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64)
164 화 재회
재회
덜컹덜컹.
오히려 밤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 법한 이른 새벽. 적당히 빈집 하나를 차지해 자고 있던 와중, 카디쇼가 우리를 하나씩 차례로 깨워 떠날 준비를 하라고 속삭였다. 나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어머니와 쟈멜을 챙겨 수레에 싣고, 마을을 나섰다.
“하아아암.”
쟈멜이 연신 하품을 하며 마을에서 챙겨 온 이불을 수레 위에 깔자,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새 이불을 하나 꺼내 돌돌 말더니 수레 위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앗?! 제, 제 거 깔았으니까! 그렇게 혼자 주무시지 말고 같이 덮어요!”
깜짝 놀란 쟈멜이 이불을 돌돌 만 어머니를 탈탈 흔들어 대자 어머니의 이마 위로 자그마한 주름이 새겨졌다. 어머니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자신을 흔들어 댄 쟈멜을 노려보곤 한숨을 폭 내쉬며 돌돌 만 이불을 살짝 들쳐 쟈멜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살해살해…’
아무래도 어머니는 쟈멜과 드잡이하면서 잠기운을 가시게 하기보다는 약간의 양보를 통해 그냥 다시 꿀 같은 잠을 즐기기로 결정하신 듯했다.
그렇게 쟈멜과 어머니가 한 이불을 덮고 쿨쿨 자는 사이, 나는 최대한 평탄한 땅 위로 수레를 끌어 둘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뒤를 돌아보아도 마을이 안 보일 즈음 되자, 내 옆에서 조용히 걷던 카디쇼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깨웠는데, 내 말 대로 따라 줘서 고맙다.”
“어차피 저 마을에서 뭔가를 구하기도 힘들 것 같고, 이젠 길도 있으니 길을 따라가면 가까운 다음 마을이 나오겠죠. 게다가 어제 말씀하신 대로 계속 남아 있다간 발목이 잡혀 버릴 것도 같고요.”
“그렇지.”
카디쇼는 쓰게 웃곤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나 같은 사제들이 저들을 구하는 건, 결국 응급처치에 불과할 뿐이다. 이 뒤가 어떻게 될지는 모두 저들의 손에 달렸지. 애초에 이런 일은 나 같은 이들이 아니라 위정자들이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건만… 이 북제국은 과연 어떻게 되려는 건지. 참으로 걱정스럽군.”
“혹시 이 나라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대부분의 나라에 순례를 다니는 사제들은 대개 한 나라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었다.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건, 결국 그들의 신이었기에. 그래서 카디쇼가 황제를 부를 때 별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거고. 그런데도 북제국을 걱정한다면 그녀가 나고 자란 나라가 이곳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 나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지. 내가 열두 살이었을 때쯤인가… 아니, 열셋이었나? 내가 살던 마을로 찾아온 광휘교 사제분과 만나는 순간, 그때부터 내 인생이 바뀌었지. 온기 없는 빛께서 내게 권능을 베푸신 그날부터 말이야.”
어딘가 추억에 푹 빠진 모양새에 나는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게 몇 년 전쯤 이야기입니까?”
반사적으로 무어라 입술을 오물거리던 카디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곤 이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인의 나이를 캐묻는 건 실례다.”
나이 같은 건 전혀 상관 안 하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그냥 몇 년 정도 단련하신 건가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사실,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런가.”
그녀는 한 꺼풀 경계를 거두고 쓰게 웃었다.
“날카롭게 반응해서 미안하다. 가끔 무례한 귀족이나 노인들이 결혼 문제를 걸고넘어져서 말이지.”
이 세계의 사제들은 대부분 결혼이 당연하게 허용됐다. 오히려 사제들처럼 우수한 존재들이 제 씨를 퍼뜨리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겼으면 여겼지. 그 누구도 사제에게 순결하거나 정결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결혼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큰 무례 같지 않나? 박수도 서로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나듯이, 결혼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거다. 게다가 이 나라의 남자들은 힘이 센 여자를 꺼려 한단 말이다! 여자면 여리여리한 맛이 있어야 한다면서! 거기다 싸우면 질 것 같아서 싫다니? 물론, 정말 싸우면 내가 이기긴 하겠지만…”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답지 않게 많은 이야기가 주절주절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맺힌 게 많나 보네.
