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802
제802화
터어어엉!
라온이 잘레크의 지팡이 검을 쳐내며 태화이보를 밟았다.
태화보 최속의 보법에 쾌검의 묘리를 담아내자, 시야가 검게 물들며 어느새 잘레크의 하얀 수염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허어!”
잘레크도 이 정도 속도는 예측하지 못했다는 듯 하얀 눈썹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심안을 개화한 검사답게 자신이 노리던 어깨를 정확히 방어하며 뒤로 물러섰다.
치이이이잉!
라온은 제천검과 지팡이 검이 부딪치며 터져 나온 쇳소리를 디딤돌 삼아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검을 찌르기 애매한 간격까지 접근해 왼손으로 라스의 은월마장을 펼쳐냈다.
파아아아앙!
서리를 압축시킨 강대한 냉기가 잘레크의 눈앞에서 폭발하며 사위를 허옇게 얼려버렸다.
“나중에 네놈이 다 녹이고 가거라.”
잘레크가 얼어붙은 잔디를 밟으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장법을 사용할 것도 예측했다는 듯 지팡이 검의 검병을 이용해서 은월마장의 냉기를 차단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방어였다.
“물론입니다.”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광아검을 운용했다. 갈고 닦은 감각의 검으로 잘레크가 서 있는 공간을 압박했다.
‘다 피하시는군.’
잘레크는 광아검의 투로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 회피와 방어를 적절히 조화시키며 자신의 공세를 모조리 차단했다.
‘심안이라….’
잘레크는 심안이 마음을 읽는 눈 같은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의심만 들었다.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그렇다면 저 능력은….’
통찰력.
그것도 감각의 영역에 도달한 특별한 통찰력이라고 봐야겠지.
통찰력이란 어떠한 현상을 단숨에 파악하는 능력인데, 잘레크의 통찰력은 인간의 범주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것 같았다.
치이이이잉!
라온은 광아검의 흐름을 이용해서 역으로 자신의 복부를 찔러오는 잘레크의 지팡이 검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럼 심안을 깨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극한에 도달한 통찰력을 부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육체의 힘으로 압박을 하거나, 강대한 오러로 밀어붙이거나, 로렌스의 역해무를 사용하거나 혹은 심안의 규격을 넘어서는 검술로 잘레크의 통찰력을 부수거나.
‘내가 선택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지.’
다른 것을 선택해서 이겨봐야 기분만 좋을 뿐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렌스와 싸울 때처럼 오롯이 자신의 검술로 잘레크의 심안을 꺾어야 성검련에 온 의미가 있을 것이다.
쩌어어어엉!
잘레크는 자신의 의지를 읽은 듯 표정을 굳힌 채 뒤로 물러섰다.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구나.”
그는 경계심이 더 깊어진 듯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깨달은 건 아니지만, 지금부터는 조금 다를 겁니다.”
라온이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자신의 육체를 한 자루의 검이라 생각하며 근육과 오러의 움직임에 검술의 묘리를 담아냈다.
신검합일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심상의 경지. 올곧은 만검을 익힌 자신만이 오를 수 있는 새로운 경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아!
불길함을 느낀 듯 뒤로 물러서는 잘레크의 좌측으로 따라붙어서 적섬을 펼쳐냈다.
이미 완성된 검술인 적섬의 묘리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지금 상황에 가장 적절한 쾌검과 강검의 묘리를 더했다.
“으음!”
잘레크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지팡이 검으로 제천검의 검극을 후려쳤다.
치이이잉!
라온은 잘레크의 지팡이 검이 제천검에 닿으려는 순간 검술에 변화를 주었다. 쾌검과 강검을 담아냈던 적섬에 절검의 묘리를 일으켰다.
쩌어어어엉!
잘레크는 그 판단마저 읽어버린 듯 지팡이 검을 사선으로 틀었다.
육중한 오러가 그의 어깨를 받친다. 절검을 막아내는 최선의 자세였다.
‘예상대로야.’
라온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레크의 심안이라면 자신의 검술 변화도 예측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부순다.’
