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48
48화
타락할 대로 타락한 왕국의 왕성에 금빛 성력이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타락한 악마와 시체의 악취에 지독하게 잠식되어 있던 왕성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100년 전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왕국이었다. 리즈벨은 로제스에게 피와 광기로 얼룩진 관을 씌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비단 단죄뿐만은 아니었다. 단죄, 그리고 정화.
다행스럽게도 리즈벨에게는 힘이 있었다. 광기에 휩싸인 이 왕국을 제 궤도로 올려놓을 힘이.
달콤한 자유를 맛볼 방법이 꼭 도망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가둔 감옥을 부숴 버리면 된다. 그래서 같이 살아남고 싶다. 더 이상 서로의 죽음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로제스를 살리고 마법사에게로 간다. 그의 새장에 갇히더라도 훗날을 도모하자. 그곳이 어떻든 희망 한 조각 없던 발디마르에서의 유년보다 더할까.
리즈벨은 성력을 인식한 이래 처음으로 제게 이런 힘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게 맞겠지, 오라버니.”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가에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리즈벨은 기껍게 생각했다.
나를 지금껏 살게 해 준 당신에게. 내가 버린 화관 하나도 그냥 두지 못해 바스러질 때까지 보고 또 보았던 다정한 오라버니에게, 가장 빛나는 왕국을.
* * *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아드득.
본성의 가장 꼭대기 탑, 지붕이 날아가 뻥 뚫린 하늘 아래 널브러진 왕에게서 거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대로는…….”
그를 굽어보는 하늘을 피하려는 듯 루시페가 몸뚱이를 버둥거려 그늘 속으로 숨었다. 새파란 안광이 어둑한 공간 안에서 홀로 번뜩였다. 이를 가는 그 순간에도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굳어 가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미 팔다리는 전부 굳어 버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며 전신으로 피를 흘려보냈으나 소용없었다.
장기가 하나둘 움직임을 멈추었다. 혈관이 말라붙어 피가 통하지 않는 하반신은 곧 썩어갈 것이다. 토악질이 올라왔다.
“안 돼. 안 돼. 안 돼.”
루시페는 안간힘을 써 상체를 일으켰다.
“내 딸. 내 아이. 내…….”
쉭쉭, 꼭 뱀처럼 내쉬는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이고르…… 이고, 르…….”
그가 십수 년 전 소환했던 악마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루시페는 이를 악물고 그가 처음 ‘악마’를 소환해 냈을 때를 떠올렸다. 의식의 절차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악마를 유혹할 인간의 시체. 악마의 이름. 그리고 그 자신의 영혼. 악마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고, 영혼 따위야 전부 내어 줄 수 있었다. 살 수만 있다면.
“시체…… 시체가…….”
그런데 시체가 없다. 악마를 유혹할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하며, 광기에 물든 인간의 시체가.
루시페는 핏발 선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죽은 다섯 명의 부인과 일곱 명의 자식들의 시체는 이미 이고르가 전부 먹어 치운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셋이다.
라타에의 마탑주를 곁에 꿴 배은망덕한 딸년은 감히 건들 수도 없었다.
루시페는 제 목에 칼을 겨누던 딸을 떠올리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애를 조각내 먹기만 하면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을 터였다.
“그것을 못 해서, 그것을 못 해서……!”
그러나 당장이 급했다. 당장 경각에 달린 제 심장부터 지켜 내야 했다. 루시페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거듭했다.
아, 그래. 둘째. 둘째 아들이 치명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했다. 루시페의 눈에 일순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으나, 이내 절망적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갈 수가 없다, 그는. 이렇게 굳어 버린 몸을 해서는 아무 곳도 갈 수가 없었다.
마구 짓씹힌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우우……. 루시페는 죽어가는 짐승의 단말마 같은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아버지.”
그 순간, 기적처럼 탑의 석문이 열렸다.
“……!”
루시페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홱 돌아갔다. 짙은 벌꿀빛 머리카락이 휘장 너머로 어른거렸다.
“지…… 칼.”
루시페가 유일하게 이름을 외고 있던 자식이었다. 신탁의 아이로 가장 유력했던 왕자, 지칼이 홱 휘장을 걷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지칼이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인간을 지금껏 두려워했다니.”
그 새카만 뱀이 없는 아버지는 다 죽어가는 범보다도 못했다.
“지칼…… 아들아.”
루시페가 헐떡였다.
“둘째를 데려와.”
“로제스 말씀입니까.”
“그래. 그놈의 시체, 벌써 땅에 묻어 버린 건 아니지?”
루시페의 말은 중간중간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목울대의 움직임이 점점 뻣뻣해지고 있었다. 폭군 루시페의 죽음이 정말로 코앞이었다.
그러나 지칼은 당장 루시페가 죽음을 맞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착실한 아들의 낯을 만들어 냈다.
“데려오지요.”
“……!”
루시페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면 지칼은 음침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신 왕녀를 죽여 주신다면.”
“하, 하하.”
루시페가 짧게 끊어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비이성적으로 흥분하여 아들에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라, 왕자야.”
“…….”
“그년의 살점, 내장,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울 거니까.”
루시페가 더듬거리며 딸의 사지를 어찌 자를 셈인지 지껄였다. 그 잔혹한 말에는 지칼조차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기가 치밀었다.
