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556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2화
굴복
정광은 오랜만에 마령제혼술(魔靈制魂術)을 펼쳤다.
마혼을 살짝 개방하여.
-말해. 누가 시켰지?
‘……!’
정광의 의념에 뇌와 혼이 지배당한 피슈카르가 토설했다.
“바텐베르크 공작입니다.”
“……!”
정광의 눈썹이 치솟았다.
피슈카르가 입에 올린 이름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바텐베르크일 것이 뻔하나 확인차 물은 것뿐인데 놀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혼이 움츠러들어?’
오랫동안 중단전 옥당(玉堂)에 봉인돼 있다가 나왔으니 더 놀려고 기를 써야 정상이거늘,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바로 옥당으로 기어들어 가버렸다.
‘이놈은 또 뭐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별것 아닌 주제에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던 역천경이 가늘게 떨었다.
-우우웅…….
-너도 겁먹었나?
-……우웅!
-가지가지 하네.
정말 그랬다.
저 먼 곳에 있는 침묵의 산을 둘러싼 결계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눈을 뜨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정광은 소름이 돋은 팔을 어루만지며 흡족해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느끼는 흥분이었다.
“자오.”
사슴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있던 자오가 달려왔다.
“네, 단주.”
“무척 재밌는 일이 생겼어요.”
덩달아 따라온 에스텔이 다급히 물었다.
“방금 ‘무척’이라고 했어? 네가 그런 표현을 쓸 정도면 엄청난 일이겠네. 어쌔신들에게 사주한 흉수가 누구길래 그래?”
“그쪽은 별것 아닌데. 바텐베르크 공작님이요.”
“망할 늙은이! 빌어먹을 색마! 그게 왜 별것 아니야? 나와 자오를 한꺼번에 차지하려고 술수를 썼는데. 자오도 기분 나쁘죠?”
에스텔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적당히 화를 내고 자오에게 농담을 던졌으나 자오는 다른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칙칙한 기운을 풍기며 우뚝 선 침묵의 산이었다.
“단주, 뭔가 이상합니다. 저 산 때문에 그러십니까?”
“네. 결계가 흔들리고 있어요.”
“그, 그 말씀은?”
“드래곤이 깨어나려는 거겠죠. 에스텔.”
“으, 응?”
“숙영지로 돌아가면 짐을 챙기세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어…… 어…… 맞다. 이 어쌔신은 어떡할 거야? 이대로 놓아주려고? 그건 너무 친절한 대응이잖아. 사람이 그럼 못 써.”
“남은 생을 이지를 상실한 채 살게 됐으니 그쯤에서 만족하세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지, 진짜 드래곤의 레어에 들어가려고?”
“물론이죠. 왜요?”
왜긴.
울상을 짓고 있던 에스텔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두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볼을 때렸다.
짝-
“그래, 너와 자오. 두 사람과 함께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게…… 그래도 드래곤이잖아. 아아아. 아, 몰라. 가자!”
에스텔이 결연한 의지가 담긴 에메랄드빛 눈으로 침묵의 산을 노려보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정광이 뒤에서 불렀다.
“잠깐만요.”
“마음이 변했구나? 맞지?”
에스텔은 재빨리 돌아섰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의 일행이 평평한 바위에 편히 앉아 사슴 고기를 먹고 있었다.
“진짜 감동했다. 지금 그게 입에 들어가니?”
정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바쁜 하루가 될 거예요. 어서 와서 든든히 드세요.”
* * *
바텐베르크는 간편한 차림새로 자신의 천막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너무 늦는군.’
원숭이를 가만히 두면 제멋대로 설칠 게 뻔했기에 뭘 하든 간에 신경을 쓰지도, 마찰을 일으키지도 말라고 명했다.
그 예상대로 원숭이가 숙영지에서 먼 곳으로 나가지 않았는가.
이렇게 판까지 짜줬거늘, 근본 없는 어쌔신 따위가 아니라 정통 하샤신이라고 자부하는 놈들이 아직도 소식이 없어?
출신은 천하나 실력은 쓸 만한 것들이기에 실패할 리는 없지만 기분이 불쾌해졌다.