절검이란 상대의 검술 흐름을 끊어버리는 특별한 묘리. 지금까지 갈고 닦은 절검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적섬을 내리그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잘레크 역시 도망치지 않았다. 바위처럼 묵직한 검격을 휘감은 채 쏟아지는 적섬의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로가 지닌 능력과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파아아아아아!
라온의 제천검과 잘레크의 지팡이 검이 정면에서 격돌한다.
절검과 중검은 부딪침은 가위와 바위의 싸움이나 다름없다. 본래라면 바위의 승리로 끝나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결과가 달랐다.
치지지지직!
제천검에 깃들어 있던 절검의 묘리가 잘레크의 묵직한 검술 흐름을 가르고, 그의 허리에 자그마한 검흔을 새겼다.
피이이익.
잘레크는 본인의 허리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절검이 중검을 부수고 들어온 게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뭐냐….”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말씀드렸는….”
“이름 말고!”
잘레크가 헛소리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상성을 부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분명 절검이었잖느냐!”
그는 아직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오른쪽 눈을 부라렸다.
“절검이 맞습니다. 조금이지만 벽을 깬 느낌이네요.”
라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믿고 행했기 때문인지 항상 뒤떨어져 있던 절검의 성취가 크게 상승했다.
“…대련을 하는 중에 성장하다니, 정신 나간 재능이로구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뒤편에 있는 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성검련의 검사들과 매일매일 대련을 한 덕분에 얻어낸 결과입니다.”
로렌스를 비롯한 성검련의 검사들과 수없이 많은 대련을 치른 덕분에 검술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건 재능과 노력 그리고 운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렇겠군.”
잘레크도 이제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상황에서 절검을 사용하다니,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던 묘리였나?”
“아뇨.”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검은 제가 가장 못하는 검술입니다.”
강검, 쾌검, 중검 같은 시원시원한 검술 묘리와 달리 반격에 가까운 절검은 자신의 성향에 맞지도 않았고, 빠르게 성장하지도 않았다.
많은 묘리 중에서 맨 뒤에 처져 있는 검술이었다.
“뭐? 그런데 왜….”
“어렵고 힘들다고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절검이 성향에 맞지도 않았고, 어려웠지만, 한 번도 놓은 적은 없었다.
다른 검술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고,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가장 먼저 개화를 한 것 같았다.
“네놈, 진짜배기 괴물이었구나.”
잘레크가 입매를 비틀며 자세를 낮췄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호승심이 가득 차오른 표정. 도인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 역시 성검련의 검사였다.
“그럼 다시 시작하죠.”
라온이 차분히 제천검을 세웠다. 이건 이기기 위한 대련이 아니라,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한 대련이다.
천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경험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쿠우우웅!
라온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잘레크의 심안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그의 통찰력 자체를 깨부수겠다고 다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아아아아!
* * *
쩌어어어엉!
라온의 제천검에 부딪친 잘레크가 뒤로 쭉 밀려났다.
“이, 이제 그만….”
잘레크는 지팡이 검으로 땅을 짚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쳐서 말할 힘도 없는 듯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벌써요?”
라온이 제천검을 내린 채 눈을 끔벅였다. 아직 알을 깨지 못한 검술이 많아서 이대로 대련을 끝내기는 아쉬웠다.
“벌써라니! 해가 다 졌지 않느냐!”
잘레크가 하늘을 보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말대로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아침이었으니, 하루종일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못 싸워! 여기서 더 움직이면 허리가 뚝 끊어질 게다!”
잘레크는 오러는 남았지만, 체력이 한계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지쳤는지 그의 수염과 눈썹이 땀에 젖어서 붓처럼 끝이 모여 있었다.
“음, 일단 여기까지 하죠.”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제천검을 내렸다. 자신의 상태 역시 만신창이였지만, 검술이 성장한다는 기쁨에 땀이 나는 줄도 몰랐다.
“두 분 다 수고하셨어요!”
도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서 자신과 잘레크에게 수건과 물을 건네주었다.
“고맙다.”
“고마워.”
