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53)
353
협공.
시스테르나의 설명을 대충 요약하자면 네마드의 권능 발현의 형태는 이러했다.
1. 둥둥 떠다니고 있는 얼음 몽둥이. –매우 단단하고 설령 손상을 입어도 끊임없이 재생해서 파괴가 불가능함. 물리적 공격을 위한 수단.
2. 네마드 주변을 맴도는 얇은 얼음막 네 개. – 고속으로 움직이며 물리적 충격을 방어하며 특정 대상이 얼음막에 직접 접촉할 경우 대상에게 모든 것이 붕괴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냉기를 심음.
3. 신체를 중심으로 그 의지를 따라 퍼져 나오는 냉기 – 네마드의 육신을 중심축으로 삼아 흘러나오는 냉기가 주변의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함. 대신, 신체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냉기의 영향이 약해지기는 함.
4. 본인의 육체와는 관계없이 광범위하게 흩뿌리는 냉기 – 현재 수도 전체를 뒤덮고 있는 눈이 바로 이 네 번째 권능의 발현 형태라고 함.
특히나 어이가 없는 점은 지금 네마드가 눈앞에서 내보이고 있는 앞선 세 가지 권능 모두 수도 전체에 쓸데없이 냉기를 흩뿌리고 있는 탓에 한 단계 약해져 있는 상태라는 것.
시스테르나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빠르게 말을 마저 내뱉었다.
“근데 저 미친 녀석은 아마도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남제국민들이 모조리 죽기 전까진 수도 전역을 뒤덮은 네 번째 권능을 해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혹시라도 제 목숨이 위험해지면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는 네 번째 권능을 거두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르낙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뭘 믿고 그리 확신해?”
“…여자의 감?”
“대책 없는 믿음이네.”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마르낙은 내심으로 어느 정도 시스테르나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저 초탈한 분위기의 사내에겐 본인의 목숨도 그리 소중하지 않은 듯했기에.
마르낙은 절망을 다잡았다. 흩날리는 눈들 때문에 체온이 점점 떨어져 내렸다. 그렇기에 한바탕 움직여 몸을 다시 데울 필요가 있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쟤에 대해 잘 알아? 꼭 죽일 계획이라도 짰던 것처럼?”
모랫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시스테르나가 씨익 웃었다.
“원래 다들 살면서 주변 사람들을 나라면 어떻게 공략해서 죽일지 한 번씩 고민해보잖아? 그런 지극히 당연한 이유지.”
네마드를 죽이고 나면 반드시 이 여자한테 배신당하기 전에 먼저 배신해서 죽인다. 마르낙은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죽일 생각인데? 계획이 있을 거 아냐? 평소에 공략해서 죽일 계획을 짜뒀다며.”
시스테르나의 볼이 살짝 붉게 달아오른다. 그녀는 마치 고백하기 직전의 여중생처럼 반짝이는 두 눈으로 마르낙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선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내 권능이랑 쟤 권능이랑 상성이 그리 좋진 않더라고.”
저 공방일체의 권능이랑 상성이 좋은 권능은 애초에 존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의 부패의 권능 또한 저 지독한 냉기랑 상성이 안 좋은 것은 마찬가지. 저 지독한 냉기투성이 사내가 과연 쉽게 썩어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마르낙은 조용히 눈빛으로 시스테르나를 재촉했다. 빨리빨리 말해보라는 듯이. 시스테르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내 권능으로 쟤 발밑을 수렁으로 만들 계획이야. 당연히 권능으로 만들어진 수렁이니만큼 저 녀석의 냉기에도 쉽게 얼어붙지 않아. 그러면 당연히 저 녀석에게 뭐가 필요하겠어?”
“…발판?”
시스테르나는 기특하다는 듯이 마르낙을 쳐다보았다.
“맞아! 그럼 저 녀석은 대지 대신 자신의 발판이 되어줄 것을 찾겠지? 쟤 권능 중에 얼음의 막이 바로 그 발판이 되어줄 거야! 아마 그러면 적어도 저 얼음 막 넷 중 둘은 내가 묶을 수 있겠지!”
“둘?”
저 얇은 얼음 막을 굳이 두 개까지 쓸 필요가 있는가 하는 당연한 의문이 마르낙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냥 하나에 올라타고 세 개는 방어하는 데 쓰는 거 아냐?”
