인이 무인답게 살 수 있는 당당한 마도림을 원하신다. 그러자면 적어도 이 사천 땅에서만큼은 누구도 우릴 넘보지 못할 만큼 강한 힘을 갖춰야 한다. 그대들은 그런 힘을 갖고 있는가?”
평소보다 엄숙한 말투와 눈빛, 진무립의 나직한 목소리에 광룡대의 눈빛도 진중하게 변했다.
풍연이 말했다.
“부족합니다.”
“그렇다. 그러나 지금 부족하다고 앞으로도 부족할 거라는 건 아니다. 나는 그대들을 위로 끌어올려야겠다.”
마도림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사천 무림에 우뚝 서기 위해선,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이들이 더욱 강해져야 한다.
“위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사천의 그 어떤 무인과 만나도 꿀리지 않을 만큼 강하게 만들어주마. 단, 마도림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에게만 기회를 주겠다.”
이들 전원은 대검문에서도 조장 이상의 직위를 역임한 만큼 무재는 나쁘지 않았다.
낭인과 몰락한 방파 출신으로 지금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가르친다면 더욱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마도림을 위해 목숨 바칠 수 없는 자라면 공을 들일 필요가 없다.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한경이 진땀을 흘리며 일어나려 했다.
“저······.”
그때 진무립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남고자 한다면 그대로 앉아 있고 원치 않는 자는 지금 일어나라. 소속을 옮겨주겠다.”
일어나려던 한경이 억울한 얼굴로 다시 앉았다.
‘왜 하필 앉으라고 해요?’
한경이 어떻게 말을 꺼내나 고민하고 있을 때, 풍연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제 마음은 이미 정가장의 일이 끝난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남 유성검문 출신 풍연. 마도림에 뼈를 묻겠습니다.”
진무립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련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고단한 과정일 거다. 자신 있나?”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풍연의 눈빛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는 평창현의 기루에서도 유일하게 진무립을 믿었던 인물이다.
도산검림의 무림에서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진심으로 따르고 싶은 상관이다.
멸문한 방파 출신의 풍연은 오랜 세월 세상을 떠돌다 가까스로 찾은 주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진무립이 말했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나는 적으로 규정한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만일 남기로 결정하고 훗날 돌아선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선사할 것이다.”
진무립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는 평창현에서 충분히 지켜봤기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일어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풍연과 같은 마음인 까닭이다.
마도림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시간.
입을 열기 어려운 엄숙한 분위기에 한경은 속이 탔다.
‘다들 왜 갑자기 비장해?’
어차피 누구도 떠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쓸데없는 의식 따윈 제발 빨리 끝내고 자신을 풀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후영이 그의 속도 모르고 말했다.
“묵혈방에서 대주가 우리를 위해 한 행동을 모두 지켜봤는데 어찌 떠나겠습니까? 이 후영, 마도림에 뼈를 묻겠습니다.”
이어서 전유가 말했다.
“저 역시 마도림에 목숨을 걸겠습니다. 부디 저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십시오.”
마음을 굳힌 듯 결연한 눈빛을 보인 대원들도 누구 하나 일어나는 이가 없었다.
두 달의 시간.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진무립의 능력을 인정하긴 해도 완전히 믿었던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번의 사건을 거치며 지켜본 진무립은 미래를 걸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내라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안절부절못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한경이었다.
‘내 인생 최대의 고비다.’
부글거리는 뱃속은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경고한다.
‘안 되겠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손을 들려 할 때.
“저기 대······.”
그에 앞서 조원 종경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 종경은 마도림에 뼈를 묻겠습니다!”
이어서 오조의 동명도 손을 들었다.
“저 역시 남겠습니다. 위로 이끌어주십시오.”
다급한 한경의 낯빛은 점점 누렇게 떠올랐다.
“아니, 내 얘기를······.”
“산동 명정문 출신 사평, 마도림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나씩 손을 들며 비장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새끼들아! 제발 그만해!’
한경은 눈물까지 흘리며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차마 외치지 못한 이유는 목청을 키우는 순간 괄약근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기요. 대주? 저······.”
한경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는 연이어 쏟아지는 우렁찬 충성맹세에 묻혔다.
그렇게 마흔아홉 명의 외침이 끝났을 때, 모두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한경에게 모여들었다.
한경의 얼굴에 득도한 노도사의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허허, 이젠······ 틀렸어.”
한경은 초연한 듯 고개를 들었다.
누렇던 그의 하늘이 푸른 빛을 되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