라온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 이상인데.’
이곳에서 한 달 넘게 치렀던 수련과 대련의 성취가 단번에 폭발했다.
심상의 세계에서 싹을 틔운 검술들의 한 뼘 이상 자라난 느낌이었다.
‘이것도….’
라온은 거친 숨을 내쉬는 잘레크를 보며 옅게 웃었다.
‘상대가 좋았기 때문이겠지.’
잘레크는 그저 심안만 지닌 게 아니라, 수많은 검술을 정교하게 힌 절세의 검사였다.
그가 정면에서 부딪쳐준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련주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잘레크가 땀에 젖은 수건을 목에 걸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할아버지가요?”
“그래. 네놈이 찾아오면 고생 좀 할 거라고 했는데, 그게 이 뜻이었어.”
그는 이럴 줄 알았으면 도리안을 받지 말 걸 그랬다며 고개를 저었다.
“스, 스승님!”
도리안이 진심으로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저 녀석을 받아주지 않으셨어도 어차피 대련은 신청했을 겁니다.”
라온은 그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스승님! 저 버리시는 거예요? 보급의 초월자로 만들어 준다고 하셨잖아요!”
도리안이 훌쩍이면서 잘레크의 발목을 붙잡았다.
“농담이다! 농담! 그리고 내가 언제 보급의 초월자로 만들어 준다고 했어!”
잘레크는 헛소리 말라며 도리안을 걷어찼다.
“보기 좋네요.”
라온은 정말 스승과 제자가 된 듯한 잘레크와 도리안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쵸?”
“좋기는 무슨!”
도리안은 그 말이 기쁘다는 듯 헤헤 웃었고, 잘레크는 턱을 홱 돌렸다.
“크흠, 아까 내가 실수를 한 게 있더구나.”
잘레크가 어색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쓱 돌렸다.
“실수라뇨?”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족스럽게 대련했기에 그가 무엇을 실수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네게 심안의 재능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설마….”
“그래. 도리안 정도는 아니지만, 네게도 심안을 깨울 재능이 잠들어 있었다.”
잘레크는 확실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냥 눈치로 싸웠을 뿐인데….”
“말했지 않느냐. 심안은 마음의 눈처럼 거창한 게 아니라고, 그 눈치가 극도로 예민해지면 심안으로 개화하게 될 거다.”
그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믿기는 힘들지만, 정말 착하고 겁이 많을지도 모르겠어.”
-이, 이놈이 착하고, 겁이 많다고! 절대 아니니라!
라스가 헛소리 말라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요놈은 마계나 천계 한복판에 떨어뜨려 놓아도 살아남을. 아니, 그곳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노예로 부릴 괴물이니라!
녀석은 정신 차리라고 외치며 잘레크의 뺨을 후려쳤다.
“명상을 자주 하거라. 심안이 깃들어 있는 건 네놈의 눈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잘레크는 심안에 관한 조언을 해주고서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언 감사합니다.”
라온이 잘레크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해무, 격해무 그리고 심안.’
역해무와 격해무를 합치는 무학에 심안의 요소가 스며든다면 영체 상태의 백혈교주를 죽일 수 있는 무학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연구할 가치가 있겠어.’
가문으로 돌아간 후 제대로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머릿속에서 밑그림을 그렸다.
“벌써 뭔가를 깨달은 느낌이구나. 눈동자가 아주 반짝반짝해.”
잘레크는 신기하다고 말하며 픽 웃었다. 눈동자라는 단어를 들으니, 아까 그가 말했던 게 떠올랐다.
“잘레크님.”
라온이 반 이상 감겨 있는 잘레크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 저한테 인안과 천안, 마안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인안이란 인간이 지녀야 할 눈이라는 뜻이다. 네가 사람으로서 이뤄야 하는 도리를 하고 있다는 의미지.”
잘레크는 그 인안도 없는 인간들이 많다며 혀를 찼다.
“그럼 천안은 뭡니까?”
“천안은 성스러운 신이 깃드는 선한 눈이고, 마안은 어둠이 스며드는 악귀의 눈이다.”