‘인간도 못 되는 아버지.’
그러나 지칼에게는 루시페가 필요했다. 그의 계획은 딱 한 줄이었다. 리즈벨, 그 건방진 년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라타에의 대마법사를 곁에 끼고 있는 그것을 죽이려면 리즈벨이 가진 성력에 상응하는 정도의 힘이 필요했다. 인간의 능력을 훌쩍 넘어서는……. 그래, 바로 루시페 발디마르가 불러냈던 그 새카만 뱀 같은 존재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를 불러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루시페뿐이었다. 루시페를 내려다보는 지칼의 눈에 살의가 섞였다.
“이대로 죽여 버리고 싶지만…….”
직접 그 위험한 것에 손을 대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으니까.
“가져와, 어서. 시체.”
루시페가 곧 꺼질 듯한 숨으로 쉭쉭거렸다.
“어서!”
“……예.”
하지만 리즈벨, 그 건방진 것을 사로잡는대도 지칼은 아비가 누이를 잡아먹고 숨을 부지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둘 다 죽인다.
지칼의 낯에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본성의 꼭대기 탑을 나서며 후련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안하지만, 사랑하는 리즈벨.”
탑 꼭대기 성벽에서 왕성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지칼은 광적인 폭소를 터뜨렸다.
“계승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 * *
리즈벨은 긴 회랑을 걷고 또 걸었다.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고. 마침내 서쪽 탑 아래 성벽에 다다랐다.
로제스가 가만히 그 자리에 잠들어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막 성벽 아래로 내려온 참이었다.
‘하루.’
마법사와 약속한 유예는 단 하루였다.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검날이 바닥에 궤적을 그렸다. 돌이 쩌적쩌적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황금빛이 넘실거렸다. 리즈벨은 그렇게 서쪽 탑을 한 바퀴 돌았다.
이윽고 탑 주변에 커다란 황금의 원이 완성되었다. 리즈벨은 제 몸을 빠져나가는 성력을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원 안쪽이 금세 금빛 성력으로 가득 찼다. 점점 더 높이, 밀도 있게 차오르다가, 어느 순간 망막을 찌르는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리즈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공간을 휘도는 성력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번쩍 빛난 빛은 차분하게 소용돌이치며 사그라들었다. 원 안쪽으로 점점이 녹아들었다. 100년 만에 선포된 헬라르의 성역이었다.
“……좋네.”
리즈벨은 성역을 둘러보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황금 원 안쪽의 모든 움직임이 감각을 타고 세밀하게 전해졌다. 쥐새끼의 움직임 하나까지 전부 잡아낼 수 있을 듯했다.
사실 원래는 곧바로 본성으로 향할 셈이었다. 이대로 가서 루시페부터 죽이고, 그 머리에서 왕관을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아니지.”
붉은 입술 끝이 서서히 양쪽으로 추켜 올라갔다. 리즈벨은 뇌리를 스친 생각에 냉담하게 웃었다.
“그래, 지칼이 그냥 있을 리가 없지.”
무려 본성 탑 바로 아래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인간이었다.
지칼은 왜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렸나?
왜 ‘그곳’에서. 형제들이 전부 두려워하여 얼씬도 하지 않던 본성 꼭대기 탑 아래에서.
그는 리즈벨에게만 볼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가 노린 것은 처음부터 아버지, 루시페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리즈벨은 왕좌를 향한 열망이 가득 들어차 있던 지칼의 눈을 상기했다.
머리가 돌아간다. 리즈벨은 지칼 발디마르라는 인간을 꽤 잘 알았다. 그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성정이었고, 리즈벨은 타인의 기색을 알아차리는 데 능했으므로.
그러니 어찌 보면 지칼이 어떻게 머리를 굴릴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게 당연했다.
리즈벨은 다시 뒤돌아 그녀 스스로 선포한 성역의 경계를 밟고 안으로 들어섰다. 단죄의 검이 금빛 광휘를 머금고 번뜩였다.
* * *
저벅저벅.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서쪽 탑 아래, 커다란 인영이 어른거렸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큰 보폭으로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쩍 갈라진 바닥의 틈새를 넘는다. 공기가 한순간 흔들린 것도 같았으나 진동은 금세 멎었다.
지칼은 일전에 한 번 향한 적 있던 로제스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텅 빈 복도와 계단에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수십 배로 확장되어 울려 퍼졌다.
‘로제스의 시체.’
물론 쉽게 빼돌릴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리즈벨 그것은 로제스가 제 친오라비인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만, 지칼은 그조차 완전히 믿지 않았다.
로제스 발디마르도 그렇게 시침을 뚝 뗐는데 그년이라고 못 그럴 게 뭔가. 그러니 제 오라비의 시체 주위에 뭔가 수를 써 놓았을 수도 있겠지.
지칼은 방금 막 리즈벨의 동쪽 탑 근처에 사병들을 심어 놓고 오는 길이었다.
불 켜진 창과 탑 전체를 감싸고 넘실거리는 금빛 성력으로 보건대, 오후까지만 해도 서쪽 탑에 틀어박혀 꿈쩍도 하지 않더니 지금은 도로 제 침소로 돌아간 게 분명했다.
지칼은 그녀가 눈치채기 전에 로제스를 빼돌릴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