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58)
258 화 껍데기
껍데기.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지 지독한 피곤함이 두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러댔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이곳이 어디든 그대로 누워서 한숨 푹 자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내 동료들의 무사를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그럴 순 없었지만.
“일단 좀 내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응!”
펄리가 대답하기 무섭게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실들이 저절로 풀렸다. 두 발로 단단한 바닥을 디디고 서자 조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이 은신처로 들어온 뒤로 흔히 보이던 통로와 완전히 비슷하게 생긴 통로. 정말 별다를 것 없는 통로의 끝에 위치한 평범한 문 하나.
저 문 너머에 진짜 ‘신의 그릇’이 있는 것일까?
내가 문을 살펴보는 사이, 내 품속에서 꼼지락거리며 튀어나온 어머니의 손은 순식간에 소녀의 형태로 변신을 끝마쳤다.
‘살해?’
어머니는 발끝을 세우고 내 두 뺨을 이리저리 조물대시더니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됐다며 몸 상태가 괜찮은 게 맞냐고 물어오셨다.
“몸은 괜찮습니다. 계속 더 괜찮아지고 있고요. 펄리.”
“응? 왜?”
“그런데 이 문, 여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까?”
내 물음에 펄리는 눈앞의 문을 힐긋 보더니 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딱 봐도 안 잠겨 있는 거 같은데? 일단 내가 한 번 열어볼게!”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를 빼꼼 바라보았다.
왜 쳐다보는 거지?
내가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자 펄리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꺼냈다.
“혹시 호를루랑 싸울 때 내가 안 도와줘서 서운한 건 아니지?”
그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펄리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긴 했지. 뭐, 있었다고 해도 금인족인데다 독까지 써대는 호를루의 특성상 펄리의 전투방식과는 상성이 좋지 않아서 큰 도움을 받진 못했겠지만.
“딱히 안 서운합니다. 애초에 제가 싸우는 틈을 타서 이곳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은 게 아닙니까?”
“아닌데?”
“…예?”
자그마한 당황. 그 후 펄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태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로 향하는 통로는 호를루가 죽으니까 벽을 덮고 있던 금속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저절로 드러난 거야! 내가 찾아낸 게 아니고! 나는 그냥 숨어있다가 쓰러진 너만 살짝 챙겨서 온 거지! 응응!”
‘살해.’
펄리 말이 맞다는 어머니의 증언. 어머니는 얄밉게 숨어있다가 다 끝나고 나타나는 꼴이 참으로 눈꼴 시렸다며 작게 덧붙이셨다.
“대체 굳이 지금 그 사실을 밝히는 이유가 뭡니까?”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지금의 ‘나’는 평소처럼 너무 위험을 감수하면 안 되거든! 그래서 솔직하게 미리 말한 거야. 마르낙, 네 성격상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두면 혹시나 조금 뒤에 내가 진짜로 무방비해지더라도 뒤통수를 치진 않을 테니까! 히히!”
‘살해살해.’
정 네가 힘들면 내가 대신 살짝 뒤통수를 쳐주겠다는 어머니의 속삭임. 나는 어머니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드리곤 쓰게 웃었다.
“배신 안 할 테니 일단 문부터 여시죠. 이곳 일을 얼른 처리하고 제 동료들을 도우러 가고 싶습니다.”
펄리는 보랏빛 두 눈으로 나를 빤히 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럼 약속한 거다?”
“예.”
‘살해.’
어머니는 품속의 총을 만지작거리시며 ‘말로 하는 약속은 더없이 가볍지’라고 중얼거리셨다. 나는 뒤통수칠 생각으로 누구보다 가득한 어머니를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말로는 저렇게 하셔도 어머니는 나름 펄리에게 제법 정이 든 모양이라 펄리가 먼저 우리 뒤통수를 치지 않는 이상, 먼저 배신하실 일을 없을 게 분명했다.
“이제 열어볼게! 짜잔!”
펄리가 손잡이를 붙잡고 문을 밀자, 우릴 가로막고 있던 평범한 문은 여태까지 우리가 지나온 그 어떤 문보다도 부드럽게 열렸다.
문 끌리는 소리조차 없이 열린 문 너머로 우리를 반기는 건 온통 새빨간 공간이었다.
정말이지 새빨갛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공간.
자그마한 강당 정도의 크기인 공간의 천장과 벽면, 바닥에는 난생 처음 보는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온통 붉은 가운데 드물게 보이는 검은색들로 미뤄보아 온통 붉은색뿐인 이 공간의 본래 색은 붉은색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선홍색 액체들이 끊임없이 기이한 문양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 공간의 중심을 향하여.
