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49
49화
사방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잔뜩 곤두선 감각에 잡히는 것이라곤 자기 자신의 발소리와 서쪽 탑 아래를 지키는 벨리크의 기사들, 그리고 바로 뒤를 따르는 벨리크 기사단장의 기척뿐이었다.
“와, 왕자님.”
루시페의 명으로 지칼의 뒤를 따르던 벨리크의 단장이 위축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만…….”
“쯧.”
지칼은 짧게 혀를 찼다.
“네가 늘 하던 일이 아니냐? 왕족의 시체를 본성으로 옮기던 것.”
“그렇긴 하오나…….”
남자의 얼굴에는 짙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지칼은 흘끗 시선을 내려 그의 어깻죽지에 친친 감긴 붕대를 보았다. 리즈벨이 인정사정없이 베어 버린 상처라고 했다. 그는 시선을 거두며 픽 비웃었다.
“그 작은 계집애가 힘을 쓰면 얼마나 쓴다고.”
“왕자님…….”
“벨리크의 위상이 땅바닥에 내리꽂힌 게 안타깝군. 왕위에 오르면 네놈들의 기강부터 바로잡아야겠어.”
단장으로부터는 대답이 없었다. 지칼은 그의 한심함에 조소를 보내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로제스의 처소는 탑의 중간층에 있었다. 왕자의 침실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출한 문짝을 앞에 두고, 지칼은 벨리크의 단장의 멱살을 잡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열어.”
“예, 예?”
“열라고.”
그년이 문에다 무슨 짓을 해 놓았을 줄 알고.
지칼은 조금 전까지 그를 겁쟁이라 비웃던 것도 잊고 한 발짝 물러나 그를 쏘아보았다.
“그, 그럼…….”
부들부들 떠는 기사의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열겠……습니다.”
문고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칼은 흡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그것이 하면 뭘 한다고.’
광인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뭣도 모르는 작은 계집애. 분수에 맞지도 않는 힘을 쥐었다 한들 제대로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계승식에서 십 년을 훌쩍 넘게 구른 그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저 열어.”
“예…….”
기사가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문을 마저 열었다.
방 내부가 활짝 드러나자마자, 지칼은 기사를 뒤로 밀치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침대의 캐노피는 반쯤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미처 가려지지 못한 침대 위 누군가의 하반신은 똑똑히 보였다.
그는 거침없이 침대가로 걸음을 옮겨 휙 캐노피를 젖혔다. 죽은 듯 누운 창백한 낯이 눈에 들어왔다.
지칼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로제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가장 큰 적수였던 형제가 형편없는 꼴로 누워 있었다. 그가 가장 증오하는 천한 무희의 배에서 난 왕자.
“너에게 딱 맞는 최후를 선물해 주마.”
그 무희는 아버지의 뱀에게 사지가 뜯겨 죽었다. 오늘, 그 여자의 첫아이 역시 삿된 것에게 흔적도 없이 먹혀 죽을 것이다.
지칼의 얼굴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입매를 기괴하게 비틀며 로제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 커다랗고 무자비한 손아귀가 막 로제스의 멱살을 쥐고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끄륵…….”
그의 어깨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지칼은 흠칫 몸을 굳혔다.
“큭…… 끄흑…….”
사람이 목이 졸려 죽어가는 소리였다.
지칼은 번개같이 그 사실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돌아보려 했다.
“……!”
지칼이 홱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아주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목을 깊숙이 베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검날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언제부터?’
지칼의 푸른 시선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직 광기가 가시지 않은 눈에 인기척도 없이 그의 뒤로 바짝 다가온 이의 얼굴이 담겼다.
눈이 부신 금발과 서릿발 같은 푸른 눈이 보였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
건조하고 스산한 목소리로 리즈벨이 명령했다.
“놔.”
그녀가 이어 뱉은 말은 딱 한 글자였으나 지칼은 등골이 쭈뼛 곤두서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는 이를 갈며 누이를 노려보았다.
“너, 언제 왔…….”
“놔.”
리즈벨은 다시 명령했다. 황금 검이 지칼의 목에 더 바짝 들이밀어 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누이가 싱긋 웃었다.
“오라버니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너무 얕보였던 건지…….”
지칼의 푸른 눈이 급히 그녀의 뒤를 훑었다.
“끄륵…….”
벨리크의 기사단장이 성력의 사슬에 목이 졸린 채 허공에서 버둥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후자라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리즈벨이 상냥하게 말을 맺으며 검을 비틀었다. 그녀의 팔뚝의 두 배가 넘는 묵직한 검이 종잇장처럼 쉽게 비틀렸다. 지칼의 목에 난 칼자국이 더욱 길고 깊어졌다.
“로제스에게서 손 떼. 잘라 버리기 전에.”
냉혹한 경고와 경고를 무시한 대가가 떨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날카롭게 솟구친 금빛이 칼날처럼 지칼의 손목으로 쇄도했다. 아직 로제스의 멱살을 틀어쥔 손이었다.
서걱-.
성력의 궤적은 아주 깔끔하고 정교했다. 우드득,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지칼은 멍하니 제 손목에 나타난 붉은 실금을 내려다보았다. 실금 같아 보인 것은 잠시였다.