나는 라디오 방송을 하나 틀어 둔 셈 치고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수레를 끌었다. 한참을 더 투덜대던 카디쇼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갑자기 끊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머리칼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카디쇼는 감히 나와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미, 미안하다. 듣느라 곤욕이었을 텐데. 이거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해 버렸군.”
“사람이 쌓인 게 있으면 한 번씩은 풀어도 봐야 건강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카디쇼도 언젠가 좋은 분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신발도 제 짝이 있듯이 사람도 분명 다들 어딘가에 제 짝이 있을 테니까요.”
“짝없는 신발은 신발로서 가치가 없지.”
카디쇼가 시꺼멓게 죽은 눈으로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럼 짝없는 사람도 신발과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단 이야기인가?”
“그게 아니라…”
나는 허둥지둥 변명하며, 다시는 이 주제로 카디쇼를 자극하지 않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
“와하하하!!!”
“짠 하세! 짠!!!”
사람들의 시끌벅적함과 술병들이 부딪히는 소리. 자그마한 두어 개의 마을을 지나친 우리는 마침내 나름대로 있을 게 다 있는, 규모가 꽤 큰 마을 하나를 찾아냈다. 무어라 마을 이름을 들었던 것도 같지만, 별로 중요한 이름은 아닌 듯해서 딱히 기억에 남질 않았다.
숙소를 잡은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가장 잘 팔리는 메뉴 몇 개를 주문했다.
“히히히. 맨날 수레를 타고 다녀서 그런가? 직접 안 걸으니 요즘 엄청 편한 거 같아요! 거기다 신기하게도 오는 길에 도적들도 전혀 없었고요!”
하긴, 쟈멜의 말대로 오는 내내 단 한 명의 도적도 보지 못했다.
북제국 국경을 막 넘고 첫 도시를 향하는 동안, 정말 많은 도적들과 마주쳤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상하리만치 도적이 없었지.
“이거 이 근처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님의 능력이 뛰어나신가 봅니다.”
“뭔가 이상하군.”
카디쇼는 주변을 힐긋 둘러보곤, 말을 이어나갔다.
“지역 치안이 영주 개인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제국의 치안은 진작에 제 상태를 되찾았을 거다. 다만, 내가 전에 이것과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잠깐, 거기. 물어볼 게 있다.”
그녀는 지나다니는 종업원 중 하나를 불러세우곤, 동화를 하나 튕겨서 건넸다. 냉큼 동화를 잡아챈 여자 종업원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향해 슬쩍 다가왔다.
“네! 손님! 혹시 아직 주문을 안 하셨으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물어볼 게 있다.”
“네네, 제가 아는 건 전부 대답해 드릴게요!”
종업원의 꿀 떨어지는 목소리 저변에는 어떻게든 잘 대답해서 이 손님에게 팁을 더 받아 냈음 하는 소망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카디쇼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누군가 이 주변의 도적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고 다니진 않았나?”
“아하! ‘푸른 귀신’님 이야기인가 보네요!”
“푸른 귀신?”
“네! 푸른 귀신요! 진짜 푸른 귀신님이 이 마을 저 마을에 번쩍번쩍 나타나셔서 주변의 도적들을 싸그리 죽여 주신 덕분에 도적들로 인한 피해가 엄청 줄었어요!”
푸른 귀신이라고?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그 푸른 귀신이라는 게 머리칼이 푸른색이어서 그런 겁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분은 하얀 사제복을 입고 다니시고요?”
“맞아요! 게다가 푸른 귀신님은 검도 두 자루 차고 다닌다고 해요! 등 뒤에 큼직한 검 하나하고 허리춤에는 평범한 크기의 검 하나를요! 본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신기하게도 두 검 다 날이 아주 새파랗다고 해요!”