놈들의 우두머리인 피슈카르라는 잡종의 건방진 얼굴을 떠올리니 더 그랬고.
‘손을 더럽히기 싫은 일이 생길 때마다 쏠쏠히 써먹어서 아깝긴 한데. 이번을 끝으로 정리해야겠어. 그리고…….’
하프 엘프의 미모를 떠올리며 음흉한 표정을 짓던 바텐베르크가 굳어버렸다.
‘이건!’
생각보다 빨랐다.
침묵의 산을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무거운 눈꺼풀을 든 것인가. 그렇게 철저히 준비했는데도 변수가 생길 줄이야.’
그래도 결과는 같으리라.
바텐베르크는 의자에서 일어나 화려하게 빛나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챙겨 입었다.
마검(魔劍) 블루우트 프라센다 데이몬까지 등에 메어 위대한 역사를 쓸 채비를 마치자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가 황급히 들어왔다.
“총사령관님!”
“호들갑 떨지 말게. 마법사들은?”
“조금 전에 달려갔습니다.”
“나쁘지 않군.”
바텐베르크는 전군에 비상령을 내리라고 지시한 뒤 천막에서 나와 침묵의 산으로 향했다.
산 앞에 이르러서 보니 궁정 수석 마법사 하츠펠트 백작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가며 마법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어서 마법진에 나머지 마력을 불어넣고 발동할 준비를 해라! 아, 공작님. 오셨습니까.”
“고생이 많소, 하츠펠트 공. 드래곤이 왜 빨리 깨어나려는 것이오?”
“부끄럽지만 확실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건 고문헌에서 접한 일화인데 어떤 드래곤이 흥미로운 존재에 감응해 일찍 깨어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존재라. 우리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은근슬쩍 돌려 말한 것이었으나 수석 마법사는 단칼에 부정했다.
“드래곤에게 있어 인간은 인간이 개미 떼를 보는 시각과 비슷합니다. 고문헌에도 그 드래곤이 감응한 존재는 다른 드래곤이었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같은 종만 인정한다는 말이구려. 참으로 오만한 생물이오.”
“무척 재밌는 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
평생 마나를 가공하고 조합하는 수식을 붙잡고 골머리를 썩이느라 제정신이 아닌 건 이해하나 마법사란 족속들의 화법은 왜 이 모양인지. 바텐베르크는 또 부정하는 수석 마법사의 입을 주먹으로 뭉개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무슨 말이오?”
“출처가 불분명한 오래된 역사서지만 한 드래곤이 지나가던 마족(魔族)에게 감응해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바텐베르크가 쥔 주먹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번엔 또 뭔가 했더니 뭐?
신화에나 나오는 마족?
바텐베르크는 언젠가 반드시 이 짜증 나는 놈을 손봐줄 것이라 다짐하고 화제를 돌렸다.
“재밌는 얘기이긴 하나 현실에 신경 써야겠소. 마법진이 제대로 발동될 것 같소?”
수석 마법사의 얼굴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작스럽긴 하나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군. 잘 부탁하오, 하츠펠트 공”
“맡겨주십시오.”
바텐베르크는 수석 마법사가 다시 마법사들을 다그치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활한 애송이가 분에 넘치는 고풍스러운 풀 플레이트 메일과 예리한 롱소드로 완전무장 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바텐베르크는 내심 비웃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전하, 오셨습니까.”
“큰 변수가 생겼다고 해서 다급히 달려왔소, 바텐베르크 공.”
“이곳은 위험합니다. 숙영지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전에 선언했듯이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소. 여러 영웅의 희생을 똑똑히 지켜보기만 할 것이니 너무 탓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소.”
바텐베르크는 주변 분위기를 힐끔 살폈다.
정벌군 중 상당수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고 있었다.
그 사기의 원천인 교활한 애송이, 프로부뉴 국왕 발부에 6세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이 보시기엔 상황이 어떻소?”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그리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어떤 집단도, 어떤 존재도 아국의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하. 공의 말이 옳소. 과인도 그렇게 믿고 있소.”
국왕은 겉으로는 맞장구를 쳤으나 속마음은 참담했다.