“전에 보니까 허공에 발판을 밟고 날아다닐 땐 발 하나에 하나씩 쓰더라고,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게 편한가 봐.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겠지 싶어.”
계획이라고 말하는 게 뭔가 말하는 분위기만 체계적이지 그 근거들이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계획의 근거가 되는 부분들이 대부분 ‘아마 그렇겠지?’의 영역에서 멈춰져 있는 상황.
마르낙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찌 된 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시스테르나의 저 상기된 얼굴이 점점 더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딱히 자신에게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게 아니라서 이 멍청하기 그지없는 계획이라도 한 번 따라봐야 한다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내게 좀 더 다양한 권능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기껏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역시나 신의 사도를 공략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신은 반드시 사도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사리들을 모아야 함에도.
문득 그냥 지금 신나서 재잘대고 있는 시스테르나를 기습해서 죽인 다음, 그녀의 사리만 취하는 건 어떨까 하는 지극히 사악한 생각이 마르낙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악마적인 발상을 떠올림과 동시에 새하얀 붕대투성이 사내가 시야의 한구석에서 나타나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마르낙은 또 갑자기 튀어나온 상투스의 모습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마르낙은 자신의 천재적이고도 악마적인 발상을 곱게 접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계획의 결론은 이거지? 네 권능으로 두 개의 얼음 발판을 못 쓰게 만든다. 그다음에 우리 둘이 알아서 잘 저 얼음 몽둥이와 나머지 두 개의 얼음 막을 돌파한 다음 네마드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이거 맞아?”
“응! 정확하게 이해했네!”
활짝 웃는 시스테르나를 쳐다보는 마르낙의 시선이 더없이 차갑게 식었다.
‘그래, 얘한테 크게 기대한 내 잘못이지. 생각해보면 얘도 무투파 쪽인 거 같은데 머리가 좀 멍청하면 어때. 일단 부딪혀보는 수밖에.’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볼게. 네마드의 신체를 중심으로 퍼져 나오는 냉기는 어쩔 셈이야?”
“아, 그거? 그거는 이거에 맡겨야지.”
시스테르나는 자신의 등 뒤에 떠올라있는 모랫빛 헤일로를 가리켰다.
“사도화를 하면 특히 저렇게 무작위적으로 뿌리는 상대의 권능에 대해 어느 정도 저항이 생기니까 빠르게 치고 빠지면 괜찮을 거야. 너도 사도니까 할 수 있잖아. 사도화. 안 그래?”
반쯤 망가진 사도화를 사용하면 그때부턴 퇴로가 없어지는데. 마르낙 잠깐 고민하다 이내 진짜로 모든 고민을 접었다.
‘각이 나오면 쓰면 되겠지. 그땐 필살의 한방이 필요할 테니.’
“좋아. 알아서 잘해보자는 게 골자인 계획을 어디 한번 제대로 잘해보자고.”
“그래!”
그렇게 둘이 네마드의 앞에서 뻔뻔하게 계획을 짜는 동안에도 새하얀 사도는 그저 무심히 피 튀기는 괴물과 병사들의 전장만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스테르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손으로 살짝 부비고는 마르낙을 향해 한쪽 주먹을 내밀었다. 마르낙은 내민 주먹을 힐긋 쳐다보고는 이내 아무런 반응 없이 네마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랫빛 눈동자에 자그마한 불만이 차올랐다. 시스테르나는 마르낙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왜? 파이팅하고 시작해야 작전의 성공 확률도 올라가고 그러지.”
“뭐래. 네마드만 죽이고 나면 다음은 너야. 여기서 쓸데없이 더 친해지고 싶지 않거든? 나중에 목 칠 때 미안해지니까.”
굳이 해줄 필요 없는 경고. 마르낙은 제 입으로 떠들면서도 자신이 왜 이러는가 싶었다. 아직도 시야 한구석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투스 때문일까.
잘게 부스러진 눈들이 콧등 위로 내려앉는다. 폐에서부터 뻗어 나온 데워진 숨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하얗게 맺힌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절망의 감촉. 그 부서지지 않는 검을 느끼며 마르낙은 고요히 네마드를 쳐다보았다.
네마드의 푸른 눈과 마르낙의 새카만 눈이 서로 허공에서 뒤얽힌다. 네마드의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부질없는 짓이다.”