훅하고 풍겨오는 진득한 피 냄새. 저 붉은 액체는 인간의 피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진한 혈향을 품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천장의 문양을 따라 흐르는 붉은 액체들이었다. 액체들은 중력을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기이한 문양만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 진한 혈향에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온통 붉어서 뭐가 뭔지 잘 구별이 되질 않는군요.”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반응이 나올 거야. 혹시 모르니까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펄리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진득한 붉은 액체들로 가득한 공간으로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성큼 걸어 들어가자 붉은 공간이 작게 요동치더니 그 중심부에서 무언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붉은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자그마한 강당 크기의 공간 중심으로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내 공간의 중심에 도착한 우리는 방금 솟아난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혼자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고깃덩어리였다. 족히 사람 하나는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고깃덩어리.
고깃덩어리는 끊임없이 꿈틀대며 쉴 새 없이 흘러들어오는 붉은 액체들을 흡수하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 커다란 고깃덩어리의 정체가 바로 우리가 찾던 ‘신의 그릇’임을 깨달았다.
“이게 바로 리베라티오가 그토록 열심히 만든 신의 그릇이군요.”
펄리는 커다란 고깃덩어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꿈틀대는 고깃덩어리를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귀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내게 대답했다.
“맞아. 이게 바로 ‘신의 그릇’이야.”
솔직히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적어도 신을 담을 그릇이라길래 철저하게 잘 빗어진 인간의 육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완성된 무언가일 줄 알았는데.
이런 식의 완전히 미완성된 고깃덩어리였을 줄이야.
나는 신의 그릇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곤 바닥에 흐르는 붉은 액체들을 이리저리 찰팍찰팍 밟아대며 노시는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주변에서 어머니의 신성이 봉인된 성물의 기운이 느껴지십니까?”
당연히 여기 있으리라 믿은 성물의 기운이 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물음에 어머니도 두 눈을 꼭 감고 잠깐 집중하시더니 고개를 갸웃하셨다.
‘살해…?’
전혀 안 느껴진다는 한마디.
어머니의 성물이 여기 없으면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는 거나 다름없는데. 심하게 말하자면 여태까지 한 고생이 전부 헛수고인 셈이었다.
“펄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잠깐 기다려봐! 내가 해결해볼 테니까! 아무래도 이 안에 있어서 너희가 못 느끼는 거 같거든?”
펄리는 냉큼 손을 쭉 뻗더니 그대로 커다란 고깃덩어리 속에 그대로 팔을 쑤셔 박고는 이리저리 휘저어댔다.
“흐음. 이건가?”
그녀가 이내 쑥 팔을 뽑아내자 펄리의 손아귀에서 강렬한 어머니의 신성이 느껴졌다.
‘살해!’
바로 저거라는 외침. 펄리가 커다란 고깃덩어리 속에서 꺼낸 건 말라비틀어진 심장 모양의 조각이었다.
그녀가 고깃덩어리 속에서 심장 모양의 성물을 꺼내자 붉은 액체들이 고깃덩어리로 흘러가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어머니의 성물을 매개로 그릇의 완성을 촉진 시키고 있었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어머니의 신성이 그릇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였던가.
“자, 얼른 받아! 받아! 나 더는 못 들고 있을 거 같거든!”
펄리에게서 심장 모양의 성물을 받아들자 그녀가 말한 ‘더는 못 들고 있을 것 같다’는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까?”
신의 그릇에 집어넣었던 펄리의 팔은 점점 제 형태가 무너지더니 이내 바닥에 흐르는 붉은 액체들과 비슷한 액체 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렸다. 졸지에 외팔이가 되어버린 펄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내게 대꾸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야 별거 아닌걸! 그나저나 그게 너희가 찾던 물건이 맞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행이네. 혹시나 너희가 찾던 성물이 그게 아니면 어쩌는가 했거든! 히히.”
나는 힐긋 신의 그릇을 바라본 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펄리가 찾던 신의 그릇이 완전하지 않게 되는 거 아닙니까?”
펄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애초에 ‘신’을 담으려고 했으니까 너희가 찾던 성물까지 필요했던 거야! 나같은 필멸자 하나를 담는 데는 지금 저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거든? 나는 지금 이 상황에 네 생각보다 훨씬 만족하고 있어!”
그녀는 제 몸보다 커다란 신의 그릇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내게 물어왔다.
“이거 나 혼자 쓰기엔 조금 커 보이는데 마르낙 너도 조금 쓸래?”
“쓴다니요?”