“악귀의 눈….”
라온이 라스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천안은 모르겠지만, 마안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허나 그건 입이 싼 인간들이 퍼뜨린 소문일 뿐이다. 천안이 정말 선한지, 마안이 정말 악독한지는 밝혀진 적 없어.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에 따라 입맛대로 나눴을 뿐이다.”
잘레크는 신과 마에 대해서는 본인이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너한테 신과 마가 깃들 수 있다는 거겠지.”
그는 그것만큼은 확실하다며 고요히 눈동자를 빛냈다.
‘신이라….’
마는 이미 라스가 거머리처럼 붙어 있으니 이유를 알겠지만, 신이 왜 붙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데루스가 불러왔던 우리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누, 누가 거머리야! 거머리는 네놈이잖느냐!
라스는 불쾌하다며 턱살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군요.”
라온은 머릿속에 천안과 마안에 관한 내용을 새기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돌아가는 게냐? 네놈 때문에 한동안 요양을….”
“아뇨. 쉴 만큼 쉬었으니까. 2차전을 시작해야죠.”
라온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끔벅였다.
“일어나세요.”
“아….”
잘레크는 2차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한 듯 눈썹이 벗겨질 정도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 말을 안 들은 것이냐! 이제 힘이 없다니까!”
“포기하세요.”
도리안이 잘레크에게 지팡이 검을 건네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상태의 라온 님은 누구도 못 말리니까.”
그는 빨리 싸워주는 게 편할 거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억….”
잘레크가 지팡이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이 한순간에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노인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 양아치 자식아! 내가 네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그럼 아는 검술도 더 많으시겠네요. 계속하시죠.”
“으아아아악!”
오늘도 성검련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이른 새벽.
석상이 된 듯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던 라온이 찬찬히 눈을 떴다.
‘벌써 시작 됐나.’
성검련의 아침은 빠르다.
이곳의 사람들은 검을 그 어떤 삶의 가치보다 중요시하기에 일어나서 씻거나 밥을 먹기 전에 먼저 검술을 수련한다.
지그하르트 역시 이른 새벽부터 수련을 시작하는 검사들이 많지만, 저렇게 열정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검을 휘두르고 대련을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이젠 성검련의 아침에 익숙해진 모양이구나.”
연무장 벽에 등을 기댄 채 라온을 지켜보던 렉타르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렇죠.”
라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온 지 2달이나 지났으니까요.”
성검련에 머무른 지 2달이 지났기에 새벽이나 밤에 검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애들은요?”
“해가 뜨기 전에 이미 나갔다. 누군가와 검을 부딪치고 있겠지.”
렉타르는 마르타, 루난, 버렌이 이미 밖으로 나갔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녀석들도 열심이네요.”
세 명의 조장은 자신보다 먼저 이곳에 적응하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수련과 대련. 그것도 자신만의 검술을 극한까지 다듬은 검사들과 싸우는 경험은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나중에 광풍대 전원을 데리고 오는 것도 좋을지도. 아니면 지그하르트와 성검련 전체의 대련을 벌여볼까?’
지금은 무리지만, 언젠가 성검련주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진 후에는 눈치 보지 않고 행동해도 될 것 같았다.
“아쉽네요.”
라온은 새소리처럼 울리는 검술의 파공음을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게.”
대륙의 상황이 어지럽고, 광풍대를 계속 놔둘 수도 없기에 처음부터 성검련에서 머무는 시간은 2달로 정해져 있었다.
“난 더 머물러도 상관없다.”
렉타르는 평생 있어도 된다며 웃었다.
“그러고 싶기는 한데. 수하들을 놔둘 수도 없잖아요.”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조장들만이 아니라, 광풍대 전원을 챙겨야 하는 대주다.
스스로의 수련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 또한 옳은 선택이다.”
렉타르는 기껍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언제 떠날 생각이냐.”
“정리할 게 많으니, 다음 주에 떠나려고 합니다.”
“정리라면… 그게 우선이겠군.”