빙글. 절망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가볍게 손목을 푼 마르낙이 씨익 웃었다.
“한칼만 제대로 먹이면 넌 죽어. 그러니 재주껏 피해 보라고. 가자!”
“응!”
시스테르나의 헤일로가 찬란한 빛을 내뿜자 퍼져나가는 강렬한 신성과 함께 네마드의 발밑 일대가 끝없는 수렁으로 변했다. 물렁한 수렁이 네마드의 발을 붙잡고 늘어진다.
하얀 신발을 신은 발이 대지를 가볍게 두드리자 울렁이는 바닥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꿈틀대는 그 수렁의 권능은 얼어붙은 대지마저 다시금 집어삼키고자 퍼져나가는 냉기에 격렬하게 반항했다.
하늘빛 눈이 무심히 바닥을 내려보았다. 네마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얼음막 중 두 개를 불러 한 발에 하나씩 디디고 서서 공중으로 낮게 떠올랐다.
지극히 허술해 보이는 계획이라 생각했는데, 시스테르나가 말한 대로 딱딱 흘러가는 상황에 마르낙은 조금 감탄했다. 왠지 모르게 시스테르나의 웃는 얼굴이 아까보단 조금 덜 멍청해 보였다.
시스테르나는 고개를 돌려 마르낙의 눈을 쳐다보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외쳤다.
“가자! ‘잘’ 해보자고!”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간다. 마르낙은 처음부터 부패의 문을 한계까지 발동해 육체를 강화하고서 그 뒤를 쫓아 튀어 나갔다.
두 사도가 하나의 사도를 향해 질주한다. 네마드의 주변을 떠다니는 얼음의 몽둥이가 그에 반응해 허공을 찢으며 시스테르나를 향해 몰아친다.
시선이 교차한다. 마르낙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음에도 시스테르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르낙 쪽으로 힘껏 뛰었다.
교차하며 자리가 바뀌고 마르낙은 움직이는 폭력 그 자체인 얼음 몽둥이를 향해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베어낸다? 베어낼 수는 있었다. 다만, 베어낸다면 깃든 힘이 전혀 소모되지 않은 두 조각난 몽둥이가 있는 힘껏 자신의 몸을 뭉개버린다는 결과만이 기다릴 뿐. 거기에 피해 봤자 허공을 날아다니는 몽둥이가 따라붙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빗겨 흘려내며 얼음몽둥이의 움직임을 최대한 지연시킨 다음 다시 따라붙기 전에 네마드를 베어낸다.
결론이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계까지 증폭된 몸뚱이가 반응했다. 전신을 뒤덮은 부패의 문이 여느 때보다 환한 빛과 함께 신성을 내뱉었다.
푸른 검날과 얼어붙은 거대한 몽둥이의 거친 표면이 스치듯이 닿는다. 마르낙은 그동안 깎아온 모든 검술의 정수를 담아 정교하게 절망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맞닿은 검면과 얼음의 표면이 딱 달라붙었다. 검면이 마치 두꺼운 몽둥이와 한 몸이 되기라도 한 듯 검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얼음 몽둥이의 궤적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극한에 다다른 달인의 기예. 어느새 얼음 몽둥이는 그저 허공을 한번 가르고는 제 원래 목표를 잃어버린 뒤였다.
마르낙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만들어낸 틈을 파고들고서 시스테르나와 동시에 네마드를 향해 닥쳐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두 개의 얼음 막이 빠르게 움직여 각각 시스테르나와 마르낙의 공격을 막아선다.
시스테르나의 은빛 검이 얼음막과 닿으려는 순간, 시스테르나의 헤일로가 반짝이고는 그녀의 몸 전체가 물컹한 바닥 속으로 쑤욱 꺼지며 사라졌다.
마르낙은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그저 눈앞의 얼음막을 향해 절망을 휘둘렀다.
쩌엉!
달인의 검이 얼음의 막을 쪼갰다. 그러나 그 막에 닿은 절망의 검신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끈적한 저주의 냉기가 마르낙의 몸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갔다.
툭.
마르낙은 기다렸다는 듯이 절망을 놓았다. 완전히 얼어붙은 절망이 쩌엉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나뒹군다.
네마드는 새카만 두 눈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것을 보았다. 제 무기까지 놓아버린 사도의 입가로 아주 진한 미소가 걸린다.