무척 오만한 말이었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휜펠 제국의 사행을 가로막는 걸 넘어 두들겨 패기까지 한 존재가 떠올랐다.
국왕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흠. 흠. 헌데 정광 일행은 어디 있소?”
바텐베르크야말로 궁금했으나 태연히 답했다.
“워낙 자유분방한 자들인지라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을 수도 있지요.”
“허어. 그게 사실이면 큰 전력을 잃은 것 아니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국은 강합니다, 전하. 없던 셈 치고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물론 정벌이 끝나면 그들을 잡아 죄를 물어야겠지요.”
“안타까운 일이긴 하나 지당한 말이오. 그럼 공만 믿고 있겠소.”
국왕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믿지 않았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그들은, 특히 정광은 겁을 먹고 도주하지도, 약조를 어기지도 않을 위인이었다.
‘분명 뭔가 있다. 설마 이 늙은 괴물이?’
국왕은 생각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합동 전략 회의에서 몇 번이나 검토한 대로 정벌군이 전투 진형을 짰다. 마력을 전부 쏟아내 기진맥진한 마법사들이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궁정 수석 마법사는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위치로 가 바텐베르크에게 보고했다.
“끝났습니다, 총사령관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바텐베르크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높은 단상 위에 올라갔다. 드래곤 정벌군을 형형한 눈으로 굽어보며 위엄 있게 외쳤다.
“대륙 제일의 기사이자 마검 블루우트 프라센다 데이몬의 주인이며 드래곤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바텐베르크가 약속한다! 비록 국적은 다르나 우리는 하나! 황제 폐하의 무궁한 성은과 국왕 전하의 지대한 믿음을 받고 있다! 그런 우리를 감히 누가 막을쏘냐! 우리는 포악한 드래곤을 징벌해 황제 폐하와 국왕 전하께 보답하고 휜펠 제국과 프로부뉴 왕국의 이름을 높일 것이며 우리 자신들도 대륙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짧지만 힘 있는 연설에 긴장하고 있던 기사들도 벌벌 떨고 있던 병사들도 모두 열광했다.
바텐베르크는 환호성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석 마법사에게 명했다.
“시작하시게!”
“네! 총사령관님!”
수석 마법사가 마력을 쏟아내 거대한 마법진을 억누르고 있던 봉인을 해제했다.
화아아아아아-
마법진이 형형색색의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빛이 하나로 합쳐져 침묵의 산을 감싸고 있는 결계를 향해 쏘아졌다.
마력이 응축된 빛과 결계가 충돌했다.
콰카카카카카카!
귀를 찢는 듯한 소음과 함께 빛이 결계를 뚫고 들어갔다.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틈이 생기고 있었다.
정벌군은 그 장관을 지켜보며 환호했다.
바텐베르크는 전술을 간략히 되짚어주며 그들의 사기를 한층 더 끌어 올리려 했다.
“저 틈의 끝에 간악한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 십 분 정도만 지나면 완전히 뚫릴 것이다! 먼저 나를 비롯한 정예들만 들어가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한 드래곤을 친다! 그리고 드래곤이 외부에 쏟았던 마력을 전부 흡수해 결계가 사라지면 넓은 이곳으로 유인할 테니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은 일제사격하고 기사단은 기마 돌격해 놈의 신경을 분산시킨다! 그리고 그때! 내가 드래곤의 목을 벨 것이다!”
다들 함성을 지르려는 그때!
맑은 목소리가 장내에 퍼졌다.
“역시 기다리길 잘했다니까. 힘을 덜 빼게 됐네요.”
어느새 결계 앞에 나타난 정광이 빛이 뚫고 있는 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오, 에스텔, 십 분 정도 걸린다고 하니까 우리도 작전이나 한번 짜보죠.”
정벌군이 쏟아내는 어이없는 눈빛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에스텔이 기가 차서 물었다.
“하, 한번 짜보자고? 아무런 계획도 없었어?”
자오가 빙그레 웃었다.
“단주 자체가 최고의 작전이오. 심심해서 하신 말씀이니 그러려니 하시오.”
정광이 웃었다.