“하아…”
날이 파란 검 두 자루? 이건 프리디야 스승님이 무조건 맞았다. 스승님의 애검인 ‘절체’와 ‘절명’까지 챙겨 오셔선 여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신 거지?
나는 내 왼손 검지에 낀 하얀 반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내가 이걸 끼고 있는 이상, 스승님께선 내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바로 날 찾아오지 않는가.
지금의 나로선 당최 알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건 비밀인데…”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이 종업원이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뻔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동화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 비밀이나 어서 말씀해 주시죠.”
“사실… 푸른 귀신님에겐 동료가 하나 있다고 해요! 이건 푸른 귀신님의 뒤를 쫓던 분이 봤다고 한 건데. 마을에서 벗어난 푸른 귀신님이 검은 머리 여자분과 합류하는 걸 봤다고 해요!!!”
검은 머리 여자? 내 주변에 검은 머리 여자라 하면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쟈멜의 친구, 지젤.
아니겠지. 나를 거치지 않고, 지젤과 스승님이 먼저 마주칠 가능성은 영에 수렴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네네! 필요한 게 있으면 또 불러 주세요!”
종업원이 떠나고, 카디쇼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 푸른 귀신이라는 사람하고 아는 사이인가 보군.”
“아마… 그 푸른 귀신이라는 분은 제 검술 스승님이신 거 같습니다.”
“호오.”
“대체 스승님이 이 주변에서 뭘 하고 계시는지 진짜 모르겠군요.”
“그럼 일단 주변에서 스승님과 합류하는 걸 우선할 건가?”
프리디야 스승님과 합류? 스승님께서 날 찾아오려고 했다면 진작에 찾아왔을 게 분명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으신 거겠지. 거기다 스승님이 혼자 다니다가 위기에 처하는 모습은 절대 떠오르지 않았고.
“아뇨. 일단 제 동료 쪽을 먼저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럼 예정대로 체르벨 시로 향하게 되겠군.”
사실 다키아한테 반지를 넘긴 걸 밝히고 다키아의 위치를 부탁했을 때는 어머니가 굉장히 화내실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다키아의 위치가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셨다.
자기가 빠져서 생긴 일이니, 이번만 특별히 봐준다면서.
“체르벨 시라… 내 기억으론 그곳엔 제국 마법사 협회의 지부가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제국 마법사 협회라… 듣기만 해도 사고를 잔뜩 치고 다닐 것만 같은 이름이군요.”
“사고 치고 다닐 것만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도 자주 사고를 치고 다닌다. 다들 마법사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이지.”
그 천방지축에 무뢰배들인 마법사들을 규합한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잠시 후,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그럼 일단 지금은 식사부터 하고 내일 다시 움직이도록 하죠. 듣기론 사흘 정도 걸으면 체르벨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니까요.”
“그러는 편이 좋겠군.”
나는 체르벨 시에서 다키아랑 합류하고 나면, 스승님을 조금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우습게도 내 예상과 달리, 체르벨 시에 도착한 우리는 다키아와 재회하기도 전에 프리디야 스승님과 먼저 마주쳤다.
“왔니? 연아. 나는 네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단다.”
피투성이가 된 바닥과 검집. 날 반기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
“스승님… 이건 대체…”
프리디야 스승님의 주변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쥐어터진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날 향한 애정이 가득한 푸른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사소한 사람들과 사소한 다툼이 조금 있었단다. 딱히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렴.”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 오면서 듣기론 전부 마법사 협회 소속 마법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마법사들을 이렇게 두들겨 패서 다져 놓다니.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프리디야 스승님이 부드럽게 날 포옹하며 속삭였다. 날 끌어안은 스승님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내 등을 토닥였다.
“그게 바로 사소한 거란다. 그런데 연이 너는 이 스승님이 보고 싶지 않았니?”
“…물론,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프리디야 스승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