하늘색 눈동자와 새카만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강렬한 신성과 함께 마르낙의 손아귀에서 새로운 권능이 순식간에 자라난다.
제 주인마저 썩게 만들어 집어삼키는 부패의 검.
마르낙은 새롭게 자라난 ‘검’을 쥐고서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적을 베었다.
두 사도가 서로 교차하고 붉은 피와 함께 새하얀 팔 한 짝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베는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새하얀 사도의 팔은 순식간에 썩어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백지 같던 네마드의 새하얀 이마가 작게 일그러진다. 마르낙은 잽싸게 부패의 검을 바닥으로 내던지고는 썩어서 역류한 내장을 내뱉었다.
“퉤.”
마르낙은 산 채로 썩어들어가는 고통을 인내하며 입가로 일그러진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는 이젠 팔 한 짝을 잃어버린 ‘눌어붙은 얼음’의 사도를 향해 말했다.
“너도 급하면 피하긴 하는구나? 거 되게 웃기네. 안 피했으면 아주 예쁘게 반 토막 냈는데 말이지.”
“…인정하지.”
짧은 한마디. 어느새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네마드가 자신의 잘려 나간 팔의 단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어깨부터 얼음으로 된 새로운 팔이 자라나 그 빈자리를 메꿨다.
“내가 너를 너무 과소평가…”
“기스으으읍!!!”
물렁한 땅에서 시스테르나가 총알처럼 튀어나와 은빛 검을 휘둘렀다. 네마드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팔을 움직여 시스테르나의 검을 쳐냈다. 시스테르나는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훌쩍 뛰어 마르낙의 옆에 가볍게 착지하며 외쳤다.
“…실패!”
마르낙이 무척이나 뻔뻔하게 자신의 옆에 선 시스테르나를 지그시 쳐다보자 그녀는 마르낙을 향해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실패했네. 아까워라.”
선택.
호흡기를 타고서 침투한 냉기에 목이 바싹 메마른다. 목을 타고서 지나다니는 공기의 감촉마저 아릿하게 느껴진다. 네마드에게 잠깐 근접했다 물러났을 뿐인데도 몸의 이곳저곳에서 그 냉기는 몸으로 감당해낼 것이 아니라는 듯이 자그마한 비명을 질러댔다.
헤일로에서 흘러나온 신성이 차갑게 식어가는 시스테르나의 몸을 감쌌다. 냉기가 한결 가시자 시스테르나는 그제야 깊은숨을 토해냈다.
장난스러운 척, 아무것도 아닌 척 기습을 하긴 했지만 정말 방금의 기습이 장난인 건 아니었다.
네마드에게 새롭게 돋아난 저 얼음 팔. 저 신성을 풀풀 풍겨대는 팔에 어떤 특별한 기능이 있는지 살짝 떠보려고 날린 가벼운 수였다.
헤실대고 있는 입가와는 달리 얼음덩어리 팔을 보는 시스테르나의 모랫빛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얼음 팔의 반응속도는 원래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팔일 때랑 큰 차이가 없나. 물론, 저 정도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 이상 최소한 접촉할 경우 상대를 붕괴시키는 냉기 정도는 심을 수 있다고 보는 게 맞겠네. 잡히면 죽겠어.’
쉽지 않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시스테르나는 저 멀리 얼어붙은 채 나뒹굴고 있는 푸른 검을 힐긋 쳐다보고선 마르낙을 향해 말했다.
“검 없이 괜찮아?”
마르낙은 살짝 숨을 내뱉고서 잠깐의 간격을 두고서 대답햇다.
“…괜찮아. 근데 저 얼음팔은 어쩔 거야? 저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미안미안. 저 녀석 팔 잘라본 게 이게 처음이라.”
마르낙의 오른 팔목에서부터 뻗어 나온 새카만 금속의 실들이 마르낙의 전신을 뒤덮었다. 검은색 금속 실들은 마르낙의 몸을 뒤덮기 무섭게 새카만 갑옷의 형태를 갖추더니 이내 마르낙의 얼굴마저 뒤덮었다.
철컥.
금속음과 함께 오른 팔목에서 튀어나온 톱니 달린 검을 붙잡는다. 마르낙의 손에 닿기 무섭게 도살자는 언제나처럼 제 주인을 위해 울부짖었다.