“하하. 역시 자오밖에 없다니까요. 아, 국왕 전하! 대륙 제일의 기사이자 마검…… 어쨌든 공작님!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턴 우리가 맡을 테니 푹 쉬고 계세요!”
“……!”
뭐가 어째?
정벌군은 입을 떡 벌렸고 프로부뉴 국왕 발부에 6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단상 위에 있던 바텐베르크는 무서운 눈빛을 발하며 정광을 노려봤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온 것이냐? 군법이 우스운가 보군.”
정광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하샤신, 그러니까 어쌔신들이 우리를 멀리 떨어진 숲으로 유인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 간신히 설득하고 왔는데 너무하시네요.”
“……그걸 믿으라는 말이냐?”
“제 말이. 저야말로 안 믿기더라고요. 피슈카르라는 분이 자기도 더러워서 더 못 해먹겠다고 어떤 악당이 사주했는지 알려줬는데 놀랍게도 흉수는…….”
“시끄럽다! 게다가 쉬고 있으라니! 완전히 미쳤구나!”
“켕기는 거라도 있으세요? 왜 말을 끊으세요?”
“더 대화할 가치가 없다. 저놈들을 잡아라!”
한 무리의 기사들이 정광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정광의 몸에 손을 대는 그때, 자오가 유령처럼 움직이며 그들의 갑옷에 있는 작은 틈에 비수를 쑤셔 넣었다.
“끄윽!”
“아악!”
기사들은 쓰러지고 정광은 두 팔을 벌려 주장했다.
“정당방위인 거 보셨죠?”
“……!”
바텐베르크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오의 실력이 예상외로 높은 걸 확인하고 정광의 능력까지 더 높이 쳐서 빠른 길을 택했다.
“시간이 없다! 기사단은 기마 돌격해서 저 요사한 놈을 벌해라!”
“공작님이 탐내시는 에스텔과 자오도 있는데요?”
바텐베르크의 눈썹이 무섭게 치솟았다.
“무엇들 하느냐! 당장 쓸어버려!”
“충!”
기사들이 말에 올라타 돌격할 준비를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에스텔이 정광에게 속삭였다.
“미쳤어? 왜 시비를 걸어?”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그게 그거지. 어떡하려고 그래?”
“어차피 이렇게 흘러가게 돼 있었어요. 드래곤을 잡고 있는데 뒤통수를 치면 곤란하니 쉴 계기를 만들어 드려야죠.”
정광은 싱긋 웃으며 돌격을 시작하려는 기사단을 바라봤다.
‘기사단의 진짜 실력은 기마 돌격에서 나온다고 했지?’
저렇게 크고 육중한 과녁들이 줄을 지어 달려오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비룡(飛龍)을 곤륜에 두고 오지 않았으면 신나게 쐈을 텐데.’
허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낭만? 용이, 그것도 악룡이라는 훨씬 더 대단한 낭만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깟 기마 돌격쯤이야.
마침 기사단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정광은 허리춤에 꽂혀 있는 것을 꺼내 들어 입가에 댔다.
대명 황궁무고에서 챙긴 마적(魔笛)이었다.
그 모습을 본 프로부뉴 국왕 발부에 6세는 정광이 처음 만났을 때 다가와 속삭였던 부탁이자 충고를 떠올렸다.
‘제가 피리를 꺼내 들면 귀를 꼭 막으세요. 전하를 비롯한 프로부뉴군 모두가요. 친위기사단장님보고 전하 옆에서 만일을 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잊지 마세요.’
‘……과인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네. 그럴걸요.’
‘……겨우 그거라고?’
‘네. 그렇게 해주시는 걸로 알게요.’
‘그러시게. 이해는 안 가나 그렇게 하지.’
그래, 분명히 그랬다.
발부에 6세는 프로부뉴군과 동시에 귀를 막았고 정광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게 됐다.
정광이 전생에 작곡한 마라팔곡(魔羅八曲) 중 제육곡(第六曲).
살아 숨 쉬는 생명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강요하는 천하굴복(天下屈服)이었다.
끼이이이이이아아아악-
정광에게 무섭게 기마 돌격하던 기사단이 허물어지고.
휜펠 제국군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으며.
바텐베르크 공작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