“예.”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을 잡은 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끝을 봐야죠.”
* * *
다음날.
라온은 저녁이 되자마자, 저택을 벗어나 로렌스가 머무는 산으로 올라갔다.
다만 언제나 홀로 산을 오르던 그의 등 뒤에는 렉타르, 버렌, 루난, 마르타, 도리안 그리고 소수의 성검련 검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오지 말라니까요.”
라온이 뒤를 돌아보며 미간을 구겼다.
“이걸 어떻게 안 봐!”
“그래. 로렌스 꼬마 놈이 털리는 걸 보여달라고.”
매일 같이 자신의 대련 상대를 해주던 마장검주와 현악검주가 무조건 따라가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대주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봐야지.”
“나보다 못 컸으면 욕먹을 각오 하라고.”
“지면 아이스크림도 사줘….”
버렌, 마르타, 루난은 지켜보겠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였다.
“나를 2주 동안 괴롭혔으니, 그 결과는 보여 줘야겠어.”
잘레크가 주름이 한참 늘어난 이마를 찌푸린 채 자신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스승님! 여기요!”
도리안은 잘레크의 옆에 붙어서 그가 먹을 차와 건포도 쿠키를 내밀었다.
저 정도 되니,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요양보호사처럼 보였다.
-쿠, 쿠키이니라! 건포도 쿠키! 본왕도 좋아하느니라!
라스는 그 와중에 쿠키가 먹고 싶다며 자신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
라온이 도리안에게 쿠키를 나눠 받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가 좋네요.”
“허허허.”
무스턴과 렉타르는 이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음….
라스는 도리안에게 받은 쿠키의 맛을 음미하다가 뒤를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제 네놈이 뒤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구나. 처음 보았을 때는 구석에 처박힌 쭈구리였는데 말이야.
녀석은 재밌다는 듯 픽 웃었다.
‘쭈구리라….’
라온은 각기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보며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전생의 자신은 그림자의 수장이었을 뿐 그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도구처럼 여기는 삶을 살았기에 라온 지그하르트로 태어났을 때도 불신이 깊어 인간관계를 쌓기 어려웠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여러 인연이 겹치며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게 되었다. 책임질 게 늘었다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본왕 역시 그러했느니라! 이 타고난 카리스마로 모든 마족을 사로잡았느니라! 본왕이야 말로 최고의….
라스는 동그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카리스마를 외쳤다. 통통한 고양이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군요.’
-보, 본왕의 말은 아직 안 끝났느니라!
‘이제 대련해야 하니까. 조용히 좀 해줘.’
-끄억….
라온은 가볍게 라스를 밀어내고서 동굴 앞 공터에 섰다.
“더럽게 시끄럽네.”
로렌스가 기다렸다는 듯 동굴에서 나오며 미간을 찌푸렸다.
“매일 하는 대련인데, 뭐 이렇게 많이 찾아왔어!”
그는 돌아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놔두세요. 마지막이잖아요.”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이 지그하르트로 떠나기 전 로렌스와 마지막 대련이었기에 구경꾼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으음….”
로렌스는 짜증이 올라왔던 표정을 지운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떠난다는 게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금방 끝날 텐데….”
로렌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공터로 내려왔다.
“그래서 오늘 대련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죠.”
라온이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로렌스를 바라보았다.
“딱 한 번의 대련을 하되 확실히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어쩐지 눈빛이 매섭더라니.”
로렌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좋다.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시작하지.”
그는 덤벼보라는 듯 나뭇가지처럼 길쭉한 손가락을 까딱였다.
검계현신 신마조화결.
라온은 대련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제천검과 진혼검을 뽑으며 검계를 개방했다.
어둑한 산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과 달.
태양 속에서 화염의 신검을 세우고, 달빛 아래에서 서리의 마검을 뽑아 들었다.
“너….”
로렌스는 라온이 검계를 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듯 눈을 부릅떴다.
“방심하지 마세요. 이곳에서 쌓은 무학으로….”
라온은 불길로 타오르는 신검을 겨누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당신을 쓰러뜨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