왜애애애애애애앵!!!
눈구멍조차 없이 얼굴을 뒤덮은 투구 위로 새겨진 문양들이 옅은 빛을 토해낸다.
시스테르나는 검은 갑주를 입은 마르낙을 조금 멍청한 눈빛으로 쳐다보고서 말했다.
“되게 멋진 거 가지고 있네…?”
“온다.”
공기를 찢는 소리. 그러나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폭력 덩어리 몽둥이는 소리보다 빠르게 둘이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콰앙!!!
둘의 몸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가고 빗나간 얼음 몽둥이와 충돌한 대지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여태 너희를 얕본 것을 인정한다던 네마드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얼음 몽둥이는 아까보다 더욱 빠르고 강하게 둘을 압박해왔다.
저 신기한 갑옷을 껴입은 마르낙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저 몽둥이에 한 대라도 맞으면 진짜 죽는다. 동공이 벌어지고 근육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비명을 지른다. 시스테르나는 뇌 끝까지 저릿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기척에 환히 웃었다.
‘재밌어. 좀 더 본격적으로 움직여볼까.’
탁.
모랫빛 헤일로에서 흘러나오는 신성이 권능이 되어 그녀의 발 근처를 부드럽게 감싼다. 그녀의 두 발이 수렁이 된 대지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다리를 움직이는 동작마저 생략된 채 시스테르나의 육체가 스케이트를 타듯 미끄러지며 고속으로 대지 위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더욱. 더욱 빠르게.’
애초에 자신이 네마드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자신의 역할이란 네마드의 주위를 날파리처럼 맴돌면서 나는 언제고 충분히 네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것 정도. 그렇기에 자신의 공격은 네마드에게 적중해선 안 됐다.
한 대라도 정타로 네마드에게 들어가는 순간, 네마드는 알아채 버릴 게 분명했다. 이런 공격 따윈 얼마든지 맞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들을 온몸으로 얻어맞으며 고속으로 미끄러져 간다. 얼음 몽둥이는 기본적으로 조금 전 자신의 팔을 잘라낸 마르낙의 견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견제의 시선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끌어온다. 그럼 그 공백의 시간 속에서 생긴 빈틈을 마르낙이 분명 찌르고 들어올 것이다.
‘간다.’
결심과 동시에 시스테르나는 필요 이상으로 헤일로에서 신성을 뿜어내며 제 위협을 과장한 채 네마드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은빛 검을 내뻗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며 얼음의 사도와의 거리를 좁힌다.
‘나를 봐! 나를 보라고!’
마르낙을 비추던 네마드의 하늘빛 눈동자가 움직인다. 시스테르나는 그 서늘한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까보다 더욱 강렬한 죽음을 느꼈다.
짜릿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그녀가 대지 위를 미끄러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빨라진다.
네마드. 너는 과연 이 찰나를 붙잡을 수 있을까?
뒤늦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얼음막을 반 발짝 빠르게 지나친다. 은빛 검이 반짝이고, 시스테르나는 한줄기의 선이 되어 네마드에게로 내리꽂혔다.
얼음으로 된 손아귀가 시스테르나를 가리킨다.
쾅!!!
왜애애애애앵!!!
두 소음이 교차한다. 튕겨 나간 시스테르나의 몸뚱이가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구르고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피투성이가 된 몸. 머리 쪽 피부가 조금 찢어졌는지 이마를 타고 흘러 내려오는 피 때문에 시야가 붉었다. 그러나 시야를 가리는 피보다도 진탕이 되어버린 뇌 때문에 초점이 잡히질 않았다.
몇 번 눈을 끔벅이며 상태를 회복하자 시스테르나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마르낙을 쳐다보았다.
‘왜…?’
분명 얼음몽둥이의 시선은 제대로 끌었을텐데. 자신에게 대응하기 위해 네마드의 얼음몽둥이는 마르낙에게서 떨어져 이쪽으로 왔었다.
자신의 찰나를 더없이 밝게 불사르며 만들어낸 빈틈. 그 빈틈을 파고들어 네마드를 썰어버려야 했을 마르낙. 분명 그랬어야만 했는데.
자신이 돌진한 속도 그대로 얼음몽둥이와 부딪혀 곤죽이 되더라도 그랬어야만 했다.