그의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그제야 지칼은 조금 전의 소리가 제 뼈가 부서지고 썰려 나가는 소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아악……!”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지칼의 낯이 고통으로 처참하게 뒤틀렸다.
핏방울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그는 오른손의 뼈와 근육이 반절 이상 처참하게 잘려나간 것을 확인하고 분노에 차 울부짖었다.
“리즈벨 발디마르!”
“고작 손목 하나 가지고 엄살 부리지 마.”
성력이 감도는 가느다란 손이 그대로 지칼의 멱살을 틀어쥐고 내던졌다. 콰앙. 커다란 체구가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지칼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뜨고 고개를 쳐들기 전에, 리즈벨의 몸에서 솟구친 네 갈래의 성력이 그의 사지를 속박했다.
“있지, 나.”
리즈벨이 검을 가볍게 들고 손끝으로 날카로운 검신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다른 형제들에게는 특별한 유감이 없었거든? 사실 우리 사는 게 다 그렇잖아. 미워하진 않지만 그래도 죽여야 내가 사니까.”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누이가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를 천당으로 인도할 더없이 고귀한 성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아니야.”
“리, 리즈…….”
“너는 나를 한 번 죽였어.”
“뭐? 무슨.”
지칼은 덜렁거리는 손목의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져 오는 와중에도 짓씹듯 항변했다. 그러나 누이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리즈벨이 손에 든 검을 휙 허공으로 던졌다. 검은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허공에 얌전히 떠올랐다.
“……!”
지칼은 누이가 검을 던져 버리고 대신 집어 든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로제스의 침상 곁 협탁에 놓여 있던 검은 활촉의 화살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가렛트 공작가의 사병들이 사용하는 독화살.
“그리고 로제스를 죽였어.”
리즈벨이 한 발짝씩 그에게 가까워져 왔다.
“너는 우리를 죽였어.”
지칼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리즈벨이 그의 앞에 자세를 낮추고 앉았다. 가는 손이 놀랄 만큼 강한 악력으로 지칼의 어깨를 붙들었다.
성력에 온몸이 칭칭 묶인 채, 지칼은 누이가 천천히 화살을 치켜드는 것을 보았다.
“……!”
본능적인 공포가 지칼을 휩쌌다. 푸른 눈에 지칼이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절박함이 어렸다. 그는 몸을 비틀며 처절하게 누이를 불렀다.
“누이야, 누이…….”
“그러니 나는 네가 딱 내가 그랬던 것처럼, 로제스가 그랬던 것처럼.”
“리즈벨!”
“딱 그만큼만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 말이 끝이었다. 리즈벨의 손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콰득.
“……!”
검은 활촉이 정확히 지칼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어찌나 인정사정없이 내리꽂았는지 리즈벨의 손안에서 화살대가 부르르 진동했다. 활촉에 묻은 독이 살갗을 시커멓게 물들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허억…….”
지칼이 가쁜 숨을 뿜어내며 리즈벨을 노려보았다. 그의 동공에 점점 핏발이 섰다. 혈관을 타고 독성이 침투하기 시작한다. 환부 주위의 살이 시퍼렇게 변색하고 있었다.
“아으…… 아악…….”
리즈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동으로 재생되는 것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저렇게 살이 썩어들어 가고 온몸을 마비시키는 독화살을 너덧 대나 맞고도 동요하지 않던 로제스가 저를 보는 순간 얼마나 흔들렸는지.
저를 붙들고 절박하게 윽박지르던 그 표정이 얼마나…….
“…….”
리즈벨은 손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끝에 실타래처럼 연결된 성력의 줄기가 지칼과 벨리크의 기사의 몸을 휘감아 열린 창밖으로 내던졌다.
두 몸이 성벽 아래를 구르는 굉음이 창문을 타고 어렴풋이 올라왔다.
리즈벨은 몸을 일으켜 로제스에게 다가갔다. 로제스의 왼뺨에 튄 지칼의 핏방울을 닦아 내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애달팠다.
리즈벨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밖의 벽에 기대어 관전하던 이가 흠칫 놀라는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나 걸려?”
리즈벨의 목소리는 얼핏 평온하기까지 했다. 아시어스는 금빛 빛 너울에 둘러싸인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직하게 답했다.
“네다섯 시간 정도.”
리즈벨은 잠시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네다섯 시간이라…….
“……동이 틀 때.”
조용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저번에 봤던 그 성벽 위에서, 동이 틀 때 만나.”
충분하리라.
리즈벨은 로제스를 등지고 걸음을 떼었다. 그녀의 생을 가져가기로 한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시어스는 제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스라한 향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왕녀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푸른 눈에 깃든 것이 이미 결단을 내린 자의 무감함이라, 아시어스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침실 안에는 시체 하나와 그리고 그 시체를 되살릴 마법사 하나만이 남았다.
“……대단한 누이를 두었군요.”
아시어스는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침대가로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회색빛 안개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시작해 볼까.”
쩍.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투명한 유리알에 금이 갔다. 그것은 그대로 수천 개의 조각으로 화해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은테 안경이 사라지고 드러난 아시어스의 맨얼굴은 조금 전의 리즈벨만큼이나 무감하고 단호했다. 서로에게 반드시 얻어야 할 것들이 있는 자들에게는 망설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