“말하자면 복잡한데 쓰겠다면 내가 조금 나눠줄게!”
“흠.”
뭐가 뭔지 몰라도 리베라티오가 그렇게 공들여 만든 물건이라면 일단 써보는 게 낫지 않을까?
‘살해!’
내가 고개를 끄덕여 펄리에게 알겠다고 답하기도 전에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어머니가 내 앞에 불쑥 튀어나오더니 세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셨다.
딱 봐도 하지 말라고 말리는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살해살해.’
그냥 그러면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대답. 합리적인 이유 따윈 하나도 없었지만,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펄리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안 쓰는 편이 나을 거 같군요.”
펄리는 나와 어머니를 번갈아 보더니 대뜸 어머니에게 물었다.
“나도 저거 쓰면 안 돼?”
‘살해!’
어머니는 피식 웃더니 너는 쓰던지 말든지 너 알아서 하라며 짧게 대꾸하셨다. 당연히 펄리는 못 알아듣는 대답이었기에 나는 어머니의 말을 그녀에게 전달해주었다.
“마음대로 하시랍니다.”
“그래? 나는 상관없구나? 그럼 됐어!”
그녀는 하나 남은 팔을 빙빙 돌리더니 깊게 심호흡했다. ‘후’하고 숨을 뱉어낸 펄리의 진한 보랏빛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럼 내가 저 그릇을 쓰게 조금 도와줄래? 마르낙?”
“그러죠.”
“이리와.”
펄리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네가 호를루랑 싸울 때 내가 못 도와준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사실 대충 짐작은 갑니다.”
“그래?”
“그 몸, 펄리의 진짜 몸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지금 나와 함께 여기 온 펄리의 저 몸이 바로 그녀의 본체이기 때문이겠지. 여태까지 펄리가 자신의 몸을 막 굴릴 수 있었던 건 그 몸들이 진짜 그녀의 몸이 아니라 진짜에 한없이 가까운 인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신의 그릇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이 정도 규모의 일이라면 그녀의 본체가 올 확률이 높다는 건 사실 무척이나 쉬운 추리였다.
“아닌데? 이거 인형이야.”
“예?”
보기 좋게 빗나갔나. 펄리는 킥킥 웃어대더니 불쑥 거리를 좁혔다.
“사실 잘 맞췄어. 물론, 이 몸이 인형이란 것도 맞는 이야기지만!”
그녀는 단숨에 몸에 달라붙는 새하얀 옷을 가슴팍까지 찢었다. 펄리의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어머니가 질겁해서 소리쳤다.
‘살해!!!’
당장 옷 여미라는 격렬한 경고. 펄리는 길길이 날뛰는 어머니를 태연히 무시하고는 하나 남은 손의 검지를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곤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내 ‘본체’를 인형 속에 담아 온 거야. 내 본체는 자유롭게 움직이기엔 아주 살짝 힘든 상태거든!”
새하얀 손가락이 이마에서부터 수직으로 직선을 죽 그어 내리자 펄리의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금이 천천히 갈라지며 그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 인형과 별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진한 보랏빛 눈.
다만, 인형과 똑 닮은 그 모습은 겨우 얼굴의 사분지 일밖에 되지 않았다. 멀쩡한 왼쪽 눈 주변을 제외하면 그녀의 상태는 살아있는 것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의 상태였다.
왼쪽 이마 일부와 눈 주변을 제외한 펄리의 얼굴은 지독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원래 모습을 감히 유추하기조차 힘들었다.
초점 없이 탁한 오른쪽 눈과 얼굴에서부터 이어진 심한 화상 자국은 그녀의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마르낙, 내 몸 좀 받아줄래?”
여태까지 인형으로 내던 청명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긁어내는 듯한 탁한 목소리.
완전히 인형을 벗어던지고 내게 안긴 펄리의 몸은 나체였지만 성적인 무언가와는 한참 먼 몸뚱이였다.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녀의 진짜 몸은 전신에 진한 화상 자국으로 가득한 데다 사지마저 없었다.
내가 정말 몸뿐인 그녀를 안아 들고 멍하니 있자 펄리는 화상 탓에 잘 안 움직이는 입가를 움직여 억지로 미소를 그려냈다.
“왜? 너무 야해서 흥분돼?”
나는 잠깐 침묵하다 이내 빙그레 웃었다.
“조금 많이 야하긴 하군요. 옷이라도 좀 챙겨입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펄리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킥킥대고는 자그맣게 대답했다.
“아직은 덮치면 안 돼.”
그러곤 작게 덧붙였다.
“아직은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