의문은 이내 선명한 짜증이 되어 시스테르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등신 같은 새끼가 왜 날 구해!!!”
마르낙은 온전히 공격에 집중하는 대신 자신의 이동 경로에 얼음몽둥이보다 반 발짝 먼저 끼어들어서는 그대로 자신을 어깨로 밀치며 네마드를 공격했다.
어중간한 공격. 어중간한 구원.
덕분에 얼음몽둥이에 직격하지 않고 스치듯 얻어맞아 살았지만, 마르낙의 되다만 공격 또한 네마드를 제대로 베어내지 못했다.
까가가가가갉!!!
얼음으로된 네마드의 왼팔에 붙잡힌 도살자가 발버둥 친다. 마르낙은 무심한 눈으로 시스테르나를 힐긋 보곤 기계적으로 초근거리에 근접한 네마드의 얼굴을 향해 한쪽 주먹을 내밀었다.
철컥.
튀어나오는 네 개의 포구가 빛을 내뿜는다. 네발의 마력포가 네마드의 얼굴을 후려갈긴다.
사실, 시스테르나의 말이 맞았다. 온전히 공격에만 집중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좋은 상황이었겠지.
그러나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희생을 감수한 채 돌진하는 시스테르나를 보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서 반응해 구해버렸다.
순간, 자신을 위해 희생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서일까.
더는. 더는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살아남고, 승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비록 곧 직접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인간이라도.
마력포의 섬광이 가시고 마력포의 포구와 네마드의 얼굴 사이로 끼어들어선 얇은 얼음막이 보였다.
툭.
지극히 가벼운 맞닿음. 포구와 얼음의 막이 툭 하니 부딪히자 갑옷째로 팔이 얼어붙어 오기 시작한다. 이모탈리움으로 이루어진 갑옷은 부서지지 않을지라도, 저 치명적인 신성이 담긴 냉기로 인해 얼어버린다면 아무리 이 몸뚱이라도 죽어버리고 만다.
툭.
다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함과 동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소리. 또 하나의 얼음막이 이미 자신의 뒤에 와있었다.
등을 시작점으로 몸이 얼어붙는다.
퇴로는 이미 막혔다. 그렇다면 여기서 승부수를 띄우는 수밖에. 마르낙은 네마드의 손에 틀어막힌 도살자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왜애애애애애애앵!!!
제 주인의 위기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이 도살자가 울부짖는다. 한계까지 활성화된 부패의 문이 신체를 증폭했다.
더 얼어붙기 전에 저 얼음 손째로 베어낸다.
까가가가갉!!!
회전하는 톱날이 얼음을 부스러뜨리며 파고들자, 갉아낸 만큼 얼음으로 이루어진 팔이 고속으로 재생한다.
느리다. 너무나도 느리다.
도살자가 파고들고 있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네마드를 반토막 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갑옷째로 얼음 동상이 되고 만다.
도살자를 놓고, 부패의 검을 쓴다? 아니. 애초에 이 기묘한 대치는 전적으로 네마드가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자신이 부패의 검을 사용하기 위해 도살자를 손에서 놓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뒤에 떠 있는 얼음몽둥이가 이 몸을 후려치겠지.
네마드는 혹시 모를 내 한 수를 경계해서 언제라도 그에 대응하기 위해 얼음몽둥이를 여분의 힘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었다.
도살자를 놓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대로 베어내려고 해도 내가 늦어서 죽는다.
역시 나도 모르게 시스테르나를 구한 게 실착이었나? 아니.
연민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 실수였나? 아니.
죄책감을 느낀 것이 실수였나? 아니.
아니,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마르낙의 두 눈에서 암녹빛 정광이 불타오른다. 새카만 투구 뒤에서 마르낙은 웃었다.
“이대로 널 베어내기만 하면 전부 아무것도 아닌 일이잖아?”
마음 벼려낸다. 도살자 대신, 곧 죽어도 절망만을 주로 사용했던 이유.
그래, 사실 아직은 ‘달인’의 힘을 온전한 검 형태가 아닌 도살자에 실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실전에서 도살자를 사용하는 것을 피해 왔다.
왜애애애애애애앵!!!
마음을 다잡는다. 달인의 힘은 마음의 힘. 한계까지 쌓아낸 기예 속에 쌓아온 마음으로 쌓아온 자신의 세계를 담는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달인이 되었는가?
더는. 더는 타의에 의해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 다신 타인에 의해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착에 가까운 소유욕을 살의로 벼려내 검에 담는다.
대지를 디딘 발을 축 삼아 도살자를 쥔 손을 네마드에게로 처박는다.
왜애애애애애앵!!!
시끄러운 비명이 귀를 찢어발기듯 고막을 두드려대고 지독한 살기를 풍기는 도살자가 마침내 얼음으로 된 손아귀를 찢어발겼다.
까가가가가갉!!!
“뒈져라!!!”
얼음으로 된 손아귀가 깨진다. 네마드의 하늘빛 조금 눈이 커지고, 도살자의 맹렬한 이빨이 네마드의 어깻죽지까지 파고든 그때.
쾅!!!
등 뒤에서부터 후려쳐진 육중한 충격과 함께 마르낙의 몸뚱이가 훨훨 날았다.
늦었다. 조금만 더 빠르게 베어냈다면 목째로 뜯어버릴 수 있었는데.
손아귀와 등줄기에서부터 번져가는 냉기가 집요하게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한다. 시야 저 너머, 네마드는 완전히 깨 부서진 자신의 얼음 팔을 멍하니 쳐다보며 작게 감탄했다.
“…대단하군.”
“대단하긴 개뿔.”
마르낙은 빠르게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팔을 파고든 냉기는 팔꿈치 어림까지 번져온 상태. 사실, 진짜 문제는 등줄기를 파고든 냉기였다. 팔이야 잘라낸다지만 등의 척추를 타고 얼어붙은 부분은 잘라내기도 어렵고 정작 잘라낸 그다음이 더 문제였다.
신성으로 입은 상처인지라 재생이 더딜 테니, 척추 없이 싸울 수도 없는 노릇.
‘하.’
객관적으로 보아도 전력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저 얼음의 사도는 지금 당장 정면으로 부딪쳐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저 괴물 같은 사도 놈은 수도 전역에 눈을 뿌려대느라 권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멀쩡한 다리로 비척대며 일어선다.
‘이 정도면 콰르트가 다 챙겨서 이탈했겠지.’
여기서 비루하게 도망쳐도 아마 저 사도는 자신을 쫓지 않겠지. 그저 계속 저 자리에 서서 얼마 남지 않은 남제국 수도의 인간들이 다 죽어 나자빠질 때까지 눈만 뿌려댈 테니.
거의 다 죽어가는 시스테르나만 죽여서 사리를 챙겨가면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저 잡기 힘든 네마드나 시스테르나나 똑같은 사리 하나니까.
와아아아아아아!!!
눈 속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승리의 환호성. 마침내 남제국의 병사들이 치열한 교전 끝에 괴물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듯했다.
그럼 뭐하는가. 어차피 다 저 네마드의 손에 죽을 텐데. 그들이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그래. 부패의 저주를 던지고. 저들의 죽음까지 훔쳐 가서 신성으로 쓴 채로 도망치자.
어머니를 부활시키기 위해선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니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언제나 그랬다. 막을 수도 있을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비정한 척, 잔인한 척,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척 해봐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사소한 것들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어머니는 내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무게 추. 그 저울의 반대편에 무엇이 올라가더라도 내 마음의 저울은 반드시 어머니에게로 기울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어머니가 가장 아껴 마지않는 ‘나’를 상처입힌 데에 대한 응징이다.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나 다친 것을 보면 분명 그 큰 눈망울 가득 눈물을 머금으시고는 진한 분노를 표현하셨겠지.
그래.
이건 누군가를 구해내기 위해서도, 불합리한 학살을 막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오롯이 어머니를 위해서. 내 아픔에 슬퍼하셨을 어머니를 위해서다.
마르낙은 일어서서 멀쩡한 한 손으로 도살자를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듯이.
“도망치지 않겠어.”
마음이 더 없이 가벼워졌다. 몸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쾌했다.
그런데 문득 마르낙은 깨달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조용했다. 승전을 알리는 병사들의 포효도. 쏟아지는 눈들도, 얼어붙어 가는 몸도.
그 모든 것이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시야 한구석에 서 있는 붕대투성이 사내 하나만이 그 정적 속에서 홀로 웃고 있었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